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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2011년 1월 27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히브10,19-25 마르4,21-25
"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마르 4,21-25)
더불어 법칙 /김찬선신부님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
건널목(횡단보도)을 건널 때 저는 재미있는 현상을 보곤 합니다.
차가 많이 다니는 곳은 아니지만 신호등이 있는 곳입니다.
신호들이 빨간 불일 때
차가 오지 않아도 인내하며 잘 기다리던 사람들이
누구 하나가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면 같이 우르르 건너갑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이번에는 어쩌나 하고 저는 지켜보는데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규칙을 깨트리면
다른 사람도 덩달아 규칙을 깨트리고 맙니다.
고속도로 정체 때도 어느 한 차가 위반하여 갓길로 가면
지금까지 준법주행을 하던 다른 차도 갓길로 갑니다.
한 사람의 악행은 모든 선행을 허물어버리는 것입니다.
작은 구멍이 거대한 둑을 허물 듯
하나의 작은 악이 모든 선행을 허물어버립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선행은 선행을 격려합니다.
선행은 선행을 자극합니다.
선행은 악행을 억지합니다.
이것이 ‘더불어’의 법칙입니다.
‘더불어’는 ‘더’와 ‘불어나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더불어 하면 더 불어납니다.
선행을 더불어 하면 마치 작은 불이 큰 불이 되듯이 큰 선이 되어
웬만한 악으로 어쩔 수 없게 되지만
악행을 더불어 하면 시너지 효과로 더 큰 악이 되어
웬만한 선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나쁜 것이 더 불지 않고
좋은 것이 더불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 /조명연 신부님
우리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상대방의 기를 살리기도, 또 반대로 죽이기도
합니다. 만약 내가 오늘 아침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긍정적인 말, 칭찬의 말,
사랑의 말 등을 들으면 어떨까요? 모든 것이 기쁘고 세상 살맛을 느끼게 되면서
하루를 신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부정적인 말, 미움의 말,
악담 등을 듣는다면, 머리에서 그 말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하루 종일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기쁨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기를 뺏는 나라가 아니라 기를 살리는 나라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 하면 보통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죽어서 갈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체험하는 나라입니다. 달리 이야기한다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내 이웃을 위해서
기를 살리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바로 그 순간 하느님 나라가 내 곁에 자리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라는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듯, 우리의
작은 칭찬이 다른 곳에서 더 큰 수확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기쁨을 주는
말 한마디,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키워가는 좋은 거름이 됩니다
들음과 새김 /김연희 수녀님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와 사랑의 계명을
잘 알아들으려면, 그분의 설교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유들을 제대로
파악해나가고 그 깊은 의미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등불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곧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계속해서 듣도록 요구하십니다. 또한
이어서 우리에게 “너희는 새겨들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를
지닌 자가 누구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마음을 여는 자가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비유는 듣는 이의 마음속에 오래 새겨져 그 시기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다가올 수 있고, 그 강렬한 메시지는
새로운 삶을 향하여 도전하는 데 힘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새김으로써
내적 통찰력을 얻게 된 자는 자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가장 중요하고도
영원한 가치를 선택하는 결단력을 갖게 됩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보아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라고 자주 애송하는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를 오늘도 읊어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추억의 등불 /양승국 신부님
등불, 점점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는 물건이지요.
등불, 말만 들어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전기보급률이 그리 높지 않던 시절,
해가 넘어가면 집집마다 등잔에 불을 붙였습니다.
기름 냄새를 배경으로 라디오에서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흘러나오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렇게 어린 시절의 밤은 깊어갔습니다.
요즘은 그 용도가 사뭇 다릅니다.
피정 집에서, 카페에서, 분위기 잡는데, 아니면
묵상기도 프로그램 진행할 때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전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예수님 시대에 등불은
야간생활에 가장 중요한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등불을 사용해보신 어르신들 기억나실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바닥에 두지 않았습니다.
등불을 켜서 서랍 속에 감추어놓지 않았습니다.
침대 밑에 두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행동했다면
살짝 맛이 간 사람 취급받기 십상입니다.
등불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높이높이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등불을 올려두는
등경(등잔걸이)이란 것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칭하는 등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그분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선포하실 때
비밀리에, 비공개석상에서, 끼리끼리, 속닥속닥,
그렇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언제나 타당하고 보편적이었기에,
진실하고, 공정했기에 늘 거침없고 당당했습니다.
이런 그분의 가르침은
속성상 한 곳에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너무나 은혜로운
생명수 같은 가르침이기에 내 안에, 우리 안에만
갇혀 있기에 너무나 아깝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려가야 합니다.
세상 이편 극단에서 반대편 극단까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로 전해져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상향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좀 더 많은 급여, 좀 더 높은 지위,
좀 더 안락한 생활,
좀 더 많은 권력, 좀 더 풍요로운 인생...
그러나 예수님 삶의 특징은 우리와는 반대로 ‘하향성’입니다.
“높은 곳에서 맨 밑바닥으로,
승리에서 패배로, 부유함에서 가난함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움직이셨습니다.”(칼 바르트)
예수님의 사목의 정점에는
자신의 무력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
그 무력함 가운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곳으로 계속 내려가시고,
그곳에서 끊임없이 탄생하십니다.
아직도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사람이 있는 한
편히 계실 수 없으셔서 끊임없이
하향하시는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등경 위의 등불 /강영구 신부님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저는 요즘 신영복 교수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돌베개)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주역(周易)의 기초 개념을 강의하는 중에 위(位)와 응(應)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맞아떨어져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위(位)는 ‘자리’를 말합니다.
등불이 등경 위에 있으면 득위(得位)-제자리를 차지함-하여 방 안을 환히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아래 있으면 실위(失位)-제자리를 잃음-하여
아무리 밝게 빛난다 해도 방안을 밝힐 수 없습니다.
만물은 고유한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등불의 자리가 등경 위인 것처럼,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 자식의 자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사제의 자리, 수도자의 자리, 평신도의 자리가 있고,
직장에서는 사장의 자리, 간부의 자리, 평사원의 자리가 있습니다.
각자가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을 득위(得位)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밝게 빛나는 것을 응(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리에 걸맞은 삶의 모습을 말하지요.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라도 불 꺼져 있다면 방안을 밝힐 수 없습니다.
제 구실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통령(大統領)이라는 자리에 있다고 해도
대통령답게 말하고 처신하지 못하면 빛을 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제(司祭)라는 지위 하나로 큰 소리 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사제답게 살고 처신할 때 빛을 낼 수 있고 많은 사람을 비출 수 있습니다.
양(洋)의 동서(東西), 시대의 신구(新舊)를 넘어서서
진리(眞理)는 하나로 통합니다.
죄의 사회적 측면 /전삼용신부님
어떤 피정에서 한 지도 신부님이 혼자 짓는 죄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괜찮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혼자 그 죄를 지었다고 과연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요?
제가 일반 대학 다닐 때 심심풀이로 관상을 좀 공부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관상 책을 보며 강의하는 교수님들의 얼굴을 표본 삼아 관상을 연습하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얼굴 보며 몇 시간은 이야기 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내면인데 그것들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관상을 봐주었는데 보아주는 제가
신기하게도 80%정도는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관상은 하나의 통계입니다. 선천적으로 생긴 얼굴과 후천적으로 인상을 써서 생기는
얼굴의 조합이 사람의 성격과 운명을 만들어갑니다.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중에
더 중요한 것은 후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운명이란 사실 없고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굴이
변해가는 사람도 있고 사실 제 얼굴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변했습니다.
예를 들면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은 윗눈썹 사이에 골이 파입니다.
걱정을 하니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지고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보니 당연히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눈이 위로 치켜뜬 눈은 윗사람들에게 대항하는 상입니다.
실제로 자신도 모르게 윗사람들을 그렇게 노려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래로 내려 보는 눈은 아랫사람을 내리 누르는 상이겠지요.
물론 지금은 관상을 보지도 않고 다 잊어먹었습니다. 사람들 중에 혹시
특이한 관상이 있을 때는 하나씩 기억나기는 하지만
사람을 앉혀놓고 관상을 보아 주는 것은 군대 제대하고 끝냈습니다.
어느 순간에 관상에서 말하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이 현세에서 돈 많이 벌고 오래 사는
등의 매우 속세적인 기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관상에서의 복은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잘 사는 것이지
영혼이 구원되거나 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관상학으로 보면 그것만큼 안 좋은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난하고 고생하고 치욕의 죽음을 당한 것이
우리 믿음 안에서는 더 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위험성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관상을 조금 했어도 맞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관상대로
성격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쨌거나 관상 보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하나 믿는 것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얼굴엔 안에 있는 것들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십 이후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듯이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짓는 표정들이 얼굴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다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숨길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하느님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경험 안에서도 아이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뻔한 거짓말’을 할 때
쉽게 알아차렸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거짓말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사람들은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죄를 짓고 그것이 감추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의 말과 행동, 표정 등을 통해 밖으로 나타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이
죄의 사회성이고 온전히 개인적인 죄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은 대낮이고 대낮에 숨길 수 있는 것들은 없습니다.
죄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짓는 것입니다. 적어도 완전히 죄를 물리칠
수는 없어도 자신에게 솔직하고 또 이웃을 위해서라도 죄를 줄여나가도록 합시다.
스스로 결정 짓는 것 /구경국 신부님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는 속담처럼 자주 경험하거나 열심히
연습을 하여 숙달이 되면 저절로 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숙달이 숙련을 창조하는 것은 학문이나 기술의 연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 봉사, 선행, 기도 등과 같은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도 역시
예외가 없습니다. 본당공동체 등에서 항상 봉사하는 사람들이 이 단체 저 단체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계속 뒷짐을 지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봉사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것으로써
하느님께 점점 더 가까이 가는 데에 반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조차 잊어버리게 되어 저절로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주고받는 것을
주님께서 능동적으로 주도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계속 실천함으로써
사랑을 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고 사랑의 실천을
미루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저절로 유보되어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더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임의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결정 짓는 것입니다.
가진 것은 작아도 마음은 크게! /김찬선신부님
“너희는 새겨들어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지 사람들을 수상쩍게 봅니다.
그렇기에 정말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자본주의의 논리로 이해하면 큰 일입니다.
자본주의의 신조는 “Money creates money”,
“돈 놓고 돈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이런 신조로 왜곡해서 알아들으면
“하느님은 있는 자의 편이다.”
“하느님은 돈 있는 사람에게 돈을 더 주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먼저 오늘 주님의 말씀은 소유가 아니라
나눔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심 사나운 신조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빼앗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신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말씀은 주기 위해서 가지는 것입니다.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게 될 것이다.”고
바로 앞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있는 사람만이 줄 수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어떻게 주겠습니까?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어떻게 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주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줄 것이 없는 사람이거나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은
더 많이 소유하려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더 많이 주려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고
더 많이 주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말씀을 우리는 재물의 차원만이 아니라
마음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으로도 알아들어야 합니다.
줄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더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가진 사람”이란
재물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줄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없다고 생각하며
줄 마음조차 없는 사람이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줄 마음만 있으면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불과 장작은 있지만 정작 제물인 양이 없다고 하는 이사악에게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우리는 줄 마음과 봉헌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하느님께서 줄 것과 봉헌할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빛과
작은 능력과
작은 소유와
작은 성의를 우습게 여기고
함지속이나 침상 밑에 처박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가지고
거기에 더 보태어 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진 것은 작어도 마음은 크게!”
이것을 오늘의 경구,
아니 일생의 경구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요?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생각나게 하는 사람 /양승국 신부님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는 교회안의 봉사자인
‘사목자’들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결국 ‘산위의 등불’ 같은 사람이네요.
그를 보는 사람마다 쓰라렸던 마음이 순식간에
따뜻하게 풀리게 되는 그런 사람,
그를 바라보면 즉시 흐려졌던 마음이
맑아지게 되는 그런 사람이겠지요.
그로 인해 죄인들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되는 그런 사람,
그로 인해 만물이 본연의 제 색깔을 찾게 되는,
그래서 세상이 좀 더 밝아지게 되는 그런 사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산위의 등불’처럼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어두운 세상,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활활 타오르는 등불로 살아갈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경제 한파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갈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을 보고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돈이 다가 아니다, 없이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온 몸으로 보여주길 바랍니다.
나라의 근본인 가정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따뜻한 보금자리여야 할 가정이
산산조각 나는가 하면 많은 가정이
말만 가정이지 여인숙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보고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길 바랍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똘똘 뭉치고,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용서하고 새 출발하는
정녕 복음적인 가정 상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수많은 단체, 기업, 조직, 공동체들이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공동체들이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새로운 모델로 설정하게 되길 바랍니다.
겸손의 리더십, 진지하고 인격적인 소통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장으로서의
우리 공동체를 통해 세상의 모든 공동체들이
다시금 활성화되길 바랍니다.
공동체가 동요되고, 공동체가 분열되고,
결국 공동체가 와해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공동체 구성원 각자인 우리들이
모든 것을 공동체에 내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내어놓음’으로 인해 공동체는 급격히 약화됩니다.
생명력의 결핍이 뒤따릅니다.
‘내어놓음’이란 자양분 없이 절대로
공동체는 활짝 꽃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공동체는 강점이나 약점, 성공이나 실패,
희망이나 좌절,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데서 비롯됩니다.
안면보시(顔面普施) /김현숙 수녀님
등불! 빛은 밝음과 따뜻함 그리고 확산의 속성이 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스스로 퍼져 나간다. 이는 다른 사람을 비추기 위해서다.
지금은 옛 정취로 남아 있는 호롱불. 학창 시절 늦은 귀갓길,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올 때 우리 집 대문에서 비쳐오는 불빛만 보아도
긴장했던 다리의 힘이 확 풀리며 안도의 큰 숨을 쉬곤 했다.
그리도 밝게 빛나던 등불이 이젠 대낮에도 어느 사무실이나 켜져 있건만
밝음과 따뜻함을 쉽게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빛이 내 시야와 가슴에 담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빛의 강도가 아무리 높다 해도 안목이 더 높아지지 않고 인정이 메마른 탓일까?
스스로 누군가에게 빛을 밝혀주려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도 없고, 또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는 부유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다만 무언가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무언가 나누어 주려는 마음보다
앞서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나눈다고 할 때 좋은 것, 나눌 만큼 풍요로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또 앞서기 때문이다.
언젠가 상담 워크숍에서 자신의 life story를 나눈 기억은 아직도 내 영혼을 흔든다.
한 자매님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장기를 기증하듯이 자신의 상처를 나누겠다고 하면서
아픔과 수치로 점철된 자신의 깊은 생채기를 보여주었다.
자신의 아픈 과거와 현재를 우리에게 선물로 나눈 것이다.
나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생각했다.
자매님을 통해 그 자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아픔과 결핍을
서로를 위한 선물로 나누게 되었다.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간증(干證)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보시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선물로 기꺼이 내놓는 것임을 배웠다.
보시 중에 으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안면보시(웃는 얼굴)라고 했던가!
나의 아픔과 상처를 나눌 수 있다면 밝고 따뜻한
등불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등불처럼 환하게 웃어보자.
양극화의 해법 /오상선신부님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
즉 양극화 문제이다.
부자는 더욱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는 더욱더 가난한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인류가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 중의 하나 일지도 모른다.
제도상의 보완을 통하여 각 나라마다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지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새정부에게 경제활성화를 기대하고는 있지만
경제활성화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더욱더 가속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나는 문득
양극화 문제는
바로 부익부 빈익빈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오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로
부익부 빈익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이 아니라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을 말하는 것이다.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해결책은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숙고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나누면 나눌수록,
주면 줄수록 더욱더 풍요로워지는
영적인 부자됨의 신비는
경제적, 물질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는
정반대 현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측면의 부익부 빈익빈은
서로 자기 것을 챙기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은
서로 자기 것을 버리고 주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나누면 나눌수록
영적으로는 더욱더 가진자가 되고
자기 것으로 챙기면 챙길수록
영적으로는 매마른 영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스승 예수님의 해법은
인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절묘한 해법인가!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이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문제시하고 아파하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가
스승 예수의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에 대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실제로 영적인 풍요를 위한
나눔의 삶에 매진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이것을 하지 않고
정부가 무슨 답을 제시해 주길 바라고
부자가 회개하여 빈자에게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결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은
<너희가 해 주어라!>고 하신다.
우리의 영적인 풍요의 삶은
인류가 안고 있는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리라.
오늘
나는 무엇을 주고, 나눔으로써
영적인 부자가 될 것인가?
받으려 하지말고,
나의 것으로 챙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주고, 나누고, 베품으로써
나의 영적인 풍요를 체험해 보자.
이를 체험하는 크리스천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고, 기쁨이 있는
그런 세상으로 한발자욱 더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보스코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영적인 부자가 아니었겠는가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조욱현신부님
등불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등불은 어두운 곳에서 밝혀주는데 그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낮에 등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밤에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가 바로 감추어두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드러내 보이고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려할 때에 때로는
박해를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진리의 반대 세력이 그것을 막으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진리는 드러나게 되고, 진리가 옳다는 사실이
밝혀져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감추어 둔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말씀이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이 지금은 당장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불안한 상태에서 살게 된다.
그렇게 순간을 피하는 것이라도
하느님 앞에 감추어진
비밀로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실수를 하고 죄를 짓게된다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등불을 외면하면,
즉 진리를 외면하게 되면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리를 받은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감추거나
가리지 말고 외면하지 말아야 하겠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비추는 등불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사는
생활을, 다른 이들을 비추어 증거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빛으로서 증거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을 통해서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복음 한 말씀을 가지고도 빛을 낼 수 있다,
아무리 짙은 어두움도 성냥불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냥불빛에 어두움은 서서히 걷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 때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이러한 겸손된 삶을 청하자.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 ”
어두운 거리 비추는 작은 등불처럼 /양승국신부님
아이들과 목청 터져라 즐겨 부르는
18번 생활성가가 한 곡 있습니다.
하도 많이 부르다보니 기억력이 나쁜
저까지도 그 가사를 다 외울 정도입니다.
김태진 신부님의 곡
‘하늘의 태양은 못 되더라도’입니다.
가사 말이 참으로 예쁩니다.
“어두운 거리 비추는 작은 등불처럼
내 주위의 사람에게 빛을 줄 수 있다면
나의 한 평생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나의 사랑으로 빛을 줄 수 있다면(...)
하늘에 태양은 못 되도 밤하늘 달은 못 되도
주위를 환하게 비춰주는 작은 등불되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에 관련된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등불, 요즘 우리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추억속의 물건이 되었지만,
등불 생각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따뜻했던 지난 시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다시금 열심히 살아
가야겠다는 힘을 주는 물건입니다.
오늘 이 시대,
어둔 거리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된다는 것,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제가 만난 많은 아이들,
환한 대낮의 밝은 거리보다는 약간은 음침하고,
약간은 퀴퀴한 어둔 거리를 선호하더군요.
당당하게 대로를 활보하기보다는 뒷골목으로 숨어듭니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를 어둠의 세계로 몰고 갑니다.
자신을 어둠의 세력에 속박시킵니다.
영화를 보여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미 넘치는 가족영화나
감동적이거나 서정적인 영화를 보여주면
다들 괴로워합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적어도 100명 이상 죽어나가는 영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영화는 이게 ‘웬 떡이냐’며
화면 앞으로 바짝 다가갑니다.
이런 아이들을 가끔씩 정돈되고,
포근하고, 밝은 분위기로 끌고 나오면
엄청 어색해합니다.
이런 상황은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밝고, 건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보다는
어둡고, 폭력적이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이런 분위기 앞에서 작은 등불로 선다는 것,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아 보여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상식이 무너지는 상황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걸고,
‘그건 아닙니다. 이렇게 합시다.’ 라고 말했을 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너나 잘하세요!”
등불로 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모진 박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손가락질도 견뎌내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꿋꿋이
나는 주님께서 제시한 이길,
내가 기꺼이 선택한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간다는 의연함이 필요합니다.
어둔 거리의 등불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점점 무너져만 가는 상식과 도리의 선을
다시금 회복하자는 눈물어린 예언자적 호소입니다.
극단적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서 탈피하자는,
그래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는 외로운 부르짖음입니다.
등불이 어둔 거리에서 지속적으로
활활 타오르기 위해서는
넉넉한 기름이 가장 기본입니다.
넉넉한 기름이란 바로
활발한 성령의 현존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흘러넘치는 자비입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연민의 마음입니다.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 잡아
보겠다는 우리의 적극적인 의지입니다.
2011.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히브10,19-25 마르4,21-25
전례와 삶 /이수철 신부님
오늘은 전례와 삶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전례를 통해 꼴 잡혀 가는 삶이요
삶을 통해 실현되는 전례입니다.
전례 없는 삶은 맹목이고 삶 없는 전례는 공허합니다.
사람만이 전례를 지닙니다.
전례 없으면 본능의 욕망만 남아 사람 되기가 힘듭니다.
관혼상제의 유교 전례가 사라진 뒤 대체할
전례가 없어 혼돈된 인간 삶입니다.
가톨릭의 힘은, 깊이는 전례에 있습니다.
2000년 전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교회의 뿌리에 닿아있는 가톨릭 전례입니다.
무엇보다 긴요한 게 전례의 삶화요 삶의 전례화입니다.
오늘 저는 1독서의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서 미사전례를 연상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의 은총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는
미사를 통해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을
우리에게 활짝
열어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인
공동체를 다스리는
위대한 사제인 예수님이 계십니다.
바로 그 위대한 사제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드리십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주님 대전에 나아갑시다.
그리스도의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마음은 깨끗해졌고,
우리의 몸은 맑은 은총의 물로
말끔히 씻겨 졌습니다.
믿음과 더불어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십시다.
또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 삼덕을
굳건히 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영성생활은 습관입니다.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습관화하며 서로 격려합시다.
끊임없이 바치는 습관화된 공동전례의 은총이
공동체는 물론 각 개인을 지켜줍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저절로 실현됩니다.
숨겨진 것이나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공동전례의 수행에 충실할 때 저절로
등경위에 빛나는 등불 같은 삶이요,
그리스도의 현존 또한 투명하게 드러나
공동체도, 공동체의 형제들도
주님의 투명한 현존이 됩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끊임없는 공동전례를 통해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할 때,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더욱
믿음, 희망, 사랑 풍요한
영적 부자의 삶이 됩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너희는 새겨들어라.”
주님은 매일 미사를 통해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우리에게
좋은 믿음과 희망, 사랑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강영구신부님
온 세상을 두루 밝히는 큰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이 갈릴래아, 유다, 예루살렘, 에돔과 요르단강 건너편,
띠로와 시돈까지 방방곡곡에 두루 비치고 있다.
생명의 빛, 자비의 빛, 희망의 빛, 진리의 빛이 온 누리를 비추자
수많은 사람들이 빛을 향해 나왔다. 그리고
그 따뜻함과 밝음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은 치유를 받아 건강을 되찾게 되었고,
생명의 불이 꺼져가던 사람들은 새 생명의 씨앗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 살던 사람들도 희망을 불꽃을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예수로 인해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빛의 근원이 어디일까?
예수 자신에게서 그 빛이 나오는 것일까? 아니다.
예수의 빛은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철저히 하느님께 귀의한 사람 예수, 그의 존재의 근거는 하느님에게 있다.
하느님이 아니면 예수는 없다.
온전히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으로 충만한 예수,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버리고 하늘의 뜻을 찾고 따르는 예수는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다.
태양이 있어서 밤 하늘에 밝게 떠오르는 달처럼,
하느님의 빛으로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닮고자 하는 사람이다.
스승 예수와 같이 자신을 비워 하느님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그래서 예수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一明)
♪ Shine(1996) - Nulla in mundo pax sincera-David Hirschfelder/Vival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