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범우(李範雨, 1892~1969) 애국지사
이범우 애국지사는 1919년 3.1의거 당시 제천군청 잠업계 조수로 근무 중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할 제천군대표로 뽑혔다.
상경한 이범우는 1주일 동안 서울에 있으면서 평소에 사숙하던 최 린(崔 麟)을 만나 만세의거를 권유받았다. 최 린은 3.1의거를 주도한 천도교 계열의 인사로 민족대표33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독립선언서 10장을 얻어 검문을 피하기 위하여 차편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귀향하는 길에 처가가 있는 횡성의 한영고와 원주의 이연호 등에게 만세의거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10일 만에 제천에 도착한 이범우는 권종필, 이기하, 전필현 등 가까운 친구들과 만세의거를 모의하는 한편 부명보통학교 후배인 장두성을 단양으로 보내어 봉기를 부추키고 영월 금마리에 사는 차은성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하여 금마리만세의거를 촉발시켰다.
제천에서의 만세의거는 제천장날인 4월 17일(음력 3월 17일) 예정되어 있었다. 하루 전날 부명보통학교 후배들과 함께 하소동 용바위 아래에서 태극기를 만들던 장용근, 이선동, 이기택 등이 체포되고 1,200여 장의 태극기가 압수되었다.
그러나 이범우 등은 예정대로 만세의거를 결행했다. 1,000여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고 부명보통학교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이날 이범우 외 주모자가 모두 체포되었고 일본군 수비대의 총격으로 4명 사망 1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일로 이범우는 보안법 위반혐의로 10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석방 후 1920년 5월 초 의림지에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 4명과 함께 간도로 건너가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재차 옥고를 치른 후 계속된 감시원들의 삼엄한 눈초리 속에 구속된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참조 : 제천향토문화대전
제천 의림지 애국지사 이범우선생 추모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 이 추서된 이 선생은, 제천 출신이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 서울에서 태극기 10장을 얻어 귀향해 동지들을 규합,
4월 17일 장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 시위 행진을 주도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연행돼,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처>미디어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