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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을 1년간인 매주 토요일 52주간동안 함께 걸으며 완주를 했고 남파랑길 일부 구간도 함께 걸으며 우정
을 쌓았으면서 옛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친지(親知) 한 분이 살고있는 가양동에 초대를 받고 가서 4,5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경치나 분위기가 아주 좋은 세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처럼 별유천지(別有天地)가 된 동네를 돌아보니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조선 14대 선조와 15대 광해군의 어의(御醫) 조선조(朝鮮朝)뿐만 아니라 400여년이 지난 현재의 대한민국 한의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奇與)한 동의보감 저자인 허준의 유적지와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거장(巨匠) 겸제 정선의 유적지 그리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향교 명륜당은 교육이 진행됐던 교실로 학생 30~50명이 이곳에서 수업을 받았답니다. 향교는 공자 등 선현에 대한 제사를 모시는 공간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지방 향리들의 자제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고. 명륜당 뒤편으로는 내삼문을 거쳐 대성전으로 연결되는데, 이곳은 공자 등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 남아있고 볼꺼리 얘기꺼리가 많은 궁산에도 올라 한강을 조망하며 동네 한바퀴를 돌아보고는 맛이 제일미(第一味)여서 단골집이라는 염소탕집에가서 영양식으로 점심을 먹고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에는 참으로 좋은 기분을 느꼈답니다.
가양동(Gayang-dong, 加陽洞)
가양동 면적 6.69㎢, 인구 6만 686명(2008)이고. 서울특별시 강서구에 속한 동이며. 북쪽으로 올림픽대로를 끝으로 한강에 접해 있고, 서쪽은 궁산(宮山)의 능선을 경계로 마곡동과 이웃한다. 남쪽은 공항로가 경계가 되어 내발산동·외발산동, 양천길을 경계로 등촌동과 마주하며, 동쪽은 염창동과 접해 있다. 동 이름은 가마동(加麻洞)의 '가' 자와 고양리(古陽里)의 '양' 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가마동은 삼밭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양천군의 중심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현(陽川縣)에 속하였으며,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 때 김포군 양동면 가양리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가양동이 되었고, 1977년 강서구의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법정동인 가양동은 행정동인 가양1~3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양1동사무소에서는 마곡동도 관할하고 있다.
가양3동은 한강변의 뻘이었는데 올림픽대로가 개설되면서 비로소 육지가 된 곳이다. 인구 증가율이 다른 지역보다 낮아 동 면적의 많은 부분이 농경지로 되어 있었으나, 가양지구 개발로 많은 아파트가 들어섰고, 한강변의 습지를 메워 택지를 조성함으로써 탑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굉이말, 향교동, 성재정(城才井), 공암리 등 고유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양리를 굉이(고양이의 방언)말이라고도 하며, 향교동은 양천향교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성재정은 양천고을의 원님만 먹을 수 있는 우물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공암마을은 먹(묵:墨)으로 유명했던 마을로, 지금의 공암(궁산 아래에 있는 구멍 뚫린 바위)이 있는 지역이다.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에 가까운 탑산에는 공암나루터가 있었고, 양천 허씨의 발상지로 알려진 허가바위가 있다.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許浚)의 생가 터와 양천향교도 가양지구 옆에 있다.문화재로는 올림픽대로변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터인 양천고성지(사적 372)가 있다.
출처:(두산백과)
허준(許浚)
조선 중기의 의학자. 선조와 광해군의 어의를 지냈으며 1610년
(광해군 2)에 조선 한방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낸 허곤(許琨)이 할아버지이며, 아버지는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이다. 허론의 정실은 일직 손씨였으며 허준의 생모였던 영광 김씨는 소실이었다. 허준의 이복 형 허옥(許沃)은 임금의 신변보호와 궁궐수비를 책임지는 내금위에 있었고, 동생 허징(許澄)은 서자이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검, 교리 등 내직을 지냈고 선조 때 영의정이었던 노수신(盧守愼)의 사위가 되었다.
허준은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에서 태어났다. 비록 서자였지만 차별받지 않고 명문가 출신답게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경전과 사서 등에 밝았다. 허준이 형제들과 달리 어떤 계기로 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의하면 1569년(선조 2)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하였고, 1573년(선조 6)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9년 이후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양천 허씨 세보》에는 1574년(선조 7)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알려져 있어 두 가지 설 모두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1575년 어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기 시작했으며, 1578년 내의원첨정이 되었다. 1587년 10월에는 태의 양예수(楊禮壽) 등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여 건강이 좋아지자 호피(虎皮)를 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1590년에는 광해군의 두창(痘瘡)을 치료하여 이듬해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어의로서 선조 옆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셨으며, 그 공으로 전쟁이 끝난 후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 1596년에는 광해군의 병을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제수되었고, 이때부터 선조의 명을 받아 양예수 등 여러 의원들과 함께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발발로 의서 편찬이 어려워 보류되었다가 본격적인 편찬은 160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601년 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1606년에는 양평군(陽平君)에 올라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였으나 중인 신분으로는 과도한 벼슬이라 하여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보류되기도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책임 어의로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그는 광해군 대에 주로 의서를 편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의보감》의 완성이다. 1610년 완성된 이 책은 총 25권 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림촬요(醫林撮要)》를 비롯하여 중국측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된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다. 이 책은 일본과 중국에까지 전해져 중국판 서문에는 ‘천하의 보(寶)를 천하와 함께한 것’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跋文)에서는 ‘보민(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醫家)의 비급’이라 평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고, 2009년 7월 31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는 또 《구급방(救急方)》을 언해한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2권, 《창진집(瘡疹集)》을 개정하여 언해한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2권,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개편하여 언해한 《언해태산요집(諺解胎産要集)》을 비롯하여 《벽역신방(辟疫神方)》《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등의 저술이 있다. 죽은 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추증되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허준이 저술한 의학서
동의보감 | 1610년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이 저술한 의학서적 《동의보감》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다. |
동의보감 | 1610년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이 저술한 의학서적 《동의보감》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다. |
동의보감 | 1610년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이 저술한 의학서적 《동의보감》의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이다. |
벽역신방 | 1613년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이 전염병 치료를 위해 편찬한 의학서이다. |
신찬벽온방 | 1613년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이 전염병 치료를 위해 편찬한 《신찬벽온방》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다. |
신찬벽온방 | 1613년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이 전염병 치료를 위해 편찬한 《신찬벽온방》의 허준박물관 소장본이다. |
언해태산집요 | 1608년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이 출산에 관한 처방과 치료방법을 엮어 간행한 《언해태산집요》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다. |
언해태산집요 | 1608년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이 출산에 관한 처방과 치료방법을 엮어 간행한 《언해태산집요》의 한독의약박물관 소장본이다. |
찬도방론맥결집성 권1, 3 | 1612년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이 중국 육조시대 고양생(高陽生)이 쓴《찬도맥결》을 개편하여 간행한 의학서이다. |
언해두창집요 | 1608년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이 편찬한 두역(痘疫) 처방에 관한 의학서이다. |
참조항목
출처(두산백과)
겸재 정선(謙齋 鄭敾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년)이 살던 시대는 진경시대(眞景時代)이다. 진경시대는 숙종대에서 영조대까지인데 겸재의 활동기인 영조대에는 진경시대 중에서도 전성기다. 진경시대란 조선 후기 사회가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 문화인 진경 문화를 이루어 낸 시기를 의미한다. 이 문화의 주도자는 왕조시대의 특성상 군주인 숙종과 영조, 정조지만 구체적인 문화 현장에서 당시대가 진경시대임을 작품으로 실증해 준 이는 정선이다. 그래서 그는 화성(畵聖)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조선의 금수강산이 붓끝에서 완성되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정옥자)
양란 후 조선 사회는 전란 후의 혼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상처받은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안을 강구했으니 명ㆍ청이 교체된 세계 질서 재편기에 무력으로 중원을 제패한 청나라의 야만성을 부각시켰다. 청이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동맹국인 조선을 선제 공격한 것이 병자호란이므로, 조선은 침략자인 청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고취하는 것으로 전쟁 후유증 극복의 장치로 삼았다.
또한 평화 공존하는 세계 질서를 무력으로 파괴한 청나라는 세계(당시의 동아시아)의 주도국이 될 수 없다고 치부하고, 조선이야말로 예의를 숭상하고 인륜을 지키는 도덕적 문화 국가의 핵심이라 자부하면서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임을 천명했다. 조선 문화의 본질은 평화와 애경을 기본으로 하는 자연 친화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문화의 주도층인 지성들이 숭상하는 선비 정신과 검소 질박한 삶의 방식이 그대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생활 양식의 주류가 되었다.
진경을 절묘하게 묘사한 산수화의 수요가 폭증한 것도 이때였다. 조국 산천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일컬으며 산천 경개 유람하는 국토순례가 유행을 했는데, 왕을 비롯한 궁중 사람들이나 여행 할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이 그 사실적 산수화의 수요자였다. 그러한 문화계의 흐름 속에서 진경산수화의 화법을 완성한 화가 중의 화가가 겸재 정선이었다. 한호는 조선 전기에 유행하던 조맹부의 송설체를 넘어 왕희지체와 안진경체의 재해석을 통해 조선 고유의 서체를 이루어 냈다.진경산수화가 겸재의 손에서 완성되기까지 조선의 독자성을 형성하기 위해 고심한 여러 인사의 사상적, 문화적 움직임이 있었다. 문학에서는 송강 정철(鄭澈, 1536~1593년)이 가사문학으로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열었고, 글씨에서는 석봉 한호(韓濩, 1543~1605년)가 송설체를 뛰어넘는 조선 고유 서체인 석봉체를 이루어 냈으며, 그림에서는 창강 조속(趙涑, 1595~1668년)이 전국을 유람하면서 경개 절승의 감흥을 읊고 그림으로써 진경시화의 기틀을 닦았다.
조선 왕조는 중국 송나라에서 형성된 성리학을 국학으로 채택하여 성립한 국가이다. 따라서 조선 왕조의 입국 체제는 송나라의 제반 문물을 모방한 것으로서, 불교 예술이 발달한 고려의 미술이 불상 조각을 중심으로 발달한 점과 비교된다. 고려 말에 성리학과 함께 원나라에서 도입된 중국의 강남 문화는 송의 한족 지식인들이 이어온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였다. 이 문화의 특징은 사대부의 교양 필수로서 시ㆍ서ㆍ화를 겸수하는 것이었다. 이때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서 조선 전기 서체의 전범이 되었듯이 강남의 산수화가 조선 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의 금수강산이 붓끝에서 완성되다
출처:(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한강 옆, 유적도 만나고 풍류도 읊고 '양천향교 & 궁산
삼박자를 갖춘 여행지가 있다. 유적, 풍경, 미술관 등 보고, 배우고, 감동할 수 있는 공간이 어우러져 있으면 이 또한 삼박자를 갖춘 여행지이다. 게다가 교통이 편리하고 인근에 맛집 골목까지 있다면 금상첨화다. 7월 무더위에 멀리까지 발품을 팔 엄두가 나지 않으면 서울 강서구의 양천향교와 궁산을 찾아볼 일이다. 궁산 자락 아래에는 겸재정선미술관도 위치해 있다. 각 여행 공간들의 대의부터 짚어보자. 양천향교는 서울에 위치한 유일한 향교로서 그 가치가 높다. 양천향교를 넉넉하게 품어 안는 산이 궁산이다. 한강을 바라보고 솟은 낮은 산이지만, 임진왜란 때 의병과 관군이 진을 치고 왜적에 맞서 싸웠던 곳이다. 최근에는 옛 산성터를 발굴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궁산에 오르면 겸재 정선이 한강의 풍취에 반해 산수화를 남긴 소악루라는 누각이 있다. 궁산을 내려오면 그 여운을 이어 겸재정선미술관으로 향한다.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향교
이곳 구경은 일단 양천향교에서 시작한다. 서울 한 귀퉁이에 향교가 있는 것도 새롭지만, 제법 옛 모습을 갖추고 있어 더욱 인상 깊다. 양천향교는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에 있다. 주택가를 지나면 불현듯 고풍스러운 기와의 윤곽이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홍살문 너머 외삼문의 자태가 예스럽다. 향교를 방문하기 전 상식 한두 가지를 챙기면 동행한 꼬마들에게 제법 멋진 설명이 가능하다. 홍살문은 충신, 효자, 열녀 들을 표창해 임금이 그의 집이나 마을 앞에 세우게 한 붉은 문이다. 향교 앞 외삼문은 문이 3개인데, 들어설 때는 동문, 나설 때는 서문을 이용하는 게 관례다. 가운데 외신문은 제례 때만 개방된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이곳에서 공자를 추모하는 석전대제가 열린다. 석전대제는 중요무형문화재 85호로 지정돼 있다. 외삼문 너머 드러나는 명륜당의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명륜당은 직접 교육이 진행됐던 교실로 학생 30~50명이 이곳에서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향교는 공자 등 선현에 대한 제사를 모시는 공간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지방 향리들의 자제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다. 명륜당 뒤편으로는 내삼문을 거쳐 대성전으로 연결되는데, 이곳은 공자 등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출처:(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한국관광공사)
2021-11-23 작서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