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초대 개인전 - 푸른밤
기간 : 2022년 5월 1일 (일) ~ 5월 15일 (일)
(월요일 휴관)
오프닝 : 5월 1일 (일) 3PM
장소 : 갤러리 자작나무
(www.galleryjjnamu.com) 02.733.7944
경력
개인전 10회
2022 푸른밤 (갤러리 자작나무, 서울)
2022 Look Back (더숲갤러리, 서울), 그룹전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갤러리 두)
2021 내가 살고 싶은 곳 (갤러리 자작나무, 서울)
2019 선물 (갤러리 자작나무, 서울)
2018 사랑 (갤러리 자작나무, 서울) / ASYAAF_Hidden Artists Festival (DDP, 서울)
2017 어제.오늘.내일 (유디갤러리, 서울) / 불이(不二))여성과 자연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2015 Look Back (카페성수, 서울) / COAF (웰리힐리파크)
2014 꽃과 사람에게는 그리움이 있다 (갤러리 자작나무, 서울)
Home Table Deco Fair (Coex, 서울)
2012 벗어남 (갤러리 자작나무, 서울) / BAMA (Centum Hotel, 부산)
2010 KASF (SETEC, 서울)
2009 Salon des Arts Seoul (aT center, 서울)
2008 그를 만나다 (목인갤러리, 서울)
전시 서문
무구한 언어로 그리기
김주희의 열 번째 개인전 <푸른 밤>을 두고 ‘내면의 풍경’, ‘관조와 정취’ 같은 독법으로 풀어나가기는 쉽다. 다만 문제는 이 작업들이 과거의 정취를 반복 재생하는 필름이나 이상적 낙원을 제시하려는 조감도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로 제주의 풍경이긴 하나 ‘제주’가 제공하는 편리한 기호들, 가령 전원적/이국적 이미지, 토속성, 생태주의 등에 기대어 있지는 않다. 말하자면 난만은 없으나 천진하고, 순진보다는 무구에 가깝다.
김주희의 작업을 ‘어린아이의 방식’이라 말한다면 페인팅 기법이나 기술적 관점이 아니라 매체를 다루는 언어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보다 정확한 소통을 위해 관용어와 상투성을 필사적으로 피해가며 굽이굽이 돌려 장황하게 설명하는 방법도, 각종 현학의 인용과 참조를 경유해 신뢰를 빌려오는 방법도 있겠지만, 때로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 닿고자 하는 바가 근원적이고 보편적일수록 더욱 그렇다. 산문의 방식이 아니라 운문의 방식이, 정의가 아니라 아포리즘의 방식이 덜 훼손되고 덜 왜곡된 진실의 방법이 된다.
환대와 환송, 1인용 풍경
그림을 위한 시선, 가장 원론적인 접근은 안에서 밖, 내면의 정서를 외부로 투사하는 방식이다. 작가의 이전 작업들도 그렇다. 꽃과 나무에 자신을 의탁하거나, 인간을 집이나 그릇으로 상징 삼거나, 캐릭터화(deformation)된 눈사람에 성격을 부여하거나 등. 이때 시선은 관찰일 수도 응시일 수도 있는데, 굳이 그의 작업을 한쪽으로 기울여 말하자면, ‘(가만한) 관찰’ 쪽에 가깝겠다. 가급적 작고 일상적인 소재를 택해 오래 들여다보되(관찰), 소재 너머의 개념에 도달하려는 목적, 예컨대 통찰이라는 이름으로 사물의 외피를 뚫고 지나쳐보려는 의도(응시)는 없다. 단지 사물의 형상에서 이미지가 풀려나올 때까지, 윤곽이 흐려지고 의미가 투명해질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말하자면 맹목적이고 원초적인 앎, 게슈탈트를 이루는 “1인분의 시선”.
이번 전시에서도 그 시선의 무구함은 여전한데, 출입의 방향이 반대다. 풍경이라는 외부에 작가의 감정을 덧입히는 대신 풍경이 작가의 내부로 들어왔다. 이전 작업에서 자연 속에 ‘집’으로 표상된 작가 자신을 투영했다면, 이번에는 그 집의 안과 밖, 내피와 외피를 뒤집어서 투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의 인간이 거주하고픈 공간을 그린 것이 아니라 공간을 데려와 그 풍경이 그림 속에 거주하게 한다. 세잔을 빌리자면 이렇게 쓸 수도 있겠다. “풍경은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쉽게 비교해, 더 이상 그림 속에 작가 자신을 기입하지 않고, 작가의 내면으로 ‘자연히’ 들어간 풍경이 있다.
이런 식의 형용이 가능하다면, 이곳은 ‘아늑한 자연’이다. 먼바다와 하늘, 수평선이 그려질 만큼 트인 공간이지만 자연의 스펙터클이 강요하는 압도나 숭고가 없는 풍경. 그의 화면이 몸에 꼭 맞는, 딱 한 사람을 위한 창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를 다시 “1인용 풍경”이라 명명하면 어떨까. 깨끗이 정돈된, 비워서 조용한 ‘한 사람을 위한’ 공간이 있다. 작가의 내면에 거주하는 풍경이라 해서 비밀정원이나 낙원은 아닌데, 그렇다면 이를 휴양의 공간으로 보아도 좋겠다. 스스로 거주하는 풍경에 우리가 들어가 머무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임의의 치유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 휴양이고, 이때 휴양은 환대의 한 방식으로 읽힌다. 작심 없이, 얼마든지 머물다 갈 것.
이렇게 읽을 때 나란히 놓인 인물들 역시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 자연히 들어와 머물다 가는 것. 환대의 연장은 환송이고, 풍경 작업이 지금 문을 두드리는 삶의 순간을 맞이하는 공간이라면 인물 작업은 한때 머물렀던 시간들을 정성껏 갈무리하는 순간이다. 작가가 오랜 시간 함께해온 명상의 과정과도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인위와 작심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봄(seeing)’을 위해 지각의 그릇을 비우는 것, 비움은 선결 과제다. 오래도록 ‘나’로 살아온 나, 관성대로 사고하며 항상 그 중심에 있던 ‘나’의 상을 지울 때 그 자리에 풍경이 들어와 머문다. 자연히 지나는 시간을 잘 맞이하고 잘 보내기. 머무는 동안이 풍경이고, 이를 회화로 옮겨내는 작업이 환대이며 환송이다.
머무는 풍경: 빛과 빛 사이
이번 전시에는 <푸른 밤>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밤의 풍경 속에서 하늘과 바다, 꽃과 나무, 새와 인물 들은 밤의 어둠에 묻히거나 삼켜지는 일 없이 선명하다. ‘푸른 밤’의 시간에는 여전히 빛이 있다. 해 질 녘 흐릿하게 남은 빛이거나 달의 은근한 빛, 혹은 다시 밝아오기 직전의 희미한 빛이지만 무엇도 숨기거나 가리지 않는 분명한 빛이다. 이를 빛과 빛 사이의 시간(twilight)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오고가는 사이에 머무는 풍경. 휴양지는 밖에 있지만 휴양은 안에서 일어난다. 어느 밤, 오롯이 한 사람을 위한 풍경에 마음껏 머물다 가시기를.
글_김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