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기 견학 및 47회 숲 문화 기행】
-18기 견학 및 46회 숲 문화 기행을 아래 와 같이 실시합니다. 자리 여분이 있습니다. 선배 기수나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기행 코스가 조금 변경하여 소쇄원-가사문학관-환벽당-식영정,-서하당을 포함 시켰습니다.
1. 일시 : 2010년11월6일(토)~7일(일) 1박2일
1).상세 일정(11월6일(일))
-07:00-서면영광도서에서“뉴삼성고속관광”출발(기사, 이탁기:010-6577-0080)
-10:00-쇄원 도착 (061-382-1071) :입장료 개인 1,000원
-10:00~12:00-소쇄원-한국가사문학관-환벽당,-서하당,-식영정 돌아 봄(총무님은 해설사 부탁요)(입장료소쇄원 1000,가사문학관 10,000)
-12:00~12:30분-점심(점심값 7,000원 예상)
-12:30~14:00-함평 국화 제전 장 도착
-14:00~16:00-국화 제전 관람 (총무님은 해설사 예약 부탁 요)(입장료 7,000원)
-16:00~17:00-해남 이동
-17:00- 해남 도착
-17:30~18:30-저녁 식사(1박 2식에 1인당 25,000원:4~5인 숙)
-18:30-자유시간
2).11월7일(일)
-06:00-기상
-06:00~07:30-대흥사 및 천연기념물 벚나무 돌아 봄
-07:30~08:00-아침
-08:00-출발
-09:00-완도 수목원 도착
-09:00~10:30-완도수목원 견학(입장료 2,000원)(061-552-1541)
-10:30~11:00-보길도 선착장 도착(11:10분 출발)
-11:10:00-배 승선(왕복 9,200원)
-12:00-보길도 도착
-12:00~12:30 -점심
-12:30-15:00-부용동 원림 견학(입장료 1,000)(010-3756-0406황성일 해설가)(061-555-5559, 550-6610)
-15:20-보길도 출발(배 출발 시간)
-22:00 -부산 도착 예정
*부산-소쇄원-한국가사문학관-환벽당-식영정-함편국화대전-해남(1박) 대흥사-천년기념물 벚나무-완도수목원-보길도-부산. 일정이 아주 타이트 합니다. 출발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일정대로 갈 수 있습니다.
*배삯은 개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18기 외 다른 참가자는 1인당 총 경비는 100,000원입니다.
【 워크숍 안내】
1.일시 : 2010년10월 29일(금) 18:30~20:30
2.장소 : 한국원예복지협회 강의실(아래 약도 참고)
3.주제 : 한국의 명원 『소쇄원의 원림 치유에 대한 고찰』
4.강사 : 윤철호
5.참가비 :10,000원(저녁식사비 및 뒷풀이 경비)
【 다시 보는 소쇄원-원예치료와 원림치유로 접근하면서-】
한국적 원예치료란 무엇인가? 한국의 산림은 한국의 국민에게 치료적인 측면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원예치료가 미국에서 발달하였고, 산림치유가 독일에서 비롯 되었는 데, 미국의 원예치료는 어떤 것이고, 독일의 산림치유의 과학적 원류는 어디에 두고 있는가?
숲 해설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데, 해설이 학문적으로 어떤 근거를 가지고 설명해야하는가?
많은 혼란 속에서 원예를 대를 이어 전공하고 원예치료를 학문적으로 가르친지 10여년을 전 후하여 우리의 자연 치유의 정체성을 연구하기 위한 작업으로 올해는 소쇄원을 주목하게 되었다.
<조선 선비의 살해사건 1,2권><똑바로 살아라><유배지에서 쓴 아빠의 편지>,<시와 그림으로 수놓은 소쇄원 48경><소쇄원사람들><소쇄원의 역사와 인문활동 연구><소쇄원><세종의 똥지게와 링컨의 꽃사랑>의 9권의 책을 두 세번 읽고 그 외 논문, 인테넷 등을 3달 정도 뒤지고 소쇄원을 2번 정도 방문하며 소쇄원 원림의 역사의 바다에 첨벙 빠져 보았다.
결론은 소쇄원이란 원림을 조경, 건축에서 소쇄원을 밝혀 낸다는 것이 과연 소쇄원 전부인가? 이는 눈에 보이는 현재의 소쇄원을 나열하는 정도 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
500년의 역사를 가진 소쇄원은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비운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소쇄원가의 수많은 고통과 죽음과 슬픔과 불행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라고 있다. 이 비운의 역사를 밝혀내어 한국의 원림치유의 본류를 찾고자 한다.
성리학과 사림학파의 희생, 부부와 자녀의 죽음에 대한 비애, 권모와 술수로 억울한 고문에 의한 자녀와 형제의 죽음, 임진전란이 준 가족의 죽음과 임란에 의한 20년간의 포로생활에서 엄마와 아들 딸의 고통, 정유재란으로 가족들의 생 이별과 소새원의 폐허, 조상의 명예를 회복하고자하는 자식들의 처절한 몸부림, 이모든 것이 내가 파헤치고자 한 소쇄원의 참된 모습이었다.
수많은 연구가들의 결론은 양산보와 그 시대의 선비들이 낙향하여 <주자>를 흠모하고 도잠(도연명)이가 그리던 이상의 세계를 양산보가 만들어가는 데 촛점을 맞추어 연구하였는데 이 또한 틀린 것은 아니나, 내가 연구한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사건들을 헤쳐 나가는 지혜와 힘은 소쇄원가의 처절한 원림 치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굳게 믿고 싶다.
양산보는 일찍 어머니를 여인다. 집안에 장남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 서울에 그 시대의 성리학의 최고의 스승인 조광조를 만나서 현량과라는 과거에 말석으로 합격하나 임금님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벼슬에 나가지 못한다. 그의 첫 번째 좌절과 시련이 아니었겠는가?
곧 이어 조선 500년 역사에 가장 개혁적인 인물 조광조는 “위훈삭제”라는 비장한 카드로 나라를 객혁하고자 하나 훈구파의 모함에 양산보의 고향 가까이 능주(화순)로 11월에 귀양와서 12월에 사약을 받고 죽는 현장에 양산보가 수발을 하며 같이 있었다. 이듬해 봄에 지금의 용인으로 운구하여 장사를 치르고 창평으로 돌아와 소쇄원의 터를 닦고 명문가인 김윤제의 누이와 결혼을 하지만 후사 없이 그의 나이25살 때 부인이 죽는다, 첫 아들 양자홍도 잃는다.
사화에 얽혀 스승의 죽음, 부인의 죽음 ,큰아들의 죽음은 보통사람은 상상하지 못하는 큰 불행임이 분명하다. 이 불행의 심리를 파헤치는 것이 초기 소쇄원 건립의 단초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우리가 소쇄원을 유토피아 처럼 생각하는 것은 사돈 김인후가 쓴 <48영>에 초점을 맞추기에 모든 이들의 생각이 그렇게 쏠리는 것 같다. 김인후는 소쇄원을 가장 많이 찾아들며, 둘째 아들 양자징의 스승이자 장인이다. 그러나 김인후 역시 첫딸과 말녀를 일찍 잃는 비운을 맞는다. 그 첫 딸이 양산보의 둘째 아들 양자징의 부인이다. 사돈이자 친구인 김인후가 그냥 뜻이 같고, 같은 선비이기에 찾는 것이 아니라, 첫 딸의 죽음에서 사돈이자 양산보와의 인간적인 슬픔을 함께 나누지 않았겠는가? 둘째 아들 양자징은 김인후의 수제자이고, 스승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김인후와 필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김인후가 그의 제자이면서 사위인 양자징을 볼 때마다 어떤 마음이었겠는가? 양자징은 다시 재혼한다. 총 3남 3녀를 두지만 양천운만 남기고 정여립사건에 두아들이 고문에 맞아 죽고, 나머지 자년들은 임란에 희생된다. 그러나 영천운은 소쇄원을 재 건립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소새원이란 원림의 치유적 역할이 없어서도 가능 했을까?
양산보 때에만 20년간 소쇄원을 만들어 나간다. 자기의 경제력보다는 처가의 김윤제 외가인 송순의 힘이 컷을 것으로 보인다. 소쇄원 이웃 김윤제의 환벽당, 김성원의 식영정 송순의 면앙정이 연이어 만들어지고 호남의 명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고경명, 기대승, 임억령 송순, 정철, 김성원, 김윤제 등이 학연, 지연, 혈연으로 뒤엉켜 소쇄원을 더나들면서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가되고 백미를 만들어 내고, 소새원 건립에 많은 영향을 줄 뿐만 아니고 호남의 지도자적인 선비로서 자리 매김 해 나간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평학구당>이 세워져 호남의 많은 인재를 200년동안 길러내는 교육의 전당 한가운데에도 소새원가가 중심적 역할을 한다
동방 5현중에 수현으로 숭상하는 김굉필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소학에 밝은 인물로, 본인이 소학 동자로 불렀다. 그 시대의 학문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소학>을 조광조에게 뼈속 깊이 가르쳤고, 그 학문이 양산보에게 이어져 호남의 학문과 호남 사림파의 초석은 물론이거니와, 소쇄원가를 효심이 가득한 집안으로 만들어 나간다.
<소학>이란 학문적 사상이 없었으면 오늘날 소쇄원이 우리나라 최고의 명원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이조 500년의 역사에서 스승이 제자 때문에 부관참시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스승 때문에 사약을 받는 올곧은 선비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김종필,김일손,김굉필,정여창,이언적 조광조 등 사림학파의 본류들이다.
오늘날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중요한 반성의 기회도 소쇄원을 통해 깨닥고 있다.
머지 않아 소쇄원을 다시 찾는다면, 500년간 소쇄원 속에서 뒤엉킨 선현들의 고통과울분, 불운과 수많은 명사들의 충과 효와 자연 사랑에 대한 외침을, 그리고 의를 함께하면서 살다간 그 분들의 영혼에 간절히 기도드리고 싶다.
차근히 인물 중심으로 소쇄원을 풀어 보고자 한다. 잘 따라 오시면서 함께 이 가을에 소쇄의 높은 원림의 숲 속을 힘차게 걸어 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0년 10월13일 1차 정리를 끝내고
소새원에서 한국 최초의 원예치료와 원림(숲) 치유를 간절히 찾아가면서---
여초 윤철호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