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다 손 없는 윤달이라 요즘 부쩍 결혼식이 많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는 시내 중심이 아닌 변두리나 시외에서 예식을 하면 더 반갑고 좋습니다. 혼인을 축하하고 나서는 길은 바로 여행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무렵에 결혼을 했었지요. 그런데 예식장에 가 보면 부모님의 형편이 썩 좋은 것도 아닌데 온갖 치장을 한 고급 웨딩카를 타고 럭셔리 해외여행을 떠나는 신랑신부가 적지 않아 마음 한구석이 답답함으로 채워지기도 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축하하러 가서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때가 간혹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나라에 어디 고래부터 신혼여행이란 게 있었겠습니까? 신혼여행 풍습의 흐름을 찾아보니 50, 60년대에 신혼여행이 시작되긴 하였으나 부유층에 한정되었고 온양온천이 주 신혼 여행지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3일을 머문 후 본가로 들어가 살았는데 이도 남편의 입장에서는 신혼여행이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본격적인 신혼여행이 시작된 시기는 경제력이 향상된 70년대라 볼 수 있는데 온천에 이어 경주에 많이 몰렸고 부유층은 해운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답니다. 신혼여행을 못가는 서울 사람들은 택시로 남산, 북악스카이웨이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였다지만 그 시대의 책을 보다보면 고궁 산책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답니다. 하긴, 신혼여행이 일반화되기 전이었으니 ‘대신’이라는 말도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만... 80년대에는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요즘과 같은 결혼식과 신혼여행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경주, 설악산, 제주도가 주 신혼여행지였지요. 물론 형편상 신혼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였습니다. 89년 해외여행자유화 이후 해외여행이 급증하였고 90년대에는 해외로 나가는 신혼여행 하면 태국, 사이판 등 동남아시아행이 주였습니다. 2001년 인천공항이 개항되면서 장거리 여행이 많이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2000년대에도 발리, 세부, 보라카이, 푸켓, 코사무이 등 동남아시아가 주 여행지이지만 몰디브, 칸쿤, 남태평양, 호주, 뉴질랜드, 하와이 등 다양한 지역에 크루즈, 봉사여행, 오지여행 등 개성 있는, 혹은 고급화된 신혼여행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신혼여행이 더욱 고급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신혼여행을 밀월(蜜月)여행이라고도 하지요. 영어로는 honeymoon이라 하는데 여기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외국에서도 신혼여행, 즉 허니문이 시작된 건 1840년 전후랍니다. 제가 결혼한 1989년은 해외여행 자유화 원년이었습니다. 해외로의 여행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때였지요. 저는 결혼 당시 빈털터리에 가까웠기에 예식비와 여행비 등 제반 경비를 손톱 썰 듯 줄이고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예식에 대해 매력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저간의 상황이 그러했기에 경비를 줄일 수 있다는 사실까지 보태어져 전통혼례를 선택했습니다. 신혼 여행지를 제주도로 정하였지만 패키지가 아닌, 왕복 항공권만 끊어 현지에서 코스와 숙박 장소와 식사, 교통편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여행을 떠났었습니다. 모텔에서 자고 봉고 한 대에 현지에서 처음 만난 다른 세 팀과 함께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혼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들도 꽤 있었지만 그렇게 신혼여행을 보낸 것이 제게는 두고두고 아내에게 미안한 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선물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고급스러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니지만 밥 한 끼를 먹고 지나더라도 기념일을 잊지 않고 챙기고 최근 몇 년간은 아내가 원하는 코스로 계획을 잡아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예년에는 1박2일로 다녔는데 요즘 아내가 피로가 누적된 것 같아 당일로 다녀와 일요일은 푹 쉬기로 하였습니다. 어디로 갈 건지 물었더니 가을바다를 보고 싶다기에 통영, 울산, 부산, 영덕, 포항 등 후보지를 거론 끝에 감포로 정하였습니다. 감포 가는 길, 골굴사의 기운을 느끼고 선무도를 보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결혼기념일인 10월 28일은 평일이었기에 어제 살짝 다녀왔습니다. 그 기록은 아래에...
http://blog.naver.com/bornfreelee/220169043096
그리고
2010년의 결혼기념으로 떠난 함양, 인월, 순천 여행길 후기입니다.
http://blog.naver.com/bornfreelee/50099289060
2013년 함양, 하동, 산청 여행길입니다.
http://blog.naver.com/bornfreelee/50182025719
결혼 당시 거의 빈털터리에 가까웠다고 얘기했는데 거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86년 12월 입사하여 첫 월급으로 28만 원을 받았습니다. 3개월의 수습기간에는 월급의 80% 정도만 받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때는 저축을 권장하던 시기였고 이자율도 좋았는데 특히 서민이 목돈을 마련하는데 이자, 세금 등 조건이 좋았던 재형저축이 제일 인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월급의 반은 재형저축에 들고 나머지는 어머니께 드려 돈을 모았지요. 입사 초년병 시절이었던 86년~87년 무렵에 신용카드가 급격히 확산되었고 동료들 간에 상호 보증을 하여 카드를 발급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증을 섰던 동료가 회사에서 사고를 내고 잠적하는 바람에 연대보증을 섰던 제가 변제를 해야 했습니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탄원을 하였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래서 1년 반 정도 넣었던 재형저축을 해지하여 2백20만 원 전액을 변제하였습니다. 당시 제게는 정말 엄청난 거금이었는데, 참으로 허탈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이 사실을 아시게 되면 저보다 힘들어 하실 것 같아 어머니께 매달 맡겼던 돈을 이제부터는 제가 관리하겠다고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이 결정은 사실 어머니를 위한 선택이었으나 제겐 치명적이었습니다. 당시 동료들이 제가 운이 나빠 그 부도 낸 친구 보증을 섰을 뿐이지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십시일반으로 모금을 하여 제 결손을 도와주자고 결의를 하였습니다. 저는 말로는 받을 수 없다고 하였지만 내심으로는 받아도 되나 말아야 되나 혼자 고민하고 있었는데 부서장께서 거두지 말라고 지시를 하셔 결국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월급을 동전 1원까지 세어서 월급명세서와 함께 봉투로 받던 시절이었으니 봉투를 집에 전하면 결국 회사의 좋지 않은 일이 외부에 알려진다는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뒤늦게 이해하게 되었지만 당시는 배신감이 느껴졌습니다. 사고를 낸 동료보다 부서장이 미워졌습니다. 신뢰도 무너졌습니다. 내 전 재산 220만 원이 그렇게 허무하게 날아갔다는 사실에 극도로 상실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방황을 하였습니다. 월급 전액을 술 마시는 데 썼습니다. 독서 습관도 이때 흐트러졌습니다. 일 년여를 방황하던 중 사내 식당에서 아내를 보았습니다. 배식을 기다리다 다른 줄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그로부터 일 년을 지켜본 뒤 프러포즈를 하였고 1년 뒤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녀를 만난 이후 방황을 끝냈습니다. 저축도 하고 책도 다시 보고, 술 마시는 횟수도 줄였습니다. 하지만 저간의 사정이 그렇다보니 결혼 당시에는 참 가난하였습니다. 집에서 보태 주실 형편도 아니 되었습니다. 제 신혼집은 눈이 오면 굽이친 길에 쌓인 눈이 감당이 안 되어 출근 버스가 2시간씩 거북이 운행하여 회사에 지각 아닌 지각을 할 정도의 면 단위 단칸방으로, 전세 160만 원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주시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 하십니다. 저는 결혼 하면서 전세를 얻어가는 친구,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는 후배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는 하였지만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제 삶이 구차하다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 바탕에는 부모님 밑에서 보고 배운 바가 있기도 하고 아내가 힘든 내색 않고 주어진 내에서 알뜰히 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일도 잊지 않고 챙기기는 하지만 결혼기념일은 생일보다 더 챙기고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항상 뒷동산 같이, 동산의 거목같이 흔들림 없이 중심이 되어 주시는 어머니, 집 앞에 흐르는 내 같이 항상 마르지 않는 마음으로 나를 이해해주고 떠받쳐 주는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있기에 아직 재산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여유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가난(모셔온 글)===============================
가난한 자의 아들이여 !
가난하다고 스스로 얕보고 비웃지 말라.
가난함으로써 그대가 상속한 재산이 있다.
튼튼한 수족과 굳센 마음.
무슨 일이고 꺼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힘.
가난하기에 그대에게 참을성이 있고
작은 것도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슬픔을 가슴에 품고
지긋이 견디는 용기가 있으며
가난하기 때문에 우정이 두텁고
곤란한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상냥한 마음씨가 있다.
이것들이 그대의 재산이다.
이러한 재산은 임금님도 상속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라.
그대가 가난하기 때문에 얻은 고귀한 재산임을 알아라.
위와 같은 로웰의 말을 빌리면
가난도 꽤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듯싶습니다.
하기야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좀 불편한 것이라고
누누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 말에 의지해 현실에 안주하는 것도
다분히 곤란한 일인 듯싶습니다.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열정을 가져다주는 가난.
자신은 가난했지만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애썼던 우리네 부모님들을 생각해 보면
그런 마음가짐이야말로 가난의 가장 큰 재산인 듯싶습니다.
-----이정하시인의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