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문익(蔣文益)
장문익(蔣文益) 1596년(선조 26)~1652년(효종 3). 조선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아산(牙山) . 자는 명보(明輔) , 호는 조경당(釣耕堂) . 부사 장효범(蔣孝範) 의 증손이다. 어려서 목장흠(睦長欽)에게서 수업을 받았고, 형제와 함께 창원 .낙빈(洛濱)에 복거하면서는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드나들었다.
당시 사류들 사이에 중망이 있어,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호소사(號召使)로 의병을 총괄하던 스승 장현광에게 발탁되어 12읍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뒤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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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조경처사 장공 묘갈명 병서(釣耕處士蔣公墓碣銘 幷序)
신묘년(辛卯年, 1651, 효종 2)에 내가 밀양 부사가 되었을 때 예림 동주(禮林洞主) 장문익(蔣文益) 명보(明輔) 군과 함께 놀았는데, 용모가 준수하고 말투가 한아(閒雅)하며 흉금이 깨끗하고 시원하여 좋아하고 공경하여 곧바로 마음에 두고 친하게 지냈다.
이듬해 임진년(壬辰年, 1652, 효종 3)에 내가 체임되어 돌아왔는데, 12월에 공이 세상을 떠났다. 생사가 갈리고 불현듯 십 년이 흘렀는데, 공의 맏아들 장희적(蔣煕績)이 찾아와서 묘갈명(墓碣銘)을 요청하였다.
아, 나는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지만 차마 공의 묘갈명을 쓸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세계(世系)가 아산(牙山)에서 나왔는데, 선조는 중국 사람이다. 비조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로 신경위대장군(神慶衛大將軍) 장서(蔣) 아래로 8대가 현달하여 벼슬에 올랐다.
증조 장효범(蔣孝範)은 통정대부로 연안 부사(延安府使)를 지냈고, 조부 장경신(蔣敬臣)은 성현 찰방(省峴察訪)을 지냈다. 부친 장영(蔣瑛)은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고, 모친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훈련 봉사(訓鍊奉事) 박충헌(朴忠憲)의 따님으로 만력 병신년(丙申年, 1596, 선조 29)에 낙성(洛城)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승지(承旨) 목장흠(睦長欽) 형제에게 수업하였는데, 잘 기억하여 외우고 글을 잘 지어 크게 인정을 받았다. 신해년(辛亥年, 1611, 광해군 3)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 계축년(癸丑年, 1613, 광해군 5)에 편모를 받들어 밀양(密陽)으로 돌아왔다. 창원 부사(昌原府使) 손기양(孫起陽)에게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매우 공을 사랑하여 몸소 낳은 자제(子弟)처럼 대해주었다.
무진년(戊辰年, 1628, 인조 6)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묘소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지내면서 날마다 곡을 하며 묘소를 보살폈는데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만두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번 해시(解試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번번이 성시(省試)에서 낙방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633, 인조 11)에 명경과(明經科)에 이틀 동안 응시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다. 고례(故例)에서 보관(補官)에 해당되기에 친구가 머물렀다가 벼슬에 나아가라고 권면하였으나 공은 옷깃을 떨치고 돌아갔다.
창원(昌原)의 낙빈(洛濱)에 터를 잡아 살면서 바위 사이에 집을 짓고 연못을 파고 나무도 심어 마음을 부쳐 감상하며 당호(堂號)를 조경(釣耕)이라 편액하고 밤낮으로 그곳에서 거처하며 초연히 자득한 정취가 있었다. 매번 새벽닭이 울면 정자(程子)의〈사물잠(四勿箴)〉을 외우고 새벽에 일어나 옷과 두건을 가지런히 하고서 성현의 글을 읽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두 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아 마음을 제어하고 몸을 다스리며 보고 느끼는 사이에 얻은 것이 많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를 다하였고 제사를 받듦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우애(友愛)가 순수하고 돈독하였다.
백씨(伯氏)가 역병에 걸려 죽었을 때에 온 집안사람들이 달아나 피하였으나 공이 홀로 들어가 염빈(斂殯)하였다. 막내 동생이 풍병(風病)에 걸렸을 때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고 잠깐 동안도 잊고서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행의(行義)가 널리 드러나 원근에서 모두 칭찬하며 감복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인조 5)]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인조 14)]의 변고에 공을 추대하여 의병장(義兵將)으로 삼았고, 또 추대하여 12읍(邑)의 의병장이 되었으니, 공이 사류(士類)에게 존중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고을 사람들이 여러 번 효우(孝友)를 조정에 알려 10여 차례 의망(擬望)에 올랐으나 끝내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지 못했으니 천명이다.
부인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군자감 참봉 김득지(金得地)의 따님으로 4남 4녀를 낳았다. 첫째 희조(煕祚)는 1남 4녀를 두었고, 둘째 희적(煕績)은 1남 3녀를 두었고, 셋째는 희업(煕業)이고, 넷째는 희백(煕伯)이다. 딸 넷은 강전(姜鐫)ㆍ손여직(孫汝稷)ㆍ박태한(朴泰漢)ㆍ손석보(孫碩輔)에게 시집갔다. 공의 묘소는 밀양부(密陽府) 동쪽 만어산(萬魚山) 율동(栗洞)의 오향(午向) 언덕에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순수하고 순박함이 / 粹而醇
공의 성품이고 / 公之性
민첩하고 훌륭함이 / 敏而懿
공의 행실이네 / 公之行
그런데도 복록을 누리지 못했으니 / 然而不祿
운명을 어찌 하겠는가 / 奈何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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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목장흠(睦長欽) 형제 :
목장흠(1572~1641)의 형 목서흠(睦敍欽, 1572~1652)과 아우 목대흠(睦大欽, 1575~1638)을 두고 이른 말이다. 본관은 사천
(泗川)으로, 목장흠의 자는 우경(禹卿), 호는 고석(孤石)이다. 1599년(선조 3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도승지에 올
랐다.
목서흠의 자는 순경(舜卿),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610년(광해 2)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승지, 우승
지, 예조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목대흠의 자는 탕경(湯卿), 호는 다산(茶山)ㆍ죽오(竹塢)이다. 1605년(선조 3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은 광주 목사(廣州牧使)ㆍ연안 부사(延安府使)ㆍ예조 참의(禮曹參議) 등을
지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다산집(茶山集)》이 있다.
[주02] 손기양(孫起陽) :
1559~1617.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聱漢)이다. 1588년(선조 21)에 문과에 급제하여, 1610년(광해군
2) 창원 부사를 지냈다. 1612년(광해군4)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오한
집》이 있다.
[주03] 염빈(斂殯) :
염은 죽은 이튿날 시체에 옷을 갈아입히는 것이고. 빈은 시체를 입관(入棺)한 뒤 장사할 때까지 안치(安置)하는 것이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