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25.주일오후찬양예배 설교
*본문; 삼하 14:1~3
*제목; 사무엘하서강해(14) 용서도 징계도 분명하게 해야 한다!
1. 용서와 죄값은 전혀 다른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고, 그 죄를 덮으려 살인하고, 살인하고도 죄에 둔감해져 있어 회개하지 않는 다윗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가 용납이 되어서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의 영원한 언약으로 인해서(이스라엘의 등불이 되게 하리라!, 왕하 8:19) 그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또 무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그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지키시고 이루십니다. 이를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그래서 천국백성이 될 수 있도록 하셨지만(죄가 있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 죄값은 분명히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용서와 죄값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다윗이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자, 나단을 통해서 그의 죄를 지적하시고, 그의 저지른 죄값을 그대로 갚아주십니다. 왜입니까? 다시는 이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자이기에 징계하시는 것입니다.(히 12:6~8)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히 12:6~8)
그래서 “간교한 꾀”를 통해서 암몬이 이복동생 다말을 범하게 합니다. 다윗이 간교함으로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그를 죽인 죄를 깨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다윗의 반응을 보니 아직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건 처리가 전혀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아들 암몬을 회개시키고, 딸의 고통을 회복시켜주었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냥 “노(怒)”하고 말아버립니다. 그래서 더 큰 아픔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말의 친 오빠인 ‘압살롬’이 ‘암몬’을 죽이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삼하 13:28~29’입니다.
“28 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한지라
29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삼하 13:28~29)
그리고 ‘압살롬’은 다윗을 두려워하여 ‘그술 땅’으로 피하여 3년간을 지냅니다.
다윗이 바로 회개하지 못하니, 그의 딸이 폐인이 되고, 그의 아들들이 서로를 죽이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그리고 어떤 잘못이든지 용서하십니다. 십자가의 약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녀들이 바른 회개를 하지 못하면, 이처럼 분명히 그 죄값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2. 다윗의 압살롬을 향한 그리움
그런데 3년이 지난 후에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그리워합니다.
이를 충신 요압이 눈치를 쳅니다. 그리고 드고아 여인을 불러 연기하게 하고, 다윗이 압살롬을 다시 불러오도록 작전을 짭니다. ‘1~3절’입니다.
“1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2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3 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 (삼하 14:1~3)
결국 여인의 이야기가 압살롬의 이야기인 줄 안 다윗은 그를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21~24절’입니다.
“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23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4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삼하 14:21~24)
데려오라고는 했는데, 정작 진정한 용서는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들을 부를 때에도 “아들 압살롬”이라 부르지 않고 “청년 압살롬”(21절)이라고 부릅니다. 아직 아들로 받아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왕궁으로 들이지 않고, 그의 집에 거하게 하면서 그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이럴거면 왜 오라고 했습니까? 그술 땅에서 잘 살도록 내버려두었으면 그도 좋고, 자신도 좋았을 것을 어슬픈 용서를 하다보니, 용서도 아니고 징계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압살롬의 마음이 심히 상한 것 같습니다. 그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아버지의 자리를 찬탈할 계획을 세워버린 것입니다. 그냥 그술 땅에 두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굳이 데리고 와서는 용서하지 않으니 그 마음이 더욱 삐뚤어져버린 것입니다.
용서와 죄값은 분명히 다릅니다.
또한 용서와 징계도 분명히 다릅니다.
다윗의 믿음과 지혜가 회복되었다면, 형을 죽인 잘못에 대해서 분명히 징계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다윗은 용서도 아니고 징계도 아닌 모습으로 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는 안 될 대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주대낮에 능욕하는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가 저지른 죄를 다 돌려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용서하십니다. 죄를 가지고 있으면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죄값에 대해서는 물으십니다.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천국의 길을 놓치지 않고 완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그 용서만큼은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 할 수 있는 용서는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징계할 것이 있으면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교만하여 지고, 또 다시 어리석은 짓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를 하지 못해 이런 비극을 경험한 것입니다.
첫댓글 하나님께서는 주님 앞에 나오면 모든 것을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분명히 그 죄의 값을 물으십니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용서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징계도 해야 합니다. 그가 바른 길로 가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엄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