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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란 무엇인가?
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
우리는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면서 너무 쉽게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주인인 조물주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키우고 있는 개가 있다고 할 때 그 개는 자신의 운명을 주인의 손에 맡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좋든 싫든 주인의 뜻에 일생을 맡기고 살아야 하는 운명인 것입니다. 개 자신이 좋아하는 먹이든 싫어하는 먹이든 주인이 주는 먹이를 먹어야 하며 제때에 먹이를 주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따듯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면 따듯한 곳에서 살 수 있으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마루 밑 한쪽에서 오돌오돌 떨며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관심을 가지고 목욕을 시켜주고 화려하게 치장해주면 깨끗한 몸으로 호사하며 살 수 있으나 관심이 없는 주인을 만나면 지저분하고 냄새나게 일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개의 입장에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잡고 있는 것 또한 그 주인이므로 개의 의사와는 전연 관계없이 주인의 뜻에 따라 죽고 사는 것도 달려 있는 것입니다. 좋은 주인을 만나서 오래 장수하는 개가 있는가 하면, 주인을 잘 못 만나 사람의 몸보신이나 식도락에 이용되는 경우의 운명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개가 하고 싶은 것을 전연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란 결코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개는 자신의 의사와는 전연 관계없이 주인의 뜻에 따라 모든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개에게 주인을 능가하는 능력이나 힘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개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에게는 그런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게 조물주가 개에게 준 시나리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도 이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즉 내 자신의 몸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모두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부를 누리면서 잘 살고 싶지만 결코 자기의 생각대로 잘 살아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 큰 소리치고 넓고 큰 사무실과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며 멋진 승용차와 경호원의 경호를 받으며 많은 무리에 둘려 쌓여 왕과 같이 살고 싶지만 그것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재물과 권력은 그런다고 쳐도 가장 우리 인간에게 소중한 생명은 어떻습니까? 마음대로 생명을 연장할 수가 있거나 또한 마음대로 생명을 단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자살을 하는 경우 마음대로 생명을 단축 했다고 볼 수 있지만 자살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죽을 사람은 자살에 성공을 하지만 죽지 않을 사람은 자살에서조차 성공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매스컴을 통해서 사랑하는 연인과의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지 못하여 세상을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한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남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통사고, 항공기 추락사고, 또는 오래전 삼풍백화점 같은 붕괴사고, 성수대교와 같은 사고 등 대형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물론 죽은 사람도 있지만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기적같이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아파트 고층에서 떨어져 사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 일이 아닙니까? 이렇듯 우리의 평범한 상식을 초월한 일들이 우리의 주변에서 무수히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산다고 큰 소리 치지만 실제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범위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가장 귀중한 생명에 대해서는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가 그 운명과 생명을 주인의 뜻에 일임한 것과 같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소리치는 우리 인간들도 자신의 운명과 생명을 조물주의 뜻에 일임하고 일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역시 지극히 적은 범위로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금극목)
나. 셋의 나(肉我, 心我, 神我)
우리의 운명과 생명을 주관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 불가사의한 일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한 진정한 나는 누구란 말인가?
결정적인 것은 어느 것 하나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라는 의문을 한번쯤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보는 사람은 대체로 한번쯤 실패를 해본 사람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에 실패하여 어려움을 크게 당한 후이거나 아니면 건강에 문제가 있어 고통을 당한 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경우 또는 부부의 불화로 인해 가정이 파탄된 경우이거나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고 나서 … 등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이를 공자가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에 다음과 같은 좋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생이지지자, 상야. 학이지지자, 차야. 곤이학지자, 우기차야. 곤이불학, 민사위하의”(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者,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으뜸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며, 어려움을 당한 후에야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고, 어려움을 당한 후에도 배우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를 가장 저질의 사람이라 한다)라고 하였듯이 보통 평범한 사람은 대부분 어려움을 당한 후에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부귀영화를 부여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물질과 명예의 쾌락에 빠져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이는 영원히 부귀와 명예가 지속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며 지금 붙잡고 있는 부귀와 명예가 다른 곳으로 달아날까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붙들려는 이기주의적인 생각에 혈안이 되어 있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틈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만을 생각하는 편협한 인간으로서 겨우 죽음에 임박해서야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죽는 그 순간 까지도 자신의 진짜의 모습을 돌아보지 못하고 평생을 모아둔 재물이 아까워 죽음마저도 편히 맞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몸에 지녔던 권력과 재물은 죽는 그 순간에 죽은 자신의 시체인 마음과 몸을 따라서 가버리기 때문에 조물주가 준 시나리오를 가지고 내 인생의 숙명과 운명을 이끌어 왔던 진짜의 나인 신아(神我; 몸이나 마음이 아닌 진짜의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은 쓸모없는 것들일 뿐입니다. 권력과 재물은 진짜 나의 것이 아니므로 신아(神我)는 권력과 재물을 잡기 위해 저지른 탐욕과 죄악의 업만을 짊어지고 자신의 창조주이며 우주의 창조주인 조물주에게 심판을 받으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부자가 천당을 가기 위해서는 낙타를 타고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했던가요?
그러므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실패가 주어진 경우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실패한 사람 중에서 진정으로 실패하고 싶어서 실패한 사람은 없을 것이며 출세와 공명이 싫어서 출세하지 못하고 부귀와 공명을 던져 버린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화목한 부부생활을 싫어해서 가정을 파괴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자식이 잘 못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한 사람도 없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엉뚱한 일에 몰두하고 있는 불량청소년들은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성인(聖人)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연구하고 탐구하여 그 결과 자신을 셋으로 나누어 보게 되었습니다. 첫째, 부모님께서 낳아주고 길러주신 몸인 육체의 나를 의미하는 육아(肉我; 프로이드는 外我라고 하였음). 둘째, 육아인 몸을 주관하여 조종하고 통제하는 마음의 나인 심아(心我; 프로이드는 自我라고 하였음). 셋째, 마음인 심아를 움직이는 조물주의 아들로서 나의 숙명과 운명을 주관하는 진짜의 나인 신아(神我; 프로이드는 超我라고 하였음)가 그것 입니다. 이 진짜의 나인 신아(神我)는 내 마음과 관계없이 운명 또는 숙명적으로 계획되어 있는 길로 나를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다. 내가한 게 내가한 게 아니며 네가한 것도 네가한 것이 아냐!!!
그러면 육아(肉我), 심아(心我), 신아(神我)를 한번 분석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몸의 나인 육아는 자신의 육체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만 보아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는 체를 하게 되는 육체를 말합니다. 이 육체는 자신이지만 육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모두가 마음의 나인 심아에게 종속 되에 마음이 육체에 지시를 내리게 되면 육체는 그 지시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몸의 나보다 진실 된 나는 마음의 나인 심아(心我)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음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몇 가지나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명리학에 통하여 전생과 미래를 꽤 뚫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사람들도 또 얼마나 많습니까?
부부화합하고 가정화목하며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가 원하는 일이지만 그게 마음과 뜻대로 되던가요? 아니 마음이 내 몸의 주인이라면 마땅히 마음대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육체의 나인 육아(肉我)도 진실한 내가 아니요, 육체를 조종하는 육체의 주인 마음의 나인 심아(心我)도 진실한 내가 아니면 과연 나는 누구이며 무엇일까요? 심아(心我)를 움직이는 그 무엇인, 진짜 나인, 숙명(천명)이라 할 수 있는 명(命) 바로 신아(神我)가 진정한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일생은 그 숙명에 의해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타고난 명(命)인 조물주의 시나리오 천명(天命)에 의해 마음이 동(動)하게 되는 것이고 그 동한 마음의 지시에 의해 육체는 따르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번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공할 사람이 철학원을 찾아와 사업계획을 말하면서 할까요. 하지말까요 물의면 당연히 하라고 권할 것입니다. 아니 설령 하지마라 하여도 그 사람은 결국 그 사업을 진행해 성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패할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당연히 실패할 길을 안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지 말라 하여도 결국 그 사업을 진행하여 실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공할 사람에게는 성공할 길을 안내할 것이고 실패할 사람에게는 당연히 실패할 길을 안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철학원이나 무속인이나 종교의 성직자나 아니 친한 친구이거나를 불문하고 성공할 사람에게는 성공할 길을 실패할 사람에게는 실패할 길을 안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실패할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말로 말려도 다른 사람의 꼬임에 넘어가 실패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진짜 자신인 신아(神我)의 지시에 의해 마음이 동하게 되어 마음이 자신의 몸에게 꼬임의 길을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주학이 적중률 100%라 한다면 실패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물주가 시나리오를 각자의 신아(神我)에게 주어 성실히 그 역할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데 종교의 성직자나 역술인 무속인들이 그 시나리오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조물주는 꽤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
바로 자연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말로 천기누설이라 하는데 천기누설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가 원수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원수도 자신에게 주어진 조물주의 시나리오를 오직 성실히 실행한 것뿐입니다. 조물주의 시나리오가 준 역할이 원수의 역할이었으니 원수도 조물주에게는 시나리오를 성실히 연기한 연기자일 뿐입니다. 조물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역할을 성실히 잘 수행하였기 때문에 다음에는 더 좋은 배역을 받을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즉, 좀 더 나은 생을 살아가는 역할의 배역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한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며 네가 한 것도 네가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인 것입니다.
말 또한 내입으로 말을 하지만 그 말 또한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모두가 주어진 시나리오대로 인생 연극의 배역을 열심히 수행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역학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육아 심아 신아의 구별은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아와 신아란 말이 생소하여 그 출처를 알지 못하지만
육아와 심아는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아란 대부분 진아란 개념을 사용합니다만
아지랑이 속처럼 알 수 없는 경계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심아와 신아의 경계선을 확인한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심아를 떠나서 신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장문의 글을 쓰시느라 매우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스크랩해도되겠지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생각하고 살고 있었던 내용으로 또한 무시하고 잊고 살려 하는 내용이기도 하네요.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성경에 "고요하게 있으라 그리고 네 자신이 神인줄 알아라"라는 말씀이 있다니 매우 반갑습니다.
어떤 성경에 있는지 가르쳐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맙습니다. 의견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거듭 정진하시길 기원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육체...... 몸.이름.남자.누구의 아들.아빠.직위...., 육아(肉我),외아(外我)
나의 마음...... 마음,성격,사랑,증오.이별.계획,질투,,,,,. 심아(心我),자아(自我)
나의 근본...... 숙명,운명,인간,축생,천상,색,道,참선......신아(神我),초아(超我)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心은 심아(心我)인가? 신아(神我)인가?
결국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비록 신아도 좋고 운명도 좋지만 결국은 자기운명의 주체는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