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글중에 순흥출신 조성학 의병장 (조장군)과 그 어머니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조성학선생은 김하락 의병장의 이종사촌으로 이천수창의소 활동부터 경주전투,영덕전투까지 함께 한 분입니다.아래 내용이 시사하는 바는, 순흥에도 김구선생의 어머니와 같은,안중근의사의 어머니 만큼,이순신장군의 어머니만큼 ,신사임당 만큼 위대한 어머니상을 발휘하신 분이 계십니다.영양의 '정부인 장씨'만한...여장부요 의사의 어머니를 소개합니다.....조성학 장군은 영주와 순흥 분들이 현창해야할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영주가 영주역사만 관심있다면...아래 내용은 쓰레기통으로 넣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순흥역사....발굴해보심이 어떨찌요???
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
박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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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락 의병장은 서울,경기도,충청북도,경상북도에 걸쳐있습니다.이렇게 활동하신 분들이 구한말 국권회복기에 민긍호,관동창의대장 민용호 ,2대 호좌의진장 운강 이강년,1대 호좌의진장 의암 유인석,3대 호좌의진장 백우 김상태 의병장,영덕의 신돌석,성익현,춘천의병장 이소응,을사의병장 원용팔,호남의 문태서 의병장,산청출신 박동의 의병장등 여러분이 계십니다.
김하락 의병장의 활동은 제가 봤을 때는 대단합니다....의성출신입니다....의성 향토사 회원과 문화원,군청,군의회가 연합하여 자료를 발굴하고....현창해야 합니다.예천역사가 아니니까요...
어제 제가 어떤 분과 통화하며 들은 바로는 김하락 의병장의 아들은 없고....딸과 사위가 있는데(잘모름)..위 진중일기를 임진왜란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헌의 후손에게 맡겨놓았다고 합니다.....나중에 돌아오면 되돌려주고....안돌아오면 정부에 제출해달라고 했다고합니다.정부에 아래 자료를 제출한 사람도 저는 잘모릅니다.
자 ...잃어버린 의성역사.....여러분께 드립니다.조사,발굴,현창사업....인제는 의성인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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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락진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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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락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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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은 해운당(海雲堂) 김하락(金河洛) 자신이 지은 진중일기인데, 그는 경북 의성 출신으로 을미사변 후에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조승학(趙承學)·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이천(利川)에서 의병을 조직, 부대를 편성했다.
병신년(1896) 1월 30일 남한산성을 점령했을 때, 그는 도지휘(都指揮)였으나,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좌익장 김귀성(金貴星)과 후군장 박준영(朴準英)이 관군과 결탁하여 4대문의 군졸을 만취시켜 놓고, 밤에 문을 열어 적을 불러 들인 것이었다.
박은 광주유수(廣州留守), 김은 수원유수(水原留守)를 주겠다는 꾀임에 수많은 동지들을 배반한 것이었다. 그랬으나 의병부대가 성문을 급히 나서자, 일본군에게 끌려 온 관군들조차도 민족의 양심이 없어지지 않아 속히 달아나라고 외쳤었는데, 의병진의 중책까지 맡은 박·김 두 놈은 민족에 대한 큰 죄를 지고 만 것이었다.
김하락은 남은 의병을 수습해 가지고 제천(堤川)에서 부대를 재편성, 단양(丹陽)을 거쳐 안동(安東)·의성(義城)서 의병을 규합하고, 청송(靑松)에서 접전, 5월 7일 경주(慶州)까지 점거했으나, 다시 후퇴, 그는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며 씩씩한 행진을 했다.
6월 3일에는 관군과 부딪쳐 적에게 많은 사상자를 나게 하고, 4일에는 폭우가 내려 천지가 캄캄한 물바다가 되었는데, 적병 수백 명이 몰아쳐 온다는 정보를 접하자, 군사들은 사기를 잃고 총 한 방 쏘지도 못하고 헤어져 버렸으나, 김하락 대장은 분연히 말 위에 올라 앉으므로 수십 명의 장졸들도 뒤를 따랐다.
적탄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달려나가는 도중, 총알이 좌우 어깨를 뚫고 나갔다. 김 대장은 외치기를 ‘우리 겨레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할지라도 적에게 욕볼 수는 없다’하고 곧 강물에 몸을 던져 탁류에 휩쓸려 가니 따라가던 군졸들도 물에 빠져 죽는 이들이 많았다.
이 책은 그가 전투하던 실기를 자신이 적은 것으로서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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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락진중일기(金河洛陣中日記)
개국(開國) 504년, 성상(聖上 : 고종) 32년 을미(乙未)에 나라 운수가 큰 액을 만나 난신(亂臣)이 정권을 잡게 되자, 혁신(革新)이란 표어를 만들어 내어, 어진 선비를 배척하고 섬 오랑캐와 암통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천 년 동안 호시탐탐하던 왜적이 이 문호개방의 기회를 편승하여, 이 해 6월에 적의 군사 10만 명이 바다로 육지로 한꺼번에 진출하여, 각 항구와 각 요새지에 기지를 만들고, 동래(東萊)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3천 리에 뻗쳐 수십 개소에 진을 치고, 마침내 도성(都城)으로 돌진해 들어 왔다.
이 때 역적놈들은 밖으로 왜적의 세력을 끼고, 안으로 임금을 협박하여, 오래 전 국법으로 제정된 우리 의복을 다 버리고 되놈의 의복으로 바꾸어 입게 하여, 8도의 수령과 서울 안에 출입하는 사람은 모두 검은 옷을 입게 되니, 이에 따라 민심이 흉흉하여, 혹은 깊은 산골로 도망가고, 혹은 배를 타고 바다로 가기도 했었다.
이 해 8월 21일 밤에 적신(賊臣) 유길준(兪吉濬)·정병하(鄭秉夏)[원문에는 정병조(朝)로 나옴.]·조희연(趙羲淵)·장박(張博) 등이 일본 군대를 불러 궁중에 들어와 난을 일으키고, 안 대궐로 넘어들어 우리 국모를 살해하였으니, 아! 지극히 통분한 일이었다. 그후, 9월에 전임 대신 송근수(宋近洙)·신응조(申應朝)가 장차 의병을 일으켜 원수갚을 일을 모의하다 성사하지 못하고 적당(賊黨)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11월 15일 밤에, 유길준 등 여러 적당이 머리 깎는 칼을 가지고 대궐 안에 들어와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이어 조신(朝臣)들의 머리를 깎으며, 다시 관리와 병졸을 발동시켜 그 칼을 가지고 사방으로 횡행케 하여, 도성 안 사람들이 대개 늑삭을 당하며 이 화를 면한 자는 극히 적었다.
이른바 예의의 나라가 어찌 이토록 부패될 줄이야 기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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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통분하도다. 저 정부 당국자들은 극독한 수법을 자행하고 망극한 변고를 창조하여, 마침내 5백 년 종사(宗社)와 수천 만 생명을 오랑캐놈들의 손에 넘겨 주려 드니, 이놈들의 죄악은 고금천지에 가득 차서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하겠다. 당시 서울에 있는 지사들은 가슴을 두들기고 주먹을 비비며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나는 이종제(姨從弟) 조성학(趙成學), 동지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 몇 사람과 더불어, 16일 이른 아침에 한강을 건너 17일에 이천(利川)군에 들려 화포군(火砲軍) 도영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을 불러들여, 포군 명부를 가져다 놓고 포군 1백여 명을 징발하여, 여러 대로 나누어 우선 의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다.
그래서 구연영은 2개 대의 포군을 거느리고 양근(陽根)·지평(砥平) 두 고을로 떠나고, 조성학은 2개 대의 포군을 거느리고 광주(廣州)로 떠났으며, 김태원은 안성(安城)으로 떠나고, 신용희는 음죽(陰竹)으로 떠났다.
이와같이 나누어 맡겨 떠나보내고, 나는 이현(梨峴)에 있었다.
조성학은 광주산성에 들어가, 별패진(別牌陣) 군관(軍官) 김순삼(金順三)을 시켜 별패진 포군 3백여 명을 일으키게 하여, 김순삼·인준성(李俊性) 두 사람으로 통솔하게 하였고, 구연영은 양근·지평으로 가서 군사 3백여 명을 일으켰으며, 신용희는 음죽·죽산(竹山)으로 가서 화포군 3백여 명을 일으켰고, 또한 포군으로 자원해 온 의병도 1백여 명이었는데, 본군 사람 심종우(沈鍾禹)로 하여금 통솔케 하였고, 김태원은 안성(安城)으로 들어갔는데, 그 고을에서는 이미 창의(倡義)를 하여 민승천(閔承天)이 대장이 되었으므로 서로 합세하기로 하였다.
이 때에 창의하는 사람이 각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용인(龍仁)·안성·포천(抱川)·시흥(始興)·수원(水原)·안산(安山) 등 여러 고을에서도 모두 병대를 모집하여 일제히 이천(利川) 수창의소(守倡義所)로 모여드니, 이로부터 군의 기세가 크게 떨치어 드디어 대오를 편성하게 되었다.
민승천을 추대하여 이천 창의대장으로 삼고, 나는 각군 도지휘가 되었으며, 조성학은 여러 군문(軍門)의 도총(都摠)으로, 김귀성(金貴星)은 좌군(左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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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희는 우군, 김태원은 선봉, 구연영은 중군, 박준영(朴準英)은 후군, 전귀석(全貴錫)은 소모(召募), 김경성(金敬誠)은 유격(遊擊), 심종만(沈鍾萬)은 돌격, 안옥희(安玉熙)·안재학(安載學)은 나의 종사(從事)로 되었으며, 최순룡(崔順龍)·김명신(金明信)은 대장의 종사, 조순희(趙舜熙)는 도총의 종사, 최진엽(崔鎭曄)은 중군의 종사로 되었다.
이상과 같이 부서를 정하고, 3기 9대(三騎九隊)의 법에 따라 항오(行伍)를 편성하여, 1기(一騎)로 제 1대 십장(什長)에는 허봉룡(許奉龍), 제 2대 십장에는 김봉학(金奉學)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순절했음], 제 3대 십장에는 경운(李敬雲), 2기로 제 1대 십장에는 이상태(李相台), 제2대 십장에는 김한룡(金漢龍), 제 3대 십장에는 표금하(表金河), 3기로 제 1대 십장에는 문기현(文奇現), 제 2대 십장에는 이준성(李俊性), 제 3대 십장에는 신탁원(申卓元), 기총(旗摠)에는 고기준(高箕俊), 1초(哨) 초관에는 김순삼, 2초 초관에는 고응선(高應善), 3초 초관에는 권영수(權榮壽), 4초 초관에는 홍대현(洪大現), 5초 초관에는 김만석(金萬錫), 6초 초관에는 한석기(韓錫琪)였다. 대오 편성이 끝나자, 각 장령들은 지휘와 교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12월 3일에 적은 의병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듣고, 수비대 보병(步兵) 백여 명을 파송하여 장차 우리 진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대장에게 이르기를
“저놈들은 연습을 받은 군사요, 우리 군사는 얽어 뭉친 군중들이라, 아직 기정(奇正)의 변법과 주객의 형세와 적을 저항하는 방책에 익숙하지 못하니, 먼저 복병을 하여 덥쳐 무찌를 기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하고, 곧 김태원을 보내어 1초군(哨軍)을 거느리고 백현(魄峴) 아래 깊숙한 골짜기로 복병하게 하고, 김귀성·신용희는 2초군을 거느리고 백현 상봉으로 가 복병하게 하고, 조성학은 2초군을 거느리고 백현 아래 산 오목한 곳으로 가서 적을 대기하게 하였다.
4일. 이른 아침에 조성학은 적과 더불어 맞아들여 두어 시간 동안 격전을 하다가, 갑자기 쇠북을 울리며 퇴군하여 백현으로 향해 달아나니, 적병이 고함을 치며 뒤를 따라 쫓아와 백현 아래 당도하였다. 그 때에 문득 대포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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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며 구연영(具然英)은 전면을 가로막고, 김귀성·신용희는 산 중턱으로부터 쏜살같이 내려오고, 조성학은 적의 돌아갈 길을 횡단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니, 적은 포위망 속에 빠져서 진퇴의 길이 없었다. 나는 군사를 지휘하여 엄습해 무찔러, 적병은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한 자가 없었다. 한참 동안 무찌르다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초생달은 서쪽 하늘에 떠있는데 서릿 바람은 뼛 속을 뚫는 듯하였다. 이윽고 달은 지고 저녁 10시 경이 되자, 적은 한 가닥 길을 찾아서 암암리에 도망하므로, 좌우의 우리 군사는 밤새도록 뒤를 쫓아 광주(廣州) 장항(獐項) 장터에 도착하였는데, 바로 초닷샛날 새벽이었다. 샛별은 반짝이고 닭울음은 여기저기 들리는데, 위 아래 행진(行陣)에서는 포성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 때에 적병이 장터에서 잠깐 휴식하다가 우리 군사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곧장 전면을 향하여 달아나므로, 뒤를 쫓아 습격하여 수십 명을 쏘아 넘어뜨리니, 많은 적이 혹은 총과 탄환을 버리고 혹은 찬 칼을 끌러 버리고 달아나므로, 쇠북을 울려 군사를 거두어 장항 장터로 올라와 군사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먹였다.
뒤에 동민의 말을 들으니
“그저께는 적의 군사가 1백 80명이었는데, 어제는 겨우 36명만이 패해 달아났고, 또 오늘 아침에 죽은 적을 제외하면 살아 돌아간 자는 응당 두어 명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날에 이천 본진으로 환군하여, 6일에는 황소 세 마리를 잡아서 군사를 먹이고, 7일은 군사를 휴식시키고, 8일에는 그런 대로 훈련을 시키고, 9일, 10일에는 대군문(大軍門)의 훈련을 실시하였다.
11일에는 눈이 내려서 훈련을 중지하게 되자, 나는 말하기를
“병법이란 뜻밖의 일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니, 적이 이 번 패전하여 비록 담이 떨어졌을지라도 뒤에 반드시 다시 올라올 것인즉, 좁은 목을 굳게 지켜 적을 막아야 한다.”
하고, 곧 여러 장수를 명하여 요긴한 곳을 지키기로 하였다. 그래서 조성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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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금 이현(梨峴)을 지키게 하고, 구연영으로 남천(南川)을, 김태원은 원적산(元寂山) 중요한 길목을, 신용희는 여주 경계를, 김귀성은 양지(陽智) 경계를 각각 지키게 하고, 심종만은 유격대 1초군을 거느리고 한강 위 아래를 순찰케 하였다. 이상과 같이 분담이 정해지자 여러 장수들은 각기 명령을 받들고 떠났다.
12일. 나는 대장과 더불어 각 도 각 군에 격문(檄文)을 발송하여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국난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13일. 아침 식사 후에 한 사람이 한 통의 글월을 올려오므로, 보니 바로 임금의 애통하신 조칙이었다.
그 대강을 보면
‘왜적이 대궐을 침범하여 국가의 안위(安危)가 조석에 박두했으니 모쪼록 힘을 다해 토벌하라. 경(卿) 등의 자손에게 의당 후한 녹을 내릴 것이다. 김병시(金炳始)로 삼남창의도지휘사(三南倡義都指揮使)를 삼고, 계궁량(桂宮亮)으로 목인관(木印官)을 삼아 장차 목인을 선포(宣布)키로 한다. 경기도는 순의군(殉義軍)이라 하고, 충청도는 충의군(忠義軍)이라 하고, 영남은 장의군(仗義軍)이라 하여 8도에 반포하노니, 8도 각 고을은 모두 호응하여 창의하기 바란다.’
는 것이었다.
나는 여러 장수를 불러들여 조서를 안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국가가 달걀 포개 놓은 것 같은 위기에 직면하고, 임금이 바늘 방석 위에 앉은 것 같은 상황을 빚어낸 것은 모두 신민된 자의 허물이다. 아! 우리 제군은 동심 협력하여 국가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도록 하자.”
하니 이에 여러 장졸들이 눈물을 뿌리며 죽기로 맹서하였다.
14일. 참모 이춘용을 충주·청주 등지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더니, 각 고을이 창의에 호응하여 모두 각 고을의 장사들을 모집하여 군의 형세가 심히 성하니, 그 대장은 바로 유인석(柳麟錫)이었다.
한편 전귀석을 여주에 보내어 창의하게 하여, 그쪽은 심상희(沈相禧)가 대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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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나는 잠시 이현을 돌아 보고, 17일. 진중으로 돌아왔다.
18일. 각처의 파수 진영을 순시하여 군을 위로하는 일로 4, 5일이 걸렸다.
24일. 본진으로 돌아오니 대장이 나에게 말하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왜적이 장차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올 모양이라는데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조칙을 읽어 본즉, 신민에 대한 소망이 지극하시니, 마땅히 죽음을 각오하고 힘을 다해 무찔러 임금의 은혜를 보답할 수 밖에 없다.”
하였다
25일. 척후병 한 명을 보내어 적의 내용을 정탐케 한즉, 과연 왜적이 대병력을 이끌고 온다는 것이었다.
26일. 또 척후병을 서울 안에 보내어 왜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게 하였다
27일. 각처의 파수장(把守將)을 불러 들여 일제히 이현에 모이게 하고, 방어하는 방책을 가르쳤다.
28일.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병 2백여 명이 어제 발정하여 광주부에서 잤으니, 지금쯤 몰아올 것이다.”
하므로 즉시 군중에 영을 내려 좌우로 복병하게 하고, 진용을 엄밀히 단속하여 대기하였다.
29일. 새벽녘에 적병이 과연 4개 부대로 나누어 습격하여 오므로, 김태원은 1초군을 거느리고 적 앞에 곧장 나아가 돌격전을 벌이고, 조성학은 원적산에 웅거하여 적의 돌아가는 길목을 끊고, 구연영은 1초군을 거느리고 이현 동구를 지키고, 신용희·심종만은 각각 1초군을 거느리고 좌우로 복병하고, 나는 유격병 1초군을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 지휘하고, 대장은 종사관 안옥희·최진엽과 더불어 1초군을 거느리고 중앙 진영을 고수하였다. 이렇게 작전 지시가 끝나자 여러 장수가 좌우로 협격하매, 총소리가 우뢰와 같고 탄환이 우박 쏟듯하여 종일토록 어울려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아니하므로 각각 군사를 거두어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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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새벽녘에 적병이 또 와서 공격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전진하여 두어 시간 동안 큰 싸움을 벌였는데, 10시 정각에 이르러 서북풍이 크게 불어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이윽고 큰 눈이 사뭇 내려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이 때에 적의 군사는 서북을 등지고 동남을 향하고, 우리 군사는 동남을 등지고 서북을 향한 까닭에 풍설이 얼굴에 드리쳐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뜰 수 없게 하므로, 여러 군사가 수족을 놀릴 수 없어 다만 빈 총을 들고 사방으로 흩어져 목숨을 유지키로 하니, 형세 매우 창황하여 부득이 군사를 거두어 본진으로 돌아왔다. 적은 마침내 이현에 들어가 불을 놓아 한 동리가 고스란히 불타 버리고 닭·개까지도 다 없앴으니, 아! 참혹한 일이었다.
여러 장령과 군졸이 태반이나 흩어져 도주해 버리니, 대장은 자기 친위병을 거느리고 죽산쪽으로 떠나가고, 구연영은 원주쪽으로 떠나가고, 그 나머지 장졸도 사방으로 흩어져 한 사람도 없으므로, 나는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통곡하였으나 형세가 어찌할 수 없었다. 부득이 민가에 잠시 기숙하는데, 이 날은 바로 섣달 그믐날이라 온갖 감회가 가슴 속에 얽히여 촛불로 벗삼아 밤을 샜다.
병신년 1월 1일 적병이 사방으로 우리를 수색하였다.
2일. 나는 비로소 밖으로 나와 여주 진소로 가니, 대장 심상희가 매우 환대하여, 수일 동안 머무르면서 그 진용을 살펴본즉, 군대가 훈련도 못 받았을 뿐 아니라 수효도 5백 명도 되지 못하므로, 나는 심 대장에게 말하기를
“지금 적의 칼날이 그물치듯 벌여 있어 외로운 군사로는 무력을 쓸 여지가 없으니, 우선 이천으로 진영을 옮기고 흩어진 군사를 초집하여 다시 대사를 도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심 대장은
“명령대로 따르겠으니 빨리 큰 계획을 세우라.”
고 하였다.
18일. 이현에 돌아와 본즉 모두 불타버리고 몸을 용납할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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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두어 곳에 통지하였더니 장졸들이 차츰 모여들었다.
구연영은 원주군 수백 명을 일으키고, 신용희·전귀석은 3초의 군대를 수습하고, 김태원 역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 왔다. 이리하여 군의 기세가 다시 떨쳤다.
23일. 안성에 격문을 보내어 민승천 우장(右將)을 불렀더니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24일. 군사 수효를 점고한 바, 포군이 1천 8백 명이고, 장수·종사관을 합하면 2만 명이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패전한 장수는 다시 등용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박준영(朴準英)으로 대장을 삼고, 심상희로 여주 대장을 삼고, 나는 군사(軍師) 겸 지휘(指揮)가 되고, 도소모(都召募)는 전귀석, 선봉은 김태원, 중군은 구연영, 우익장(右翼將)은 김경성, 후군은 신용희였고, 그 나머지 참모 종사관은 당초 창의할 때 임명한 사람을 그대로 두어 시행케 하였다. 그리고 수일 동안 합진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30일. 광주산성으로 진을 옮겼는데, 사방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고 성첩이 견고하여, 참으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라도 열고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성중을 두루 살펴보니 싸인 곡식이 산더미 같고, 식염(食鹽)이 수백석에 달하고, 무기도 구비하여, 대완기(大碗器)가 수 십 자루, 불랑기(拂狼器)가 수십 자루, 천황포(天黃砲)·지자포(地字砲)도 역시 수십 자루, 천보총(千步銃)이 수백 자루였고, 그 나머지 조총도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며, 탄약 철환이 산더미 같으므로, 여러 장수들은 군용이 유여한 데다 진칠 곳마저 견고함을 몹시 기뻐하였다.
2월 1일. 소를 두 마리 잡아 군사를 먹였다.
2일. 각각 파수를 정하여 선봉 김태원은 남문을 지키고, 후군 신용희는 북문을, 우익장 김경성은 서남문을, 좌익장 김귀성은 동문을 각각 지키고, 구연영은 장교청에 진을 마련하여 중앙을 지키고, 나는 유격병 두어 연대를 거느리고 오락가락하며 지휘키로 하니 장수들이 각기 명령에 의하여 파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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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은 우리 진영이 광주산성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자, 우리 전하를 협박하며 하는 말이
“이미 두 나라는 호의를 강론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백성으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켜 우리를 해롭게 하니 개화의 본 취지가 어디에 있읍니까.”
하고, 누차 말씀을 올렸으나 성상께서 끝내 어떻다는 조칙이 없으므로, 마침내 역당과 더불어 밀의하고, 억지로 조서를 꾸며 우리나라 병대 5백 명을 징발하여 산성으로 몰려와 사면을 포위하니, 이자들이 비록 우리나라 민족이나 결국 왜적에게 넘어간 군사들이라, 부득이 적병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다.
3일. 나는 포군 36명을 내어 36개 소의 소나무 숲 사이에 매복(埋伏)하고 있다가, 적이 산 중턱을 향할 무렵에 36개 소에서 차례로 포를 터뜨리니, 적이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고 후퇴하여 내려갔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싸움의 승리란 많은 군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군사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다.”
하고, 군사를 거두어 들였다.
4일. 적이 또 사방으로 산을 포위하고 요란스럽게 포탄을 발사하므로, 우리 군사도 대응하여 포를 떠뜨렸으나, 서로 거리가 멀어서 다만 빈 총만을 쏘았을 뿐이었다.
5일. 적이 또 와서 만단으로 계획을 벌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다만 성 밖을 둘러 서서 머뭇거릴 뿐이었다.
6일. 적이 또 와서 싸움을 청하므로 우리 군사는 포로 대응하며 나가 싸워, 두어 시간을 교전하였는데, 우리 군사는 성 안에 있고 적은 성 밖에 있으니 제놈들이 비록 천만 번 포를 쏜다 해도 한갖 탄약만 허비할 뿐이라, 적은 스스로 당적하지 못할 것을 요량하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북문을 지키던 장수 신용희가 크게 외쳐 군졸을 부르며 말하기를
“적이 대포를 버리고 갔으니 그 대포를 가져오는 자에게는 백 냥의 상금을 주겠다.”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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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 뭇 군사가 앞을 다투어 문 밖으로 나가므로 곧 문을 닫고 급히 외치기를
“이미 문 밖으로 나갔으니 죽을 힘을 다해서 적을 토벌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뭇 군사들은 비록 본진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문이 이미 닫쳤는지라, 부득이하여 곧 적병을 뒤쫓아 수십 명을 죽여 너머뜨리니, 적이 드디어 퇴군하여 도망갔다.
신장군의 이 꾀는 비록 한 때의 권변에서 나온 것이지만, 언제나 충의로써 격려해야 군사가 국사에 죽을 수 있는 것이어늘 어찌 속임수를 써서 되겠는가. 그러나 이미 적을 죽인 공이 있으므로 북문의 군사에게 큰 상을 주었다.
7일. 적병이 서울로 되돌아가므로 우리 군사는 고개를 쳐들어 북쪽을 바라보고 만세를 부르며, 거의 섬 오랑캐가 목을 움츠리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8일에도 전과 같이 굳게 지켰다.
9일. 김귀성은 정탐하기 위하여 서울로 들어갔다가, 12일에 본진으로 돌아와 적병의 염려 없음을 말하였다.
13일. 중군 구연영이
“김귀성의 파수 장소를 들려, 한 봉서(封書)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음을 보고 몰래 주워 와서 뜯어 보니, 바로 왜적과 밀약한 문자였다.”
하고 나에게 와 고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아직 그 속에 어떠한 사계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우선 끌어다 곳간 속에 가두어 두고 차차 동정을 보기로 하자.”
하였는데, 3일이 지나서 김귀성은 암암리에 도망하여, 과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18일. 다시 단속을 가해서 엄일히 지키도록 하였다.
19일. 나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하여 산을 내려가 조리하고 있었다.
21일에 이르니, 산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기가 가슴에 차서 발을 구르며 호통하다가 부지중 땅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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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적병이 피해 달아난 뒤로 역당(逆黨)과 더불어 모의하기를
“의병의 진영이 심히 강하여 쉽게 사로잡을 수 없은즉, 의병장과 암통하여 이해로써 꼬이는 것이 상책이다.”
하고, 마침내 비밀이 박준영에게 기별하기를
“만약 귀화한다면 너에겐 당연히 광주(廣州) 유수(留守)를 줄 것이고, 김귀성에겐 수원 유수를 주겠으며, 불복한다면 전국의 병력을 몰고 가서 토벌하겠다.”
하니, 박·김 두 놈이 자기 이익에 급급하여 적과 더불어 상통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날 서울에 들어가 정탐한다는 그 걸음은, 실상 아무 날 아무 시각에 문을 열어 놓겠다는 약속이었으며, 김적(金賊)의 도피는 박적(朴賊)이 들어서 몰래 놓아 보낸 것이었다. 그들의 역적행위는,
20 일에 박적이 소를 치고 술을 걸러 크게 포졸들을 먹였다. 이날 밤에 각문의 파수 장병이 모두 취해 넘어져 인사불성이 되니, 박적은 군인들의 이무르익기만을 노렸었다.
21 일은 새벽 3시 경에 서·북문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도 한 진영의 장졸들은 전혀 몰랐었다. 5시가 다 되자 고함 소리가 크게 일어나므로, 취해 넘어졌던 군졸들이 놀라 일어나 보니 온 성중이 모두 적병이었다. 2천여 장졸은 비로소 박적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즉시로 박준영 3부자(三父子)를 끌어 내어 한꺼번에 총살하고 급히 성 밖으로 나가니, 적병들이 도리어 호송해 주며
“빨리 달아나라. 일본 놈을 만나면 죽는다.”
고 하였다.
이 무리들이 비록 왜적의 세력에 핍박되었지만 양심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모양인데, 저 박적 놈은 몸이 대장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임금과 민족의 급박함을 돌아보지 않고 이 엄청난 죄악을 범하여 스스로 멸문의 화를 취했으니, 하늘 이치가 밝고 밝아서 역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장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고 한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어느덧 며칠이 지나자, 나는 심신이 황홀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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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신용희·김태원·구연영이 흩어진 군사 6개 연대를 모집 수습하여 나의 처소에 와 울며 전일의 일을 고하면서,
“사세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는 무력을 쓸 만한 곳이 없게 되었으나, 방금 형편으로는 오직 빨리 의병을 일으켜서 죽음을 맹서하고 적을 토벌하는 수 밖에 없는데, 현재 대장의 재목으로는 선생이 아니고서는 담당할 만한 인물이 없으니 사양을 말아 주기 바란다.”
하고, 곧 목인(木印)을 올리는 것이었다.
나는 자리를 피하여 사양하고 말하기를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 있어서는 비록 제공의 말씀이 아니라도 나는 의당 죽지 않으면 그만 두지 않을 것이나, 대장의 소임에 대해서는 결코 용렬한 자의 감당할 바 아니다.”
하자, 세 사람은 재삼 고청하였다.
이 때 늙은 아내는 병석에 누워 있으므로, 세 사람은 자진하여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지었고, 이튿날 아침에도 또한 그러했다. 나는 그 정성에 감격하여 더불어 함께 일할 수 있다 생각하고 말하기를
“이 지대는 인심이 흩어져서 계책을 세울 수 없게 되었고, 영남은 본시 문화의 고장으로서 인재의 부고(富庫)라 일컬으니, 함께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대사를 도모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세 사람은 모두
“명령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27일. 길을 떠나는데 군사는 겨우 9개 연대밖에 되지 않았다. 이 날 여주에서 유숙하였다.
28일. 행군하여 흥원(興原)에서 유숙하였다.
29일. 백운산에서 유숙하였다.
30일. 제천(堤川) 의병 진영에 들어가니, 대장 유인석·중군 안승우(安承禹)·선봉 홍대식(洪大植)이 반갑게 영접해서 소 한마리를 잡아 우리 군사를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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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단양(丹陽)에서 유숙하였다.
2일. 풍기(豊基)에서 유숙하였다.
3일. 행군하여 동면(東面) 산법동(山法洞) 차계남(車啓南)의 집에 당도하여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순흥부(順興府)에 들려 머물렀다. 조성학의 집이 동군 백운동(白雲洞)에 있으므로 나는 가서 이모(姨母)님을 뵙고 나서 성학을 불러 다시 일어날 것을 권유하니, 성학은 말하기를
“군사가 백명도 못 되는데 어떻게 적을 없앨 수 있는가. 발동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옛날에 단지 주먹 하나로 적에게 덤벼든 자도 있으니, 남의 신하로서 이러한 어지러운 시기를 당하여, 오직 군사가 미약하고 형세가 궁하다 해서 소매 속에 손을 넣고 방관만 하면 되겠는가.”
하였고, 이모님도 성학을 불러 부탁하되
“의로써 국가에 보답하면 죽어도 무슨 한이 있으랴. 너는 나를 위해 염려말고 네 이종형의 말을 듣도록 하라.”
하였다.
그래서 성학은 마침내 명령을 받고 빠져 나와 진중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7일. 길을 떠나 영천(榮川) 창보역(昌保驛)에서 유숙하였다.
8일. 안동(安東) 유동역(楡洞驛)에서 유숙하고, 이튿날 본동(本洞) 김(金)·전(全) 두 민가의 곡식 30석을 빌어서,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백성 30여호를 뽑아 구호미로 주었다.
호서(湖西) 의진(義陣)의 소토장(召討將) 서상렬(徐相烈)이 전군(前軍) 김한성(金漢星)을 보내어 함께 합세하기를 청하자, 조성학이 말하기를
“이 군사로 하여금 영천·안동·청송(靑松)·경주(慶州)를 순회하여, 일변으로는 의병을 모집하고, 수 개 연대의 군사를 보내어 경주에 들어가 부윤(府尹)에 나서 줄 것을 청하여 직접 모집하게 하면, 열흘이 지나지 않아서 군의 기세가 크게 떨칠 것이니, 이것이 상계요, 소토장과 더불어 합세하고 이어 영남 각읍의 진을 불러 일제히 힘을 다하여 곧장 대구영(大邱營)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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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하면 영남 일대가 크게 의병을 일으킬 것이니, 이것이 중계요, 단독으로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임의로 행군하면 좌우의 보익이 없을 것이매, 이것은 하계이니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을 택하렵니까.”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그대의 소견 매우 이치에 합당하다. 그러나 오늘의 급무는 오직 단결에 있는데 호진(湖陣)에서 이미 합세하기를 청하였으니 중계를 취택하는 것이 옳다.”
하고, 김한성과 더불어 함께 행군하여 감천(甘泉) 창리(倉里)에서 점심을 먹고, 곧장 예천(醴泉)에 당도하니, 소토장 서상렬이 또 좌익장을 보내어 두어 연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마중나왔다. 그래서 호진(湖陣)에 들어가 반갑게 서로 인사하고, 예천 본진의 의병대장 박주상(朴周庠)을 만나 보았다. 그리고 근처 약방(藥房)에다 숙소를 정하고 이틀을 머물렀다.
소토장 서상렬이 나를 청하여 묻되,
“방금 안동관찰사(安東觀察使) 이남규(李南圭)가 상주(尙州)에서 군사를 양성하는데 매우 엄숙하니 이를 칠 수 있겠는가.”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안 된다. 만약 상주로 향하려면 반드시 함창(咸昌)을 경유해야 될 터이니, 상주를 갔을 때 함창 태봉(胎峯)의 왜병이 우리의 돌아갈 길을 끊고, 상주의 경병(京兵)이 우리 전면을 공격한다면 앞뒤로 적의 침범을 받게 되는지라, 병가(兵家)의 가장 꺼리는 바이니 아예 경솔히 움직이지 말라.”
고 하니, 서장군도 역시 그렇게 여겼다.
11일. 서장군이 본진에 영을 내려 소 두 마리를 잡게 하였으니, 이것은 우리 군사를 먹이기 위한 것이었는데 밥상을 드릴 적에는 오직 푸나물뿐이었다. 대개 그 부하들이 사사로 빼앗어 먹어 버린 까닭이다. 우리 군사가 모두 분개하여 내게 와 고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음식에 탐내는 사람은 남에게 천대를 받는 법이다. 그러나, 저 군사의 규율이 없는 것을 이로써 알 수 있으니, 저것들과 더불어 어찌 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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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즉시 행군하여 도리현(桃李峴)에 당도하니, 김한성이 본진 군관을 이끌고 급히 와 사과하며 회군하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응하지 않고 행군을 재촉하여 안동 풍산(豊山) 주막에 당도하니, 해가 이미 저물었기로 장터에 진을 머물렀다. 이튿날 가랑비로 행군하지 못하게 되어, 식량을 각 마을에서 모집하여 각 군막(軍幕)에 나누어 주고 눌러 진을 머물렀다. 저녘 무렵에 호진(湖陣)에서 좌군 몇 개 대가 사발통문을 가지고 왔다. 내용은 봉정사(鳳停寺)에서 모시기를 청하는 것이었으므로 함께 유숙하였다.
13일. 비가 갰다. 아침 식사 후에 안동 유격장 이석조(李錫祚)가 와서 보고 함께 합세하기를 청하였다. 오정이 가까운 무렵에 문득 총소리가 서쪽에서 들려 오므로 군관을 시켜 엄탐한 바, 서장군이 예천 중군과 더불어 수 십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충산 주막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오후에 그들은 와서 나를 보고 봉정사에 모이기를 청하므로 다시 약속을 했으나, 우리 군사가 식량 운반이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눌러 이곳에 머물렀다.
14일. 오후에 비로소 봉정사에 모였는데, 본사(本寺)가 협착하여 군중을 용납하기 어려우므로 동군에다 진지를 마련하였다.
15일. 본사에 올라가 서장군을 만나보고 각 고을과 합진할 일을 의논하였다. 마침 안동 통문(通文)이 왔는데, 빨리 본부에 와서 단합해 주기를 청한 것이므로, 서장군은 응락하고 통문을 회답하였다. 그리고 오후에 곧장 안동부를 향해 행군하여 함께 안기역(安奇驛)에 진지를 정했다. 원래 안동의 의병대장은 본부가 소화된 후에 군의 진영을 금소역(琴韶驛)으로 옮겼으며, 유독 중군이 수초(數哨)의 군대를 거느리고 아직 성을 지키고 있었다.
16일. 조성학은 자기 스승을 방문하기 위하여 대구 팔공산(八公山)을 향해 떠나 갔다. 수일 동안 진을 머물고 있었다. 나는 달성(達城)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였는데, 서장군의 병력이 부족하다 하여 중지시켰다. 나는 마침내 진을 갈라섰다. 군관 고기준(高箕俊)이 민가의 여자를 간음하고 재물을 강탈하였기로 군문(軍門)을 마련하여 총살하고 군중에 영을 내리되
“만약 추호라도 백성에게 범하는 자가 있으면 이 법률에 의하여 처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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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리고 김태원을 시켜 후히 장사 지내주게 하였다. 행군하여 의성(義城) 금성산(金城山)의 수정사(水淨寺)에 진지를 정하였다.
27일. 수정사를 떠나서 청로점(靑路店)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때 경병(京兵) 3백 명이 군위(軍威)에 진을 치고 있다 하므로, 나는 밤을 틈타서 그 진지를 덥치려 하는데, 조성학이 이 무렵 진중으로 돌아와 굳이
“안 된다.”
하고 말리는 것이었다. 나는 묻기를
“그대의 계책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조장군은 말하기를
“여기서 의흥(義興)읍까지는 20리 밖에 되지 않고, 군중에는 탄약이 전혀 없으니, 만약 뜻하지 않은 변이 있다면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인즉, 지금 의흥으로 가서 탄약을 가지고 경주부 기계(杞溪)·죽장(竹長) 양 면으로 향하면, 열흘 이내에 3백 명 군사는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즉시 응락하고, 저녁밥을 재촉하여 군사를 먹인 후, 의흥으로 향하면서 군중에 영을 내려
“절대 떠들지 말라.”
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빨리 달려 의흥읍 관저로 들어가니, 읍내 사람이 전혀 몰랐다. 그래서 곧장 동헌(東軒)으로 들어가니 본군 군수는 도망해 달아나므로, 조성학으로 하여금 원풍루(願豊樓)에 올라, 군중에게
“놀라지 말고 안심하라.”
는 뜻으로 타이르게 하고, 곧 무기와 화약을 대여섯 짐 가량 가지고 인리청(人吏廳)으로 진을 돌리는데, 배후에서 갑자기 포 소리가 나므로, 군중으로 하여금 호응케 하였으나 조금 뒤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본읍 이속(吏屬)들이 민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엄습해 오려 하다가 중지하고 모두 흩어졌던 것이었다.
28일. 행군하여 고리곡(古里谷)에 당도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나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비를 무릅쓰고 행군하여 용애(龍崖)에 당도하니, 비가 비로소 갰다. 압곡사(鴨谷寺)에 들어가 진지를 마련하고 하루를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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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에 거센 바람과 소낙비가 서북쪽으로부터 크게 몰아왔다. 조성학은 여러 장령들을 이끌고 나의 숙소에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바로 갑자일(甲子日)인데, 거센 바람과 소낙비가 서북으로부터 크게 몰아왔으니, 북방의 의진(義陣)은 대개 이롭지 못한 징조인데, 우리 군사는 장차 어찌하오리까.”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절대로 군심을 동요시키지 말고 차차 동정을 살피기로 하자.”
고 하였다.
29일. 의성(義城) 의병이 패했다는 보고가 왔다. 조성학은 점괘를 뽑아 보고하는 말이,
“북쪽 군대는 족히 근심할 것 없고, 오직 남쪽 군대가 염려될 뿐이니, 저녁 식사 후에 동북쪽으로 나가면 전승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므로, 즉시 영을 내려 진을 동북으로 옮겨 사품(沙品)에 당도하니 닭이 울었다.
4월 1일. 행군하여 대곡(大谷)에서 아침 밥을 먹고 있는데 의성에서 패전한 군사 2 명이 왔기로, 급히 그 대장의 거처를 물은즉,
“군사 50여 명을 거느리고 진을 청송(靑松)으로 옮겼다.”
는 것이었다. 즉시 군사를 재촉하여 화목점(和目店)에 이르러 점심을 먹는데, 의성 진중으로부터 급보가 왔다.
“병정 백여 명이 의성 정현(鼎峴)으로 와 본진을 습격하려 드니 속히 와서 구원해 달라.”하므로, 우리 군사는 곧 의성 진영으로 향하여 드디어 백사장에 주둔하였다.
나는 구연영과 더불어 의성대장 김상종(金象鍾)을 찾아가 보고, 합세하여 적을 토벌할 계책을 협의하였다. 이윽고 우리 진영으로 달려드는 한 기병은 청송 교련군관 이교식(李敎植)이었다.
“그는 양군의 진영을 장터에 정하고, 병졸들은 각 마을로 흩어져 유숙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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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므로, 나는 크게 책망하며 말하기를
“병법에 ‘뜻밖의 일을 대비해야 한다’ 하였는데, 만약 적군이 갑자기 습격해 온다면 어느 겨를에 군사를 부르겠는가.”
하고, 바로 명령을 내려 의성의 진영과 합세하게 하였다. 그리고 문거점(文居店)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2일. 척후병이 의흥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경병(京兵) 백70여 명이 재작일에 대구로부터 와서 압곡사(鴨谷寺)를 포위하였다가 우리 군사가 이미 철퇴한 것을 알자, 바로 뒤를 쫓아 화목점에 당도하였으니, 지금쯤은 화현(火峴)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므로 바로 군중에 영을 내려 나아가 적을 맞아 싸우라 하였는데, 청송 진영의 장령은 한 사람도 와 보는 자가 없었다.
화현에 당도하여 계획을 세워 복병을 하게 하는데, 구연영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安德)의 후방에 잠복하고, 신용희는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뒤 상봉에 잠복하고, 김경성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城隍) 주산(主山)에 잠복하고, 조성학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현(城隍峴)에 잠복하고, 나는 유격병 1대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 관망하고, 의성대장과 부장은 지극히 동떨어진 곳으로 보내어 적을 깨뜨리는 것을 구경케 하였다. 청송진은 안덕에 있다가 진을 철수하여 도망갔다.
이날 정오에 적병이 화목으로부터 안덕 뒤 강변에 이르러 즉시 우리 군사에게 공격을 가해 오는데, 이때에 군중으로 하여금 포를 터뜨리지 못하게 하였기로, 적은 전혀 내용을 모르고 곧장 성황현에 이르렀다. 이제 곧 천보총 5 자루를 내어 일제히 포를 터뜨리니, 적진의 앞 부대가 무너지므로, 이에 기를 휘두르며 크게 외치니, 사방의 복병이 한꺼번에 발동하여 적의 군사는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10여 명이 되자, 적병은 크게 혼란하여 앞산을 향해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포를 잘 쏘는 우리 군사 10여 명이 천보총을 가지고 뒤를 쫓아 총을 쏘아 수십 명을 죽이니, 적이 마침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므로, 드디어 퇴군하여 본진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으려는데, 적이 이때를 틈타서 다시 반격하므로 곧 좌우로 하여금 일제히 포를 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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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에 청송 민병(民兵)이 술 두동이를 보내왔는데, 나는 그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적을 깨뜨린 뒤에 모두 모여 마시기로 했다. 문득 앞산 절정에서 포소리가 나며 수초(數哨)의 군사가 쏜살같이 내려오는데, 마침내 청송 중군이 흩어진 포군2대를 수습해 가지고 급히 와서 우리에게 호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적은 예기(銳氣)가 꺾이자, 드디어 청송진을 향하여 가므로, 곧 좌우의 복병을 인솔하고 쫓아가 적진을 엄습해 무찌르는데, 종사관 최순룡·김순삼이 크게 외치며
“복병이 있는 것 같으니 쫓아가지 말라.”
하므로, 나는 꾸짖으며 말하기를
“종일토록 교전하여 무수한 적을 죽였고, 하물며 청송진 2대 군사가 그쪽에서 들락날락하는데 어느 겨를에 복병을 했겠느냐.”
하고, 드디어 앞으로 나아가 맹렬히 포를 터뜨려 적병 8명을 죽이고 청송진에서도 2명을 죽였는데, 이때 해가 이미 저물었는지라 어둔 밤에 검은 옷의 적이 잠복할까 염려되어 즉시 좌우로 하여금 크게 고함을 치며 추격하게 하니,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므로 한 부대만 남겨 두고 병력을 다 출동시켜 뒤를 쫓아 엄습해 무찔러, 적진에서는 포성이 영영 끊어지고 시간은 아마도 10시에 가까왔다. 곧 화현으로 회군하여 우리 군사 2개 부대 및 청송군으로 하여금 본진을 파수하게 하고 대군은 문거점(文居店)에서 유숙케 하였다.
3일. 이른 아침에 군사를 점고해 본즉, 의성군은 이미 도망가고 다만 16명이 남았으며, 본진의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한 자가 없었다. 의성대장은 나에게
“의성으로 회군하여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합세해서 일을 해 나가자.”
하므로, 나는 응락하고 행군하여 화목점에 이르러 점심을 먹는데, 동리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어제 저 북녘에 병정 백여 명이 3, 4명씩 대오를 지어, 혹은 신음하고 혹은 다리를 절으며 의성 등지로 도망가고 혹은 신령(新寧) 등지로 도만가면서 모두 하는 말이, 이천 의병은 참으로 강병이니 절대로 우리들이 여기를 지나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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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지 말라 부탁했다.”
고 하는 것이었다. 오후에 행군하여 의성 오동촌(梧桐村)에서 유숙하였다.
4일. 토현(土峴)에 유숙하였다.
5일. 운곡(雲谷)에서 유숙하는데 의성대장이 소 2마리를 잡아 군사를 먹이고, 일변으로 영을 내려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6일. 수정사에 들어가 진지를 정하고 각 면에 영을 내려 군수 물자와 군사들이 입을 군복을 독촉해 받았다.
7일. 각 면의 초군이 일제히 모여 수효가 백여 명에 달하므로, 우리 군사와 섞어서 부대를 편성하여, 1기 3대(一騎三隊)의 법으로 부서를 짜 놓으니 군의 기세가 차차 떨치기 시작하였다.
8일. 산 아래 각 동리에 영을 전달하여 산 마루 사방에 군막을 마련하게 하고, 여러 장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파수를 하게 하여, 좌익장 신용희는 운곡의 요긴한 길목을 지키고, 우익장 김경성은 천마봉(天馬峰)을 지키고, 의성대장의 영으로 김두병(金斗柄)은 남현(藍峴)을 지키고, 조성학은 금성(金城) 좁은 목을 지키게 되었다.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기를
“병정 백여 명이 방금 산운리(山雲里)로 들어오고 있다.”
하므로, 높은 데 올라 바라보니 과연 그러했다. 그래서 다시 여러 장수로 하여금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맞아 싸우게 하여, 좌·우익장은 군사 3개 부대를 거느리고 비봉산(飛鳳山)에 잠복하고, 김두병은 군사 2개 부대를 거느리고 비봉산 아래 주둔하고, 중군 및 김순삼은 천마봉에 잠복하고, 조성학은 군사 3개 부대를 거느리고 수정사 동구에 잠복하고, 나는 유격병 한 부대를 거느리고 이곳저곳을 지휘하고, 의성대장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남현(藍峴)을 지키기로 하였다.
오정에 적병이 곧장 수정동을 충돌하여 들어오므로, 조성학은 보리밭 속으로 기어가서 곧장 적진 앞에 이르러, 고개를 들고 깃발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한 번 호통을 치자, 뒤를 따른 3개 대의 군사가 일제히 포를 터뜨리니, 적은 뜻밖의 일이라 놀라서 다 흩어져 가서 마침내 청로역(靑路驛) 안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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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갔다. 우리 군사들은 뒤를 쫓아 엄습해, 적을 몇 명을 죽이고 쇠북을 울려 군사를 거두었다.
점심 식사 후에 영을 내려, 중군으로 하여금 5개 부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즉시 순호(蓴湖) 안산을 점령하여 적의 두부(頭部)를 치게 하고, 조성학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꼬리를 치게 하고, 나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들락날락하며 의병(疑兵)이 되어 그 중앙을 대적하니 마침내 쏜살같이 나왔다. 미처 서로 어울리기 전에 1초장(哨長) 이준성(李俊性)이 포 한 발로써 적 1명을 쏘아 죽이고, 김인식이 포 한 발로 적 2명을 명중시켜 너머뜨리니, 적이 놀라서 흩어지므로 뒤를 쫓아 엄습해 무찔러 겨우 4명을 명중시키자, 해가 이미 저물었다. 또 회군하려 하자, 이 적이 다시 뒤를 따라 쫓아오므로, 미리 잠복해 있던 포군 두 사람이 제방의 양쪽에서 나타나 한꺼번에 발포하니 적은 복병이 있는가 의심되어 급히 쫓아오지 못하므로, 군사를 철회하여 본진으로 돌아왔다. 뒤에서 다시 빨리 쫓아오므로 나는 친히 천보총을 들고 쏘아 두명을 죽이니, 여러 장수가 힘을 다해 협격하여 네 명을 죽이고 돌아와 함께 수정사에 모여 일군에게 큰 상을 주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려 전과 같이 파수하게 하였다.
밤 8시 경에 적병의 대장(隊長)이 수 초(數哨)의 군대를 거느리고 엄습할 꾀를 내어 파수하는 곳으로 들어왔다가, 복병에게 패하여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사13일. 아침 식사 후에 적병이 4개 대로 나누어 와서 호위하므로, 우리 군도 역시 나가 양진(兩陣)이 대치하여 총탄이 비오듯 하며, 오전 8시 경부터 오후 4시 경에 이르도록 승부가 나지 아니하였다. 적은 산길이 험악함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데, 지나가는 각 마을에서 의복과 소(牛)·말(馬)을 수도 없이 약탈하면서, 의병의 물건이라 칭탁하였으니, 원통하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적병이다.
14일. 아침에 조성학이 점괘 하나를 뽑아 보고 즉시 깃발을 거두며
“퇴군하자.”
하고 크게 외쳤다. 그는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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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왕기를 타고 왔으니, 먼저 이동하는 것이 상책이다.”
하므로 나는 꾸짖어 말하기를
“무릇 진을 이동하는 사이에 잘못하면 난군을 만들게 된다. 그러므로 예전 명장들이 항상 경계하였거늘, 지금 적이 오지도 않았는데, 먼저 스스로 군의 마음을 동요되게 하느냐.”
하였다. 때마침 회오리바람이 크게 불어,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러가는 정도인지라, 미처 화승(火繩)을 걸지 못하는데 총귀의 탄약이 먼저 날아가는 터라, 군졸들은 다만 빈총만 등에 메고 서로 돌아보며 벌벌 떨었다.
이때에 경기도에서 따라온 포군 두 사람이 방금 병들어 누워 몸을 운동하지 못하므로, 차마 버리고 떠날 수 없어 여러 장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비봉산을 넘게 하고, 나는 친히 그 두 사람을 부축하여 바위 틈을 찾아 눕히고서 마른 섭으로 가려 두었다. 그리고 나는 비봉산을 오르니, 적이 과연 크게 산채(山寨)로 몰아들어 포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게 하였다. 군사를 거느리고 지동점(地洞店)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15일. 군인 2명을 수정사에 보내어 병든 포군 2명을 등에 업고 오게 하였다. 이 날에 구연영은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함을 두려워하여 비밀히 군중에 설유하기를
“대장은 본시 영남 사람이라, 친척과 친구가 이 지방에 많이 살고 있으니, 설혹 뜻밖의 변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보호하는 자가 많으려니와 우리들은 천리의 고독이니 누가 즐겨 돌보아 주겠는가. 미리 먼저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그 부하 30여 명을 거느리고 몰래 경기도로 향해 떠났다.
“아! 슬프다. 약간 의기가 있다는 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죽음에 당하여 변하지 않는 자가 몇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부하를 잘못 어거한 탓도 있겠다. 그러나 역시 국운의 소치다.”
탄식하며 오래도록 울었다.
16일. 군사를 점고해 보니 4개 부대에 불과하였다. 행군하여 황산동(黃山洞)에 당도하니, 거류민이 병정들의 횡포한 약탈에 겁을 내어 모두 도피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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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머리 백성을 불러 효유하고 눌러 유숙하였다.
17일. 이른 아침에 행군하여 20리를 걸어서 두음산(斗音山)에 당도하여, 점심을 먹고, 드디어 황학산(黃鶴山)에 올라 진지를 정하였다. 이 산은 내가 초년에 공부하던 곳인데, 산 중턱에 한 석실(石室)이 있어, 수십 명이 용납할 만하며, 위로는 봉우리들이 깎아 세운 듯하고, 아래는 수목이 나열해 있고, 또 난석(亂石)이 무더기를 이루어 발을 붙이기 어려우니 참으로 피란할 만한 곳이다. 드디어 근동에서 가마솥과 식량을 빌려서 군사를 먹이고 석실에서 유숙 하였다.
18일. 행군하여 안동 금학산(金鶴山) 극락암(極樂庵)에서 점심을 먹고 재 하나를 넘으니, 또 한 암자가 있어 극히 정결하므로 진을 머물렀다.
이 때에 춘천(春川) 이병원(李炳遠)이 와서 군에 투신하였는데, 이씨는 본시 춘천진의 종사관으로, 본진이 패하게 되자 마침내 재를 넘어 의성진에 투신하였다가, 또 황산의 패전을 만나고, 종적을 숨겨 와서 투신(投身)하니, 그 지기가 가상할만 하다. 그래서 종사를 삼았다. 이곳에 3일 동안 진을 머물렀다.
22일. 드디어 행군하여 황학산에 이르러 진지를 정하고, 돼지를 잡아서 산신에게 제사하였다.
24일. 행군하여 황산(黃山)에서 유숙하였다.
25일. 20리를 행군하여 실업동(實業洞)에 당도하니, 포군 김인식(金仁植)·김호길(金好吉)이 자원하여 종군하였다.
26일. 종일토록 큰 비가 내렸다. 의성 중리(中里)에 거주하는 오혁주(吳赫周)가 와서 종군을 자원하였다.
27일. 비가 개었기로, 행군하여 동구를 나가는데, 들리는 말이
“적병 50여 명이 우리 군사를 쫓아온다.”
는 것이었다. 이 때에 우리 군사는 30명도 다 못되니, 아무리 해도 대적하기 어려우므로, 즉시 군중에 영을 내려, 사방으로 흩어져 대오를 나누게 하고, 만약 적이 오면 이리이리하라고 하니, 일군이 영에 의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잠복하였다. 적병이 과연 실업동으로부터 산 아래로 쫓아오므로, 나는 깃발을 휘두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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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외치자, 수 십 곳에서 일제히 포를 터뜨리며 고함을 치니, 적은 사방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급히 퇴군해 달아났다.
나는 군사를 거두어 20리를 가서 전풍(全豊)주점에 당도하니, 좋은 술이 있다 하므로, 조장군으로 하여금 군사와 함께 술을 마시게 하고, 나는 본시 술을 즐기지 아니하므로 먼저 떠나서 수곡(藪谷) 숙소에 당도하였다. 밤이 깊어가는 데도 조장군이 오지 아니하므로, 서상각(徐相珏)·박순화(李舜華)를 시켜 사방으로 찾았으나 밤새도록 보이지 아니하였다.
28일. 이른 아침에 조장군이 비로소 와 보이기로, 나는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방금 적병이 뒤에 있으니 잠깐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며, 하물며 술은 본성을 상실케 하는 독약인데, 만약 어젯밤에 불의의 변이 있었다면, 어찌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지 안했겠는가. 군법은 사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금번에는 특히 여러 군사들의 체면을 보아 짐짓 용서하는 것이니, 이 후로는 각별히 주의하라.”
하니, 조장군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오후에 행군하여 청송 화목점에서 유숙하였다.
29일. 도동(道洞)에 당도하였다. 밤중에 전초도영장(前哨都領將) 이준성(李俊性)이 군사 4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울며 실패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5월 1일. 덕현(德峴)에 당도하니, 전번에 무너져 흩어진 군사들이 줄대어 와 대기하므로, 바로 9개 부대를 만들었다.
2일. 행군하여 안덕점(安德店)에서 유숙했다.
3일. 유천점(柳川店)에서 유숙하였다.
4일. 영천(永川) 입암(立巖)에서 유숙하였는데, 이곳은 여헌(旅軒) 장 선생의 주거지였다.
5일. 가랑비가 내렸다. 오후에 행군하여 경주(慶州) 인비점(仁庇店)에 당도하니, 김병문(金炳文)·이시민(李時敏)·서두표(徐斗杓)·박승교(朴承敎)가 찾아왔다. 원래 서두표의 용력이 발군(拔群)하다는 말은 이미 익히 들었었는데, 이 시기에 서로 만나게 되니 매우 즐거웠다. 따라서 진에 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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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수를 차정하게 되어, 이영구(李永久)를 경주 도소모(都召募)로 삼고, 이준구(李俊久)·이종흡(李鍾翕)·장상홍(張相弘)·이우정(李寓禎)·박승교(朴承敎)를 참모로 삼고, 서두표(徐斗杓)·홍병태(洪秉泰)를 좌·우 봉(鋒), 안옥희(安玉熙)·안재학(安載學)을 좌·우익, 이익화(李益和)를 중군, 김두병(金斗柄)을 후군, 이용관(李容觀)·이용태(李容泰)를 좌·우 (鋒)봉, 황성학(黃性學)·이시민(李時敏)을 좌·우 포장(砲將), 김병문(金炳文)을 영솔(領率)로 각각 삼았다.
이상과 같이 부서가 정해지니, 각 장령은 모두 절하고 엎디어 절제를 받았다. 흥해(興海) 사람 장상흥·이우정과, 울산(蔚山)사람 이익화·이용관은 의기를 숭배하여 발을 싸매고 와서 투신한 것이었고, 경주 사람 홍병태는 청송진의 선봉이 되어 군수전(軍需錢)을 화목 장터에서 거두다가 우리 진이 장차 경주로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군사 1개 부대를 거느리고 도동(道洞)에서 머물은 진중으로 찾아와 투신한 것이었다.
6일. 이른 아침에 서두표가 자기 선친의 대상을 모시기 위하여 본가로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10일 동안 말미를 주고 곧 행군하여 40리 밖 안강점(安康店)에 당도하여, 서상각·김춘삼 두 사람을 부중에 보내어 허실을 정탐하게 하였다.
7일. 이른 아침에 군마(軍馬)를 점호하고, 길을 배나 빨리 달려 고성수(高城藪)에 당도하니, 주점 사람이 묻기를
“어제 저물녘에 척후병을 본부에 보낸 일이 없습니까. 그 사람이 아마도 반드시 살해를 당했을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놀라서 그 연유를 물으니, 대답이
“어제 저물녘에 읍내 장교 두 사람이 공금을 거두기 위하여 나왔다가 귀진(貴陣)의 척후를 보자 바로 잡아갔는데, 오늘 새벽에 총소리가 연달아 세 번이나 났으니 반드시 그 두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는 것이었다.
또 성안의 일을 물으니 말하기를
“포군 50여 명이 이미 수일 전부터 동·북 양문에 잠복하고 있으니, 의병의 힘으로는 깨뜨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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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므로, 나는 점괘 하나를 뽑아 보고 즉시 조성학으로 하여금 성을 공격하는 선봉장을 삼고, 정병 1개 부대를 뽑아 복수기(復讐旗)를 들어 앞세우고, 달려서 동문 밖 황오리(黃五里)에 당도하니, 성안 군사가 일제히 포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나는 군사들에게 일제히 큰소리를 내어 병창(並唱)으로 꾸짖게 하기를,
“너희들도 역시 우리나라 민족인데, 우리 복수군(復讐軍)을 대항하니 이것은 역적 돕는 큰 죄악이다. 만약 종시 미혹을 고집한다면 옥석구분(玉石俱焚)의 경우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빨리 성문을 열어 후회가 없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 곧 김한룡(金漢龍)·노대택(盧大澤) 두 사람을 불러 분부하여 동·북 양문으로 가게 하니, 조장군은 크게 외치며 말하기를
“적을 돕는 역적 무리는 불속의 귀신이 될 것이 목전에 있는데도 오히려 이처럼 미혹을 고집하느냐.”
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였다.
이윽고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므로 곧 군사를 몰고 동문에 당도하니, 성 위에 있는 적병들이 머리를 싸매고 쥐구멍을 찾아 달아났다. 앞부대 포군 권영수(權永壽)·허봉룡(許鳳龍)·박돌쇠(朴乭釗)가 즉시 성을 넘어 들어가 성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본부 부윤 이현수(李玄▼(氵+豆+寸)), 중군 윤흥순(尹興淳)이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도망해 달아나므로, 일변으로 군사를 시켜 불을 꺼버리게 함과 동시, 인리청(人吏廳)에 진영을 마련하고 포군을 시켜 척후병 두 사람을 찾게한 바, 옥중에서 기절해 있었다. 급히 붙들고 진중에 와서 한참만에 겨우 소생했는데, 온 몸에 매맞은 독기가 떠올라서 죽은 송장이나 같으므로, 나는 그 자욱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자, 여러 군사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없었다.
이때에 성중의 여러 백성들이 모두 가산을 옮기고 달아나서, 온 성이 텅텅 비었기로, 즉시 영을 내리되
“만약 추호라도 민간에게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장령·군졸을 막론하고 모두 군율에 의하여 시행한다.”
하여, 4대문에 방을 써서 걸게 하고, 각 면 대성(大姓)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창의에 호응하게 하고, 또 성 지킬 장수를 차정하여 이용관(李容觀)·최진엽(崔鎭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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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금 동문을 지키게 하고, 이병원(李炳遠)으로 동소문을 지키게 하고, 황성학(黃性學)·오학문(吳學文)으로 남문을 지키게 하고, 이시민(李時敏)·박수한(朴壽漢)으로 서문을, 그리고 김학문(金學文)·노성호(盧性浩)로 북문을 지키게 하고, 군막을 만들어 옹성(甕城)에 세웠는데, 무릇 28개 소나 되었다. 그리고 이준구(李俊久)로 동화면(東華面) 소모장(召募將)을 삼고 이종흡(李鍾翕)으로 기계면(杞溪面) 소모장, 김병문(金炳文)으로 죽장면(竹長面) 소모장을 삼고, 동·북 양문 밖에 소화를 당한 민가에는 각각 돈 백냥 씩을 주니, 백성이 모두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8일. 각 면 소모장들이 모두 명령을 받고 떠났다. 이윽고 한 포군이 촌락 민가에 침범한 일이 있어, 즉시 잡아내어 곤장 15대를 때렸는데, 그래도 몹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또 민가에 침범하므로, 곧 동문 밖에서 총살하였다.
9일. 오후에 소낙비가 크게 내렸다. 석양에 척후병이 보고하되
“적병 3백여 명이 두 길로 나누어 온다.”
하므로 곧 군중에 영을 내려, 탄약을 준비하고 진을 엄밀히 결속하여 대기하게 하였다.
10일. 이른 아침에 적병이 과연 두 갈래로 나뉘어 크게 몰아오는데, 한 갈래는 남문 봉황대(鳳凰臺)로, 한 갈래는 서문 장대(將臺)로부터 오고, 본부 부윤은 수 개 부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산에 올라 군막을 만들어 세우고 관망하는 것이었다.
조성학·이영구·홍병태가 남문에 올라 먼저 포를 터뜨리니, 적병이 마침내 산에 올라 싸움이 어울렸으나 승부가 나지 아니한다. 적은 우리 군사가 굳건히 지키는 것을 알자 동문으로 회군하므로, 우리 군사도 역시 군사를 동문으로 모아서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또 적이 북문으로 회군하므로 수성군이 일제히 포를 터뜨려, 두어 시간 동안 접전한 끝에 적병 십여 명이 죽어 넘어지자, 마침내 퇴군하여 곧장 서문으로 몰려오므로, 서문 수장 이시민이 두어 시간 동안 교전하니, 적은 퇴군하여 산에 올라 멀리서 포로 대응할 뿐이었고, 성중의 백성들은 앞을 다투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권하였다. 이날 밤에 진을 엄밀히 결속하여 대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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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새벽녘에 적이 4대문을 포위하고 마구 총탄을 터뜨리니, 4문의 수병들이 힘을 다해 포로 대응하여 여러 시간 동안 혼전이 벌어진 끝에 적병 20여 명이 죽어 넘어지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한 자가 없었다. 적병이 연일 이익을 보지 못한 나머지, 또 석양에 이르자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마른 섭을 북문에 운반하여 장차 불을 놓으려 하므로, 우리 군사가 일제히 포를 터뜨리니, 적은 섭을 버리고 달아나므로, 즉시 문을 열고 나가 적을 추격하여 많이 무찔렀다. 그래서 적은 마침내 서장대(西將臺)로 달아나면서 멀리서 포로 반응할 뿐이었다.
이때 군중에는 탄약이 떨어져 가므로 본부 화약고에 들어가 본즉, 있는 것이 모두 검은 흙덩이 뿐이라, 필시 본 부윤이 미리 실어간 모양이다. 이날 밤에 군의 실정이 흉흉하여 여러 장수들이 와서 답답한 사정을 고하므로 나는 각 군막을 순회하여 타이르고 형세를 관망하여 함께 후퇴하기로 하였다.
12일·새벽 2시 경에 포군 배인도(裵仁道)가 급히 와서
“각 문의 병졸이 모두 도망갔다.”
하므로, 나는 즉시 4대문을 순회하여 보니, 남아 있는 병졸이 4개 부대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즉시 분배하여 4대문 및 군막을 지키게 하였는데, 동문에 가는 도중에 적병이 크게 외치며
“너의 도망병의 죽은 자가 7명이니, 곧 시체를 거두어 가라.”
하고, 드디어 포를 터뜨리며 달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홀로 동문에 있어 별다른 계책이 없었으므로, 친히 포 한 발을 터뜨리고 지휘하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포군 한 사람이 와서 포 두 발을 연발하여 적병 2명을 죽여 넘어뜨리니 적이 크게 놀라서 급히 물러갔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 군사가 탄약이 떨어진 것을 알고서 다시 와 성을 공격하므로, 4대문의 파수병이 죽을 힘을 다하여 종일토록 접전한 결과, 적병이 죽은 자가 20여 명이었고, 적은 드디어 퇴군해 갔다. 그래서 즉시 돼지 2마리를 사서 군을 먹였는데, 날은 이미 저물었다.
나는 조장군에게 이르기를
“오늘 우리 생문방은 동쪽에 있으니, 너는 이채구·홍병태를 이끌고 각군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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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하여, 가만히 오늘밤에 모두 동문에 와 모이도록 부탁하라.”
하였다. 세 장수는 명령에 의하여 10시 경에 군사를 거두어 동문에 당도하자, 적병은 문밖에 줄지어 있으므로 나는 앞에 서서 문을 나가 친히 철장을 들고 크게 호통을 치며 한번 휘두르니 좌우의 적 네 명이 단번에 죽어 넘어지는지라, 적은 드디어 놀라 흩어졌다. 그래서 즉시 군중을 거느리고 고성수(高城藪)에 당도하였는데, 적병은 기세를 타서 습격해 오는 바람에 아군은 이미 탄약이 떨어져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했고, 나는 연달아 탄환 5발을 맞았으나 다행히 옷만 뚫고 피부는 한 곳도 상하지 아니하였다. 그 대신 마필과 군수 물자는 모두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달성점(達城店)에 당도하니, 여러 장졸이 먼저 이 주점에 당도하였는데, 좌선봉 이상태는 바른 어깨가 총에 맞아 누웠기로, 곧 약을 붙이고 치료하게 하였다. 여러 장령은 나의 총 맞은 곳을 보고 모두 깜짝 놀라며
“신인(神人)이라.”
하므로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내 목숨이 하늘에 달렸기 때문이지, 어찌 신인이겠는가.”
하고, 즉시 흩어진 군사를 불러 들이니, 수효가 6개 부대에 달하는지라, 대장기를 세우고 다시 행군하여 10리 밖의 기계창(杞溪倉)에 이르러, 진지를 정하고 유숙하는데, 무너져 흩어진 군사들이 줄대어 모여들었다. 이윽고 한 군사가 와서 보고하는데,
“의성 오혁주가 대장이라 자칭하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죽장면(竹長面)으로 향해 갔다.”는 것이었다.
14일. 아침 식사 후에 나가 포군을 시켜 오혁주를 잡아오니, 좌우에서 군율에 의하여 총살하려 하므로, 나는 준열히 꾸짖고 타일러서 운량관(運粮官)으로 내보냈다. 이날 오전 8시 정각에 포 소리를 내며 수 개 부대 군사가 달려오는데, 바로 기계 소모장 이종흡이었다. 그는 소모군을 거느리고 와서, 울며 무너져 흩어지게 된 사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함께 행군하여 십리 밖 우각점(愚覺店)에 가서 유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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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아침에 동화면(東華面) 소모장 이준구가 와서 인사를 드렸다. 곧장 행군하여 흥해(興海)로 들어가서 인리청(人吏廳)에 진영을 두고, 호장(戶長)·수리(首吏)·수교(首校)들을 불러, 피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거행할 것을 분부하였다.
16일. 본현 무기고에 들어가 탄약을 준비하고, 2개 부대의 군사를 모집하여 양만춘(楊萬春)을 포군 영솔자로 삼았다. 석양에 행군하여 5리 밖 용전(龍田)에 당도한즉, 큰 비가 갑자기 쏟아지므로, 어둠 속에 비를 무릅쓰고 청하(凊河)읍으로 달려가서 진지를 정하였다.
17일. 본현의 의병을 일으킨 결과 군사가 겨우 30명에 불과하므로, 본진의 중군 안만근(安萬根)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18일. 청송진이 내려 왔다.
19일. 오후에 청송진과 합세하여 행군하여 영덕(盈德) 장사동(長沙洞)에 이르러 진을 머물렀다.
20일. 비가 내려 행군하지 못하였다.
21일. 비가 계속하여 내렸다.
22일. 행군하여 40리를 걸어 영덕읍에 당도하여 장교청(將校廳)에 진영을 마련하였다. 본진 의병장이 와서 인사를 드렸는데, 성은 신(申)씨였다.
23일. 계속 진을 머물렀다.
24일. 비가 내려 행군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머물며 본현 의병 백여 명을 모집하였다. 청송진은 따로 성 밖에다 진을 쳤다.
25일. 이상태·이종흡·장상홍에게 2개 부대의 군사를 주어 청하(凊河)로 떠나 보내고, 소모 황성학·안만근에게 2개 부대의 군사를 주어 흥해로 보내고 소모 이채구·이준구·홍병태에게 5개 부대의 군사를 주어 영해(盈海)로 보내고, 본진과 합세한 청송진을 일으켜 영덕진과 합세하여 흥해로 향해 떠나게 하였다. 나도 즉시 행군하여 40리를 가서 축산(丑山)에 진을 머물렀다.
26일. 비가 내려 행군하지 못하였다.
27일. 계속 비가 내렸다. 영해 선봉·좌익 양장(兩將)이 와서 인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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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비가 개었기로 행군하여 영해부에 들어가니, 본부의 진이 오리정(五里亭)으로 마중나왔다. 장교청에 진영을 정하였다.
29일. 안동진(安東陣)의 전군(前軍) 유시연(柳時淵)이 6개 부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인사하고 합세하기를 청하므로, 함께 안동의 화부(花府)로 들어갔다.
6월 1일. 본진의 중군을 불러, 의병을 일으켜 합세하게 하였는데, 본진이 일어나지 않고 있으므로 의리를 들어 책하여 빨리 일어나게 하였다. 오전 8시 정각에 본진의 척후병이 보고하기를
“적병 3백여 명이 흥해진을 깨뜨리고 장차 영덕으로 들어 올 모양이라.”
하더니, 이윽고 소모장 황성학의 보고에서, 적병의 소식은 까마득하여 불확실하다 하였기로, 드디어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유시연을 불러들여
“너도 함께 영덕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고 함께 안동부로 들어가자.”
고 분부하였으나, 유시연은 기어코 회피하므로 이에 군문을 마련하여
“네가 이미 의병장이 된 신분으로써 적만 만나면 회피하고, 오직 잔민(殘民)만 약탈하니 죄상이 용서할 수 없다.”
하고 밀어내어 행형(行刑)하게 하니, 유시연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었다. 그 나이를 물으니 24세라고 하므로
“나이 젊으니 면죄해 주라.”
하였다. 여러 군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을 회피하는 자가 무기는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고 곧 총과 칼을 빼앗고서 쫓아냈다. 이윽고 유시연이 다시 와서 간청하므로, 무기를 도로 주고 좋은 말로 타일러서 보냈다. 먼저 이채구·이준구·홍병태 세 장수에게 정병 백여 명을 주어 밤에 영덕진으로 달려가게 하고, 나는 조성학과 더불어 명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기로 하였다. 이날 밤에 나는 꿈을 꾸었는데, 한 늙은이가 와서 말하기를
“내일 아침 대장기가 땅에 떨어지면 네 목숨이 다 된 줄로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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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로, 인해 놀라 깨어 심신이 황홀하였다.
2일. 이른 아침에 조성학이 장막으로 들어오기로, 나는 꿈꾼 이야기를 말했더니, 조장군은
“이 꿈이 흉한 꿈이니 행군을 하지 말자.”
는 것이었다. 나는 말하기를
“내가 의병을 일으켜 이미 1년이 되었으나 오직 민생에게 노고만 끼쳤을 뿐이요, 성상의 잠 못 이루는 근심을 덜어드리지 못하였기로 노상 생각이 초조하여, 한 칼로 적의 배를 가르지 못해 한이거늘, 하물며 실상이 없는 꿈 때문에 적을 보고서 퇴진한단 말인가. 또 죽고 사는 것이 명에 있으니 무엇을 한탄하랴. 내가 비록 단명하더라도 그대는 이로써 의기를 상실하지 말고 대사를 스스로 책임지고 신민의 의무를 다하기 바란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여기에서 절필(絶筆)됨]
이날 행군할 무렵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크게 불어 대장기 폭이 문득 땅에 떨어지니, 뭇 군사가 얼굴빛이 변하여 당황하였다. 조성학은 말 앞에 엎디어 울며 회군하기를 요청하니,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내 운명이 이미 다 되었다. 다만 원수인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성은(聖恩)을 갚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그러나 하늘이 도와주지 아니 하고 운명의 길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구구하게 목숨을 도피하랴. 대장부가 전쟁터에 죽게 되는데 무엇을 한하랴.”
하고, 또 말을 재촉하여 전진하므로, 장졸들이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서 영덕읍에 이르러 진지를 정하였다.
이튿날, 적과 더불어 교전하여 종일토록 무찔러 죽인 수효가 매우 많으니,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그래서 전군이 모두 크게 기뻐하며 하는 말이
“사뭇 흉하면 도리어 길하다 하더니, 과연 그렇다.”
고 하였다.
그 이튿날은 바로 6월 4일이었는데, 오후에 폭우가 갑자기 쏟아졌다. 이윽고 척후병이 급히 와 보고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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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정 수백 명이 수륙(水陸)으로 밀려들어 기세가 비바람과 같다.”
고 하니, 여러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고 벌벌 떨며, 포 한 발도 쏘아 보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데, 외쳐 만류해도 금할 수 없으므로, 공은 마침내 분연히 나서니 뒤를 따른 자가 불과 수십 명이었다. 포탄을 무릅쓰고 달려가 좌우로 충돌하다가 탄환 2 발이 연달아 좌우 갈빗대에 명중하자, 큰 소리로 하늘을 부르짖으며
“우리 5백 년 예의 나라가 견양(犬羊)과 같은 섬 오랑캐에게 먹힌단 말이냐. 아! 우리 수천 만 민족이 과연 희생의 참혹을 면하지 못한단 말이냐. 나는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할망정 살아서 왜적 놈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
하고, 곧 강에 몸을 던져 죽으니, 따라간 군졸들도 한 때에 같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상 3일 동안의 사적은, 당시 참관한 부로(父老)들의 전설에 의거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첫댓글 오동촌,토현,운곡,항확산,비봉산,수정사....언젠가는 답사를 해야 하는데.....한번 같이 갑시다.
의성 병신창의 전모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병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답사에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성에 오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의성의 망금성편 백오십운의 창의기록과 일맥상통함이 있습니다 좋은자료를 본것같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