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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0 - 주원장 홍건적에 들어가 군웅을 물리치고 명나라를 건국하다!
역사에서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로 부터 이어 내려온 가문으로 세력과 토지에 경제력을 갖춘 금수저나 은수저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경우가 많으니.... 한반도에서는 온조나 비류에 왕건과 이성계가 그러하고 중국
에서는 주 무왕에 진시황과 항우며 원소나 조조에 손권 그리고 후한의 광무제와 송나라 조광윤 등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드문 예이기는 하나 흙수저 출신으로 오직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나라를
세우기도 하니.... 주몽이나 김수로에 석탈해가 그러하고 중국에서는 한(漢) 나라
를 세운 유방과 절의 탈발승으로 홍건적에 들어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그러한가 합니다.
명 (明) 나라는 1368년에 주원장이 건국한 한족 (漢族) 최후의 통일 왕조이며 또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화북지방이
아닌 강남 지역에서 출발해 통일 왕조를 세운 국가이기도 한데 건국 초기의 수도는 강남의 난징 이었으나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하였으며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1368년 부터 1644년 까지 276년간 존속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나라를 땅의 이름이 아닌 해(日) 와 달(月) 이 합쳐진다는 추상적인 이름인 명(明) 을 국호로 정한 첫 번째
나라인데, 이는 태조 주원장이 믿었던 백련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백련교에서는 흑암 (黑暗) 이 물러가고
광명 (光明) 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흑암인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나라라 하여 명이라는 국호를 쓴 것 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왕조를 건국하면 기존에 하사받거나 불리던 작위가 고스란히 황제로 격상되면서, 봉지가 왕조의 국호로
격상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원장은 황제가 되기 전 오왕 (吳王) 이었음에도 이를 쓰지 않았으니, 오(吳) 라는
글자에 강남을 가리키는 지역색이 너무 강하게 들어 있어서 중국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건국 초기에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원과 내몽골 남쪽 일부, 만주 일부에 이르는 지역 까지
장악하였으며 15세기 중엽 까지 대대적인 원정을 통해 국가의 위세를 떨쳤으니
조선, 무로마치 막부의 일본, 류큐 왕국, 대월 등이 조공을 하며 사대의 예를 취했습니다.
농민에 의해 건국되고 농민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기도 한데, 주원장이 몽골 제국의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
건국되었으나, 만주족 청나라가 남하해 나라가 어려워지고 폭정으로 농민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역시
가난한 농부인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인 숭정제가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원나라의 초창기 에는 뛰어난 행정가 야율초재가 있었고 지폐가 유통될 정도로 경제가
안정됐지만 이후 쇠락하면서 부정부패가 극심해졌고, 세율 인상과 지정교초
(至正交鈔) 를 대량으로 발행하면서 경제혼란과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 했습니다.
1351년에는 황하의 제방을 쌓는다고 10만명의 농민들을 강제로 징집했으니 폭동을 일으킬 흉흉한
분위기가 일어나 결국 9월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으니.... 곽자흥은 안후이성
펑양현을 함락했고 주원장은 곽자흥 세력에 가담해 군사적 재능을 보여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합니다.
주원장은 1328년 원나라때 안후이성 추저우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원나라는 그 해 에만 진종, 천순제, 문종 세 황제가 즉위하는 혼란기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신하들 처럼 명나라의 개국공신 서달, 탕화, 주덕흥 등은 마을 친구였습니다.
주원장이 17살 때 마을에 가뭄, 메뚜기떼, 전염병이 돌아 부모 형제들이 거의 다 사망했는데...
하나 남은 형은 마지막 남은 쌀알 13개로 죽을 끓여 그에게 넘겨준뒤
굶어서 죽고 중팔(주원장) 만 살아남았으니 굶주렸던 주원장은 살기 위해 절에 몸을 의탁합니다.
결국 음식을 탁발하여 먹는 탁발승이 되었는데 불교 수행의 일환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구걸하는 거지
였으니..... 이때 구걸하던 기억 때문에 주원장은 황제가 된 후 자신에게 올리는 문서에서
스님 승(僧),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 등의 글자를 못 쓰도록 했으며 도적인 홍건적
출신 이었기에 도적과 관련된 글자도 금지했으니, 무심코 썼다가 처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352년 정월에, 호주 정원현의 토호 곽자흥이 호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수만명의
농민이 곽자흥에게 호응했으니 이들은 군대와 종교가 결합하여 곽자흥은
자신이 백련회의 수령이라고 선포했으며 주원장은 25살에 홍건적 생활을 시작합니다.
단 1년 만에 곽자흥의 양녀 마수영과 결혼하고 곽자흥 군단의 2인자가 되는데, 일개 병졸로 입대해 순식간에
지도자가 된 것이니 중팔은 '주 공자' 로 불렸고 이름을 '주원장' 으로 고쳤는데, 호주성의
홍건군은 처음부터 곽자흥과 손덕애를 비롯 5개나 되는 파벌로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 사사건건 대립합니다.
원나라 승상 메르키트 토크토아(탈탈) 가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홍건군의 주장 이이의 서주성을 함락하니
서주성의 백성들은 모조리 도륙을 당했는데 팽대와 조균용의 홍건군은 서주성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호주성으로 들어오니 곽자흥은 지모가 뛰어난 팽대를 우대한 반면 산적 출신 조균용을 무시합니다.
이때 손덕애가 조균용을 부추겨 곽자흥을 제거하자고 하니 조균용은 반란을 일으켜 곽자흥을 포박해
손덕애 휘하 군진의 영창에 가뒀는데, 당시 주원장은 화북에 있었으니 황급히 호주로 달려와
팽대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하니 팽대는 주원장과 함께 부하들을 끌고 가서 파옥하고 곽자흥을 구합니다.
주원장은 사병이 없으면 자신도 위험할수 있다고 생각해 1353년 곽자흥에게 장인을 위해 병사를
증원하겠다며 의심을 피하는 말로 간청한 끝에 고향 종리로 돌아와 병사를
모집하니 서달, 주덕흥, 곽영을 비롯해 700여명이 모인지라 이들을 데리고 곽자흥에게 돌아갑니다.
곽자흥 고향 정원은 호주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정원의 장가보에는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민병 3,000명
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홍건군에 귀부하지 않은 세력으로 주원장이 가서 귀순하라고 말했는데
수령이 거절하자..... 300여명을 거느리고 계책을 세워 수령을 사로잡고 병사 3,000여명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활비산에 주둔하던 민병 800여명도 주원장의 부대로 편입되니 주원장은 밤을 틈타 정원의 횡윤산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 군영을 공격하자 원나라 장수 무대형이 투항하여 마침내 정원성이 주원장의
수중에 들어왔고..... 항복한 병사들 가운데 한족 출신 병사 20,000여명을 뽑아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킵니다.
정원이 함락되자 토호 풍국용과 풍국승 형제가 농민군을 거느리고 투항하자 주원장은 풍씨 형제가 사대부임을 알고
천하를 취할 계책을 묻자 풍씨 형제는 "금릉을 취해 근거지로 삼은후 사방으로 나가 정벌하고 인의를 제창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금은보화와 여색을 멀리한다면 천하는 어렵지않게 평정될 것" 이라고 말하니 참예기무로 삼았습니다.
안휘성 저주로 진군하는 도중 1354년 정원 사람 이선장이 면담을 요청하자 두 사람은 의기가 통했으니
주원장이 예를 갖추고 "천하가 전란에 휩싸였는데 언제 안정을 찾을 수 있냐" 고 묻자
이선장은 한고조 유방을 언급하며 "도량이 넓고 사람을 잘 알아보아 적재적소에
썼으며 함부로 죽이지 않았던 까닭에 군사를 일으킨지 5년 만에 제왕의 대업을 이루었다" 고 답합니다.
"지금 원나라는 기강이 무너지고 사분오열로 분열되었는데 주원장의 고향 호주가 유방의 고향 패현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당신이 고향 선배의 장점을 배운다면 천하는 평정될 것"
이라고 답하자 주원장은 이선장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며 군영에
머물게 하고 문서와 서적을 관장하는 서기의 직책을 맡겼으며 이선장의 책략으로 저주성을 점령합니다.
곽자흥은 조균용을 피해 병사 10,000여명을 거느리고 호주성을 떠나 사위가 있는 저주성으로 입성하자 주원장은
거느리던 30,000명의 병력을 장인에게 넘겼으며.... 원나라 승상 탈탈의 관군이 고우에서 장사성의
군대를 격퇴하고 육합성을 포위하니 주원장은 심복인 경재성과 함께 와양루에 진지를 구축하고 육합성을 도웁니다.
원나라 탈탈이 저주성을 공격해 오자 주원장은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유인작전으로 격퇴했지만
맹호처럼 날랜 원나라 기병의 재침을 우려하여 포로로 잡은 병사들과 노획한
말들을 탈탈의 군영으로 돌려 보내면서 사자를 보내 술과 고기로 원나라 장수들을 위로했습니다.
"나는 다른 도적떼로 부터 저주성을 지킬 뿐인데 왜 더 큰 도적을 쫓지 않고 선량한 백성만 살육하냐" 며 읍소하니...
탈탈은 한학에 정통한 정치가이자 군사 전략가로 우승상 직책을 맡았을때 과거제를 부활시켜 한족 출신의
사대부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할 정도로 국정을 다스리는 안목이 있었으니 주원장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철군합니다.
1355년 주원장이 화주를 함락시키자 곽자흥은 주원장을 총병관에 임명해 화주를 지키게 했는데
곧 곽자흥이 사망하니, 홍건군의 가장 큰 우두머리 소명왕 한림아는 곽자흥의 아들 곽천서
를 도원수, 장천우(張天祐) 를 우부원수, 주원장을 좌부원수로 임명하니 주원장은 푸념을 합니다.
하지만 한림아의 송나라가 위세를 떨쳤기에 주원장도 신하로서 군대를 통솔했는데 강남의 중심 집경로 (集慶路 난징)
를 공격할때 곽천서와 장천우가 전사하니 주원장은 대원수로 승진하고 곽자흥의 군대를 전부 거느리게
되었으며 화주에 주둔한지 얼마 안되어 군량미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장강 남안의 태평과 무호를 공략하기로 합니다.
주원장에게는 수군과 선박이 없었는데 마침 안휘 지방의 소호에 주둔하고 있었던 홍건군의 수군이
주원장에게 귀부 의사를 밝히고 원나라군의 봉쇄를 뚫은 뒤 화주에 도착하자 주원장은
병사와 군마를 배에 태우고 장강을 건너 우저산에 진을 치고 휘하의 장수 상우춘을 선봉에 세웁니다.
상우춘의 저돌적인 공격으로 우저산을 손에 넣은 주원장은 장강 하류 태평으로 진격해 점령한후 성에 입성해
노략질을 엄금하고 백성의 재물을 보호했으며 민폐를 끼치는 병사가 있으면 즉시 참수형으로 다스렸으며
주원장은 태평흥국익원수부를 설치하고 난뒤 스스로 원수의 지위에 오르고 이선장을 수부도사로 임명합니다.
“장사성은 재정이 풍부하고 진우량은 병력이 강했으나 주원장은 내세울 장점이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장사성이나 진우량이 강남의 패자가 되리라고 생각했으나...
주원장은 강남의 선비를 영입해 “북방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화를 회복한다”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주원장은 1356년 집경 (난징) 을 점령한후 응천부 (應天府) 로 개칭한뒤 주변지역을 평정해 세력을 쌓기
시작해 1360년에 용만 (龍灣) 에서 진우량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후, 1363년에는
"파양호 전투" 에서 또다시 진우량에게 대승을 거둔 뒤 4년 뒤인 1367년 오왕 (吳王) 으로
칭왕후 즉위했는데, 삼국지연의에서 적벽 대전은 훗날의 파양호 전투를 모방해 창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원장은 1367년에 장사성 군대를 공격해서 근거지인 평강을 함락했고 저장성 해안의
방국진도 제거한 후에는 1368년 정월 응천부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명나라를
건국한 후..... 서달을 총사령관으로 20만 대군을 진격시켜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함락합니다.
이어서 1371년에는 쓰촨성의 대하를, 1382년 1월 6일에 윈난성의 양왕을 쓰러뜨리고
1387년에는 만주의 나하추를 정복해 요동을 차지하고는 1388년에 북쪽에
북원 마저도 공격했으니 마침내 한족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것입니다.
명나라 건국후 홍무제 주원장은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하고 사회경제 생산력을 회복하며 원나라
가 남긴 불합리한 관행들을 혁파하고 부패 관료들을 벌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른바 '홍무지치 (洪武之治)' 로 경제는 급속도로 회복되었고 국력은 크게 성장했는데,
세금 및 노동력 징수와 방비를 위해 호적과 토지대장을 재편찬했고,
이갑제 라고 하는 향촌 제도를 설치해 백성들에게 효과적인 징세 및 노역을 부과 합니다.
고려의 장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해서 최영과 우왕등을 죽이고는 왕위에 오른후 중추원사 조림을 명에
파견해 신정권의 수립을 알리면서 국호를 개정하겠다는 뜻을 전하니 명태조 주원장이 이를 승인하자
이성계는 원로들과 백관을 모아 의논후 '조선(朝鮮)' 과 '화령 (和寧)' 이라는 두 명칭을 국호 후보로 정합니다.
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등 역사적 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채택되었는데...
화령이라는 지명은 원래 화주목으로 공민왕 시대에 화령부로 개칭되었다가 화령으로 바뀌었으며 국호가 조선
으로 확정한 1393년 이성계의 외조부 출생지 영흥진의 이름을 따서 '영원히 흥한다' 는 뜻인 영흥으로 다시 바뀝니다.
이성계는 1392년 11월 예문관학사 한상질을 다시 명나라에 파견해 조선과 화령 둘 중에서 하나를 국호로
택해줄 것을 청하였으며 이에 명 태조 주원장이 너희 나라 이름을 조선 (朝鮮) 으로 하라고 하명해 이
이름이 국호로 정해지는데, 만약에 주원장이 두 번째를 선택했으면 우리나라 이름은 화령 (和寧) 이
되었을 것인데.... 이성계의 국책은 "작은 나라는 마땅히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 는 사대 (事大) 였습니다.
조선에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도였지만, 명(明) 은 기자조선
(箕子朝鮮) 을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준 것이니.... 공자의 '논어' 에 등장하는
은(殷, 商) 나라의 현인 기자(箕子) 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무지한 백성을 교화시켰으니,
이에 주(周) 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하였다는 '한서지리지' 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국 사람들의 생각은 예나 이제나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고 중국 천자의 제후국 이라는
의미인데..... 주원장으로 부터 500년이 흘러 이홍장과 원세개도 그러했으니 미국은
조선과 수교 하려면 한양이 아닌 베이징으로 오라 했고, 몇 년전에 시진핑은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과거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 라고 말한게 이런 인식이 이어진다는 뜻이라?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인이 와서 조선을 세웠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니 허구라고 봅니다만.... 옛날 고려와
조선 사람들은 이를 수치가 아닌 대단한 영예로 여겼으며 문화대국인 중국에서도 현자가 와서 조선을 세워 무지한
백성들을 일깨웠으니 이를 자랑하고 자부심을 느껴 평양에 단군묘와 기자묘를 짓고 제사를 지냈으니 지금과 다릅니다.
사실 “고조선” 이라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냥 “조선 朝鮮” 인데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 이라고 부릅니다만.... 그러나 이런 이름은 고려시대에 이미 있었으니 일연은 1284년에 지은
삼국유사에서 기자조선을 “후조선 後朝鮮” 이라 하고, 단군 조선을 고조선 古朝鮮 이라고 구분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이라는 국호는 민족주의적인 역사관과 사대주의적인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는 이름이었으니 유교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하여 건국한 조선왕조는 왕도 정치의 구현과 중국을 받드는 사대관계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했으니 기자동래설을 명예롭게 생각해 긍정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며 조선의
왕들은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자신을 "신(臣) 아무개" 라고 적고 설날에 서쪽 북경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습니다.
명은 원나라 중서성을 폐지해 재상을 없애고 권한을 쪼개 6부 상서가 황제를 직접 보좌해 황명을 받들었으니
황권이 크게 강화됐으며..... 모든 관료들을 대상으로 탐관오리 색출 작업을 진행해 60냥이 넘는
은을 횡령한 관리들은 모조리 죽였으니, 부패에 연루된 관료들은 출신고하를 가리지 않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원장은 백성들이 부패관료를 조정에 고발하는 것까지 허용해 부정부패를 뿌리뽑아버리고자 했으니 백성
들의 탄원은 국법으로 보호받았고 관리가 탄원을 접수했음에도 묵살한 경우에는 관리를 처벌했습니다.
의심이 많았던 주원장은 공신들마저 믿지 못했으니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제맘대로 놀거나 반역의 의도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재상 호유용은 주원장의 총애를 등에 업고 뇌물을 받거나 상주문을 제멋대로 검열하고
주원장을 업신여기는 발언까지 했으니 자신이 죽으면 공신 세력들이 황제를 멋대로 좌지우지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주원장은 호람의옥 (胡藍黨獄)을 일으켜 모든 공신들을 숙청했으니, 1375년 요영충이 숙청된 것을 시작으로 주양조,
이문충이 연달아 죽임을 당했고 1380년에는 마침내 호유용의 옥을 일으켜 숙청한 뒤 어사대부 진녕과 어사중승
도절도 함께 처형했으며 1390년에 최대 공신 이선장마저 호유용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그와 가족 70명을 처형합니다.
30,000명 사람들이 죄인으로 잡혀갔고 죽은 사람이 15,000명이 넘었으며 대장군 남옥도 모반 혐의로 숙청하면서
호유용의 옥에 숙청되지 않은 공신들마저 죽였으니..... 공인의 옥과 곽환의 옥까지 포함 홍무제가 죽을 때까지
목숨을 부지한 공신은 탕화, 경병문, 곽영 단 3명 뿐이었고 이들도 황제를 두려워하며 납작 엎드려 살아야 했습니다.
몇년전 난징 여행 중에 주원장의 무덤인 明孝陵(명효릉) 을 찾았는데, 1381년부터 1413년까지 30년동안 무려
10만명을 동원해 만들었으니 황실에 경제적 파탄을 몰고올 정도였다는데, 이후 잦은 전란 속에 모두 소실
되어 현재는 능의 일부만 볼 수 있으며... 1km 에 달하는 참배로에는 24마리의 석상만 남아 능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자, 낙타, 코끼리, 말 등의 동물이 종류별로 네 마리씩 조각된 석상은 두 마리는 서 있고
나머지 두 마리는 앉아 있는데, 이는 하루 2교대로 황릉을 지키는 것(?) 을
상징한다고 하며...... 태조 주원장은 무덤이 완성된 지 15년 만에 이곳에 묻혔다고 합니다.
이미 문명화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순장 된 관인이 10여명, 병사와 시종이 46명 이라고 전해지는
데.... 능의 명칭인 효릉 (孝陵) 은 마황후(馬皇后) 의 시호인 효자 (孝慈) 에서 따온
것이니 카이산사 절을 이전하고 1381년 착공하였으며 이듬해 마황후가 죽자 황릉에 먼저 매장하였습니다.
1383년 대전이 완공되었으며 1398년 태조 주원장은 병사한뒤 매장되었는데 3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영락제 (永樂帝) 때인 1405년에 최종 완공되었으니, 태조 이후 명나라 황제들은 모두 이 능을
모방하여 황릉을 건설하였다는데 효릉의 동쪽에는 주원장의 장자인 주표가 묻힌 동릉(東陵) 이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주원장이 죽은뒤 난징 13개 성문을 모두 열고 관을 운구하여 성밖으로 나가 매장하였다는데
그럼 도굴을 피하기 위하여 가짜 무덤을 여러개 만든 것이네요? 이로인해 주원장의 진짜 능묘는 난징 서쪽의
조천궁 삼청전 지하에 있다는 설도 있고 황성 (皇城) 의 만세전 지하 또는 베이징의 만세산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명효릉의 지상 건축물들은 이미 훼손되었지만 지하의 유적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효릉의 담벽 길이는
22.5㎞ 로 난징 성벽 길이의 3분의 2에 이르고 또 효릉의 구도는 베이징의 심삼릉 (十三陵) 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는데 이는 십삼릉이 효릉의 구도를 모방하여 축조하였다는 것을 뒷받침 한다고 합니다.
명태조는 1380년 개국공신이던 승상 호유용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처형하는데 증거가 전혀 없이
고문에 의한 자백만으로 형이 확정되었으며 1384년 개국공신 이문충이 독살당했고
다음 해에는 강남 평정과 북벌 통일의 전쟁에서 둘도 없는 공헌을 했던 노장 서달마저 독살 됩니다.
1390년에는 이선장등 1만 5천명이 호유용 역모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처형되고 1393년 에는 남옥이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운 역모혐의로 2만여명의 연루자 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강남 군벌 시절 천하제패의 계책을
들려주었던 “4대 선생” 역시 뒤끝이 좋지 못했으니 유기는 낙향해 있다가 독살되고 송렴은 유배지에서 죽었습니다.
한 마디로 명태조는 개국공신을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조금이라도 권세를 가진 신하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검교라고 하는 첩보조직을 운영했으니 송렴이 손님을 초대해 식사를 하자 다음날 명태조가
그를 불러 그 일을 물었는데 누구를 불러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답니다.
이처럼 공포와 불신만이 가득한 군신관계는 문제가 있다고 여긴 사람 중에는 황태자인
주표도 있었으니 신하들을 의심하고 죽이는 일을 그만두라고 청하자.....
명태조는 가시가 박힌 막대기를 가져와 주표에게 집어보라고 하니 “가시 때문에 잡을
수 없습니다” 고 말하자 “그러면 너를 위해 가시를 말끔히 잘라내 주겠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니라, 어째서 그 뜻을 몰라주느냐?” 라 말합니다.
애써 세운 왕조가 강력한 공신들 때문에 힘을 잃고 멸망하는 예는 중국사에 흔하니 명태조는
자신의 숙청에 왕조의 기반을 다진다는 정치적 의의를 찾고 있었으니,
태종 이방원이 장인과 처남 넷을 모두 죽이고 장모를 노비로 만들었던 것이나 같은 것이지요!
우리나라 TV 에 방영된 주원장 일대기 연속극에 보면 학살을 말리는 장남과 황후는
홧병으로 죽고 태조는 눈이 멀었는데..... 이제 7살 짜리 손녀가 유일한 낙 이라?
주원장은 얇은 금괴와 은괴를 안에 넣어 특수제작한 옷을 손녀에게 주면서 그 가치와 사용법을
예를 들어 상세히 가르치는데 혹시라도 변란이 나면 천하를 손에 넣은
태조이건만 시종할 시녀 하나 믿을 사람이 없으니 손녀더러 혼자 멀리 달아나 숨으라고 이릅니다.
불행히도 에감은 적중하니 태조가 죽자 넷째 아들인 북평의 연왕 주체 (영락제) 가 반란 을 일으켜 난징으로
쳐들어와 황족들을 몰살시키는데.... 저 어린 손녀는 무사히 달아나 숨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홍무제 재위 시절에 황태자인 주표가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손자인 주윤문이 황태손
으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홍무제는 아들들은 번왕으로 임명해 병사를
주고 제후 처럼 역할을 주었으니 몽골과 인접한 연왕 주체의 세력이 으뜸이었습니다.
홍무제는 이들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해 필요할 시 탐관오리들을 체포,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황제의 칙령을 받아 난을 평정한다는 '정난 (靖難)' 을 하도록 했는데, 그러나 동시에
번왕들이 난립하는 것을 막기위해 후임 황제가 번왕들을 숙청하는 삭번 (削藩) 도 가능토록 했습니다.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에 오른 손자 건문제는 제태, 황자징 등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삼촌인 번왕들을
숙청하려고 들었으니..... 그렇게 주왕, 대왕, 제왕, 상왕이 평민으로 폐위되거나 사형당합니다.
연왕 주체는 숙청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을 직감하자 선수를 쳐서 황제의 눈을 흐리는
간신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정난의 변을 일으켜 황궁을 점령하자 건문제는
화재 속에 자취를 감추었고, 연왕 주체는 명나라의 3대 황제에 즉위하니 영락제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