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상원조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던 곳에 회의화상이 창건 하였다. 당시에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 라 했었다.
고려 태조 3년(920)에 도선국사가 왕명을 받아 중창하였는데, 국사가 원당을 건립하고 국운을 기원했다해서 '원당'이라고도 불리다가 그 후 영조 4년(1728) 신천영의 병화로 사원이 전소되어 80여 년 동안 빈 절터인 채로 내려오다 이조 순조 14년(1814)에 금봉화상이 옛 원당터에 실상암을 짓고 절을 중건하여 절 이름을 개칭하되, 진인출어동방(眞人出於東方)이라하여 "동"자를 따고 사판국청학귀소형(寺版局靑鶴歸巢形)이라 하여 "학"자를 따서 동학사라 명명했다는 설도 있고, 또 계룡산 동쪽 사찰 입구에 청학이 깃들었다는 학암(鶴岩)을 위주로 하여 동학이라는 절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그 뒤 고종 원년(1864)에 만화화상이 개창하였고, 그의 제자인 경허성우 스님이 고종 8년 (1871)에 강의를 열었으며 1879년에는 이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한국의 선풍을 드날녓다.
근대에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으며, 지금도 일주문 불사 및 상원암(옛 계명장사로 남매탑이 있는 곳) 복원불사
가 진행 중이다. 현재 전각으로는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을 비롯하여 조사전, 육화당, 강설전, 화경헌, 엽화실, 실상료, 숙모전 등이 있다. 신내암자로는 미타암, 길상암, 관음암,
문수암, 심우정사, 상원암 등이 있다.

동학사 일주문

동학사 입구 계룡산 조형물

구름다리

느티나무

계곡마다 맑은 담과 폭포로 이루어진 계룡산

비구니 강원 동학사
천년고찰 '동학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비구니 강원(일명:승가대학)으로서,150 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부처님의 일대시교 및 수행과 포교에 필요한 제반교육을 받으며 정진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도량이다.
또한 동학사는 문필봉(文筆峰)이 있어서 대 강 백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도 유명하며 비구
니 스님들의 경 읽는 소리는 맑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와 하나로 어우러져 고즈넉한 산사에 그 청아함을 더해준다.

동학사 범종각

동학사 대웅전
대웅전의 무사석으로 쌓은 석단 위에 세워졌으며, 이 무사석에는 불기 이천구백육십이년(1935) 을해 오월일준공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무사석 석재들은 풍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며 년대가 상당히 경과된 것으로 엿 볼 수 있다. 대웅전은 이러한 석조 기단 위에 복연판주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으로 2익공 팔작지붕으로서 남향하여 건립되었다.

동학사 요사채

동학사 삼층석탑
충남 문화재자료 제58호
동학사 대웅전 앞에 위치한 높이 1.85km의 조그만 탑이다. 이 탑은 동시대, 동일한 치석의 방법으로 조성한 것이 아닌 여러 돌을 석탑의 부분적 재료로 사용하여 만든 것인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각골의 절터에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에 위치한 탑의 구조를 보면 지대석은 2매의 자연석으로 조성되었고 기단석도 2매로 이루어졌으나 1매석은 자연석으로 보완하였고, 나머지 1매석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갑석은 부분 파손을 입고 있는데, 그 윗면에는 옥신 괴임을 높게 조각하였다.

동학사 대웅전 문살
문에는 매란국죽(국화, 대나무, 소나무, 난초) 등 4군자의 문양을 아름답게 조각하였다.

동학사 삼성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7호
대웅전 좌측에 인접하여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삼성각은 장대석을 외벌대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워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앞면 3칸에 모두 닫이 띠살문을 달았는데 오른쪽 앞칸에도 외여닫이문을 달아 평상시에는 출입에 이용하고 있다.
건물의 내부에는 단을 설치하여 중앙에 칠성탱화를 두고 그 좌측에 산신탱을 그리고 우측에 독성탱을 모셨다. 공포는 무출목 2익공계로서 사절주두와 엇물려 외부로 돌출된 1익공과 2익공 위에 연꽃과 연봉이 장식적으로 조각되었고 내부로는 간결한 양봉으로 되어 대량의 단부를 받쳐주었다.

동학사 대웅전내
동학사의 대웅전에는 삼존불을 조성하였는데, 석가여래를 주존불로 하여, 우측에 아미타여래 좌측에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다. 대웅전 내부 후불벽에는 근래에 제작된 삼불회상목각탱이 봉안되었다. 그리고 동벽에는 신장탱화와 약사회탱이, 서벽에는 미타회탱과현왕탱이 걸려 있는데 목각탱을 제외한 불화들은 모두 1898년(광무2)에 제작되었다. 전각 내외에 화려한 단청을 그려 장엄하였고, 외벽에는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동학사 강원

동학사 석등

청량사지 칠층석탑(남매탑)
보물 제1285호
청량사터에는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등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두 탑을 가리켜 오누이탑 혹은 남매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상원이라는 승려가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 상원은 처녀와 남매로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고, 처녀의 아버지는 그 갸륵한 뜻을 기려 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탑은 그 중 칠층석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세워 두었으며, 전체적으로 폭이 좁고 길쭉한 형태이다.
기단은 각 면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을 딴 돌로 세운 점이 특이하다. 탑신은1층 몸돌의 한 면에 직사각형 모양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이 2단이고 7층이 1단이며, 2·3·4층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서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2층 지붕돌 낙수면의 경사가 1층 보다 급하고, 2∼7층까지 몸돌이 줄어드는 비율이 그리 크지 않아 탑 전체의 안정감과 균형을 해치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이를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청량사지 5층석탑(남매탑)
보물 제1284호
청량사터에는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등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두 탑을 가리켜 오누이탑 혹은 남매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상원이라는 승려가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 상원은 처녀와 남매로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고, 처녀의 아버지가 그 갸륵한 뜻을 기려 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탑은 그 중 오층석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그 위에 둔 기단의 아랫돌은 각 4장의 돌로 짰다. 특이한 점은 기단의 가운데기둥을 별도의 돌로 끼워두었다는 것이다. 탑신의 각 층 지붕돌은 얇고 넓어서 균형과 안정감을 잃고 있다. 1·2층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2단인데, 모두 딴 돌을 끼워넣은 구조이다. 3·4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한 돌씩이며, 4층의 지붕돌받침은 아래층들과 달리 1단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4층 지붕돌 위에 5층 몸돌이 있으나,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비인오층석탑(보물 제224호)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와서 한 절에 각기 특징있는 두 가지 유형의 백제탑을 세운 것은 역사적, 미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남매탑 앞에 놓여있는 거북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