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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사회참여 / 박광서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박광서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미국 Brown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미국 MIT 연구원을 역임했으며 서강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 불교의 사회참여운동에 적극 나서 (사)우리는 선우(재가신행결사단체) 이사장, (사)생명나눔실천회 이사, 참여불교 재가연대 공동대표 등을 거쳐 현재 참여불교 재가연대 공동대표와 종교자유정책연구원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1. 들어가며
삶의 저변의 한 축을 이루는 종교계가 짊어져야 할 사명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불교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스스로의 변화를 통해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한 길을 제시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가 사회적 고통을 감싸고 치유하기보다 자체 무게를 감당하기조차 힘겨워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돌아보면서 극복해야 할 과제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불교의 가치로 우리 사회를 맑고 따뜻하게 만들기 위한 불자들의 몫, 특히 사회참여의 교리적 근거, 참여불교의 특징, 사회의식의 제고, 그리고 구체적인 사회참여의 내용과 한계 등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불교학이나 사회학 전공자가 아닌 발제자로서는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 학술적으로 심도 있는 발표를 하기엔 미흡하다. 이 원고는 한국불교의 사회참여에 관한 학문적 접근이라기보다 불교운동 현장에서 피부로 느꼈던 점들을 정리해 본 글이라는 점을 밝힌다.
2. 한국불교의 현주소
1) 한국 종교의 지형 변화
2006년 5월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에 따라 종교마다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특히 지난 10년간의 종교인구 변화는 천주교의 약진, 불교 정체, 개신교 쇠퇴로 요약되어 한국의 종교 지형이 크게 변화해 왔음이 확인되었다.
불교 인구는 1995년에 비해 3.9% 늘었으나, 같은 기간의 인구증가율 5.6%나 종교인구 전체 증가율 10.5%에는 오히려 못 미쳐 결과적으로 인구 구성비는 23.2%에서 22.8%로 0.4%포인트 감소한 셈이 되었다. 반면에 천주교는 10년 동안 74.4%(219만 명) 증가하여 신자 수가 514만 명이 됨으로써 인구 대비 10%를 넘어섰고, 개신교는 오히려 1.6% 감소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물론 조사방법상의 문제점이 전혀 없을 수 없고, 종교마다 자체의 신자 기준도 달라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는 있지만, 천주교의 급부상은 분명히 주목할 만하다. 그 이유를 어느 학자는 대내외적 이미지에서 청렴성ㆍ저항성ㆍ조직력ㆍ(정치사회적)결속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하고 있는데, 실제로 사회지도력 제고 및 지도자의 부정적 이미지 차단과 함께 불교 및 전통문화를 유연하게 소화한 소위 ‘토착화 전략’도 신뢰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반면에 불교와 개신교는 대중에게 신뢰를 주는 데 상대적으로 실패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4년도 갤럽의 조사 결과를 보자. 우선 종교지도자에 대한 신뢰도에서 ‘소속 종교단체 성직자에 대해 만족한다.’라는 응답이 개신교인은 76.1%, 천주교인은 67.4%인 데 비해 불교인은 58.0%로 불교인들의 교계 지도부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랑과 자비를 잘 실천하고 있다.’라는 응답도 개신교인은 73.8%, 천주교인은 63.0%, 불교인은 56.9%로 답해 역시 종교의 사회적 역할도 불교가 상대적으로 낮음이 확인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2005년 갤럽 조사에서 무종교인의 호감 종교가 불교 37.4%, 천주교 17.0%, 개신교 12.3%로 나타나 불교가 가장 높았다는 사실이다. 이 결과는 그동안 수십 년간 천주교가 1위를 차지했던 점을 고려하면 미래 사회에 불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불교의 경우 외부 여건은 호의적이었음에도, 내부 구성원들의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도나 사회적 실천에 대한 불신이 크며, 따라서 불자들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생활하거나 포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정체를 면치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2) 한국불교의 정치·사회적 위상
조선조 수백 년의 탄압으로 역사의식을 상실했던 불교인들은 일제 침략기에 사상적으로 동질적인 일본에 강한 친화력을 보여 해방 후 한반도가 미ㆍ소 중심의 세력 판도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비하여,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며 한불전쟁 끝에 선교의 자유를 획득한 천주교와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강력한 후원 아래 교육ㆍ의료ㆍ복지 등 물량 선교를 시작한 개신교의 활동 여건은 너무나 일방적이어서(특히 해방 이후) 불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이승만은 일본 친화적이고 민족문화 전통으로 영향력이 살아 있는 불교계에 의도적으로 내분을 조장하여 시대적 상황에 합당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할 기회마저 박탈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친미사상과 기독교의 선교 공간을 열어 놓았다.
《청소년 토지》의 머리말 '청소년에게 드리는 말씀'에서 박경리는 “40년 동안 우리 민족문화가 난도질당한 데는 삼박자(三拍子)가 맞았다고나 할까요? 일제는 나라를 빼앗고도 민족을 말살하고자 우리 문화 파괴에 혈안이 돼 있었고, 기독교 문화와 동경 유학파, 그러니까 새로운 지식인들이 일본에서 들고 돌아온 소위 계몽주의는 각기 그 속셈은 달랐지만 우리 문화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데에는 손발이 맞았습니다. ……기독교 문화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혀 주었고 새로운 문물에 눈뜨게 한 공은 있었지만 종전에 있어 온 고유의 종교, 가치관, 생활양식을 배격했습니다.
새로운 지식인들 역시 서양의 합리주의를 신봉하고 새 시대를 뛰어야 한다는 성급한 마음에서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것들을 부정했습니다.”라며 우리 것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재기불능으로 만든 문화사대주의를 탄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불교는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한 채 신행 형태도 사회성이 탈각되고 개인 중심의 기복신앙 성격에 머물게 되면서 이른바 은둔불교ㆍ산중불교ㆍ치마불교로 굳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는 불교의 급격한 사회적 영향력 감소라는 당혹스러운 현상을 빚고 말았다.
사회현상에 가장 민감하다는 정치인을 예로 들어 보자. 1987년 정치인이 본 서울 시민의 종교 성향은 개신교 20.9%, 천주교 6.0%, 불교 5.8%였다.(월간 중앙 1994년 4월호) 그에 비해 1991년 인구 대비 종교인 분포는 불교 27.6%, 개신교 18.6%, 천주교 5.4%로 발표되었다.
국회의원의 종교 분포도 종교 세력을 가늠하는 잣대의 하나가 될 수 있다. 14대(1996년)까지 역대 국회의원 당선자 1,983명 중 자료가 있는 842명의 종교 분포를 분석한 결과 개신교 367명(18.5%), 불교 283명(14.3%), 천주교 156명(7.9%), 유교 36명(1.8%) 등으로 평균 종교인 비율은 42.5%, 불교계 대비 기독교계 의원 수가 1.8배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6대(2000년)부터 종교인 비율은 점점 늘어 18대(2008년)에는 82.6%까지 증가했으나, 불교인은 오히려 17대(2004년)에 34명(11.4%)까지 급격히 줄었다가 18대에 56명(18.7%)으로 다시 증가하여 겨우 숨을 돌리는 정도이다. 불교인 대비 기독교인(개신교+천주교) 증가 역시 16대에 4.1배, 17대에 5.1배로 최대치를 기록하더니 18대에 이르러 3.4배로 감소세로 돌아섰으나 아직 국민 평균 종교인 비율과는 차이가 크다.
한마디로 불교는 정치·사회적으로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경종에 대해 불교지도자 누구 하나 심각성을 알리고 대책을 마련하고자 노력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렇게 사회에 초연하거나 무관한 모습이 불교의 원래 속성인 양 자포자기하는 태도이다. 물론 교리 해석을 포함한 불교 내부의 근본적인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리 자체보다 역사적 배경에 대한 몰이해와 현재 불교지도자들의 의식 부족에서 문제점을 찾아야 한다. 다른 종교에 비해 사회성이 현격히 떨어지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이제 더 이상 불교 교리 자체가 사회성이 취약하다는 근거 없는 논리로 불교를 왜곡, 스스로 패배감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동남아와 티베트의 활발한 참여불교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3) 2등 국민 대접받는 불자들
“다종교 국가 중 한국만큼 비기독교인으로 사는 데 불편을 느끼는 나라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힘 숭배’의 종교인 기독교가 모든 국민이 공유해야 할 공공 영역마저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공격성과 패거리 문화 때문일 것이다. 종교의 오염과 무례, 더 나아가 종교차별과 종교폭력 등 인권침해까지 감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한국사회를 ‘불안한 동거’라고 표현했던 어느 학자의 말이 실감 난다.
종교의 권력화가 사회문제로 등장한 지 오래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는 헌법 20조가 무색할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공직 신분을 이용한 종교 활동은 공권력의 사적 도용이며,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함께 이용하는 위헌적 행위이다. 일부 몰지각한 개신교인 공직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도시선교 사업을 지원하는 소위 ‘성시화(聖市化) 운동’도 편파적 정보 제공이나 권력 집행에 대한 의혹을 살 만한 대표적인 정교(政敎)유착이며 종교권력화 현상이다.
건국 초기부터 친기독교로 일관한 정책 때문에 지난 수십 년간 불교가 홀대를 받아 온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군승제도 도입(1968년),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1975년), 불교방송 개국(1990년)이 군목(1948년), 크리스마스(1949년), 기독교 방송(1954년)에 비해 각각 20년, 26년, 36년이나 뒤처진 것도 파행적 기독교 우대 정책의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4년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여 물의를 일으키더니, 2005년 청계천 준공식 때도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이기에 먼저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테이프를 끊었다.”라고 자랑하여 일반 시민들은 어리둥절했다. 지난해 8월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된 직후 그가 국립묘지에 이어 가장 먼저 달려간 공식 방문지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실용정부 1백일 동안 불거진 종교편향 사건들이 참여정부 5년간 있었던 종교 문제 발생 건수와 같다고 한다. DNA에 새겨진 장로 대통령의 기독교 색깔이 근본 원인이란다.
현직 목사가 청와대 비서관이란 사실도 일반국민으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촛불집회의 배후를 언급하면서 ‘사탄의 무리’ 운운했던 추부길 목사가 물러나온 다음에도 김진홍 목사의 비서를 역임했던 박영모 목사가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고 하니 이제 목사가 정치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조차 없게 되었다. 최근 국토해양부가 주관하는 수도권 대중교통정보시스템 ‘알고가’에서 작은 교회까지 소개되면서 대형 사찰마저 의도적으로 모조리 빼 버린 사건, 어청수 경찰청장의 전국 ‘경찰복음화’ 대성회 광고 사진 게재, 경기여고 교장의 불교문화재 훼손 등 공직사회의 연이은 반불교적 행위에 불자들은 불안하다.
종교사학 내 종교 강요 문제, 종교사학에서 교직원 채용 시 종교 제한 등도 위헌 소지가 큰 종교차별이자 인권침해다.
공교육 현장에서 아직 성숙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 대해 가해지는 인권침해는 심각하다. 종교가 없거나 다른 게 무슨 죄라고 노예처럼 강제로 설교를 듣고 교리를 배우며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해야 하나. 2004년 6월 헌법에 보장된 종교자유를 위해 ‘예배 선택권’을 달라던 당시 대광고 학생회장 강의석 군 사건에 대해 2007년 10월 1심은 “종교의식 강요로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는 강 군의 손을 들어 주었다.
마치 2004년 헌법재판소가 “흡연권(吸煙權)은 상위의 기본권인 혐연권(嫌煙權)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인정되어야 한다.”라고 밝힌 논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지난 5월 8일 고등법원은 “입학 당시 선서, 고2까지 별다른 의사 표현 없이 참석했으므로 강제 교육이라고 보기 어렵다.”라며 원심을 뒤집었다.
평준화 제도 아래 학교 선택권도 없고, 종교사학일지라도 국고 지원이 중ㆍ고등학교의 경우 각각 82%, 51%가 넘고 재단전입금은 평균 1.8%도 안 되어 실질적으로 공립학교나 마찬가지인 데다, 더 본질적으로는 언제 어디서든지 허용되어야 할 ‘개종의 자유’까지 고려하면, 개인의 기본권보다 학교의 재량권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항소심 판결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 꺼림칙한 것은 법원이 예민한 종교 인권 문제에 세심한 배려 없이 독실한 개신교인 재판장에게 사건을 배정한 사실이다. 더구나 재판장은 대광고를 설립, 운영하고 있는 교단 소속 교회의 장로라고 한다. 뒤로 내통하여 정치적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자신의 종교를 위해 결론은 미리 내려 놓고 궁색한 변명을 찾으려 했을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힘 있는 자는 권력을 동원해 조용히 자기 뜻대로 일을 꾸민다. 촛불집회 소용돌이 속에, 부처님오신날 축제 기간에 슬그머니 내놓은 개신교인 재판장의 판결은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다.
전국적으로 170여 개의 기독교 중ㆍ고등학교에서 15만여 명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예배를 보고 종교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종교 야만국이자 인권 후진국으로는 선진사회 진입이 불가능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의 교사 임용을 특정 종교인으로 제한하는 것은 차별이므로 시정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기독교 학교들이 끄떡도 하지 않는 현실에서 사회통합은 꿈꿀 수 없다.
‘기독교공화국’이란 비난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종교자유와 정교분리의 헌법 정신을 지켜내려는 불자들의 의식화와 단호한 결단 없이는 2등 국민 대접을 면할 길은 없어 보인다.
3. 절실한 불자 의식 변화
1) 출가승단의 문제
우선 승려 개개인의 수행자 또는 지도자로서 자질 문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사판승 중의 일부는 출가의 동기도 불확실하며 수행도 하지 않고 전문성도 부족하면서 너무 많은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자질과 의식이 부족하다 보니 출가 정신은 실종되고 도덕적 해이로 말미암아 현실과 부딪치는 접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켜 전체 승가의 권위와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
사설 사암(寺庵)은 날로 증가하여 개별 생존 시대가 되어 버렸고, 말사 주지 인사 시 금품 수수, 국고보조금 횡령 등 각종 낯 뜨거운 부정과 비리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대중공의의 전통은 사라지고 파벌과 금권이 지배하고 있으니 교단의 뿌리가 흔들린다는 우려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출가자에게 재가자보다 욕심 없고 청정하며 자비롭고 참을성 있기를 바라는 소박한 기대마저 접을 수는 없다. 반사회적 행위로 불교계를 먹칠하는 승려는 소수라며 항변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지만, 종교계나 교육계에 대해서는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소수 비리라도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편 모든 권한과 의무가 출가 승단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과도한 업무와 비전문성에 따른 운영의 부실화, 그리고 재물을 직접 다루는 데서 오는 출가승의 세속화와 타락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마련이다.
승려 대부분이 본업인 ‘수행과 교화’는 휴업 또는 태만인 채 재정ㆍ인사ㆍ행정이나 건물ㆍ산림ㆍ문화재 등의 관리, 그리고 각종 의식 및 재(齋)를 주관하는 일로 많은 출가 인력이 소모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재산 관리자’ 또는 ‘영혼 관리자’로 전락하지는 않았는지, 재가 지도자나 지식인 또는 사회여론 주도층의 참여 봉쇄나 관리 부실로 방관과 이탈을 방치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작은 것을 챙기고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교단 차원의 승풍 진작과 개혁 의지의 상실 또한 중병을 방치하게 된 큰 요인 중의 하나이다. 조계종은 1994년 개혁과 1998년 사태 이후 승려교육ㆍ종단안정ㆍ사회참여ㆍ신도조직 정비 등 여러 측면에서 나아진 점이 분명히 있으나, 오히려 그 조그만 성과에 자족하며 안주해 온 업을 이제 받고 있지 않나 싶다. 게다가 내부 문제에 발목이 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사이 사회적 의제나 갈등 해소에 대한 불교적 대안 제시 및 선도적 통합 능력의 부재로 말미암아 국민은 물론 불자들에게마저 신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재가불자의 문제
불교가 인류의 가장 높은 가르침이란 자부심은 그것이 어떻게 이 사회에 적용되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드러날 것이다. 또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가르침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의 여부는 그것이 불자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지나치게 기복적(祈福的)이고 사회성이 부족하다. 많은 불자가 자기 자신이나 기껏해야 자기 가족의 복을 구하는 일에만 매달릴 뿐, 이웃이나 사회의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다. 사회성, 즉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업중생(共業衆生)의 개념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얘기다. 물론 기복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하더라도 점차 더 큰 ‘나’인 ‘사회’에 대한 보살핌으로 의식이 진화하지 않는다면 저차원의 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한 개인의 행복은 그 사람이 몸담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병폐가 남아 있는 한 지켜지지 않는 법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복 행위나 수행만으로는 끝까지 개인의 행복이나 평안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는 무관할 것 같은 교단 또는 사회의 문제들이 결국 그 개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고 산다. 모든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라는 자각이 바로 불교의 연기 세계를 눈뜸이요 대승 보살의 밑거름 아닌가.
대승불교 최고의 실천 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첫 번째인 보시에도 인색하다. 재물ㆍ지식ㆍ시간 등을 이웃을 위해, 불교를 위해, 사회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불자들의 일차적인 의무이자 보살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보시금이 모든 분야에서 대체로 기독교의 10분의 1 수준이라는 사실은 나눔의 문화가 정착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사찰이나 스님들이 재정 문제를 십시일반 보시로 해결하고자 시종일관 포교와 교육에 열중하기보다 주로 하드웨어적인 건축 불사(佛事)나 천도재 등 각종 영혼 관리비 또는 입장료 등 비교적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다 보니 신도들의 보시 행태에 대해 교육하고 지도하는 데 소홀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개선하는 데 앞장서야 할 재가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다.
보시 문화가 척박한 것은 재(財)보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생명나눔이나 봉사활동 등 사회적 고통 분담 전반에 우리 불자들의 나눔 정신이 부족한 것은 종교인으로서 치명적 결함이 아닐 수 없다.
불교가 사회적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출가 지도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자들의 99.8% 이상을 차지하는 재가신도들, 그중에서도 특히 재가불교 지도자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자들의 낮은 의식 수준도 우리 교단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자들의 사고와 일상적인 삶은 대체로 불교적 가르침과 관련성이 적거나 아예 반대인 경우마저 있다는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인의식이 부족하고 ‘종교 따로 삶 따로, 가르침 따로 행 따로’이다. 따라서 한국불교가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불자들이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으며,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재가 교육이 불교의 이상 구현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종단 발전을 위한 기본 토양이 되며,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이고 가장 핵심적이며 최우선 과제라는 문제의식 없이는 불교 발전과 사회참여는 힘겨울 수밖에 없다. 매사에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그렇다고 견고한 출가승 벽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생산적이기보다 소모적일 가능성이 크다.
재가불자들이 승가의 인식전환과 종단의 실천의지 부족만을 탓하고 있을 만큼 한국불교는 여유가 없다. 경우에 따라 재가불교 운동이 출가 승단에 새로운 자극제가 되고 건전한 경쟁과 협력을 유도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훈련하는 평생교육 체제를 구축하지 않고는 불교의 희망을 말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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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불교평론에서 퍼온 글인데 너무 길어서 두편으로 올립니다...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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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