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모름지기 경책해서 닦으나 처음과 끝이 相이 없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교리가 모두 은밀하고 행한 과보가 함께 그윽함을 갖추어서, 입으로 외우는 이는 소털과 같이 많으나 마음으로 통하는 이는 기린의 뿔과 같이 귀하게 되는데 이르른 것이다. 혹은 명자(名字)와 차별상에 끄달려 事(현상)의 뜻에 집착하여 근본 뜻을 어기며, 혹은 다만 一眞(하나의 참다움)이라 하여 근원(源:定)만 바라보아서 한쪽(慧:用)은 어두우니 그 나머지의 자기 주장(胸談臆注)은 족히 논할 것도 없도다. 항하사 같은 진귀한 보배와 하루 세 번 목숨을 바쳐 보시하는 것도 그 비유가 미치지 못한다 하거늘 어찌 부질없는 짓이랴. 또 천친과 무착은 미륵 보살을 스승으로 하셨거늘 (규봉 찬요에 미륵보살 80송과 무착, 천친론 등이 포함됨) 후학은 무엇을 의심하여 혹 첨부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서술한 바는 異端을 공박하지 않으니 疏는 論文(천친, 무착의 뜻을 끌어옴)이라. 우유는 성안의 것(가짜가 아님)이 아니어야 한다. 纂要한 이름의 뜻과 경의 제목은 다음에 해석하게 되므로 번거로이 미리 말하지 않겠다.
대각 세존 석가모니께서
반야 三空句를 능히 열어주시어
발기하고 유통한 모든 스승들께 머리 조아리노니
서술한 것들이 모든 근기에 계합하도록 그윽이 도우소서.
청봉착어:먼저 생멸의 인연(12연기)과 고집멸도(4성제)를 설해 아공을 깨닫게 하여 아집을 여의었으나, 일체가 공함을 깨닫지 못한 것을 세존께서 이 경을 설함으로써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공하여 청정함을 요달케 하였다.
그러나 통탄스러운 것은 입으로 외우는 이는 많아도 오묘한 뜻을 깨달아 증득하는 이는 귀하다. 따라서 정(定)에만 치우쳐서는 혜(慧)가 어두우므로 정혜쌍수해야 한다. 이 찬요는 미륵보살과 무착, 천친론등을 끌어 포함한 것이므로 거짓됨이 없다한 것이다.
圭峰의 科段解釋
將釋此經하매 未入文前에 懸?義門하여 略開四段하리니
第一은 辯敎因緣이요 第二는 明經宗體요 第三은 分別處會요 第四는 釋通文義니라 初中에 有二니
初는 摠論諸敎니 謂酬因酬請하여 顯理度生也니 若據佛本意則唯爲一大事因緣故로 出現於世하여 欲令衆生으로 開佛知見等이니라 後는 別顯此經이니 於中에 有五니
一은 爲對除我法二執故니 由此二執하여 起煩惱所知二障하나니 由煩惱障이 障心하여 心不解脫하여 造業受生하니 輪廻五道하고 由所知障은 障慧하여 慧不解脫하여 不了自心하고 不達諸法性相하니 縱出三界라도 亦滯二乘하여 不得成佛이니 故名障也니라 二執은 若除하면 二障이 隨斷이니 爲除二執하시어 故說此經이니라
二는 爲遮斷種現二疑故이니 爲遮未起種子之疑하고 斷現起現行之疑이니 卽經中에 答所問已하고 便?迹하여 節節斷疑이니 乃至經終에 二十七段이니라
三은 爲轉滅輕重二業故이니 轉重業하여 令輕受하고 滅輕業하여 令不受니라
四는 爲顯示福慧二因故이니 佛成正覺하시어 未說般若之前에 衆生이 由無妙慧하여 施等住相하여 皆成有漏이며 或滯二乘이니 故談般若하니 顯示妙慧로 爲法身因하고 五度로 爲應身因하니라 若無般若면 卽施等五가 非波羅蜜이니 不名佛因이니라 故須福慧二嚴하여서 方成兩足尊也니라
五는 爲發明眞應二果故이니 謂未聞般若之前에는 但言色相이 是佛하고 不知應化가 唯眞之影하여 不如實見眞身應身이니 故此發明二果하여 令知由前二因證得이니라
第二明經種體中에 二이니
初에 宗者는 統論佛敎하면 因緣爲宗이니 別顯此經이면 則實相般若와 觀照般若가 不一不二로 以爲其宗이니라 以卽理之智로 觀照諸相이니 故如金剛이 能斷一切요 卽智之理가 是爲實相이니 故如金剛이 堅牢難壞이니 萬行之中에 一一不得昧此하여 故로 合之하야 以爲經宗이니라
二에 體者는 文字般若가 卽是經體이고 文字는 卽含聲名句文이며 文字性空을 卽是般若니라 無別文字之體이니 故皆含攝하여 理無不盡하여 統爲敎體이니라
第三分別處會中에 二니
初는 總明佛說大部處會中에 二니 初는 六百卷文은 四處十六會說이니 一은 王舍城 鷲峯山에서 七會이니 山中에서 四會며 山頂에서 三會요 二는 給孤獨園에서 七會요 三은 他化天宮摩尼寶藏殿에서 一會요 四는 王舍城竹林園白鷺池側에서 一會며 後로 此經은 卽第二處第九會이니 第五百七十七卷이라 後는 別明傳譯此經時主이니 前後六譯이라 一은 後秦羅什이요 二는 後魏菩提流支가 兼譯天親論三卷이요 三은 陳朝眞諦는 兼譯金剛仙論과 及本記四卷이요 四는 隋朝?多가 兼譯無着論兩卷이요 五는 唐初玄裝과 又日照三藏이 譯功德施論二卷也요 六은 大周義淨이 幷再譯天親論三卷이니 上六人은 皆三藏이니라
今所傳者는 卽羅什이 弘始四年에 於長安草堂寺에서 所譯也니라 天竺에 有無着菩薩이 入日光定하여 上昇兜率하여 親詣彌勒하고 ?受八十行偈하니라 又將此偈하시고 轉授天親하시니 天親은 作長行解釋하여 成三卷論하사 約斷疑執以釋시니라無着은 又別造兩卷論하여 約顯行位以釋시니라
今科經은 唯約天親釋義이니 卽兼無着이되며 亦傍求餘論하고 採集諸?하여 題云纂要하니 其在玆焉이니라
第四釋通文義中에 二니 初解題目이라
金剛者는 梵云跋折羅이니 力士所執之杵가 是此寶也라 金中最剛이니 故名金剛하니 帝釋이 有之요 薄福者는 難見이니라 極堅極利로 喩般若焉이니 無物可能壞之로되 以能碎壞萬物이니라 涅槃經에 云하되 譬如金剛을 無能壞者로되 而能碎壞一切諸物하니無着은 云하되 金剛은 難壞라하며 又云하되 能斷이라하며 又云하되 金剛者는 細牢故니 細者는 智因故요 牢者는 不可壞故로 皆以堅喩般若體요 利喩般若用이니라 又眞諦記에 說六種金剛하니 一은 靑色으로 能銷災厄이니 喩般若가 能除業障이요 二는 黃色으로 隨人所須이니 喩無漏功德이요 三은 赤色은 對日出火이니 慧對本覺하여 出無生智火요 四는 白色으로 能淸濁水이니 般若가 能淸凝濁이요 五는 空色으로 令人空中行坐이니 慧破法執하여 住眞空理요 六은 碧色으로 能銷諸毒이니 慧除三毒이라 傍兼은 可矣며 非堅利之本喩이나 般若者는 正飜云慧이니 卽照五蘊空하여 相應本覺之慧가 是也니라 若約學者의 從淺至深하여 言之하면 則攝聞思修三慧하는 摠爲般若니라 故로無着이 云하되 能斷者로 般若波羅蜜中聞思修요 所斷은 如金剛이 斷處而斷故라하며 又云하되 細者는 智因故者라하니 智因은 卽慧也니라 依智度論하건대 因位를 名般若요 果位를 名智則聞思修를 皆名爲細니 細妙之慧가 佛智之因矣라 般若는 能斷이니 故在因位요 佛果는 無斷이니 轉受智名이라니라 若依大品經하면 若字는 通智慧二義니 故로 智與慧가 名義는 小殊이나 體性은 無別이라하다 波羅蜜者는 此云彼岸到라 應云到彼岸이니 謂離生死此岸하고 度煩惱中流하여 到涅槃彼岸이니라 涅槃은 此云圓寂이며 亦云滅度이니 一切衆生이 卽寂滅相이라 不復更滅이나 但以迷倒로 妄見生死로 名在此岸이나 若悟生死本空하여 元來圓寂하면 名到彼岸이니라 若兼般若?文이면 應云到彼岸慧니라 經者는 梵音으로 修多羅어든 義飜爲契經이니라 契者는 詮表義理하여 契合人心이니 卽契理契機이니 故名契也요 經者는 佛地論에 云하되 能貫能攝으로 故名爲經이니 以佛聖敎로 貫穿所應說義하여 攝持所化生故니라
此?는 本是爲評經者하여 指其科段이니 雖次第科經이나 而不次第釋文하고 但隨難處하여 卽略擧節目而已요 亦不備述義意니라 義意는 悉在傳示者의 口訣이요 不在?中이니 不得但以銷?로 而爲講也이니라 講者는 須從首至末히 次第以深玄義意로 銷釋經文일지니 難處는 卽約?요 易處는 卽直說也이니라
규봉의 과단해석(금강경을 네 과로 나누어 해석함)
장차 이 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本文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뜻으로 펴서 간략히 四段으로 나누어 여나니
첫째는 교의 인연을 말하고 둘째는 경의 종체를 밝힘이요 셋째는 모인 장소를 분별하고 넷째는 글 뜻을 해석하여 통하게 한 것이다.
첫째에 둘이 있으니, 먼저 Ⅰ. 모든 가르침을 모두 논하니 인연에 답하고, 請함에 답해서 이치를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본뜻에 의거한다면 오직 一大事因緣을 위해 세상에 출현하시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주게 함인 것이다.
다음은 Ⅱ. 이 경을 나누어 밝히니 그 중에 5가지가 있으니
1. 我執과 法執(二執)을 없애기 위함이니, 이 두 가지 집착으로 말미암아 煩惱障(번뇌가 여래의 법신을 가림)과 所知障(번뇌가 참 지혜의 발현을 막음)을 일으키니 번뇌장이 마음을 가리기 때문에 마음이 해탈하지 못해서 업을 짓고 생을 받으니 五道(천상, 인간, 아귀, 축생, 지옥)에 윤회하고 所知障은 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에 지혜로 해탈하지 못하여 자기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모든 것의 性相(본성과 현상)을 통달하지 못하니 비록 삼계를 벗어나더라도 또한 二乘(소승)에 머물러서 성불하지 못하므로 가리는 것이라 이름한다. 만약 두 가지 집착(我執, 法執)을 없애면 두 가지 장애가 따라서 끊어지니 二執을 없애기 위하여 이 경을 설함인 것이다.
2. 種子(함장식에 모든 법을 일으킬 수 있는 것)와 現行(종자로부터 모든 것이 나오는 것)의 두 가지 의심을 차단키 위한 까닭이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의심의 종자를 막고 현재 일어난 現行의 의심을 끊는 것을 말함인 것이다. 곧 경 가운데 물은 것은 답하시고 문득 자취를 없애(?) 구절구절 의심을 끊어줌이니 경을 마칠 때까지 二十七가지의 의심을 끊음인 것이다.
3. 가볍고 무거운 두 가지 업을 바꿔 없애기 위함이니 무거운 업을 바꿔 가볍게 받고 가벼운 업을 없애서 받지 않게 함인 것이다.
4. 복과 혜 두 가지 因(과보의 원인)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니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어 반야경을 설하기 전에는 중생이 묘한 지혜가 없으므로 보시 같은 것을 해도 상에 집착하여 모두 有漏(항상 하지 않고 인을 심는 복덕에만 집착)를 이루고 혹은 二乘(소승)에 머무는 까닭에 반야를 설하셨으니 묘혜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법신의 因(원인)을 삼고 五波羅蜜(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로 應身(化身)의 因을 삼으신 것이다. 만약 반야가 없다면 곧 보시 등의 五가지가 바라밀이 되지 못하며 부처가 될 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과 혜 두 가지를 잘 갖춰야 양족존(福慧)을 비로소 성취했다 하는 것이다.
5. 진불과 응신불의 두 부처를 밝히기 위함이니 반야를 듣기 전에는 다만 말하기를 현상(色相)을 부처님이라고 하고 응신, 화신이 오직 진불의 그림자임을 알지 못해서 여실히 진신과 응신을 가려보지 못하므로 이 二果를 밝혀서 앞의 二因(복과 혜)으로 말미암아 증득함을 알게 하신 것이다.
둘째는 경의 宗體를 밝히는 것 가운데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Ⅰ. 宗이란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을 통틀어 논하면 인연법이 근본이 되거니 이 경을 달리 표현하면 實相(理) 반야와 觀照般若(慧:用)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實相의 理와 볼 줄 아는 지혜)으로써 그 근본을 삼는 것이다.
실상(理:體)이 그대로 반야(慧:지혜작용)로써 모든 것들을 관조하는 것이니 이는 금강이 능히 일체를 끊는 것과 같고, 지혜가 곧 실상(理:體)이니 이것이 금강같이 아주 견고해서 깨뜨리기 어려우니 모든 행함(萬行)가운데 하나마다 그것에 어둡지 않게 하기 위하므로 이를 합하여 경의 종을 삼는 것이다.
다음으로 Ⅱ. 體란 것은 문자반야가 곧 이 경의 體(근본)이고 문자는 곧 聲, 名, 句, 文을 포함하며 문자의 성품이 공한 것을 반야라 한다. 별도의 문자의 체(성품)가 없으므로 그것을 다 포함해서 이치가 다하지 않음이 없어서 통틀어 가르침의 체로 삼는 것이다.
셋째는 處會(법회를 연 곳)를 나누어 밝히면 두 가지가 되니 처음에 부처님이 반야대부를 모여서 설하신 곳을 모두 밝히면 둘로써 먼저 Ⅰ. 육백권의 경(반야대부)은 네 곳에서 十六회 설하셨으니 1. 왕사성 취봉산에서 7회와 산중에서 4회며 산 위에서 3회이고 2. 급고독원에서 7회요 3. 타화자재천궁의 마니보장전에서 1회요 4. 왕사성 죽림원 백로 연못가에서 1회이다.
뒤에 이 경은 제2처의 제9회 때이고 제577권이 된다.
다음은 Ⅱ. 이 경은 번역하여 전한 때와 사람을 밝힌 것으로 모두(前後) 여섯 분이 번역했으니
1. 후진국의 구마라집이요 2. 후위국의 보리유지는 천친론 3권과 함께 번역했고 3. 진조의 진제가 금강선론과 이 경 4권을 함께 번역했고 4. 수조의 급다가 무착론 2권을 함께 번역했고 5. 당나라 초에 현장과 일조삼장이 공덕시론 2권을 번역했고 6. 대주국의 의정이 천친론 3권을 겸하여 다시 번역하니 위의 여섯 분은 모두 경, 율, 논에 달통한 자(三藏法師)들 이시다. 지금 전하는 것은 곧 구마라습이 弘始 四年에 장안의 초당사에서 번역한 것이다. 천축에 무착 보살이 있어 일광삼매(日光定)에 들어서 도솔천에 오르시어 미륵 보살을 친견하여 80행의 게송을 받으셨다. 나중에 이 게를 천친에게 전수하였고 천친은 長行(게송을 풀어서 설명)의 해석을 지어서 3권 론으로 만들어 요약하여 의심과 집착하는 것을 끊도록 풀어 주셨다.
무착은 또 따로 두 권의 논을 지어서 간략히 8단계를 들어내어 해석하셨다. 지금의 경을 科目한 것은 오직 天親이 풀이한 뜻을 가지고 요약한 것이므로 곧 無着과 함께 한 것이 되며 또한 여러 논한 것에서도 구했고 모든 ?도 채집한 것이니 제목에 纂要(요긴한 점만 모음)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넷째는 글 뜻을 해석하는 것으로 둘이 있으니
Ⅰ. 제목을 해석한 것이다. 금강이란 범어로 바일라(vaira)이니 力士가 갖고 있는 金剛杵(방망이)가 이 보배인 것이다. 쇠 중에서 가장 강해서 금강이라 하니 제석천이 이것을 가지고 있으며 복 없는 사람은 보기 어려운 것이다. 지극히 견고하고 날카로워서 반야에 비유하는 것이니 어떤 물건으로도 능히 이를 부수지 못하나 다른 물건을 능히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열반경에서 비유하기를 이것을 능히 깨뜨릴 것이 없으며 일체 모든 물건을 능히 깨뜨릴 수 있다고 하였다. 무착은 이르되 “금강은 파괴하기 어렵다 하고 또 능히 다른 것을 끊는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금강이란 섬세하고 견고한 까닭이라 했다. 섬세하다 하는 것은 지혜의 씨앗이요 견고하다 하는 것은 파괴할 수 없는 것으로, 이는 견고로써 반야의 체에 비유하고 예리한 것으로써 반야의 작용(用)에 비유한 것이다. 또 眞諦가 쓴 것에 6가지로 금강을 비유해서 설하셨으니 1. 청색은 능히 재액을 소멸하니 능히 반야가 업장을 녹이는데 비유하고 2. 황색은 사람의 구하는 바를 따름이니 無漏功德(새지 않는 공덕)에 비유하고 3. 적색은 해가 불을 내니 慧가 본각(本性)에서 남이 없는 지혜의 불을 냄이요 4. 백색은 흐린 물을 맑히니 반야가 의심의 흐린 물을 맑힐 수 있음이요 5. 空(빈)色은 사람으로 하여금 空(비어 청정함)에서 움직이고 머물게 하니 지혜가 모든 것에 집착하는 것을 깨뜨려 참으로 비어 없는 이치에 머물게 함이요 6.碧色(옥색)은 모든 독을 능히 녹일 수 있으니 지혜가 三毒을 녹이는 것이다. 곁으로 겸한 것이 그러하여 굳고 날카로움으로 비유한 것이나 본래의 본각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 반야란 바로 번역하면 慧이니, 곧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본각(本性)과 함께하는 혜가(밝게 작용할줄 아는) 이것인 것이다. 교학으로 얕은 데서부터 깊은 데까지 묶어서 말하자면 곧 聞(듣고), 思(생각), 修(다스림) 3가지 지혜를 모으면 모두 반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착이 이르되 “능히 끊음이란 반야바라밀 가운데 聞, 思, 修요, 끊을 것은 금강(慧)으로 끊을 것(탐,진,치)을 끊는 것과 같다” 하고, 이 섬세한 것은 지혜의 씨앗인 때문에 智의 因(씨앗)은 곧 慧이다. 智度論에 의하면 “因位(부처 될 씨)를 반야라 이름하고 果位(부처를 이룸)를 智라”고 했으니 곧 聞, 思, 修가 모두 섬세하다 한 것이니, 섬세하고 묘한 혜가 부처님의 智慧의 因이다. 반야는 능히 끊음으로서 因位에 있고 佛果는 無斷(끊을 것이 없음)이므로 바꿔서 智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大品經(대품반야경)에 의하면 “若자는 지와 혜 두 가지 뜻에 통한 것이니 그러므로 지와 혜가 이름과 뜻은 조금 다르나 體性(본래 성품)은 다름이 없는 것이다”했다.
바라밀이란 “到彼岸이라고 하니 마땅히 피안에 이르는 것이라” 해야 하니 생사의 이 언덕을 떠나서 번뇌의 흐름을 건너 열반의 언덕에 다다름을 이르는 것이다.
열반이란 여기서 이르는 것은 圓寂(원만하고 고요함)이며 또한 멸도니 일체 중생이 곧 적멸상이라서 다시 더 멸할 것이 없으나 다만 뒤바뀌어 미혹해져서 망령되이 나고 죽는다는 소견 때문에 이 언덕에 있다고 하거니와 만일 생사가 본래 공한 것을 깨달아 원래 원적함을 깨달으면 저 언덕에 이르렀다 하는 것이다. 만약 반야를 달리 말하면 마땅히 到彼岸의 慧(저 언덕에 이르는 지혜)라 하는 것이다.
경이란 범음으로 수다라인데 뜻으로 번역하면 契經이다. 계는 뜻과 이치를 말로써 표현하여 사람의 마음에 계합하니 곧 이치에도 계합하고 근기(本覺)에도 계합하여 계라 이름하는 것이며 경이란 佛地論(대승경론부:친광등 보살이 불 지경을 글에 쫓아 지음)에 이르되 “능히 통하고 포섭하기도 해서 경이라 이름하니, 부처님의 성스런 가르침으로써 마땅히 설하신 뜻을 통해서 교화할 중생들이 포섭해질 것이기 때문이라”했다. 이 ?는 본래 이 경을 평론하는 자를 위하여 그 科段을 가리킨 것이니 비록 차례로 경을 科目했으나 차례로 글을 해석하지 않고 다만 어려운 곳만 간략히 대목만 들었을 뿐이므로 역시 뜻을 갖추어서 서술하지는 못하였다. 그 뜻은 전하고 보이는(示) 이의 口訣에 모두 있는 것이요 ?(글) 가운데 있지 않으니 다만 증득하지 못하고서 ?를 따라 해석하는 것으로 강의하지 말라.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 깊고 오묘한 뜻(선지)으로 경문을 해석할지니 어려운 곳은 ?를 가지고 할 것이요 쉬운 곳은 바로 설하라.
청봉착어:이 경 해석을 뜻으로 펴 4단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첫째, 교의 인연과 둘째, 경의 근본체를 밝혔고 셋째, 모인 장소로 가리고 넷째, 글 뜻을 해석한 것으로 나누었다.(내용생략) 그리고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경의 이름을 설명(생략)했으나 이 경을 평론하는 자들은 ?의 글을 쫓아 해석하는 것으로 강의하지 말고 그 깊은 오묘한 뜻(선지)을 계합해서 설하라 하고 있는 것이다.
冶 父
冶父:○
說誼:圓相之作은 始於南陽忠國師이니 國師가 傳之耽源하시고 源이 傳之仰山하시다 源이 一日에 謂仰山曰國師가 傳六代祖師의 圓相九十七介하여 授與老僧하시고 臨示寂時에 謂予曰吾滅後三十年에 有一沙彌 來自南方하여 大振玄風하리니 次第傳授하여 無令斷絶하라하셨으니 吾詳此讖하니 事在汝躬이라 我今付汝하노니 汝當奉持하라 山이 旣得으로 遂焚之하시다 源이 一日에 謂仰山曰向所傳圓相을 宜深秘之라하시니 山이 曰燒却了也이니라 源이 曰此乃諸祖의 相傳底거늘 何乃燒却인가 山이 曰某가 一覽而已知其意하여 能用卽得이라 不可執本也나이라 源이 曰在子卽得이니 來者는 如何인가 山이 於是에 重錄一本하여 呈似하니 一無舛訛니라 源이 一日에 上堂하니 山이 出衆하여 ?一圓相(○)하여 以手로 托起하고 作呈勢하고 却叉手而立하니 源이 以兩手로 交拳示之하다 山이 進前三步하여 作女人拜하니 源이 遂點頭하거늘 山이 卽禮拜하니 此는 圓相所自作也니라 今師가 題下에 ?一圓相하신 意旨如何인가 卽文字하여 拈出離文字底消息이니라 若是離文字底消息이면 擬議得?나 計較得?인가 不可以有心으로 求며 不可以無心으로 得이며 不可以語言으로 造며 不可以寂?으로 通이니 直饒釘嘴鐵舌이라도 也卒話會不及이니라 然雖如是나 畢竟作?生道인가 生佛이 同源이요 妙體無物이나 三世諸佛이 出不得이며 歷代祖師가 出不得이며 天下老和尙이 出不得이며 六度輪廻도 亦出不得이며 三世間과 四法界의 一切染淨諸法이 無一法도 出此圓相之外이니 禪은 謂之最初一句子요 敎는 謂之最淸淨法界이니라 儒는 謂之統體一太極하고 老는 謂之天下母하니 其實은 皆指此也이니라 古人이 道하되 古佛未生前에 凝然一相圓이니 釋迦도 猶不會거니 迦葉이 豈能傳者가 是也니라
야부:일원상(○)으로 들어 보이다.
설의:원상을 그린 것은 처음 남양 慧忠 국사였으니, 국사께서 탐원에게 전하시고 탐원이 앙산에게 전하셨느니라. 탐원이 하루는 앙산에게 이르시기를 “국사께서 육대조사의 원상 九十七개를 전하여 老僧에게 주시고 입적하실 때에 나에게 이르시길 ‘내가 멸한 후 三十년 뒤에 한 사미가 남쪽으로부터 와서 禪風을 크게 떨치리니 차례로 전수해서 단절하지 않게 하라’ 하시니 내가 이 예언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 일이 너에게 있음이라. 내가 지금 너에게 부치니 너는 마땅히 받들어 가지라” 하셨다. 앙산이 이미 얻었으므로(깨달아 증득) 그것을 태워 버렸다. 탐원이 하루는 앙산에게 말하길 ‘지난 번 전해준 원상을 깊이 간수하라’ 하니 앙산이 ‘태워버렸습니다’ 하였다. 탐원이 말하길 ‘이것은 여러 조사 스님이 서로 전한 것인데 어찌 태워버렸는고?’ 하니, 앙산이 말하길 ‘제가 한번보고 이미 그 뜻을 다 알았으니 쓸 때가 되면 능히 쓸 수 있어서 가히 그 本(○)의 현상에 집착할 것은 아니라 생각하나이다’ 하니 탐원이 이르길 ‘너는 곧 증득하였으나 앞으로 오는 자는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하니 이에 한 본을 그려서 들어 바치니 하나도 잘못됨이 없었다.
탐원이 하루는 법상에 오르시니 앙산이 대중 가운데서 나와 원상을 그려서 손으로 받쳐드리는 자세를 짓고 물러나 차수하고 서 있으니, 탐원이 양손을 합하여 交拳(주먹을 지어)하여 보이셨다. 앙산이 앞으로 세 걸음 나가 여인의 절을 하자, 탐원이 마침내 머리를 끄덕거리시니, 앙산이 즉시 예배를 했다. 이것은 원상으로부터 지어진 바이로다.
지금 師(야부스님)께서 제목 아래에 일원상을 그리신 뜻은 무엇인가?
곧 문자로써 문자를 여읜 소식을 드러냄이라. 만약 이것이 문자를 떠난 소식일진대 의논으로 증득하거나 계교로써 증득할 수 있는 것인가. 有心으로 구할 수 없고 無心으로 얻을 수도 없으며 언어로써 지을 수도 없으며 寂?(적묵) 함으로써 통할 수도 없음이니, 바로 두터운 입술과 철로 된 혀로도 마침내 말이 미칠 수 없음이라. 그러나 비록 이와 같으나 필경 어떻게 이를 것인가? 중생과 부처가 같은 근본이요, 묘한 체는 한 물건도 없으나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벗어남을 얻지 못하고 역대조사도 벗어남을 얻지 못하고 천하 노화상도 벗어남을 얻을 수 없으며 육도에 윤회도 또한 벗어남을 얻을 수 없음이니라. 三世間(기세간, 중생세간, 지정각세간)과 4法界(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의 일체 더럽고 깨끗한 모든 것의 한가지도 이 원상 밖을 벗어날 수 없음이라. 선은 그것을 일러 최초의 一句字(말과 행 이전의 향상일구)라 하고, 敎에서는 가장 청정한 법계라 하니라.
유교에서는 통체가 한 태극이라 하고 노자는 천하의 어머니라 하니, 그 實은 모두 이것을 가리킨 것이니라. 옛사람이 이르되 옛 부처님이 나시기 이전에 그렇게 한 모양 둥글어 있었으니 ‘석가도 오히려 몰랐거니 가섭에게 어찌 능히 전할 건가?’ 라고 한 것이 이것이니라.
청봉착어:일원상(○)으로 마음을 들어 보이신 분은 남양 혜충국사셨고 다시 탐원선사에게 전하고 탐원은 앙산선사에게 전하셨다. 마음은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니 이 ○상의 둥근 것도 갓이 있으니 마음은 갓이 없는 일체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사량이나 계교나 유로나 무로도 표현할 수 없고 미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또한 방편이요 비유임을 알아야 한다.
冶父:法不孤起라 誰爲安名인가
說誼:法之一字는 直指圓相이요 安名二字는 直指經題이니 法不自名이나 要因名現이니 所以安名이니라 所以로 道하되 摠持無文字로되 文字現總持이니 應云法不孤起니 所以安名이나 而云誰爲安名은 語忌十成故며 恐成死語故이니 圓話自在여야 免夫招謗이리라 又法不自名이나 所以安名이니라 然雖如是나 安名字는 誰인가 若道黃面老子安이라면 黃面老子는 未嘗安이시니 何인가 則自從鹿野苑에서 終至拔提河의 於是二中間에 未曾說一字하니 若道不是黃面老子安이라면 今此經題는 從甚處得來인가 且道하라 是安名인가 不是安名인가
야부:법은(모든 것)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인데
누가 이름을 지었는가.
설의:법이란 한 글자는 바로 원상을 가리키고 安名(이름을 세움) 두 글자는 바로 경의 제목을 가리키니 법은 스스로 이름하지 않으나 반드시 이름으로 인하여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름을 두었도다. 그런 까닭으로 이르시기를 總持(다라니)는 문자가 아니나 문자로써 총지를 나타내므로 마땅히 법은 홀로 일어남이 아니니 그 때문에 이름을 두었다 이른 것이나 ‘누가 이름을 두었는가’한 것은 十成(완전함)을 꺼리는 연고로 말한 것이며, 죽은 말(말에 끄달림)에 집착할까 두려워한 까닭이니 완전한 말이 갖추어 있어야 비방을 면하리라. 또는 법은 스스로 이름하지 않으나 이 때문에 이름을 둔 것이니라.
그러나 비록 이와 같으나 이름을 둔 자는 누구인가? 만약 黃面老子(석가모니)가 했다고 하면 황면노자는 일찍이 이름을 두지 않으셨으니 어인 연고인가?
그렇다면 鹿野苑(초전법륜지)으로부터 발제하(구시라)에서 마칠 때까지 이 두 사이에 일찍이 한 자도 설하지 않으셨다 하니 만약 황면노자가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경의 제목은 어느 곳에서 왔는가. 자 일러 보라!
이름이 있는 것인가? 이름이 있지 않은 것인가?
그러므로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에 전할는가?”라 했음이 이 뜻인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일체만유가 생했으며 일체제불도 여기로부터 나왔음을 알아야 한다.
청봉착어:法(일체 모든 것)이라는 것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닌데 누가 이름을 붙였을까? 이름 그것은 바로 본래 그것이 아닌 것이니 억지 수단인 것이므로 혹시나 이름에 끄달려 본질을 놓칠까 걱정한다. 석가모니도 일생 설해도 설함이 없으신 도리를 깨우쳐 한 말씀도 설함이 없으신 뜻을 알아야 한다.
“부처가 말이 없음을 알면 입에서 연꽃이 피니라.”
(但知佛無言이면 蓮花從口發이라)
冶父:摩訶大法王이여 無短亦無長하며 本來非?白이나 隨處現靑黃이로다 花發看朝艶이고 林凋逐晩霜이니라 疾雷는 何太擊인가 迅電도 亦非光이로다 凡聖도 元難測인데 龍天이 豈度量이리오 古今에 人不識이니 權立?金剛이로다
說誼:他本에 擊은 作急이고 元은 作猶니라
法王은 非指丈六金身이라 人人本有底一着子이니 能爲萬像之主라 故로 號爲法王이라 古人이 道하되 法中王最高勝이니 恒沙如來同共證者가 是니라 法王之爲體也가 孤高更無上하고 廣博無邊表하여서 乾坤이 在其內하고 日月이 處其中이라 恢恢焉蕩蕩焉하여 廻出思義之表이니 故로 號爲大法王이라하니라 無短云云은 實相無相이요 本來云云은 無相現相이요 花發云云은 當處出生하고 當處寂滅이요 疾雷云云은 妙旨迅速하여 難容擬議요 凡聖云云은 箇事極幽玄하여 智識俱不到이니 非但古人罔措이며 亦乃今人도 不識이니 爲止小兒啼하여 權且立虛名이니라 只如依權現實底道理를 作?生道인가 月隱中峯은 擧扇喩之요 風息太虛면 動樹訓之니라
야부:크고 크신 법왕이여!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으며
본래 검지도 희지도 않으나
곳에 따라 청황으로 나타나도다.
꽃 피어 아침의 고운 모습 보이고
숲이 낙엽 짐은 늦서리에 쫓김이라
빠른 천둥은 어찌도 크게 치는지
신속한 번개도 역시 빛이 아니로다.
범부 성인 원래로 헤아리기 어려운데
천룡팔부가 어찌 헤아리리오.
예나 지금이나 아는 사람 없으니
방편으로 金剛이라 일렀도다.
설의:다른 책에는 擊(격자)은 急(급자)로 되어 있고 元(원자)은 猶(유자)로 되어 있다.
법왕은 丈六金身을 가리킴이 아니요, 사람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一着子(한 물건)이니 능히 일체 것들의 주인이 되므로 법왕이라 이름했도다.
옛사람이 이르되 모든 것 중 왕으로 가장 높고 뛰어나니 항하사와 같은 많은 여래가 다같이 증득한 것이 이것이라. 법왕의 체가 홀로 높아 위가 없고, 넓고 넓어 끝을 정할 수 없어서 하늘과 땅이 그 안에 있고 일월이 그 가운데 있도다. 넓고 커서 생각을 멀리 벗어났으므로 대법왕이라 하니라.
‘짧지도 않다 운운’한 것은 實相은 相이 없음이요, ‘본래 운운’은 상이 없는 가운데 상을 나타냄이요, ‘꽃이 피어 운운’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 자리에서 없어짐을 말함이요,
‘천둥 운운’은 묘한 뜻이 신속해서 사량분별을 용납하지 않음이요,
‘범부 성인 운운’은 그것이 지극히 깊고 그윽해서 지혜와 알음알이로 이르지 못하니 다만 옛 사람들도 그것을 어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역시 지금의 사람도 알지 못하므로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기 위해서 방편으로 헛된 이름을 세웠도다.
다만 저 방편을 의지하여 진실(實)을 나타내는 도리를 어떻게 이를 것인가?
달이 중봉에 숨는 것을
부채를 들어 그것에 비유하고
바람이 큰 하늘에서 쉬면
나무를 흔들어서 그것을 알게 하니라.
청봉착어:끝이 없으니 더 이상 클 수가 없고
길다 짧다 이를 수 없도다.
본래로 공한지라 색깔도 없으나
경계 따라 응하여 항상 나투도다.
선악이 본래 둘 아닌데
누가 감히 헤아릴꼬?
예나 지금이나 알 수 없으니
알지 못할 줄 알면 그것이 참 아는 것이니라.
宗 鏡
宗鏡:只這一卷經은 六道含靈의 一切性中에 皆悉具足이나 蓋爲受身之後에 妄爲六根六塵에 埋沒하여 此一段靈光은 終日冥冥하여 不知不覺이니 故로 我佛이 生慈悲心하시어 願救一切衆生하여 齊超苦海하여 共證菩提이니라 所以로 在舍衛國하시어 爲說是經하시니 大意는 只是爲人으로 解粘去縛하고 直下에 明了自性하여 免逐輪廻하여 不爲六根六塵에 所惑이시니라 若人이 具上根上智면 不撥自轉이라 是胸中에 自有此經이니 且將?했꿜⑥]쭤謐輜卨樟쿰憙?라도 亦不是過이나 如或未然이면 且聽하고 山野與汝하여 打葛?去也하라 夫金剛經者는 自性이 堅固하여 萬劫不壞를 ?金性堅剛也요 般若者는 智慧也요 波羅蜜者는 登彼岸義也니 見性得度하면 卽登彼岸이요 未得度者는 卽是此岸이니라 經者는 徑也이니 我佛이 若不開箇徑路시면 後代兒孫이 又向甚?處하여 進步리오 且道하라 這一步를 又如何進인가 看取下文하라 此經深旨는 無相으로 爲宗하여 顯妄明眞하시니 ○ 劍鋒微露하여 掃萬法之本空하고 心花發明에 照五蘊之非有로다 直得雲收雨霽하면 海湛空澄하고 快登般若慈舟하여 直到菩提彼岸이니라 且道하라 心花發明이 在甚?處인가 太湖三萬六千頃에 月在波心說向誰리오
說誼:劒鋒으로 至彼岸은 萬法이 本空하고 五陰이 非有거늘 但以妄緣으로 而得成立이니라 智照妄緣하면 萬法이 俱沈이요 體露眞常하면 五蘊이 皆空이니 到這裏하면 一似雲收雨霽하고 海湛空澄하여 無一物爲緣爲對하여 無一事爲障爲碍라 快登般若慈舟하여 直到菩提彼岸이니라 太湖云云은 佛法이 在世間이나 不離世間覺이니 離世覓菩提는 猶如求兎角이니라 欲識得佛法的的大意라면 直須向十二時中四威儀乃覺觀波濤中할지니 ?捕來?捕去하고 ?來?去하면 忽地에 識得根源去在이니라 縱然識得根源去라도 只可自怡悅이언정 不堪持贈君이니라.
종경:다만 이 한 권의 경은 육도의 모든 영혼을 가진 일체 성품 가운데 모두 갖추어져 있건만, 대개 몸을 받은 뒤에는 망령되이 육근육진에 매몰되어 한 가닥 신령스런 빛(智慧)은 종일토록(늘) 캄캄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므로 우리 부처님이 자비심을 내어 일체 중생을 구하시어 고해를 뛰어넘어 함께 보리(불지견)를 증득하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위국에 계시면서 이 경을 설하시니 그 큰 뜻은 다만 사람들에게 붙어 있는 것(粘:집착심)을 풀어주고 속박됨을 버려서 곧바로 자성을 밝게 깨달아서 윤회에서 벗어나 육근육진에 미혹되지 않게 하시고자 함이다. 만약 사람이 높은 근기와 높은 지혜를 갖추면 다스리지 않아도(닦음) 저절로 법을 굴릴 것(미혹에서 벗어나 일체종지를 씀)이다. 이는 胸中에 스스로 이 경을 가지고 있음이니 또 장차 三十二분(金剛經)을 쓸모 없는 공간에 두고 쓰지(보지) 않아도 허물이 되지 않거니와 혹 그렇지 않으면 또 잘 듣고 그대는 나(산승:山野)와 더불어 엉킨 것을 풀어가도록 하라.
무릇 금강경이란 자성이 견고해서 만겁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을 쇠(金剛)의 성품이 견고하고 강한데 비유한 것이요, 반야란 지혜이고 바라밀은 피안에 오른다는 뜻이니 性品을 보아 건너게 되면 곧 저 언덕에 오름이고, 건너게 되지 못하면 곧 이 언덕이다. 經이란 길(徑)이니 우리 부처님이 이 길을 열어주지 않았으면 우리 후인들이 어느 곳을 향해서 나아 가리오?
자, 일러라! 이 첫 한 걸음을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아래 글을 살펴 보라.
이 경의 깊은 뜻은 無相으로 宗(으뜸 근본)을 삼아서 妄을 드러내어 眞을 밝히시니 ○의 칼끝(般若)을 조금 드러내어(방편을 써서) 일체가 본래 공함으로 쓸어버리고 마음 꽃(自性의 性品)이 밝게 드러나매 五蘊이 있지 않음을 비치는 것이다. 바로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이면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이 맑아서 경쾌하게 반야의 자비로운 배에 올라서 곧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를 것이다.
자, 일러라! 마음 꽃이 밝게 핀 것이 어느 곳에 있는가?
태호(큰 호수)의 달은 3만 6천 넓고 넓은(頃)
파도 가운데 있음을 누구를 향해 말하리요.
설의:‘칼끝으로부터... 저 언덕에 이른다’한 것은 일체가 본래 공하고 오온이 있지 않거늘 다만 망령된 인연으로써 이루어지게 된 것을 밝힌 것이다. 지혜로 망령된 인연을 비추면 만법이 모두 없어지고(空), 體가 진상(진실하고 항상 한 것)을 드러내면 오온이 모두 空한 것이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마치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이고, 바다가 고요하고 하늘이 맑은 것 같아서 한 물건도 반연되거나 상대가 되는 것이 없어 한 가지도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유쾌히 반야 자비의 배에 올라서 바로 깨달음(菩提)의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이니라.
‘태호 운운’은 불법이 세간에 있으면서 세간의 깨달음(覺)을 여의지 않는 것이니, 세간을 여의고 깨달음을 찾는 것은 오히려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라. 불법의 的的(명백)한 대의(큰 뜻)를 알고자하면 모름지기 하루종일 四威儀(행주좌와) 안을 향하여 일어나는 파도 속을 관하여 볼지니, 보아 오고 보아 가면 문득 바로 근원을 깨달아 얻을 것이로다. 비록 근원을 깨달아 얻었을지라도 다만 스스로 기뻐할 뿐 가져 그대에게 줄 수는 없는 것이니라.
청봉착어:금강경을 금강석을 비유해서 설명한 것인바, 자성(佛性)은 항상하여 멸함이 없고 견고해서 나눌 수 없으니 크고 큰 마하의 반야지혜로 밀다의 저 언덕에 바로 건너가는 것이 고해를 벗어나는 길(徑)인 것이다.
마음이 청정함을 요달하여 일체가 청정함을 깨우쳐서 나라고 고집한 4대육신과 색, 수, 상, 행, 식이 인연으로 뭉친 환과 같으며, 본래 공적한 것임을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宗鏡:法王權實令雙行하시니 雷捲風馳海岳傾도다 霹靂一聲에 雲散盡하나 到家에 元不涉途程이더라
說誼:捲은 當作震이라 大凡垂化는 有權有實하며 有照有用이니 今佛이 從無言中에서 興敎海之波瀾하시고 向敎海裏하여 現無言之密旨시니 是謂權實令雙行也시니라 風行草偃하고 化功이 神速하고 五欲海가 自渴하고 我人山이 自倒니라 圓音落處에 雲散盡하나 不曾擡步便還家니라.
종경:법왕께서 방편(權)과 진실(實法)을 쌍으로 행하시니
우뢰가 진동하고 바람이 몰아쳐 바다와 산이 무너지도다.
벽력같은 이 한 소리에 구름이 모두 흩어지나
집에 이르러 보니 원래 한 걸음도 나선 적이 없었더라.
설의:捲은 마땅히 震으로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니라.
대체로 교화를 펴는데는 방편도 있고 實도 있으며 비춤도 있고 작용도 있으니 지금 부처님이 말없는 가운데서 敎海(넓게 가르친)의 파도를 일으키시고 교해 속을 향해서 무언의 비밀한 뜻을 나타내시니 이것은 방편과 실을 쌍으로 행하신 것이니라.
바람이 불어 풀(망상:사견)이 쓰러지니 가르침의 功(보람)이 신속하고 오욕의 바다가 저절로 마르고 我人(나다, 사람이다 집착하는)의 산이 저절로 무너지도다. 圓音(원만성취한 말씀)이 떨어지는 곳마다 구름이 걷히어 다하나, 일찍이 걸음을 옮기지 않고도 곧 집에 돌아 왔음이니라.
청봉착어:제도하기 위해서 방편과 실다움을 드러내셨고 체와 용을 일깨워 주기 위해 부처님은 풍류 없는 곳에서 풍류를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중생들이 아집과 법집을 여의고 깨치게 되면 본래로 일체가 그대로 나였음을 요달하게 되는 것이다.
惠菴門人 淸峯 淸韻 序
“금강경”은 무상(相)을 종(宗, 으뜸)지(旨)로 하고 무주(無住)를 체(體)로, 묘유(妙有, 지혜)를 용(用)으로 하여 도의 이치를 깨닫고, 그 지혜(智慧)로 리(理)를 깨달아 보아 본성(本性)을 요달하여 정각을 이루게 하려는 경이다.
본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본성이 법성(法性)이요, 중생의 본래 면목이며, 우주 근본체이니 이를 일러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각자가 본래 구족해 있으나 스스로 보지 못하는 이는 문자만 독송하고 글과 말에 끄달려 껍데기만 보나 지혜 있는 이는, 그렇지 않아서 깨달아 본성과 계합(契合)하게 되면 비로소 문자나 말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며, 자성을 밝게 터득하게 되면, 일체 제불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일체종지를 증득하여 모든 지혜가 발현(發現)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보석이 돌 속에 있으나 돌이 보석인 줄 모르고 보석도 또한 이 돌임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면 이 보석을 찾아 유용하게 쓰게 되는 것 같이, 불성이란 이와 같아 나(我)라고 하는(상대적 거짓 나의) 산(山)가운데 무명에 뒤섞인 진여라는 보석의 광맥이 있고, 이 뒤섞인 광맥에는 번뇌망상이라는 我執(즉 집착)으로 인한 무명의 잡석이 보석을 덮고 있으나, 그 잡석을 제하면 본래부터 있던 보석을 찾아내어 지혜롭게 쓰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상을 깨고 번뇌의 광을 수행의 용광로에 집어넣어 재마저 없이 하면, 없이 있는 보석 가운데서 지혜의 광(光)이 현발하게 되는 것이니, 바로 이것을 가르치는 길의 역할로 설한 것이 “금강경”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의 골수는 정각성취인 깨달음에 있는 것이지, 문자의 의해(義解)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을 강설하기에 앞서 경의 이름을 우선 알아야겠다.
금강이라는 것은 가장 단단하고 견고(즉 불변)하다는 비유인 것이다.
반야라는 것은 지혜라는 뜻이니, 이 지혜는 분별을 여읜 지혜로 맑고 깨끗한 참 지혜이니 지(智)는 어리석음이 없음이요, 혜(慧)는 방편으로 이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묶어 지혜라 하는 것은 이설이 없는 부동의 절대 진리를 깨달아 밝게 알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밀이라는 것은 저 언덕(밀다)으로 건넌다(바라)는 뜻이니,
건넌다(到彼岸)는 것은 생멸을 여읜 것을 요달한 것이다. 중생은 이 생멸 있음으로 잘못 알아 나고 죽음에 집착하므로 업이 쌓여 그 업보로 인하여 윤회를 면하지 못하는(此岸) 것이니, 내가 없음을 요달하여 집착을 털어 버려서 번뇌망상을 여의면, 진여(眞如)와 둘 아니게 되므로 대 지혜가 발현하게 되어 일체 법(眞理:일체종지)에 밝아 생사를 여의게 되어 곧 到彼岸(저 언덕, 밀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방일(放逸)하지 말고 정진할 일이다.
밀다는 근본체를 뜻하는 것이니, 곧 일체 만유의 근본체로 만법을 머금(具足)고 있으므로 불성이라 하며 일체가 원융(圓融)한 극치를 이름하는 것이다.
이 언덕(此岸)은 중생심의 마음이니, 어둡고 괴롭고 부자유하고 더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바른 지혜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암흑 속에서 헤매는 것과 같고 생사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하고 괴로운 것이요, 육근의 종이 되므로 육진 경계에 허덕이기에 더럽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갖추어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할 때, 곧 부처의 세계이므로 깨끗하고 맑고 청정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는 시방국토에 두루하여 밝고, 나고 죽는 생사심이 없는 즐거움만 있는 것이요, 걸림이 없어 구속받는 것이 없기에 자유롭고, 빛과 상에 물들지 않으므로 언제나 깨끗할 뿐이다. 그러면 실은 부처가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부처인데 무엇이 다른고 하니 그것은 한 생각의 차이인 것이다. 깨끗한 마음이 곧 부처의 세계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앞생각 어리석음을 뒷생각이 밝아 문득 부처를 이루니
“부처라 할 때 곧 중생이요, 중생의 본체가 곧 부처인 것이다”
경이라는 것은 말이니, 곧 길이라는 뜻이다. 즉 가는 곳에는 길이라는 필요한 조건이 있으니, 그 길을 빠르고 쉽고 편하고 곧장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가도록 일러준 것(즉 진리를 설함)이 경 곧 말씀인 길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와 성불의 바른 가르침을 설한 것이 길이요 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 같은 종지를 말씀하신 것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한 것이다. 다시 이르자면, 법(眞理)은 문자에 즉하여 문자를 여읜 소식이니 사의(思意)로나 계교로나 가히 유심(有心)으로는 구하지 못하며, 가히 무심(無心)으로써도 얻지 못하며, 가히 언설로써도 미칠 수 없으며, 가히 적묵(寂?)으로써도 통하지 못하니 하물며 장광설로써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필경에는 모든 일체 근원인 마음(心)을 원상(○)으로 그 의지를 표현하려 했던 것도 그마저 방편일 뿐인 것이다.
또 세간을 여의고 불법을 찾으려 함도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 같음이니, 그러므로 세간의 말과 경계를 방편으로 쓰게 되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래선은 말 있음으로써 말없음에 이르름이요, 조사선은 말없음으로써 말없는데 이르름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알아야 할 것은 경에 법이 없다 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비방하는 것이요, 경에 법이 있다하면 부처를 비방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