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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추억과 시인이 꿈꾸는 피안의 고향
-정갑숙 제7동시집 『한솥밥』
박 일
1.
비밀이 풀렸다. 제4동시집이 『금관의 수수께끼』였던가. 그 수수께끼의 비밀이 아니다. 모임이나 행사가 있어도 그림자도 안 보일 때가 많으니까 비협조적이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까지 나오기도 했다. 이자경 동화작가가 그 비밀을 풀어주었다.
‘언젠가는 소식이 닿지 않아 궁금했는데 암자에 오래 머물렀노라고 했다. 지난겨울에도 암자에서 동안거를 하고 나왔다고 했다. 그렇다고 시인을 독실한 불교 신자라고 말하기는 어색하다. 언젠가 그녀는 문학도 하나의 종교가 될 수 있겠더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그녀에게는 시 쓰는 일이 곧 수도라고 하겠다.’(『열린아동문학』 2016. 가을호)
작품을 집중적으로 쓰기 위하여 입산한다. 소재가 모이고 간절하게 글을 써야 할 때가 오면 미련 없이 떠난다. 하안거도 좋고 동안거도 좋다. 그렇게 해서 작품을 쌓아 올린다. 절 마당에 서 있는 탑처럼. 그럴 때 얼굴을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그의 동시가 맑고 거룩한 것일까?
고향은 경남 하동군 횡천면 유평마을이다. 이곳이 그의 문학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유년시절이다. 그 행복의 조건은 대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던 자유와 가족의 사랑이다. 나는 지금도 인공 거부증 환자처럼 자연을 찾아다닌다. 내 거처는 지금도 산과 들과 시냇물이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 내 고향 마을을 닮은 곳이다. 내 동시문학의 자양분은 고향의 사계와 어머니다. 고향의 사계는 섬세한 감성을 안겨주었고 어머니는 순수한 동심을 물려 주셨다.’(『열린아동문학』 2016. 가을호)라고 얘기했었다.
등단도 비교적 화려하다. 1998년 『아동문예』 신인상을 거치고,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그 당선작 「나무와 새」는 다음과 같다. 피안의 고향과 그 사계가 아늑하게 펼쳐진다.
햇살 따사로운 봄날
새 한 마리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부러운 나무는 새를 보며 말한다.
"나도 너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
나무의 마음을 안 새는 가슴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하늘 푸른 여름날
"우리처럼 하늘을 날고 싶으면 네가 가진 것 다 나눠주어야 해."
아무것도 지니지 않아야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새가 알려준다.
하늘 맑은 가을날
새의 말을 기억한 나무는 열매를 사람들에게 다 나눠준다.
그리고 빈손을 펼쳐든다.
차가운 겨울날
가지에 앉아 놀아주던 새도 남쪽나라로 떠났다.
홀로 서 있는 나무는 입고 있던 옷들까지 다 벗어준다.
풀숲에서 떨고 있을 작은 벌레들을 위하여.
하늘은
가진 것을 다 주는 나무의 마음을 알고
하얀 솜이불을 펼쳐 나무를 덮어준다.
솜이불을 덮고 누운 나무는 이제 꿈을 꾼다.
한 마리 새가 되어 훨훨 날고 있다.
하늘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나무와 새」 전문
상재한 동시집은 『나무와 새』 『하늘 다락방』 『개미의 휴가』 『말하는 돌』 『금관의 수수께끼』 『정갑숙 동시선집』 그리고 『한솥밥』 등이다. 특히 제5동시집 『금관의 수수께끼』 는 2015년 ‘세종 문학 나눔 우수동시 선정’로 선정되었다.
수상 경력도 다양하다. ‘오늘의 동시문학상’ ‘부산아동문학상’ 영남아동문학상‘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 그리고 ’최계락문학상‘ 등이다. 제19회 최계락문학상 심사를 맡은 선용(아동문학가), 박태일(시인), 구모룡(문학평론가)은 수상 동시집 『한솥밥』에 관해서 “삶의 구체를 따라서 사물들에 활기를 불러일으켜 조용한 울림과 반향을 가져다준다.”고 평가했다.
2.
모두 대표작이다. 어떤 경지에서 이뤄낸 작품들이니까. 그러나 「셋방살이」는 더 감동적이다. 착상이 기발하여 동시가 이렇게 감동적인 문학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풀잎이
전세를 내었다.
풀벌레가
전세를 얻었다.
풀잎은
전세 값으로 노래를 받아
날마다 기뻤다.
풀벌레는 전세 값으로
노래를 주어
날마다 즐거웠다.
-「셋방살이」 전문
박두순 동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 천국이다, 극락세계다. 전셋값을 노래로 주고받으니! 어찌 날마다 즐겁고 기쁘지 않겠는가.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시인은 이런 세상을 꿈꾼다. 누구나 이런 세상이면 살맛나지 않겠는가. 3월은 봄의 첫 디딤돌이자 이사철이기도 하다. 요즘 전세금이 하늘처럼 높다. 이사하는 어린이도 봄을 지고 다니는 것과 같으니 힘겹겠다.’라고.
동시집 『한솥밥』(2018. 가문비어린이)은 제7동시집이다. ‘시인의 말’에 ‘한 채의 집을 지었습니다/ 화목한 초록별 가족 꿈꾸며/ 『한솥밥』이라는 제6동시집’이라고 했다. 그런데 창작동시집으로는 여섯 번째지만 그 사이 『정갑숙 동시선집』(2016. 지식을만드는지식』)이 나왔다. 이 동시집은 이 출판사가 기획출간한 역작이다. 한국동시 100년을 증언하기 위하여 1908년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아동문학사를 빛낸 시인 111명의 대표작을 가려뽑았기 때문이다. 이에 선정된 부산의 동시인으로는 최계락, 조유로를 비롯하여 강현호, 공재동, 박일, 박지현, 선용, 이상문, 정갑숙 등인데 정갑숙이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동시집 『한솥밥』에는 50편의 동시가 실려 있다. 5부로 나누었다. ‘시인의 말’ 일부를 옮긴다. ‘생명의 숨소리’라는 주제 아래 ‘따뜻한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작은 새가 되어, 마음껏 마실 다니며 노는 기분으로 편안했습니다. 풀과 나무와 새가 살아가는 자연의 어울림은 그렇게 바라보는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를 안겨줍니다. “더불어 행복한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했다.
그는 유년의 고향과 자연을 예찬한다. 그 속에서 ‘생명의 숨소리’를 듣고, ‘더불어 행복한 삶’을 꿈꾸고, ‘화목한 초록별 가족’을 꿈꾼다. 어쩌면 유년의 추억을 통하여 피안의 고향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이자경 동화작가는 말한다. 정갑숙 시인은 ‘고향에 뿌리를 둔 나무, 고향에 깃드는 새’라고 하면서, ‘고향에 깊이 뿌리 내린 시인의 시가 더욱 무성하게 가지를 뻗어 나가기를 빈다.’고 했다.
고향은 동심의 원형이다. 그러니까 유년 시절이 그리워진다. 현대의 피폐한 삶과 훼손되고 오염된 자연 환경을 보면서 유년 시절의 고향은 낙원일 수밖에 없다. 또한 어머니가 계신 곳이지 않는가. 평화와 안식과 자유까지 넘친다.
정갑숙 동시인은 ‘꿈을 꾸면 내 꿈속 무대는 늘 고향 쪽이다. 유년 시절 내가 걷던 신작로가 나오고 시냇물이 나오고 들판이 나오고 오솔길이 나오고 감나무가 나오고……. 늘 꿈속 무대가 바뀌지 않으니 참으로 신비스럽다. 몸은 도시에 있어도 내 영혼이 머무는 곳은 내가 자라던 고향이라는 것을 꿈이 증명한다.’라고 말한다.
동시집 『한솥밥』도 고향의 자연이며 고향의 노래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그의 유년 을 바탕으로 하면서, 상상의 세계에서 재생산해낸 또 다른 세상이다. 그가 꿈꾸는 피안의 고향이다.
1부 ‘한솥밥’에는 10편의 동시가 실려 있다. 소재는 모두 ‘자연’이다. 머리말에도 ‘풀 나무 돌 강아지 고양이 매미 지렁이/ 그곳에서 그들의 꿈을 들었습니다.’고 했다. 이렇게 자연과 일체감을 보이는 것이 자연과 ‘한솥밥’을 먹는다는 의미였었다.
숲마을에
지바귀 이장님 방송 흘러나온다.
알려드리겠습니다
방금 하늘에서 햇살문자 도착했습니다
꽃대문 열어도 좋다는 메시지
한 집도 빠짐없이
오늘부터 꽃대문을 열어주세요
이장님 방송 듣고 집집마다 대문 열고 있다
산수유 목련 개나리……
색색 여닫이 꽃대문 하르르 하르르.
-「지바귀 이장님 방송」 전문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과 매직의 언어가 환상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꽃대문 열고 하르르 하르르 꽃이 피는 마을이 얼마나 정겨운가.
2부는 ‘벌레 먹은 복숭아’다. 자연의 세계는 작은 것 하나도 나누어 가지는 세상이다. 그게 아름답다. 벌레, 들쥐, 개미, 흙들이 떨어진 복숭아 한 개를 사이좋게 나눠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기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할까.
벌레가 들쥐에게 말한다
먹던 복숭아 아래로 툭 던지며
“나 이만큼 먹을게, 나머지는 너 먹어”
들쥐가 개미에게 말한다
먹던 복숭아 남겨주며
“나 이만큼 먹을게, 나머지는 너 먹어”
개미가 흙에게 말한다
먹던 복숭아 남겨주며
“나 이만큼 먹을게, 나머지는 엄마 다 먹어”
-「벌레 먹은 복숭아」 전문
3부는 ‘촛불 시위’다. 자연도 소망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산콩들이 노란 촛불을 켜고 시위를 하고 있다. 그동안 사람들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에게 저질러온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게 얼마나 무자비한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새로 난 도로가
비탈진 언덕에
산콩들이 노란 촛불 켜고
조용히 시위하고 있다
-우리 마을 허무는 것 멈춰주세요
굴착기 앞에서도
포클레인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비폭력 시워.
-「촛불 시위」 전문
4부는 ‘성덕대왕 신종과 제비꽃’이다. 이는 제4동시집 『말하는 돌』과 제5동시집 『금관의 수수께끼』의 후속편이거나 보완한 것들이다. 그는 답사를 즐긴다. 역사학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문화유산이나 역사의 유물들을 즐겨 찾아다닌다. 이에 대하여 ‘다가가면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귀를 기울이면 그들의 속삭임이 들려오고, 마음을 기울이면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 오고, 그들의 촉촉한 눈물도 한께 전해 와요.’라고 했었다.
왕릉 앞
풀꽃 한 송이
하늘하늘 떨고 있다
황금 왕관
황금 허리띠
왕 이름 다 내려놓고
찬란한 것
화려한 것
무거운 것 다 내려놓고
무덤 안 임금
풀꽃으로 외출하셨나 보다.
-「왕릉과 풀꽃」 전문
임금의 ‘황금 왕관/황금 허리띠/왕 이름’은 ‘찬란한 것/화려한 것/무거운 것’이다. 하지만 인간도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 임금은 전지전능한 자로서 세상을 통제했을 것이다. 그 시절엔 하늘의 새도 명령에 따랐을 테니까. 하지만 그도 죽어서 한 떨기 보잘것없는 ‘풀꽃으로 외출’할 뿐이었다.
5부는 ‘연필의 고백’이다. 체험이 실려 있을 것 같지만 아니다. 그러니까 관념적인 표현이 많아진다. 연필 깎는 일도 ‘글을 쓰는 일’이며 ‘내 살 깎고 내 뼈 닳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동시는 체험을 깔아놓고 현실의 문제와 밀착하여 절묘하고 간절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한층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거친 생활보다 차원 높은 관념으로 명품 동시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은
내 살을 깎는 일로 시작해
나는 내 뼈로 글을 쓰고
내 뼈 닳으면 또 내 살을 깎아내지
생각할수록 글을 쓰는 일은
내 살 깎고 내 뼈 닳는 일이야.
-「연필의 고백」 전문
얼마나 치열하게 글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글을 쓰면 연필이 닳아지니까 연필 깎는 일은 글을 쓰면서 살아온 내 살을 깎는 일이었다. 글은 생각하면서 써야 하니까 내 뼈까지 닳는 일이었다.
4.
'한솥밥'은 '같은 솥에서 푼 밥'이다. 같은 솥에서 푼 밥을 나눠 먹는 가족의 정겨움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 가족의 구성원은 자연이었다. 지구를 한 가족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하늘 높은 날
밤나무가 밥을 퍼 놓았다
가시 밥그릇 소복소복
늦봄 하얀 꽃불 연기 솔솔 피워
한여름 푸우 푸우 뜸을 들이고
가을에 잘 퍼진 알밤 고봉밥
다람쥐 들쥐 멧돼지 바둑이 사람
초록별 가족 한솥밥 먹는다
밤나무가 지은 고소한 밥.
-「한솥밥」 전문
밤나무가 지은 밥은 알밤이다. 밤나무는 ‘가시 밥그릇 소복소복’ 밥을 지으려고 ‘늦봄 하얀 꽃불 연기 솔솔 피워/ 한여름 푸우 푸우 뜸을 들’인다. 밤나무는 ‘다람쥐, 들쥐, 멧돼지, 바둑이와 사람’ 등 ‘초록별 가족’ 모두를 위해 밥을 짓는다. 그야말로 자연 속의 모두가 ‘한솥밥’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소복소복’, ‘푸우 푸우’ 같은 의태어, 의성어에도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시인의 말’에 ‘무언의 눈짓과 몸짓으로 말하는/ 풀 나무 돌 강아지 고양이 매미 지렁이/ 그곳에서 그들의 꿈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숨소리며,/ 그것은 우주의 맥박소리였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자연의 숨소리’와 ‘우주의 맥박소리’는 유년의 추억과 그가 꿈꾸는 피안의 고향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닐까.
제4동시집 『말하는 돌』에서 공재동 동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문학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생각의 질, 구성의 질, 언어 표현력 이 세 가지다. 작가의 생각은 오리지널해야 한다.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탄탄한 구성을 가져야 한다. 자기의 문체를 가져야 하는데, 좋은 문체는 작품의 제재와 알맞아야 한다. 테마, 구성, 표현 이것이 좋은 글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소다. 그러면서 참된 가치가 있는 것, 성실하고 진실한 비전이 있는 책, 어린이가 읽어서 성장할 수 있는 책이 어린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양질의 책이다’라고 하면서 이런 요소를 잘 갖춘 동시집이라고 했다.
이 동시집으로 제12회 우리나라 동시문학상을 수상할 때 ‘『말하는 돌』은 시인정신에 충실한 작품으로 역사적 화해와 우주적 정신세계를 노래했으며 생태환경의 소중함을 천착해 내었을 뿐만 아니라 정갈하고, 읽기에 편안하도록 시어의 선택과 참신한 비유가 뛰어나고 사물의 현상을 독특한 시선으로 해석하여 동시로서의 문학적 지평을 새롭게 넓힌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또한 제35회 부산아동문학상 수상작품집이기도 했는데 심사평(심사위원 박지현, 선용, 이상문 그리고 박일)의 일부를 옮기며 끝을 맺는다. ‘정 시인의 수상 작품집인 『말하는 돌』은 "동심을 통한 전통문화재를 재조명하면서 역사를 되돌아보는 치열한 주제의식이 있으며, 역사적 사건을 사실적 감각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0. 11)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갑숙 선생님의 동시 세계를
박일 선생님 덕분에 다시 접합니다.
귀감이 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