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 깃 세우고 겨울을 구경하러 나갔다.
오가는 사람 많은 사거리 차량 위에서 동해안 홍게가 모락모락 게 맛을 날린다. 사 가지고갈 사람을 기다리며, 먹음직스럽게 긴 다리를 자랑하고 있다. 몇 마리 골라 담아 게 좋아하는 남편 먹을거리로 사들고 오곤 했다. 다른 반찬 없이 게 등딱지에 밥을 비벼 맛있게 먹고, 힘들었던 하루의 피로를 이마의 땀방울로 쏟아내곤 했다.
영덕대게 맛을 한번 보려면 하루해를 보내야 다녀올 수 있어서 힘든 거리였다. 꿩 대신 닭이라고 대게 대신 홍게로 감지덕지 먹어보곤 했다.
대게 맛이 그리운 겨울 상주에서 영덕 간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었다. 그 밝은 소식이 TV와 신문지상을 타다가 내 눈과 귀에도 들어왔다. 한 시간 일이십 분만 소요되면 갈 수 있다며 입소문을 타고 돌아다녔다. 거리가 많이 단축되었다니 모두들 한 번쯤 가봐야지 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이제는 진짜배기 영덕대게를 쉽게 먹을 수 있겠다는 설렘을 안고 있던 터였다.
문학세계 문인들께서 영덕 다녀올 계획을 하고 있단다. 그 틈을 이용해 쌓인 피로와 호기심을 잔뜩 안고 차에 몸을 실었다. 쌓인 스트레스는 바다 바람에 날려버리고, 가벼운 마음 걸머지고 돌아오리라 생각을 해본다.
고속도로를 진입하자 먼 길을 단축시키느라 많은 터널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다. 사십여 개의 터널로 단축을 시켰단다. 터널로 인해 어둠과 밝음이 연속으로 이어져 터널수가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많은 터널이 생긴 태백을 다녀올 때처럼, 첨단 기술의 고마움을 담고 차바퀴가 신명나게 구른다.
영덕 근교에 들어서자, 호기심에 달려온 전국 각지의 차량들 때문 서행을 해야 하는 상황도 놓였다.
수족관에서 대게들이 살풀이춤보다 느린 동작으로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를 반기는 춤인 것 같다. 느린 동작으로 거친 파도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생존하여, 뭍으로 올 수 있을 때까지 버틴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날카로운 집게와 거친 등딱지가 자신을 방어해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였으리라.
어디서 엿보고 있었는지 갈매기 떼들이 갑자기 몰려왔다. 뭍에서 온 사람들을 구경하고, 서로 관심을 끌기 위해 머리 위를 맴돌며 야단법석이다. 새우깡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왔다. 가게가 보이지 않아 살 수가 없으니 안타깝다. 대게 팔 생각에만 정신을 쏟고 있는 영덕 사람들은 갈매기에겐 소홀함이 보였다.
부산 오륙도의 갈매기 먹이로 새우깡, 청주 명암저수지의 잉어 먹이로 뻥튀기는 인기가 만점이다. 조금만 배려를 했더라면 볼거리로 한 점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관광객의 볼거리와 새우깡으로 인한 수입도 있어 일거양득일 텐데. 대게 값에 비하면 그 정도는 생각할 겨를에서 제외된 것일지도 모른다. 서운하고 배도 고픈지 끼룩끼룩 울다가 날아가 버렸다. 다음엔 꼭 먹을거리를 사들고 오리라 기억창고에 새겨 넣었다.
예약해 둔 딸 부잣집 식당에 여장을 풀자, 우리를 위해 마련한 음식들이 나왔다. 대게가 등딱지를 걸머지고, 먹음직스럽게 익어 소복이 모여 나왔다. 주인은 먹기 좋게 잘라주고 게 등딱지만 모아 갖고 들어가 버렸다. 게 등딱지는 볶음밥을 해서 담아주는 자연산 밥그릇이라 가져간 모양이다. 역시 게는 등딱지에 담은 볶음밥을 먹어야 제대로 먹은 듯하다. 뽀얀 살이 꽉 찬 대게를 먹고 볶음밥으로 멋진 후식을 먹게 되는 격이다.
오가는 정담 속에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바다를 향해 빠져나가고 있었다. 침묵의 바다가 호기심이 당기는지 파도로 응답을 한다. 많은 얘기 듣고 싶은지 달려가더니 무더기로 몰려왔다.
게 등딱지에 볶음밥이 나오자, 모든 시름 잊은 듯이 게맛에 취한다. 저무는 해도 게다리 하나 삼키고 바닷속으로 숨어버렸다.
문인들의 담소들이 바다 위에 흐르고, 시상이 되어 내게로 왔다. 밤은 깊어 등대를 베개 삼아, 아름다운 전설이 담긴 바다를 덮고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 웅장한 해가 기지개를 켜고, 피어나는 모습을 보려고 난간에 나갔다. 이른 탓인지 일출은 보이지 않고, 찬 기운이 날아와 방으로 되돌아왔다.
화장을 마치고 나와보니, 이미 해님은 한 뼘 정도 떠올라 바다와 이별을 하고 있었다. 수평선 위엔 해님이 벗어 놓은 황금빛 실루엣이 얇게 깔려 있었다.
어제 우리를 반기던 갈매기는 산너머 멀리서 숙박을 하고 오는지 보이질 않았다. 소득이 없는 것을 알아서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바다를 옆에 끼고 해변도로를 달렸다. 풍력발전을 일으키는 축산항의 풍차를 보지 못한 체 아쉬움을 남겼다. 파도가 해초냄새를 안겨주고 말없이 달아난다.
가까운 곳에 등대가 있어 올라서니, 멀리 수평선 위에 여유를 즐기는 배들이 보인다. 만선의 행복감에 젖어 있다.
해변도로엔 가끔씩 청어과메기 초미니 덕장이 보였다. 보드라운 봄동과 김, 땡고추를 초장에 묻혀 청어과메기와 싸서 먹었다. 서서 먹은 두어 점의 맛보기지만 이 겨울 최고의 감칠맛을 먹은 것 같다.
영덕은 게가 주산지라 회 맛보기가 힘들다 했다. 차로 노상에서 가자미회를 뜨고 있는 할머니가 드물게 보였다. 인정이 담긴 할머니 손이 듬뿍 많은 양을 담아 포장을 해 주신다. 기왕이면 골고루 먹고 갈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영덕 하면 게라면을 먹어야 다 먹고 간다고 한다. 곱빼기로 한 사발 시켜 모두 맛이나 볼까 하고 나눴다. 게 맛이 베인 라면을 건져먹고 국물을 마시니, 게의 진국을 다 마셔버린 셈이다. 해장국을 대신해 따뜻한 음식을 먹고 나니, 속이 후련하고 응어리가 모두 풀림을 느꼈다.
겨울 바다를 마음껏 먹었으니 소원성취를 했다. 회자정리의 아쉬운 이별을 나누고 영덕을 뒤로했다.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면 영덕 향토음식을 더 많이 찾아볼 날을 기대해 본다.
밀려오는 졸음을 가끔 휴게소에 내려놓고, 새 길을 신나게 달렸다.
영덕대게 찌는 냄새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