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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전 8:9-17
9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10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12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15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16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17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전 8:9-17 /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세상에서 되어가는 모든 일들을 살펴보니 소수의 몇 사람이 권력을 휘두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 밑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10)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성전뜰에 묻히고 그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그가 생전에 저지른 모든 악행들을 잊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또한 그가 저지른 못된 짓거리에 온갖 시달림을 받던 바로 그 도성 사람들이 죽은 악인을 두고 칭찬을 늘어놓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이상한 세상인가! 11) 아무리 악한 짓을 저질러도 하나님께서 당장에 벌을 내리시지 않자 인간들은 대담해져서 나쁜 짓을 마음놓고 저지른다. 12)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비록 악인이 백번이나 죄를 짓고도 여전히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잘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13) 그들은 악인들과는 달리 평안하게 장수를 누리겠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은 절대로 장수하지 못할 것이다. 그림자가 사라지듯 악인들의 인생도 그렇게 지나가 버릴 것이다. 14) 그런데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언제나 헛된 면이 있어서 어떤 시인은 악인이 벌을 받는 것처럼 고난을 당하고 어떤 악인은 의인이 보상을 받는 것 같은 대우를 받는다. 이 모든 일이 꼬이고 얽혀서 괴로운 생각만 더해 간다. 15) 그래서 나는 인생을 즐겁게 살기로 작정하였다. 이 세상에서는 먹고 마시고 기쁘게 지내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고된 일로 수고하면서 짧은 인생을 살도록 결정해 놓으셨으나 그 수고에 따르는 즐거움도 함께 주셨다. 16) [하나님의 일은 알아낼 수가 없다] 나는 지혜를 통해 세상에서 되어가는 일들을 관찰하리라 마음을 정하고 밤이나 낮이나 뜬눈으로 살면서 17)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간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비록 그 일을 알아보려고 갖은 애를 써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가끔 현인들이 나타나 그것을 알아내리라고 큰소리 치지만 그들 역시 실제로 그 일을 알아낼 수는 없다.
전도자는 이 세상에 악인과 의인의 결과가 뒤바뀌는 불공평한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해 의심하지 말고 인내하며 견딜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깊고 크신 뜻을 다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빨리 실행되지 않는 악에 대한 판결(9-13)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악인들의 형통을 보면 혼란스럽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해롭게 했던 권력자가 어떤 형벌도 받지 않은 채 평안히 죽어 무덤에 안치되기도 합니다(9-10).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현실에서 속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악을 저지르려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11). 현실을 보며 좌절했던 전도자는 그럼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 사람들은 잘될 것”이라며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합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죄인이 100번씩 악을 행하고도 장수를 누리겠지만, 결국 악인의 삶은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현실에서 악인에 대한 심판이 지체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겔 18:23).
지혜로운 자도 모르는 하나님의 일(14-17) 세상에서는 악인이 받을 벌을 의인이 받고, 의인이 받을 상을 악인이 받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선악의 결과가 뒤바뀐 현실에 깊은 허무를 느낍니다(14). 하지만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해 분노하고 좌절하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분복에 따라 수고해 얻은 결실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15). 현실의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지혜자가 밤낮으로 자지 못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정답은 얻지 못합니다(16-17). 사람은 모순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높으신 지혜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적용: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인이 결국 어떻게 되리라고 확신하나요? 지금도 악인에 대한 심판이 속히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도자는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라고 권면하나요? 날마다 즐겁게 살기 위해 내가 바꾸어야 하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접두사 ‘군’은 ‘쓸데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말은 말인데 쓸데없는 말을 군말이라고 하고 살은 살이지만 쓸모없는 살을 군살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접두사 ‘개’도 있습니다. 개살구 할 때 ‘개’입니다. 앞에 개가 붙으면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개살구는 질이 떨어지는 살구를 의미합니다. 나리는 백합의 순 우리말입니다. 그러나 백합처럼 생겼지만 모양도 볼품없고 크기도 작은 백합, 즉 볼품없는 나리는 개나리라고 부릅니다. 우리 앞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재감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우리 앞에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설 교 >
인간의 한계
전도서 8:9-17 / 염두철목사
전도서는 인간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진 솔로몬의 인생에 대한 연구 발표와 고백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솔로몬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를 찬양하고 인간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엄연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혜자 솔로몬이 깨달은 인간의 한계는 어떤 것들인지 본문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9 / 내가 이런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주장함에 있어 당장은 다 이로운 것 같고 유익함을 주는 것 같아 사람의 주장함에 끌리고 주장하는 자를 따르기도 하지만 사람의 주장에는 유익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 몇 구절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46편 3-4절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이사야 2장 22절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람은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의 어느 나라 통치자가 온 국민에게 칭송을 듣고 있습니까? 그런 지도자는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모든 국민들을 유익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10 /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 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해주고 장사를 잘 지내주는 것을 큰 축복과 영예로 여겼습니다. 물론 초라한 장례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를 기억하며 슬퍼해주는 것이 보기에는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이 결국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정해진 길이라면 장례를 잘 지내주었다고 해서 사후세계가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영웅이 죽었을 때 통곡하며 큰 아쉬움을 표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웅은 점점 잊힙니다. 이처럼 인생은 영웅이든 유명한 사람이든 잊히기 마련이므로 헛된 것입니다.
11 /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악한 일이 저질러졌을 때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속히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겁을 먹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데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판결은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징벌은 세상사는 동안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은 세상 떠난 사후에 집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눈만 피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외면하고 삽니다. 그렇게 때문에 죽음 이후의 심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찌 담대하게 악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이 죽어 있어서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그 결과 악을 행하는 일에 담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10-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는 인간들에게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고 이 세상은 악의 구렁텅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 같은 철학자는 도덕적 차원에서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입니다.
12-13 / 죄인이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성도들은 세상의 불합리한 모습을 보면서 공의의 하나님께서 악인을 즉각 심판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 답답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잘 산다는 이론이나 논리는 세상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세상의 이런 문제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기도했고, 다윗 역시 악한 자가 상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이런 고통은 육적인 풍요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이에 전도자 솔로몬은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종적으로 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인생은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림자와 같다는 것은 신속히 보내는 일평생을 뜻합니다. 욥기 14장 1-2절을 보면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림자 같이 지나갑니다. 세월은 머물지 않습니다. 그 신속함이 쏜 살과 같습니다(시 90:10).
또한 인생이 그림자와 같다는 것은 헛되고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헛되고 무의미한 이유는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수고를 하여도 인간의 식욕은 차지 않습니다. 식욕 하나 채우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유익과 의미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걸으면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자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림자 같은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장수의 복은 사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의 삶을 이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복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인이 더 복을 받는 것 같고 장수하는 것처럼 보여 투덜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장수하는 것은 100세이지만 천국에서 사는 것은 영원한 것이므로 이 세상의 장수는 영원에 비할 때 결코 장수가 아닙니다.
성경은 “주의 목전에서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 속에서 인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14 /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세상만사 인생살이를 보면 헛된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의를 행하고 사는 사람이 의인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악행 하는 자가 의인의 보상을 받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애매하고 억울한 것이 세상만사 인생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령껏, 재주껏, 꾀를 내면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생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한 길로 빠져버린 것이고, 이에 전도자는 그 삶을 지적하여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도자가 은연중에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15/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전도자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중에 가장 큰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고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연구 결과로도 증명이 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오는데 이 호르몬이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을 무시할 정도로 인생을 너무 고상하고 진지하게 사는 것도 지나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맛있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수많은 먹거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맛있게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을 보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씨가 육의 몸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동안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데 사는 중 가장 큰 것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16 /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살펴보니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보기에는 대단한 노력가입니다.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근면하고 성실하니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표상이 될 만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그런 사람을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것은 먹는 것과 입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는 삶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의식주로 만족하며 사는 삶이라면 짐승과 뭐가 다를 바가 있느냐고 하면서 좀 더 이상 지향적이고 고상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이고 여기서 더 나은 것도 더 못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전도자 솔로몬은 찾아낸 것입니다.
솔로몬은 많은 시간을 성전을 짓고 궁을 짓는데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성전을 지은 왕이라고 칭송했고 권세를 가지고 나라를 확장한 왕이라고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거대해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밤잠을 설쳐야 했고,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깊이 잠들 수 없었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아내 천명과 결혼했고, 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없는 엄청난 재물을 가져서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던 솔로몬은 혼자 있을 때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외로웠고 두려웠으며 허탈했습니다.
권세와 물질은 많이 가질수록 사람 마음을 허탈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욕망과 욕심 때문에 자족함으로 받는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을 모른 채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성전과 궁을 짓고 나서 이제 사는 날 동안 즐겁게 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과 권세와 쾌락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안에서는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솔로몬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으로 채울 수 없어 말라가는 자신의 영혼을 보면서 하나님만이 깊고 어두운 인간의 마음을 밝히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가질 수 없는 재물을 소유하고도 영적으로 비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솔로몬은 하나님만이 인간을 충만하게 하실 수 있으며, 참 기쁨과 감동으로 행복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7 /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이것이 지혜자 솔로몬의 인생에 대한 진솔한 고백입니다. 알려고 하면 할수록,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알아 낼 수가 없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하나님이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결론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천하 모든 인간은 어느 누구 한 사람도 하나님의 일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어떻고, 그 하시는 일이 어떻고’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교만의 덫에 걸려있는 것이요 무지의 극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큰소리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하게 행하며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라
전도서 8장 9~15절 / 이동아목사
일반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잘되고 형통하게 될 것으로 믿고 그렇게 기대합니다. 동시에 불신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결국은 망하게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착한 사람들은 못살고 오히려 악한 사람들이 잘 사는 불 의한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게 되는 신앙의 어려운 문제입니다.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면, 요즘과 같은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올바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왠지 손해인 것 같고 바보스럽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도들이 갈등하는 가장 흔한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주일날 장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합리적인 눈이 아닌, 영적인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잘만 살더라.
교회 십일조 헌금 제대로 안하고 주일 성수 하지 않는 사람이 장사도 잘되고 사업이 번창하더라
믿음은 쥐뿔도 없이 할 짓 다하며 세상 적인 생을 사는 사람도 아무 일 없이 하는 일마다 잘되더라 이런 식의 고민을 한 적은 없는지요?
주일도 성수하고 온전한 십일조도 드리고 기도와 전도와 예배를 다 찾아 드리면서 헌신하고 봉사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려하는데 가난하고 병들고 하는 일마다 막히고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하는 나는 무엇인가?
마치 손해보는 것같고 어리석은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신앙의 갈등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계의 역사를 보면 세계 부강한 나라 16개국에서 15개의 나라는 모두가 기독교 국가인 것을 알게 됩니다.
가뭄에 직면했다고 중국관영통신이 6월 5일 평양발로 보도했습니다. 신화통신은 북한이 1727년 대 한해 이후 최악의 가뭄을 맞고 있다며 지난 3월초부터 90일째 계속되고 있는 가뭄은 북한전역을 황폐화시키고 있다고 북한 기상청 자료를 인용 보도했습니다.
유엔조사팀은 지난 주 북한의 식량난이 최근 악화돼 배급량을 줄였으며 저수지 수위가 바닥을 드러내는 등 올 가뭄이 가을걷이가 시작되는 10월~11월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저주받은 땅입니다. 하나님이 버린 땅입니다.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 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警醒)함이 허사로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나라중 유일하게 일본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으로 하여금 하나님 없는 부가 주님 없는 형통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 가를 우리로 깨닫게 할 것입니다.
도쿄에서 지난 6월5일 (로이터)통신의 보도 - 다케나카 헤이조 경제재정정책담당 장관은 5일 일본의 경제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케나카 장관은 기자간담히에서 "최근 경제지표에서 나타나듯이 경제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다" 도 말함으로 이젠 일본도 지진으로 또는 경제로 주님의 주권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고 의인은 주님을 주로 믿고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때때로 악인이 잘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결국을 보며 의인의 최종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깨닫게 되길 바랍니다.
(전7: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1. 내버려두신 하나님
전8:11)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하나님이 어느 한계까지 참으시다가 이제는 버려 두십니다. 간섭이 없습니다. 내버려두십니다. 악행을 하더라도 방치해 두십니다. 하나님이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악한 행동을 하여도 징계가 속히 시행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무슨 징계가 있느냐 하면서 더욱 악을 행하기에 줄달음질치게 됩니다.
1)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었습니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마음이 담대 하도다"
(롬1:28) "And since they did not
see fit to acknowledge God, God gave them up to a base mind and to improper conduct."
2)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었습니다.
(롬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 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1:26) "For this reason God gave them up to dishonorable passions. Their women exchanged natural relations for unnatural,"
3)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셨습니다.
(롬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8) "And since they did not see fit to acknowledge God, God gave them up to a base mind and to improper conduct."
본문(28절)에 보면 --- "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 여러분 중에는 가끔 불신자들이 불의한 방법으로도 재산을 모으며 잘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우리같이 주일을 지키며 진실하게 사는 자에게는 축복하지 않고 저렇게 불의한 사람들을 잘살게 하시는가 ? 라는 생각입니다.
(마13:28)에 보면 종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밭에 곡식보다 더 큰 저 가라지를 뽑으렵니까 ? 하니까, 주인이 종에게 말하기를 "추수때 까지 내버려두어라 !"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 불의한자들이 불의한 방법으로 잘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시므로 멸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간섭을 실어하지만 부모가 그 자녀에게서 간섭을 포기할 때 그 자녀는 그 시간부터 자유자가 되는 것 같지만 그 시간부터 방탕의 길로 달려가는 멸망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화단을 어떻게 망처 버리겠는가 발로 막 밝아 버릴까 ? 아니면 꽃나무를 모두 꺾어 버릴까 ? 아니면 흙으로 덮어 버릴까 ? 망처 버리는 제일 쉬운 방법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따라서) 가만히 내버려두어라 ! "입니다.
꽃밭을 망치는 방법은 힘들여 발로 밟을 필요도, 손으로 꺾을 필요도, 힘들게 흙으로 덮을 필요가 없이 -- 가만히 내버려두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들쥐가 모여들어 스스로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만일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간섭이 없으시다면 기뻐할 일이 아니라 - 하나님이 왜 ? 나에게 관심이 없으신지 깊이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 여러분이 상실한 마음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사사건건이 간섭 성도가 계십니까 ?
하나님이 지금 사랑하시는 증거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도 은혜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아 주셨으니 죄를 짓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도둑질할 때 하나님이 징계하셨다면 대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방인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즉시에 개입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에도 주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징계를 하시되 즉시즉시 하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악인은 그냥 버려 두십니다.
잠언 기자는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이렇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잠24:19) "너는 행악자의 득의(得意)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잠24:1) "너는 악인의 형통(亨通)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찌어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은 부러워 말아야 합니다,
캄보디아 독재자 킬링필드의 살인마 폴포트가 체포되어 초라한 모습으로 묶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결말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부, 형통, 부러울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불 신앙적으로 살아가는데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형통하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그 형통 때문에 신앙을 더 멀리 교회를 더 멀리 사명을 버렸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입니다. 그래서 악인의 형통은 저주인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잘못된 길로 갈 때 불순종의 길로 갈 때 성령께서 신호를 주십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양심이 거리낌이 생깁니다. 그것은 내 속에서 하나님의 법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을 속이고 성령을 거슬려 자기 갈 길로 가면 주님이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채찍을 들게 됩니다.
2. 악인의 형통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이미 벌써 심판을 받았고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불간섭으로부터 진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건 아니다 하는 길목에서 계속 머뭇거리고 악행을 계속하더라도 주님이 가만히 계신다면 그것은 주님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주님과 관계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주님 나를 버리셨습니까? 왜 나에게 가만히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빗나간 길을 갈 때에 어떤 사람이 나를 잡아주며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어 주며 야단치고 회초리를 들고 때려주어서 바로 잡아 주었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간섭하지 하지 않습니다. 잘못 살아도 나무라는 사람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사생아가 된 상태는 축복이 아닌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고 했으나 다시스로 가다가 그는 우연히 만난 욥바항에서 배는 잘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 신앙의 길목에서 배 밑창에 누어 하나님을 눈을 피해 사명을 저버리고 잠자다가 여호와께서 바다에 대풍을 일으켜 배가 거반 깨어져 죽게 된 상태로 몰고 가십니다. 하나님의 개입니다. 간섭입니다,
1)악인들은 희락이 없습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전8:15)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분 복이 기쁨입니다. 희락입니다. 그런데 악인에게는 희락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환난 중에도 기뻐합니다. 환난이 유익을 주는 것을 믿기에 즐거워합니다.
감옥 안에도 기뻐하는 삶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며 기뻐하는 희락이 있습니다.
악인이 백번 악행을 하고 잘될 수 있으며 형통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속임수가 있습니다. 사단은 좋은 것을 보이면서 결국은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백 한 번째에 망하게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정신을 차릴 수가 있지만 마지막에 넘어지면 너무 비대한 죄의 몸을 이길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넉다운되고 말 것입니다.
한보그룹이 뿌리 채 뽑혀버리게 되었습니다. .
2)안식이 없습니다.
16)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는 재임시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퇴임후의 결과를 내다보면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달콤한 휴식을 주십니다. 쉼을 주십니다. 안식을 주십니다.
(전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5: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성공여부를 놓고 염려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잠을 자러 갑니다" 숙소로 가서 편히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3) 결국은 망합니다.
시37: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라고 하십니다.
3. 의인의 축복
(12)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인은 잘되고 형통하고 잘나 가는 것 같아서 축복인 것 같아도 종말은 잘되지 못합니다. 장수하지 못합니다. 그 날이 그림자와 같습니다.
1)욥의 경우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잘됩니다. 의인 욥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끊고 사단의 권세에 그 삶이 주어질 때 일순간에 자녀와 소유와 건강을 다 잃어버립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외로워지고 고독해지고 따돌림을 당하고 사면초과가 되어도 의인 욥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승리합니다. 믿고 의지하면 주님이 붙드십니다. 책임지십니다.
(욥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42:12-17)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2)요셉의 경우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형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 갈 때 그는 인생이 그걸로 끝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아내에게 혐의를 입고감옥엘 가서도 그 인생은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온전히 주님의 주권을 믿고 나아갔을 때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감옥에 갔었기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린 것이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보디발의 집에서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간 것을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꿈 때문에 형들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꿈 때문에 그는 총리로 등극하는 축복을 누리게 합니다.
이 모든 역사는 누가 하셨습니까? 누가 이렇게 인도하셨나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지금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종 승리자가 누군가가 중요합니다.
축구에서 마지막 한 순간에 역전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극적인 상황을 역전의 드라마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믿음대로 순종하고 주님께 내 문제를 맡겼다면 승리는 내 것입니다. 성공은 내 것입니다. 그렇게 실패 한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불의한 성공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의로운 실패자가 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잠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왜냐하면 의로운 실패자는 하나님께서 도우시나 불의한 성공 자는 일순간 등불처럼 꺼져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20절) 악인의 패망이라고 하는 것은 순식간에 다가옵니다.
더 이상 회생 불가능한 그러한 때가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시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최후의 승리자가 누구입니까?
의인이 의롭게 살려할 때 고난이 올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고난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시험이기 때문에 이기면 주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축복을 하십니다. 내가 못 받으면 자녀들이 받을 것입니다. 자녀들이 못 받으면 자손만대에 주님이 축복을 하실 것입니다.
(삼상2:6-8)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 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1)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십니다.
(전2: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2)재물과 부요를 주십니다
(전5:19-20)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 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20)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3)영생을 주십니다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4)교제의 축복을 주십니다.
(전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5)삶의 지혜를 주십니다.
(전7:13-14)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 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6)악인의 꾀를 쫓지 않습니다.
(시1:1-3) "복(福)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 (傲慢)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2) 오직 여호와의 율법(律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晝夜)로 묵상하는 자로다(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 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7)도움을 주십니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결론
그리스도인의 형통은 영혼이 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범사를 잘되게 하는 형통입니다. 성경은 이 우선 순위가 바뀐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굽게 한 것을 아무도 곧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이 곧게한 것을 아무도 굽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십시오.
이 시간 하나님의 자녀로 주께서 약속한 형통의 복을 받게 하옵소서 이 시간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 되면 길을 평탄케 할 것이며 형통케 할 것입니다. (수1:8)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말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 주신 축복을 감사하며 누리며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삶의 원리
전도서 8장 10~15절 / 이한규목사
1.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고대에는 죽어서 장사되어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큰 영예로 여겼다. 그런데 전도자가 보니까 악인들도 잘 장사되어 그들의 행위가 잊어버린바 되었다(10절). 마치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현재의 겉모습만 볼 때 그렇다. 결국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신다. 현재 모습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한 후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외모도 학력도 사회적 지위도 보잘것없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귀하게 쓰셨다. 결국 제자들이 멋지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제자들을 붙잡아주셨던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현재의 모습보다는 장래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내다보시며 미래의 가능성을 보셨다. 그처럼 사람을 현재의 모습과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2.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의 보상과 보응이 즉각 나타나면 믿음과 선행의 진실성이 드러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진실한 믿음을 보시려고 악에 대한 보응이나 선에 대한 보상을 늦추실 때가 많다(11절). 그처럼 죄인이 계속 죄를 범해도 바로 죽이지 않으니까 죄를 짓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만 종국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되고 죄인은 잘되지 못하고 장수하지 못한다(12-13절).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오래 참는 것’과 ‘영원히 참는 것’은 다르다. 책망해야 할 때는 책망하라. 그렇지 않으면 공의와 질서는 세워지지 않고 무질서가 판친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보응과 보상이 분명히 나타난다. 다만 보응과 보상의 역사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의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3. 누림을 정죄하지 말라
전도자가 지적하는 또 하나의 모순된 현실은 의인이 악인처럼 취급받고 악인이 의인처럼 취급받는 현실이다(14절). 그런 현실에서 “어차피 세상은 악하니까 자포자기하며 쾌락 가운데 살자.”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최선을 다해 수고하면서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15절).
최선을 다한 후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선물로 적절하게 누리고 사는 것은 잘못이 아니고 오히려 칭찬 받을 일이다. ‘사치’와 ‘누림’을 구분하고 ‘쾌락’과 ‘누림’도 구분하라. 슬프게 사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특이한 의인이 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런 의인이 되려고 하라. 물론 건강한 누림을 위해서는 ‘수고하는 삶’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듯이 수고 없는 누림은 없다.
4. 은혜를 앞세워 살라
흔히 사람들은 수고가 제일인 줄 알지만 실제로는 은혜가 제일이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수고해도 자신의 뜻대로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도 없고 아무리 배우고 연구해도 인생과 역사를 운행하는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앞세우며 살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을 따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앞세워 의미 있는 일을 재미있게 하는 것이 최대 행복이다.
하나님은 주신 재능이 거듭나면 은사로 바뀐다. ‘노래를 잘하는 것’과 ‘찬양을 잘하는 것’은 다르다. 복음성가 가수가 노래는 잘하는데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것은 재능이 은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돈 버는 재능과 바치는 은사는 따로 있다. 어떤 사람은 돈도 별로 없는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잘 바친다.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재능을 은사로 발전시킬 때 더욱 큰 은혜가 넘치게 된다.
다 이해할 수 없다
전도서 8장 10~17절 / 김상복목사
오늘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격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둡니다. 우리나라의 속담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편적 진리입니다. 농사의 법칙이요, 우주적 진리입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어느 문화에서도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가 알려져 있습니다. 그 진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세상의 보편적 진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입니다. 선은 상을 받고 악은 벌을 받게 됩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받고 비판을 심으면 비판을 받습니다. 누가 나를 비판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에 대해 무관심했었는데, 그가 나를 비판하는 그 순간에 내 머리 속에는 그 사람에 대해 비판할 것이 막 생각납니다. 전에는 비판할 마음이 없었지만 비판을 들으면 바로 비판할 내용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경험하셨겠지요? 저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저주를 심으면 저주가 나오고 축복을 심으면 축복이 나옵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처럼, 먼저 용서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살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시지만,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면서 나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늘에 정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이며, 인류역사가 마치면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21장 23-25절에 “만일 어떤 잘못이 나타나면 너는 목숨을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불은 불로, 상처는 상처로, 매는 매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어떻게 용서하라 하지 않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매는 매로 갚으라고 할 수가 있는가! 그런데 그 때는 제가 성경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정의의 원리는 개인 윤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법적 시스템에 대한 것입니다.
좀 잔인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국가에는 정의로운 제도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국민들이 한이 맺혀서 못 살지요. 혁명이 날거에요. 요즘 사형제도 폐지 운동이 대단히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사형제도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죽이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정의의 제도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의도적, 계획적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개인이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재판을 해서 그가 악의를 갖고 고의적으로 살인했다는 확실한 판단이 설 때 당연히 사형선고를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고의성이 없는 사고에 대해서는 성경에 철저하게 보호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도피성이 기억나십니까? 성경에 도피성이 몇 개 있습니까? 여섯 개가 있지요. 요단강을 축으로 해서 북쪽에 둘, 중부에 두 개, 남부에 둘, 해서 여섯 개의 도피성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가지고 혹시라도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 즉시 거기로 도피해서 제사장에게 그 실수를 인정받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마련해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해서 실수로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보호해 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는 성경에 확실하게 말씀하기를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고, 나라는 정의로운 제도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한 가족이 있는데 나라가 그것을 묵과한다면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나라는 판단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특권이지 나라의 권리가 아닙니다. 나라는 정의의 제도를 만들어 놓아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습니다.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않는 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도 계십니다.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은 경우입니다. 그 살인범은 국가의 법정에서 그가 지은 죄에 대하여 마땅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그 살인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겠다고 선언합니다. 재판관은 너무 감동을 받아서 그대로 판결을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특권입니다. 가족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살인범을 용서하고 양자를 삼아라”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까? 없어요.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요, 나라의 제도는 언제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눈은 눈으로”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레위기 24장 17절에 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수로 죽이는 것이 아니고 고의로 죽였을 때의 적용입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 짐승을 죽인 자는 짐승으로 갚아주라.”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도 정의가 구현되기를 원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도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였고, 잠언 26장 27절에 “함정을 파는 자는 함정에 빠지고 돌을 굴려 떨어뜨리는 자는 그 돌에 맞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정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악을 심으면 악이 나오고 선을 심으면 선이 나온다는 것이에요.
이사야 1장 16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씻어 깨끗하게 하라. 내 눈 앞에 너희의 악한 행실을 제거하라. 악을 중단하라. 선을 행하라. . . 심판을 찾고 핍박하는 자를 구하여 주고 고아들을 심판하여 과부를 위해 항소하라. 지금 오라. 함께 의논하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자원하여 순종하면 너희가 땅의 좋은 것으로 마음껏 먹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거부하고 반항하면 칼로 망하리라. 여호와의 입이니라.” 하나님은 악을 도모하지 아니하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보상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평생 선을 심어야 합니다. 좋은 말, 선한 행동을 계속 심어야 됩니다. 성도들 간에 친절과 미소를 심어야 합니다. 모른 척하고 지나가지 말고 서로 칭찬을 심으세요. 사랑과 용서를 심으십시오. 원수에게도 사랑과 축복을 심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거두는 것입니다. 자주 심었으면 자주 거두고 많이 심었으면 많이 거둡니다. 미래에 거두고 싶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계속 심으십시오. 안 심고 거두려는 사람을 ‘도둑놈’이라고 하지요. 어떤 인생의 결과를 원하십니까? 꿈을 꾸십시오! 상상을 하십시오!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심으십시오! 공의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만약 이 땅에서 잘 심었는데도 거두지 못했다면 반드시 여러분의 후손에게라도 좋은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어 놓은 좋은 것들이 대대손손 기어코 열매를 맺고야 말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이 말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내가 축복하겠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라.” 즉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축복’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유로게오’인데, ‘유’는 좋다는 뜻이고, ‘로게오’는 말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축복은 사람들에게 좋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것도 좋은 시간에 좋은 태도로 좋게 말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언제나 좋은 것을 말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그것이 누구에게로 돌아옵니까? 자기에게 돌아오지요. 예언한다는 어떤 전도사님이 우리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교회에 5천만 원을 헌금하지 않으면 당신 자식에게 문제가 생길 것이오.” 여러분! 앞으로 예언 은사 받았다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이런 것은 안 됩니다. 목회자의 입에서 축복이 나와야지 그런 협박이 나오면 되겠습니까? 다시는 거기에 가지 마십시오. 협박하고 위협하고 두려움을 주는 목회자가 있다면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두려움을 주고 나쁜 말을 하는 것이 저주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 늘 있는 것들입니다. 좋은 것을 거두려면 반드시 좋은 것을 심으십시오. 악한 것을 심으면 악한 것들을 거두게 됩니다. 이것은 보편적 진리요 우주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요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땅에서 잘 심은 대로 거두지 못했다면 하늘의 상이 클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종종 “지옥은 꼭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너무도 괴롭히고 악하게 살며 치부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아요. 그렇게 악하게 살면서도 멀쩡하게 살다가 편안히 죽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았다라고 하면 수많은 인간의 가슴에 한이 맺힐 것입니다.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정의의 하나님인 것을 마지막에는 모두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을 심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반드시 선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보상의 원리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악인이 종종 성전에 드나들며 살다가 죽어서 장사를 지내면 악하게 살아왔던 그 도시에서 칭찬받는 일이 있더라”고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그가 보니까 어떤 때는 착한 사람에게 어려움이 나타나고 악한 사람이 동네에서 칭찬을 받는 일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현실에 구멍이 나있더라는 것이지요. 전도서 3장 16절에도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데 재판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재판 시스템은 제대로 되어 있지만 재판을 하는 사람의 속에 악이 있어서 억울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럴 때 권력과 돈 있는 사람은 편안하지만 없는 일반 시민은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마땅히 되어야 할 일들이 안 되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많이 체험한 일들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한이 맺혀있고 억울하지만 도리가 없습니다. 특히 한국 땅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 억울한 일을 당한 분이 있으십니까? 정의의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위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이 없다고 제게 말하는 사람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는 정의가 있기 때문에 13절에 보면 악인은 잘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사는 사람은 결국에 가서는 제대로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의 모순을 보면 우리 마음에 분노가 생깁니다. 억울해요. 자칫 잘못하면 비관주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파괴적인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정부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땅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즐겁게, 하나님이 주신 수고의 열매를 누리며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15절에 보니까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면서 그 수고의 열매를 먹고 마시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생을 즐겁게 사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결정을 해야 되지요. 일생을 살다가 어느 시점에서든지 한 번은 결단을 해야 됩니다. “어떤 어려움과 아픔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즐겁게 살리라!” 이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부족해서 감당하지 못하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있는 힘을 날마다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어떻게 살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우리 삶 속에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인내하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연약해서 감당하지 못하지만, 나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선을 심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방법입니다.
이 땅에는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해석되고, 모든 것이 다 보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인생을 살아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옵니다. 나의 작은 머리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가끔 생깁니다. 16절에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 때문에 속이 비틀어져서 쓴 뿌리를 만들고 분노하며 한탄하며 살겠습니까? “그래도 절대자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아버지시니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을 도모하며 살리라!” 이런 결단이 나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끝까지 선을 심어서 여러분이 심어 놓은 그 선을 평생 이 땅에서 거두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시간
전도서 8장 11~12절 / 이동아목사
세상이 무섭게 변하고 있습니다. 2년전에 산 핸드폰이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서 엊그제 교역자 회의에 허리에 차고 갔더니 어느 목사님이 "이목사님 권총을 차고 나타났다"고 해서 웃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엄청나게 변화된 세상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산업화 도시화의 속도가 서구에서 800년 동안 변화된 것들이 일본에서 130년 만에 일어났고, 우리나라에서는 30년 만에 그 모든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갑작스런 사회구조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내일에 대한 불안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서 더 많이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내일에 대한 불안은 사람들의 성격을 급하게 만들어 불안 신경증을 유발하는데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게 합니다. 또 그 반대의 현상으로 내일에 대한 불안증은 무기력증을 만듭니다. 마음으로는 다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부적응 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안을 잊으려고 쾌락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는데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쇼핑중독, 알코올 혹은 마약 중독, 음화 중독 등 다양한 중독 증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집안에서도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온통 경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의식이 내일에 대한 불안증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근본적인 염려와 불안이 늘 존재합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안과 염려의 뿌리는 하나인 데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이며, 거기서 인간의 모든 염려와 불안이 나오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염려와 불안은 근본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염려와 걱정이 있습니까?
아더 랭크라는 영국의 실업가는 사업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항상 불안했습니다. 많은 염려 가운데 살던 그는 염려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그는 매주 수요일을 염려의 날로 정하고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걱정거리가 생긴 날짜와 내용들을 적어 상자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수요일 날, 그는 상자 속의 메모 지를 살펴보다가 문득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자에 넣을 당시만 해도 큰 문젯거리였던 그것이 훗날 다시 읽을 즈음에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상자를 계속 활용하면서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이 살면서 고민하며 염려하는 일들이 시시한 일들이며 쓸데없는 걱정이며 염려래도 해결되지 않는 미래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염려의 무가치성에 대해서 이보다 훨씬 더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27) 그래도 염려 하실터면 하세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아내가 설거지하는 모습에서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아내는 하루씩 분량의 설거지를 18년 간 해왔고 설거지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사 자신은 고민의 설거지를 지난 것과 오늘 것과 아직 더럽지 않은 것까지 함께 씻으려 하는 염려를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염려는 주로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미래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일의 시간은 내시간이 아닙니다. 내일 형통한 날이 올는지 곤 고한 날이 올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물고기가 그물에 새가 망에 걸리는 것처럼 재앙의 날이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미래를 내가 확정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실례를 우리에게 들어 솔로몬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인간의 능력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빠른 선수라고 경기에서 반드시 우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수하여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악조건에 의해서 기록을 세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런던 올림픽에서 이태리 출신인 피에트리 도란도선수의 일화는 인간의 한계 도전과 그에 따른 감격스러움을 우리들의 가슴에 안겨줍니다. 도란도선수는 경기의 마지막 1마일 지점에서 선두에 나섰습니다. 경기장에 선수가 들어오자 관중들은 환호와 박수를 쳤는데 이내 경기장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이유인즉 도란도선수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머리와 팔다리를 흔들거리면서 트랙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관중들은 흥분하여 "No" 를 외쳤고 잠시 주춤 하다가 주위를 살핀 도란도는 방향을 바꾸어 걷더니 그만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다시 힘을 내 걷고 다시 쓰러지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체력이 전부 소모해 버린 듯 이내 허물어지듯이 쓰러져 버렸습니다.
관중들은 단지 안타까운 탄식뿐이었습니다. 곳곳에서는 도란도를 도와 주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때 본부석에서 의사와 임원들이 도란도에게 다가가도록 지시를 내렸고, 이들 앞에서 필사적으로 일어서려고 노력하던 도란도는 이상 서지 못하고 있는데 뒤에는 선수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잔꾀를 부리면서 약삭빠르게 살려해도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발도 빠르고 생각이 빠르고 행동이 빨라도 인생을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경주에서는 최후 승자가 이긴 자입니다. 인생의 역전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신 것입니다.
유력자(有力者)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나실인으로 삼손은 포도주 독주, 부정한 것을 먹지도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하는데 불레셋의 드릴라 여인과 사랑에 빠져 미혹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삿16:19)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들릴라 라는 여인의 사랑에 빠져 삼손의 힘이 무너지고 맙니다.(전7:26)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의 독한 유혹에 힘을 잃고 맙니다. 두눈이 뽑히고 맷돌을 가는 비참한 지경에 빠집니다. 결국은 댓가를 지불하고 삼손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불레셋을 구원합니다.
애굽의 군대가 유력하지만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동의 아랍이 병역이나 전술 면에 유력해도 이스라엘의 작은 나라를 이기지 못합니다. (삼상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은 물매 돌 하나로 골리앗을 넘어뜨립니다. 하나님이 어느 편을 들어 주느냐가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지혜자하면 솔로몬을 당할 자 누가 있습니까? 지혜자가 성공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혜 자도 자신의 앞에 당하는 재앙을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유혹을 당하지 못합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2)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3) 왕은 후비가 칠 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 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4)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 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 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8)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9)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 게 진노하시니라 (왕상11:1-25)" 지혜의 사람 솔로몬도 육신의 정욕으로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인간의 약하고 추한 면을 그대로 노출하고 맙니다.
기능자(技能者) 모세만큼 애굽의 생활 방식에 능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심판자가 되어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합니다.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살인극까지 벌이게 됩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 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14)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출2:11-15)"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쫒겨가는 불행한 신세가 됩니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경주하는 자가 그 경주에 승리하는 법입니다.
힘 지혜 빠름 명철 기능이 하나님이 부어 주실 때만 그 가치와 효용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 부귀영화 모든 삶의 결과가 자신의 능력이나 도덕적, 인격적 자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런 결론을 얻습니다.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잠21:30)" 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가진 탁월한 신속함도 인간이 가진 세상의 지혜도 명철도 능력도 하나님을 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16:1)" 주님의 절대 주권 하에 일의 결과 인생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2. 인생의 미래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전9:12)"고 말씀하십니다.
1)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는 것처럼
2)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여 거기 걸린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재앙을 그 누구도 피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물고기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그물에 걸린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환난이 뜻밖에 다가옵니다. 생의 어두운 밤이 찾아옵니다. 불순종하던 요나 에게 대풍이 몰아친 것처럼 물질로 명예로 건강으로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재앙의 때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주권하에 두셨습니다.
사람이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자에게는 형통한 날을 주사 복을 주시다가 딴 길로 나아갈 때 말씀의 신호등을 무시하고 질주할 때에 곤 고한 날을 주시는 것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 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시는 하나님은 장래일 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전적으로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믿고 의지하여 살라는 주님의 약속입니다.(전3:1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뜻을 저버리고 딴 길로 갈 때에 주께서 사건으로 개입하신 다는 것을 솔로몬은 깨닫습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 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전9:1)" 바로 솔로몬은 의인이나 지혜 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 일에 결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이고 불순종하면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우리가 계획도 세웁니다. 굉장한 사업을 하여 이를 보려는 비젼도 가집니다. 그러나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면 이것을 하기도 하고 저것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장사하기도 하고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15년을 사울 왕에게 쫒기고 쫓기면서도 그 긴긴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시기가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연단을 받습니다. 다윗은 그 시련을 잘 통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가 됩니다. 주님의 주권을 믿고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17세에 팔려가서 13년 만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인고의 세월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끝까지 견디어 그는 그의 꿈을 실현합니다. 주께서 그길을 인도하십니다.
김대중 대통령 참으로 그는 인동초처럼 살아온 사람입니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습니다. 3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상업학교 나온 것이 그의 학력입니다. 그런데 그가 역경을 딛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가진 재능 지혜 명철로 세상의 지위를 얻고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시기와 사건에 섭리하신다는 말입니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는 것처럼 새가 덫에 걸리는 것은 어부와 포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친 가지로 인생의 모든 만사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3. 주재 권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전9:11) 이렇게 솔로몬은 말합니다. 빠른 경주자, 유력자, 지혜자, 명철자, 기능자들아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7:1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슬러 불 신앙으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개입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기"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고 "우연"은 사건 재앙 환난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인생이 아무도 피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인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서
자유할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주님이 주신 부요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물도 주십니다. 명예도 주십니다. 기쁨도 주십니다. 평안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전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 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재물과 부요를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부요를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6:8-10)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로 이 가치감을 깨닫게 될 때 세상에 무엇이 부러울 것입니까? 이 부요를 누리게 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것 없습니다.
2)염려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를 초청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쉼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주님께 맡기지 못합니다. 염려 보따리를 이고 지고 메고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여려분 모든 무거운 짐을 다 주께 위탁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시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3)주의 말씀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마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 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입니다.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합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4)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 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 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면 염려를 맡길 수가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감사함으로 간 구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나 하나님의 평강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요동이 없습니다.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염려와 근심이 몰려 오거든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어느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갑자기 어린 학생 한 명이 선생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선생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제게 하얀 도화지를 주셨는데, 그만 잘못해서 검은 물감을 떨어뜨렸어요. 그래서 하얀 도화지가 시커멓게 얼룩져 버렸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선생님은 흐느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괜찮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또 새로운 종이를 줄께.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한 번 예쁘게 그려보아라.”
그 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집에 돌아오셔서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 무릎을 꿇고 그 날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에게 오늘 하루를 주신 것은 제 인생을 한 번 아름답게 수놓으라고 주신 줄 압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니 죄와 허물로 얼룩진 하루였습니다. 몹시도 보기 싫게 구겨진 하루였습니다. 하나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때 선생님은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괜찮다. 내가 너를 위하여 내일을 예비했단다. 내가 너를 위하여 새날을 준비했단다.”
내일은 하나님의 시간 약속의 시간 미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을 믿으시고 오늘 기쁨으로 먹고 마시며 주님의 희락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덧입고 가정천국, 교회 천국 이루며 주어진 사명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주앞에 서는 날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함께 있을 것이니라
전도서 8장 14~15절 / 안양준목사
전도서 1:1에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코헬레트’라는 히브리어로 “삶의 교훈을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전도서’는 “삶의 교훈을 주는 책”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국의 제 3대 왕으로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아버지 다윗의 위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잘 아시는 것처럼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천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응답으로 솔로몬이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그가 구한 것은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로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까지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솔로몬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 했을 때 하나님은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왕권도 안정되고 자신의 왕국이 번영의 길을 걸을 때 솔로몬은 점점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던 삶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던 그가 자신의 이성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주변 열강들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공주들을 아내로 맞이해서 화친조약을 맺는 정치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던 모습을 잃어버리고 쾌락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삶으로 점점 깊숙하게 빠져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내로 맞아들였던 여인들에 의해 이방의 여러 우상들이 들어오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런 무절제한 행동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결국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을 때 솔로몬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삶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역정을 통해서 체득했던 진리들을 저술하게 된 것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그러면 전도서가 전하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생의 허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헛되다’라고 하는 단어가 39번, ‘해 아래서’라고 하는 단어가 29번 등장을 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들은 어쩌면 다 헛된 것일 수 있습니다.
전 1:2-3에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지금 우리 세대가 얼마나 분요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지만 곧 우리 세대는 가고 말 것입니다. 마치 파도가 밀려왔다가 쓸려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입니다. 전 1:11에 보면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전 세대를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후에 세대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인생, 그리고 우리가 다 사라져 버린 후에도 우리가 살던 이 땅은 덩그라니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 1:14에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우리가 지금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지만 결국 그것은 끝까지 내 것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바람 같지 않습니까?
전 2:10에는 전도자가 자신의 지나온 생을 돌이켜 보면서 이렇게 술회합니다.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다” 한 마디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와 쾌락을 누려 보았습니다.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기 위해 사업을 크게 하기도 하고, 집을 짓기도 하고, 소와 양떼 등 자신의 소유를 많게 하고, 은금과 보화를 쌓고,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이들과 처첩들을 수도 없이 두었지만 결국 무익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수고한 것도 헛되고, 쾌락도 헛되고, 권력과 명예도 헛되고, 재물도 헛되다고 합니다. 왜 헛됩니까? 거기에 대해 전도자가 내세우는 이유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몇 개를 소개하면 먼저 첫 번째로 인간의 욕심은 결국 채울 수 없기에 허무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현실의 평안을 포기한채 온갖 노력을 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에 만족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이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누구나 똑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결국 허무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인간은 모든 것이 한계를 가지고 태어난 인생이기에 허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불확실성 앞에서 허무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전도자의 말에 의하면 빠른 경주자라고 해서 먼저 도착하는 것도 아니고, 유력자라고 해서 전쟁에 반드시 승리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를 가리켜서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간은 운명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신의 섭리를 거스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똑똑하고, 잘났다 하더라도 운명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전 9:13-16의 말씀을 보면 지혜자의 공헌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작은 성읍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적들이 이 작은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포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을에 지혜로운 자가 있어서 그 사람의 계책으로 인해서 결국 성이 함락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 지혜자에 대해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자가 힘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런 사실을 보면서 세상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 외에도 인생이 헛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전도서는 여러가지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죽음 앞에 인간은 허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생명의 법칙 앞에서 아무도 저항하지 못합니다. 전 3:19을 보면 “죽음 앞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일반이라 죽음 앞에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을 볼 때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경험한 삶의 진리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너무 비관적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들을 대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허무주의로 빠져들지 않는가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려서 이것이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입니다. 이것이 전 1:16에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큰 지혜를 많이 얻었다”고 장담하는 한 지혜자가 얻어낸 결론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십니까?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만큼 노력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내가 잡으려고 하는 것들은 결국은 우리에게 허무함을 안겨다 줄 뿐이라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이런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거기에 대한 답으로 이 시간 읽은 본문의 말씀을 들고 싶습니다. 15절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인생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사람들 중에 보면 항상 이마에 내천(川)자를 그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하시면서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전 9:7에도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가장 일상생활로부터 기뻐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뻐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2:24에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먹든지 마시든지, 아니면 열심히 수고하든지 일단은 마음이 기뻐야 되지 않겠습니까? 심령에 낙이 없는데 무얼 먹는다고 그것이 살이 되겠습니까? 심령에 낙이 없는데 열심히 수고하면 그건 병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도 전도자가 유심히 살펴보니까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숨쉬고 살아있다는 것만 갖고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전 9:6에 보면 죽은 자는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되어서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심지어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조차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맹수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도 죽은 후에는 살아있는 개보다도 못한 것은 더 이상 사자로서 위용을 떨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 가면 피라밋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자신들이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을 생각하며 살아있는 노비들과 많은 재물과 기구들을 함께 매장했습니다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저 세월의 무상함만 느끼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이 뿐이 아닙니다. 예전에 이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에게는 늙으신 어머니가 있었는데 연로해서 많은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하루 속히 건강하게 되기를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고향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 내용은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놀라고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차를 타고 정신없이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 달려가보니 어머니는 산소호흡기를 의지해서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이 무엇입니까? 근처에 있은 교회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어머니를 병환에서 건져주세요.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애절하게 기도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말 한마디 나누지도 못한 채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은 너무나 커다란 충격과 슬픔을 가지고 “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어머니를 데리고 가셨는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중에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신 이유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고생하게 하지 않게 하시려고 데려가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머니가 다시 회복되었다 하더라도 여러가지 병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또 많은 고통을 당해야만 하기에 하나님은 이 여인의 기도보다 더 나은 방법을 택해서 그녀의 어머니를 고통과 질병이 없는 곳으로 데려 가셨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조금 전에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라고 했지만 이제는 생명을 거두어 가신 하나님께도 감사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심령의 낙을 누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기독교의 특색은 기쁨입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갖는 환경의 만족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부와 명예, 건강 등을 갖추었을 때 기뻐하다가 그것이 없어지는 날엔 사라져버리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갖는 희락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불나방처럼 잠시 잠깐의 쾌락을 맛보다가 끊임없는 후회에 시달리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전 9:9에 전도자는 이렇게 살아갈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무릇 네 손이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이것이 칠백의 후비와 삼백의 빈장을 두고 온갖 쾌락을 누렸던 솔로몬 왕이 권고하는 말입니다. 이 속에는 육체적 쾌락의 탐닉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허락하신 돕는 베필로서의 아내와 함께, 그리고 사랑스러운 자녀들과 함께 가정의 행복을 누리는 결혼생활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복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네 손이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무릇 네 손이 당하는대로”라고 대답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계단의 끝까지 가기 위해서 이 계단을 찾아왔습니다. 거기에는 건강한 사람, 인내심이 강한 사람, 나름대로 여러가지 장점을 갖춘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끝까지 가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계단의 끝까지 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사람은 끝을 생각하지 않고 올라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저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것이 좋아서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끝에 다다라 있었다는 것입니다.
“네 손이 당하는대로”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강요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 즉 ‘달란트’를 부여받았습니다. 그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충성해서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락 속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희락속 속도원들과 모든 성도들의 삶 속에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5절 말씀을 함께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구절의 끝에 있는 ‘이것이’라는 단어를 ‘희락이’라는 단어로 고쳐서 읽겠습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불행에서 행복으로
전도서 8장 15절 / 양인국목사(서신교회)
1. 올해 준비하는 수양회에서는 우리가 회복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극복해야 할 몇 가 지 일들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지난 주 준비하는 수양회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회복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들 가운데 두려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들었다. 즉 “두려움을 극복하고 샬롬을 누릴 때 우리는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불행으로부터 행복으로“라는 주제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이 주제는 우리가 회복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2. 그러면 불행한 삶은 어떤 삶이고 행복한 삶은 어떤 삶일까? 우리가 이 물음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불행과 행복은 모두 추상명사로서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 마음에는 원하지 않는 삶과 원하는 삶에 대한 개념과 열망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다만 그것들을 불행과 행복이라는 추상명사로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삶의 태도에서 특별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태도이다. 자신은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삶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삶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를 생각할 때 불행이란 삶의 어두운 부분을 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말한다고 말할 수 있고, 행복이란 삶의 밝은 면을 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말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불행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삶의 태도에서 긍정이고,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삶의 태도에서 부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후회하고 현재에 대해서는 원망과 불평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불안해한다. 그러나 행복한 살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현재에 대해서는 기회로 알고, 미래에 대해서는 밝은 전망을 가지고 산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몇 사람을 든다면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살았던 삶을 보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는 삶이었고 결코 순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도 이들이 살았던 삶을 불행한 삶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삶에서 삶의 긍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고(롬4:18), 모세 역시 홍해 앞에서 진퇴양난의 환경에 직면했을 때에도 낙심하기 보다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고, 다윗도 생애 대부분을 전쟁의 한 가운데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바울도 환경을 초월하여 언제나 믿음의 전망을 가지고 살았다(롬8:28).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자로 보이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도 삶의 부정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예를 들면 사울, 솔로몬, 헤롯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권력을 소유한 자들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었지만 어떤 사람도 그들의 삶을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그들의 삶 가운데 삶의 부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울은 왕이 된 후 항상 왕권을 잃어버리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가운데 살았고,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진 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하고 괴로운 삶을 살았고(전1장), 헤롯역시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리며 살았다. 이들의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불행과 행복을 삶의 태도에 준(準)하여 말할 때 우리는 지금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회복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삶의 태도를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은 어떻게 불행에서 행복으로 나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특별히 우리가 본문을 주목하고 본문에서 우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하는 것은 전도서에 본문과 동일한 내용이 여러 번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2:24,3:13,5:18,8:15). 이 말씀에서 희락 또는 즐거워하는 것은 삶의 긍정 또는 행복한 삶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행복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언급한 여러 본문들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이와 같은 대답을 얻었을 때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어째서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이다.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그 일들을 통하여 행복을 얻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면 이 말씀이야 말로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어째서 행복한 삶이 먹고 마시고 수고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여기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은 일상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일상은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와 같은 일상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상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에게만 행복을 가져다 줄 뿐이다.
그러면 일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상을 허락해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두 가지 은혜의 수단을 허락해 주셨다. 그것은 시간과 일상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루라는 시간을 허락해 주시고 그 시간에 일상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하루와 그날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일상은 우리에게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일상이 즐거움이 되어 삶에 대한 긍정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을 실생활에 적용함으로 생활화하기 위하여 하루와 일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하루를 은총의 날이라고 말해 주고 있고, 또한 그날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주신 은혜의 수단이 바로 일상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하루가 은총의 날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날을 허락해 주셨다면 그날은 우리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허락 받은 하루를 일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허락받은 하루 동안 사는 일상(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하루를 후회스런 어제와 불확실한 내일을 아름답게 세울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어제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어제의 모습은 오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이미 어제라고 불리는 시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오늘을 통하여 앞으로 불리게 될 어제의 모습은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 우리가 오늘을 긍정으로 산다면 오늘을 통하여 내일 불리게 될 어제는 아름다운 날로 기억될 것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내일을 허락해 주신다면 그 내일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의존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을 통하여 내일을 아름답게 세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결국 오늘을 잃어버리며 어제와 내일도 모두 잃어버린다는 것을 말해 주고 오늘을 사면 어제도 내일도 얻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 때 오늘을 긍정으로 살 수 있다.
성경은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모세의 기도야 말로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어제로 돌아갈 수 없고 내일에 대한 보장을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보장된 시간은 오늘 뿐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어제의 일로 후회하거나 내일을 염려함으로 오늘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환경을 허락해 주실지라도 그 환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며 그것을 즐거워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오늘과 일상의 의미를 알 때 우리는 오늘과 일상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불행으로부터 행복으로 변화 시켜 갈 수 있고 이때부터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허락해 주신 하루를 은총의 날로 고백하며 살게 해 주시고 하루의 일상을 통하여 주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로 인하여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해 주옵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