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탕은 ‘동의보감’에 나오는 처방이다. 백작약·황기·천궁·숙지황·계피·감초 등이 주재료. 기를 보충하고 피로를 해소하는 데 효능이 있다고 해 조선시대 양반층에선 아침 저녁으로 먹었다고 전해진다. 쌍화탕이란 이름은 사물탕(보혈제)과 황기 건중탕의 합방 처방으로 ‘기와 혈(기운과 피) 두 가지 모두를 보한다’ 해서 붙여졌다. 하지만 요즘엔 이것이 바뀌어 쌍화탕 원처방뿐 아니라 갈근탕·쌍금탕 등 한방감기약 탕제를 모두 쌍화탕으로 통칭해 부른다.
광동제약 최수부 회장이 쌍화탕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비교적 처방이 간단해 대량 생산이 가능해서였다. 1970년대엔 10여 개 한약방과 영세 제약업체들이 쌍화탕을 만들고 있었지만 동의보감 처방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것이 많았다.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떠날 때 배에 싣고 나가는 원기충전제로 쌍화탕이 선호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최 회장은 이를 구해 오라고 해 마셔봤다. 한 입 들이키니 맛과 재료의 질이 떨어지고, 동의보감 원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내가 직접 고른 원료로 제대로 된 쌍화탕을 만들어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영세 업체가 많다 보니 정부에서 새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75년 쌍화탕을 생산하던 서울신약을 인수하면서 시장에 뛰어들었다.
동의보감 처방에 나온 대로 약을 만들자니 값이 비싸지는 문제가 생겼다. 당시 다른 쌍화탕은 50원이었지만 광동이 만든 것은 100원에 소비자가가 책정됐다. 소비자들이 외면할 것이란 사내 우려도 있었지만 최 회장은 생산을 밀어붙였다.
입소문은 약사들이 내줬다. 약사들이 시험 삼아 마셔본 후 고객에게 권해 줬다. 초기 한 달 30만 병 정도였던 판매량이 6개월 만에 150만 병으로 늘어났다. 생산라인 전 직원이 야간 근무를 해야 겨우 주문량을 댈 수 있었다. 쌍화탕은 92년 감기·몸살을 위한 처방을 추가한 광동탕을 내놓으면서 탤런트 변희봉씨가 ‘감기, 바로 이 손 안에 있소이다’는 광고를 시작했다. 자양 강장제였던 쌍화탕류가 이때부터 감기·몸살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또 진광탕·참광탕·광동탕 골드·광동금탕 등 증상별로 조금씩 다른 제품을 추가했다. 쌍화탕 제조회사들이 대부분 없어진 현재, 광동제약은 연간 1억2000만 병, 200억원 이상의 쌍화탕을 팔며 시장 점유율 80%를 고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