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들의 노래 [제2편]
시인이 되려면 저보다 앞선 시인들의 시를 과식하고 폭식을 일삼더라도 너끈히 소화해낼 수 있는 튼튼한 위장을 가져야 한다. 시를 조금 읽고 체한다면, 애초 시인이 되겠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 시는 눈먼 부엉이의 노래, 바람과 파도의 외침, 늑대들의 울부짖음, 땅이 내쉬는 깊은 한숨이다. 시인은 이 모든 소리를 듣고 시로 빚어낸다. 시는 단지 의미의 수사학적인 응고물이 아니다. 시는 말의 춤, 사유의 무늬, 생명의 약동이다. 시는 수천 밤의 고독과 술병을 집약하고, 세계를 향해 뻗치는 감각의 촉수들은 천지만물의 생리와 섭리를 더듬는다. 시들이 은유들로 가득 찬 보석상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시인에게는 시가 지락(至樂)의 방편이며, 각의(刻意)의 수단이다. “시는 전쟁이다!”라는 제목으로 산문을 쓴 적이 있다. 전쟁의 각오가 서지 않는다면 그 문턱조차 들어설 생각을 말라. 철학 공부를 하라. 철학은 왜 시를 써야 하는가 하는 근본을 담은 물음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한다. 철학 기반이 없으면 시인으로 멀리 갈 수 없다. 횔덜린이나 휘트먼이 그렇듯이 가장 좋은 시인들은 자기 분열과 싸우고, 제 안에 숨은 샤먼과 의사를 숨긴 심연의 철학자들이다. 좋은 시인들은 시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철학자들이다. 거꾸로 훌륭한 철학자들은 영감(靈感)의 노를 저어 심연에로 가지 않고 의미와 분석의 길로 들어선 시인들이다.
과연 시란 무엇이고, 시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앞의 물음은 답하기 어렵고, 뒤의 물음에 답하기는 쉽다. 어떻게 말하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물음은 제쳐놓고, 시가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명제에서 시작하자. 시는 물질의 성립 원리를 다루는 물리학도 아니고, 물질을 유용하게 쓰는 과학기술도 아니다. 시는 마틴 리스가 밝혀낸 세계를 지배하는 ‘여섯 개의 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인간 게놈’에 대한 지식에 보탬이 되지도 않으며, 양자형이상학을 해명하는 주요 명제도 아니다. 오랫동안 시를 읽어도 ‘우주에서 은하의 속도는 시속 100만 마일’이라는 지식을 얻을 수도 없다. 시는 보편적 · 객관적 지식의 세계와는 무관하며, 인류 문명의 건설에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시는 쓸모없는 것의 목록에 든다. 시를 쓰는 것은 상상과 창조의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생활에 유용하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것은 삶 자체를 넘어서서 삶을 표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쓸모가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김소월, 「봄비」)이거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유치환, 「깃발」)이거나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헤엄도 모르는 아이”(서정주, 「꽃밭의 독백」)의 마음이거나 “가난한 아이에게 온/서양 나라에서 온/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김종삼, 「북치는 소년」)이거나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도 좋을까요”(진이정,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와 같이 이름 없는 것들에게 저마다 맞는 이름을 붙여 호명하는 일이다. 그러나 쓸모가 있는 것, 유용한 것만이 가치가 있는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생물물리학자인 피에르 르콩트 뒤 노위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의 범위 안에서 오직 인간만이 쓸모없는 행동을 한다.”** 동물들은 먹이 활동이나 짝짓기와 같이 제 안에 새겨진 생물학적 본성과 목전의 필요에 종속된 행동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동물들은 쓸모없는 짓을 배제하는 데 반해, 인간은 생물학적 필요에서 벗어난 시와 철학을 선호하고, 그 밖의 예술활동을 하는 유일한 종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서 시가 품은 애초의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는 불행으로 빚은 빛이고, 진리가 언어로 화육(化育)하는 기적의 물건이다. 시는 감각의 착란 속에서 떠오른 언어거나, 세계의 이미지를 조형하는 것, 이름 없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 불러주는 행위, 그도 아니면 거의 모든 존재의 역사를 꿰뚫어 보고 존재 현상을 살펴 헤아리는 새로운 ‘관점의 창’이 될 수도 있을 테다. 시는 언어 놀음이고, 항상 놀음 그 이상이다.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말함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불행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걸 호명한다. 시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고, 뇌의 전두엽에 내리꽂히는 우레며, 모든 물질에 작용하는 메타과학이고, 형이하학의 형이상학이다. 시의 본질은 우연성이고, 이것은 무상성에서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낸다. 그런 맥락에서 시는 만듦이고 낳음이며, 위함이고 이룸이다. 인간 내부의 구멍이고 그 구멍 속에 사는 신이다. 시인은 항상 외부 세계, 멀리 있는 다른 우주의 신과 소통한다. 그래서 시는 때때로 낯선 신의 알아듣기 힘든 방언이기도 하다.
* 마틴 리스(1942~ )는 우주 진화와 블랙홀과 은하에 대한 연구에서 큰 업적을 세운 유명한 과학자다. 그는 전파를 내는 천체, 은하의 형성, 감마선 폭발, 검은구멍 등에 관한 아이디어들을 낸 천체물리학자인데 이것들은 관측을 통해 속속 입증됐다. 그가 말하는 '여섯 개의 수'는 지구와 자연과 우주의 근거를 말해주는 수다.
** 누치오 오르디네,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 김효정 옮김, 컬처그라퍼, 2015, 24쪽,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