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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바위 빙폭에서 선등 중인 이용대 교장.일흔 셋 고령에도 현역 클라이머로 활동 중인 그는 지난 2월 11일 토왕빙폭을 완등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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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나이 일흔 셋이면 사회에선 한참 뒷전으로 물러나 앉고 손자손녀나 보며 집에서 지낼 시기다. 그런 고령의 나이인 이용대(李容大)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이 여의도 63빌딩(지상 높이 249m)보다 훨씬 높은 국내 최대 얼음 폭포인 설악산 토왕성빙폭을 올랐다.
토왕성폭포(토왕폭)는 설악산 소공원으로 들어서노라면 도로 왼쪽 쌍천 너머 골짜기 깊숙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기둥처럼 신비롭게 보이는 폭포다. 하단 80m, 중단 100m, 상단 130m 3단으로 이루어진 이 폭포는 오랜 세월 클라이머들에게 도전의 장이었다. 1977년 크로니산악회 박영배씨 일행에 의해 첫 등반이 이룩된 이후 단독등반, 속도등반, 업다운(up-down) 등반, 랑데부등반 등 매년 겨울이면 놀랍거나 아슬아슬한 기록이 나왔고, 그런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인명사고도 빈번했다.
이렇게 클라이머들에게 도전의 장이자 악명 높은 토왕성 빙폭을 일흔 셋 노령의 이용대씨가 동료 세 사람과 함께 4시간 20분 만에 해냈다.
“오랜 세월 후배들에게 진 빚 갚은 기분이에요”
이용대 교장은 2월 11일 새벽 토왕골로 들어서 오전 10시40분 윤재학(60), 이내응(54), 조구일(43) 세 후배와 함께 토왕폭 등반을 시작했다. 이미 한 팀이 하단을 등반하고 있었으나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단도 만만찮은 빙폭이었다. 수직에 가까운 80m 높이였다. 30m쯤 올랐을까. 이내응씨는 2년 전 얘기를 꺼냈다.
이씨는 이태 전 토왕폭 등반중 하단에서 추락해 발등, 발뒤꿈치, 고관절, 척추 등 그야말로 온몸이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부러지고 망가졌다. 6개월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할 때에도 주치의가 정상적인 생활이 쉽지 않으리라 단언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는 피눈물 나는 고통을 참아내며 재활에 성공, 이날 등반에 동참했던 것이다.
이용대씨는 “코오롱등산학교 제자인 이내응씨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토왕폭에 재도전한다는 사실이 대견스럽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그런 사고가 일어난 토왕폭을 오른다는 게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고 돌이킨다. 더욱이 등반 며칠 전 열린 등반대회로 빙벽 곳곳에 피켈로 찍은 자국과 얼음이 깨져나간 곳이 많았고, 3분의 2쯤 올랐을 때는 얼음이 가로로 균열이 가 있어 붕괴 위험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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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이용대 교장(왼쪽)이 상단 등반에 앞서 이내응씨와 기념촬영을 했다. 이내응씨 역시 인간승리를 일구어낸 클라이머다.(우)토왕폭 정수리에서 하강하는 이용대 교장. 이 교장은 등반 직후 여든까지 매년 한 차례씩 등반하겠다는 자신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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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에 이어 완경사 빙폭인 중단부를 지나 상단부에 다가섰을 때는 두 팀이 등반 중이었다. 어설픈 실력에 앞장선 이들마다 떨어져 분위기는 정말 우울했다. 이용대 교장이 등반에 나서 한참 신경을 곤두섰을 때에는 앞장선 다른 팀 클라이머가 손에 쥐가 나 추락하면서 그의 로프가 출렁이며 목을 휘감는 바람에 균형이 깨지기도 하고, 다른 팀이 떨어뜨린 얼음조각이 콧등을 내리치는가 하면 회오리바람이 후려치는 바람에 균형을 잃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300여m 높이의 빙폭을 아이젠 앞발로 찍은 채로 버티고, 또 양팔을 휘둘러 박은 피켈을 잡아당기면서 오른다는 게 젊은 사람도 아닌 70대 노령 클라이머에게 쉬운 일일 순 없었다.
그러나 이용대 교장은 노익장의 노련함을 과시하며 침착하게 로프를 거둬내고 한 발 한 발 빙벽을 올라 수직고 300m가 넘는 토왕폭 정수리에 올라섰다. 뒤돌아서는 순간 토왕골이 내려다보이면서 속이 확 터졌다. 오랜 세월 후배들에게 진 빚을 떨어냈다는 데서 오는 후련함이었다.
“쑥스러워요. 주변에서 70대에 토왕폭을 오른 건 내가 처음일 거라 말하지만 내가 뭐 그런 기록 때문에 등반한 건 아니에요. 단지 오랜 세월 동안 후배들에게 진 빚을 떨어내기 위해서였어요.”
40년이 넘는 등반경력을 지닌 이용대 교장에게는 여러 차례 아픔이 있었다. 대학산악부 출신 클라이머로 명성을 날리던 막내 동생은 1973년 도봉산 선인봉 박쥐길 등반 중 추락사하고, 골프에 빠져지내다 느닷없이 암릉 등반 재미에 빠져든 둘째 동생은 2004년 북한산 병풍암 암릉에서 추락했다.
친동생들의 사고 이상 그의 가슴을 아리게 한 것이 1977년 2월 일어난 후배들의 화채릉 사고였다. 당시 동양산악회 후배 3명은 이용대 교장의 권유를 받고 토왕폭 초등 길에 나섰다. 이 교장이 지원한 빙벽장비가 당시로선 최신 제품이었으나, 경험이 많지 않은 후배들은 토왕폭을 마주하는 순간 위축당하고 화채릉~대청봉 종주산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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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왕빙폭 등반을 해낸 클라이머들. 왼쪽에서 두 번째인 윤재학씨는 위암을 등반으로 극복해낸 60세 클라이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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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공부하는 70대 현역 클라이머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산장에 도착해 무거운 빙벽장비를 맡겨놓은 다음 화채릉에 올라설 때까지 좋기만 하던 날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변하더니 하늘에서는 폭설이 퍼부었다.
첫날 비박지는 토왕골 상단에 깔때기처럼 사면이 형성된 함지덕 상단부였다. 세 후배는 그곳에서 눈을 그대로 맞으며 견디다 못해 한 명 한 명 죽어갔다. 조난 신고를 받고 서울에서 달려간 이용대 교장이 허리까지 빠져드는 눈을 헤치며 사고현장을 찾았을 때 후배 한 명은 쪼그린 채 얼어붙어 있었고, 또 한 명은 능선 너머, 그리고 여자 후배 한 명은 설악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토왕폭포 상단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도봉산 선인봉에서 추락사한 동생의 유품을 일일이 거두었어요. 화채릉에선 처절하게 얼어죽어간 후배들을 집어넣은 침낭을 끌고 내려왔어요. 얼마나 추웠으면 성경책도 태우고, 스패츠까지 태웠을까 싶어요. 그래서 제가 선인봉도 거의 안 가고 토왕골은 후배들 생각이 날까 늘 머뭇거렸던 거예요. 전혀 토왕폭을 찾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찾은 1994년엔 상단까지 등반했어요. 그런데 정수리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점에서 환청이 들리는 거예요. 그 친구들이 두런두런대는 거예요. 더 이상 오를 수가 없더군요.”
1월 27일 후배들과 함께 국내 최고 난이도의 빙폭으로 알려진 소승폭포에 오른 이용대 교장은 하루 앞서 등반한 실버 팀과 함께 토왕폭 등반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실버 팀 역시 60대 산악인 8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대한산악연맹 2급 강사 평가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어요. 평가 때문에 1주일간 산에서 지내다 집에 돌아갔는데 토왕폭 등반하겠다고 그 날로 집을 나설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이튿날 등반하게 된 거예요. 실버 팀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봄부터 여름 내, 그리고 가을 내 인공빙벽에서 훈련을 했으니까요. 젊은 날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룬 거예요. 물론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완등해낸 사람들도 많아요. 거의 매주 인공빙벽에서 훈련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열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이용대 교장과 토왕폭과의 인연은 오래전 일이다. 1975년부터 토왕폭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 교장은 1975년 1월에는 후배들과 함께 당시 일본 최고의 클라이머들로 조직된 산학동지회(山學同志會)의 오미야 모토무(大宮求·자누 일본 초등자)와 가와가미 기오미(河上淸美·자누 일본 초등자)에게 토왕폭 합동등반 제의를 받고 안내할 기회가 있었다.
“토왕폭으로 들어서려다 생각해보니까 잘못하면 일본 사람들에게 초등 기회를 넘겨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핑계를 대고 방향을 잦은바윗골로 틀었죠. 그 후에도 몇 차례 들어섰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돌아서곤 했던 거예요. 지난해 죽은 후배들과 자일파트너였던 후배 윤철상이 토왕폭에 올랐어요. 함께 등반했던 사람이 깜짝 놀랐다 하더군요. 갑자기 배낭에서 꽃다발과 북어 한 마리를 꺼내 내려놓더니 함지덕을 바라보면서 펑펑 울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저뿐 아니라 당시 후배들과 인연을 맺고 있던 선후배들은 모두 그런 심정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을 거예요.”
이용대 교장은 공부하는 70대 현역 클라이머로 산악계에 잘 알려져 있다. 1968년 동양산악회 창립 후 인수봉 동양길 개척에 참가하고, 1975년에는 궁형길 개척을 주도했다. 등산전문지에 일반등산개론을 비롯해 등반기술의 이론과 실기 등 수많은 글을 지금도 연재하고 있는 그는 특히 조난대책연구에 관해서는 국내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배낭꾸리기에서부터 해외 트레킹에 이르기까지 기초 등산에 관해 다룬 <등산교실>(해냄출판사) 역시 이용대 교장의 책이다. 요즘은 등반용어를 총정리한 책을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게 산악문화출판에 이바지해온 그는 1996년 한국산악회로부터 <한국산악회 50년사> 편찬 공로상을 받고, 2001년 제3회 대한민국 산악상 교육부문 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국내 최초로 세계 등반사를 집대성한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마운틴북스)를 펴내 지난해 대한민국 산악상 수상식에서 산악문화상을 받았다.
이 교장의 등반 스타일은 가능한 한 힘을 덜 들이는 것이다. 40년 가까이 52kg의 체중을 유지해온 그는 아이스바일을 타격할 때 체력 소모를 적게 하기 위해 살짝 찍거나 혹은 얼음턱에 피크를 거는 정도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오른다.
“나는 힘이 없으니까 꾀를 많이 짜내야 해요. 아무튼 이번에 토왕폭을 등반해보니까 30대 때만큼 몸이 가벼운 것 같아요. 그래서 목표를 세웠어요.”
1986년 개교 이후 대표강사에 이어 교장으로서 코오롱등산학교를 이끌고 있는 이용대 교장은 “이제 부담을 떨쳐냈다”며, “앞으론 매년 겨울 토왕폭에서 새로운 기록을 경신해내고 싶다”고 다짐했다. 취재 차 이 교장의 방학동 집을 찾았을 때 책장 옆에는 1970년대 초반 제작된 국산 모래내금강 아이젠과 일제 다니 아이젠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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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단 빙폭 등반 도중 테라스에서 동료의 등반을 지켜보고 있는 이용대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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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등반해 팔순잔치도 토왕폭에서 할까 해요”
“사과 궤짝 밑에 놔두었더니 녹이 쓸더군요. 그래서 싹 닦아내고 기름칠 해놓은 거예요. 이걸 보면 40년 산(山)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요. 그 동안 유명을 달리한 산꾼들 얼굴도 떠오르고요. 후배들에 대한 부채를 떨쳐버렸으니까 이제부턴 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어요. 매년 한 번씩만 오를 거예요. 그렇게 일곱 번 더 올라 팔순 잔치를 토왕폭에서 할까 해요.”
그런데 이용대 교장이 등반한 이튿날 토왕폭은 상단 130m 빙폭이 무너져 내리면서 하단까지 박살이 났다.
“이제 토왕폭은 마음 먹고 노력만 조금 하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빙벽이 됐어요. 빙벽 장비가 그만큼 발달했죠. 그렇지만 누구나 오를 수 있는 빙벽은 아닌 것도 같아요. 우리가 오를 때 빙폭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면 말이에요. 정말 끔찍해요. 하하.”
/ 글 한필석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