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반반창회-6월 모임
일시: 2009년6월8일 월요일
장소: 북악산 산책로와 토속촌삼계탕집
참석: 임종국(반장) 부부, 이태윤(총무), 권순복, 김용만, 문상두, 박충서, 손창인, 전영철, 조성춘, 10명(문상두는 끝 무렵에, 손창인과 임종국 부인 오영숙씨는 식당에서 만남)
특기사항:
--매번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 호젓한 산책로를 찾아 산책을 하면서 식사도 하는 것이 좋다고 의견이 모아져 반장이 이번 코스를 선정했다.
산책로의 길이는 9키로를 조금 넘는 것으로 3시간 반 정도의 거리로 2시에 출발하여 식당에는 6시에 들어갔으니 군사작전하듯 딱 들어맞았다.
경복궁역에서 출발하여 사직공원과 인왕산 숲길을 거쳐 창의문(彰義門)에 도착하여 북악스카이웨이 옆의 호젓한 길을 따라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는 백사실(白沙室)계곡을 지나면 세검정이다.
여기가 반환점으로 다시 U턴하며 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여 청운공원을 지나면 다시 창의문을 거치게 된다.
여기서는 경복궁 담 길을 따라 죽 내려가면 청와대 옆을 지나게 되는데 창의문을 지난 초입에는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북한공비들을 저지한 최규식 경무관 기념상을 볼 수 있고 청와대 옆을 지나는 경복궁 담 길에는 조선시대에 왕의 어머니로서 왕비가 되지 못한 비빈 7명의 신주를 모신 7궁(七宮)의 현판이 몇몇이 담 너머로 보인다.
곧 무궁화동산을 지나면 처음 출발했던 경복궁역으로 향하게 되는 것으로 우리는 부근에 있는 삼계탕집으로 들어가 뒤풀이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면서 적당히 걸은 후라 식사도 꿀맛이다. 그래서인지 앞으로의 만남도 이렇게 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서 우선 다음달 모임도 과천미술관 산책로에서 갖기로 결정했다. 시간은 2번째 월요일 오후2시로, 그리고 낮에 참여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해 뒤풀이식사는 6시에 사당동에서 하기로 하였다.
상세한 것은 반장과 총무가 다시 연락할 것이다.
陽川閑談
눈치 보며 사는 삶은 어떤가요?
이번 반창회 모임은 “북악산 산책로 걷기”였는데 바쁜 일이 있어 함께 출발하지 못하고 중간에 합류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산책코스를 거꾸로 밟으면 중간에서 만나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 산책코스는 인왕산을 돌아 창의문(彰義門)을 거쳐 세검정(洗劍亭)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내려와 창의문에서 북악산을 올려다 보면서 청와대를 곁눈질하며 경복궁 담 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라 거꾸로 되짚어 올라가다 보니 창의문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창의문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 창의문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 성곽을 축성하던 139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4대문을 두고 통문(通門)으로 사용하는 일종의 쪽문인 서울 4소문 중의 하나로 고양과 양주 방면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그런데 1416년 태종 대에 풍수가(風水家)가 북악산의 좌우에 있는 이 창의문과 숙정문의 도로(道路)가 산의 기맥(氣脈)을 상하게 하여 결국 북악 아래에 있는 궁궐의 기운(氣運)을 죽인다고 하므로 두 문을 폐문(閉門), 봉쇄하여 도로의 기능을 없앴다고 한다.
그나저나 그렇기 때문에 창의문이 원래의 형태를 대체로 온존(溫存)하고 있지 않나 싶으니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창의문의 별명(別名)은 북문 또는 자하문(紫霞門)인데 자하문은 속계(俗界)에서 불국토(佛國土)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뜻이니 조선과 불교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어찌하여 이런 별명이 생겼는지 의아할 뿐이다.
자하가 보랏빛 노을이란 뜻으로 신선이 사는 곳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니 혹시 예전에 이곳에 서서 눈앞에 흐르는 맑은 개울과 북쪽에 솟아있는 북한산의 가을 단풍을 본다면 그런 별천지를 연상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창의문 누각에 올라 내려다 보는데 나무그늘에서 홀연히 예쁜 두 아가씨가 재잘거리며 나와 성문을 빠져나가고 나니 지나가는 산새소리도 없이 자동차 소리마저 숨죽인 듯 그저 정적에 쌓여 조용하다.
누각에 서서 생각하니 인적이 끊겼을 옛적에 이 작은 문에서도 간단치 않은 역사의 흐름이 있었구나 싶다.
교과서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하여 인조가 주체(主體)인 듯 하지만 실은 인조 즉 능양군 이종(李倧)은 들러리라고 볼 수 있고 이 쿠데타의 주역은 이귀(李貴)였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을 예증하듯 인조반정과 5.16쿠데타의 공방(攻防)의 주체들의 역할이나 사건의 경과가 시공(時空)의 간격이 있을지언정 대체로 흡사하다.
극적인 요소를 가진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대체로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일이 성공하였다” 라는 것이다. 인조반정이나 5.16쿠데타는 그런 역사적 사건의 예증으로 들 수 있는데 그런 역사적 사건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엉뚱한 곳에서 성패(成敗)가 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 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인조반정이 어떻게 성공했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나 그 중에는 이 창의문과 연관된 것도 있다.
광해군은 왕권강화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으나 지지세력이 미약하여 임진왜란 중에 보여주었던 영명(英明)함을 잃고 집권 말기에는 폭군의 양상을 보이면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 그 한 예증이 지금으로 보면 경호실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십여 차례나 바꾸는 것이다.
인조반정 직전에 임명된 훈련대장이 이흥립(李興立)이다. 그가 임명된 것은 손녀가 광해군의 세자빈이 되어 권문세가가 된 박승종의 천거에 힘입은 것이었다.
반정세력들은 거사의 성패는 이흥립의 거취에 달려있다고 보고 박승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그를 어떻게 회유하느냐에 고심했다. 그런데 반정세력의 한 사람이었던 장유(張維)가 그의 동생 장신(長紳)이 마침 이흥립의 사위였기 때문에 동생을 시켜 이흥립을 설득하도록 했다.
이흥립은 과연 어느 줄을 잡을 것인가?
5.16 직전처럼 이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아마도 여러 첩보를 통하여 기지(旣知)의 사실로 되었으나 여러 이유로 광해군 측에서는 역모(逆謀) 정보에 대한 처리가 지지부진하였다. 그렇다 하여도 훈련대장의 힘을 막강하여 반정세력으로서는 바위에 계란치기나 다름없었다.
장신이 설득하였다고는 하나 이흥립의 향배(向背)는 여전히 불확실하였지만 이귀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므로 1623년 3월12일 밤에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만약 그가 이날 밤 행동하지 않았으면 다음날 그는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급히 행동에 옮기는 바람에 그가 이끈 병력은 천여명에 불과하였고 성패도 불투명하였으나 뛰어난 무장 이괄(李适)이 가담하여 그나마 반정군이 기세를 잃지는 않았다.
창의문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하기로 한 것은 반정군이 대부분 장단부사로 있던 이서의 병력이었고 이들을 홍제원에서 집결시켜 창의문을 통과하여 창덕궁으로 진입하는 것이 이동거리가 짧아 가장 빠른 시간에 광해군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이고 게다가 창의문은 폐쇄되어있었기에 수비병력도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때 이흥립은 반정군의 동향을 대체로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창덕궁을 호위하면서 창의문에 소란이 있다는 첩보를 받고 소수의 포수들을 올려 보내 동향을 파악하라고 하였다. 창의문 앞 좁은 골짜기에 천 여명의 병사가 몰려왔으니 “사력을 다해 지켜라” 하고 명을 내려도 겁이 날 판인데 상황을 돌아보라는 애매한 지시는 “기세를 보고 문을 열어주라”는 암호와도 같은 것이다.
창의문을 열고 살같이 달려온 반정군이 창덕궁에 다가서자 창덕궁의 수문장인 임효립(林孝立)도 별 저항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으니 참으로 싱겁게 광해군의 시대는 끝이 난 것이다.
만약 이흥립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직무에 충실했다면 반정이 성공한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창의문이 비록 작은 문이기는 하나 그리 쉽게 뚫릴 관문이 아니었고 돌파한다고 하더라도 만만찮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그 동안 당시 군사력의 중추였던 훈련도감의 병력을 충분히 집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니 반정군의 궤멸은 사실상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눈치를 보면서 반정군의 입성을 도운 이흥립은 직접 반정에 참가하지 않았어도 공신 1등급으로 훈공을 받게 된 것이다. 이흥립은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전형적 인물로서 그는 다음해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이괄에게 항복하였다가 죽게 된다.
큰 사건이 터졌을 때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딱 결단을 내리는 사람도 있고 복지부동(伏地不動)하며 눈치만 살살 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느 편이던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만 충실한 사람도 있다. 대체로 오로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사람은 훗날 성패에 관계없이 “비록 적이지만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문제는 눈치만 보는 사람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들은 줄을 잘 서서 끝없이 오래오래 복을 누리는 자도 있고 때로는 줄을 잘못 서서 끝이 더럽게 끝나는 자도 있지만 사실 역사책을 들쳐보면 이런 사람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다.
인조반정의 성패가 이흥립의 결심 여하에 달렸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가?” 싶지만 만약 그가 오로지 자신의 직무에만 충실했다고 한다면 인조반정의 성공은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근세의 5.16과 12.12를 돌아보면 이흥립과 같은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시공을 격하여도 사람들의 행태는 그다지 다른 점이 없다.
이흥립과 같은 그룹에 5.16에 있어서는 장도영 참모총장, 이한림 1군사령관 등이 12.12에서는 윤성민 참모차장, 이건영 3군사령관 등이 해당되지 않을까?
장면 총리나 노재현 국방장관의 경우에는 오로지 자신의 목숨만을 생각하였으니 미안한 말이지만 “RATs”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으니 사실 눈치 보던 자들보다도 더 거론할 가치가 없다.
창의문은 인조반정 일년 후에 다시 전란에 휩싸인다. 반정의 공훈에 유감이 있었던 이괄이 서울을 점령하자 도원수 장만(張晩)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안현(鞍峴=鞍山=길마재)에 진을 쳤다. 이괄과 장만은 안현과 창의문을 오가며 격전을 벌였다. 만약 이괄이 이 싸움에서 이겼으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결과야 어쨌든 조선 5백년사에서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아마도 이괄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1968년 1월에는 북에서 보낸 공비가 창의문을 지나치면서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으니 창의문에서도 꽤 많은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청와대를 끼고 도는 경복궁 담 길을 내려오면 청와대 정문 근처에 무궁화동산이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이 박정희가 시해(弑害) 당한 궁정동 안가(安家)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광해군이 이흥립에게 당하듯 그 역시 김재규에게 당하였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인간의 역사란 것이 참으로 허망하다. 게다가 청와대를 벗어나 잠시 시름을 벗고 즐기고자 하였던 곳이 청와대에서 이렇게 가까웠다니?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삶도 그다지 부러워 보이지는 않구나.
“한때의 강약은 힘에 달려있으나 마지막 승부는 도리에 달려있다(一時之强弱在力千古之勝負在理)”라고 배우기는 하였으나 글쎄 그 놈의 도리라는 것이 설마 눈치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
(양천서창에서 2009.6.10. 문상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