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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평양에 없었고, 지금의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다-1
◉ 번조선의 영토는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이 포함된 땅이었다
번조선 연대 적요
BC350 번조선(番朝鮮)이 북막(北漠)과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을 쳤다 BC343 연이 번조선에 화친을 청해 오므로 조양(造陽)을 경계로 삼다 BC341 연이 자객을 보내 번한인(番韓人) 해인(解仁)을 살해하다 BC339 연이 안촌홀(安寸忽: 安市城)을 돌파하고 험독(험독: 번조선의 도읍)을 치자 수유인(須臾人: 箕子의 후손들) 기후(箕詡)가 5천으로 진한, 번한의 군사와 함께 격파하고, 연의 도읍인 계성(薊城)의 남쪽에 이르니 연이 화친을 청하면서 자제를 인질로 보냈으며 연의 장수 진개가 번조선의 포로가 되었다. BC323 번조선의 왕 수한(水韓)이 죽고 후사가 없어 기후(箕詡)가 계승하여 번조선왕 이라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으로 천도하였다. BC305 번조선이 북호(北胡: 東胡)와 함께 연의 상곡을 공격하자 연이 진개를 보내 대항하였다. BC300 인질로 잡혀 있던 연의 진개가 연으로 돌아간 후 번조선 동호(東胡: 번조선을 비하한 말)를 쳐서 조양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후에 그 안쪽에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등 5군을 설치하 였는데 장성의 동쪽 끝을 만번한(滿番韓)이라 한다. ***참고:진개가 공격한 번조선을 사기는 동호(東胡: 동쪽 오랑케)라고 하였지만, 진서(晉書) 에서는 조선(朝鮮)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동호는 곧 조선을 동쪽 오랑케로 비하한 말이다. 또 연과 조선의 경계선인 만번한(滿番韓)은 전에 번조선의 도읍지였던 험독, 진황도시 창려(昌黎현)으로 추정하는데, 창려는 갈석산 남쪽 진황도시에 속한 현의 지명이다. 양평현은 평주 노룡현 서남이라고 하였다. 또 북쪽의 조양(朝陽)을 필자는 지금의 북경시 조양구(朝陽區)로 비정하며, 연구 검토기 필요하다. |
***참고: BC 350년 번조선이 연의 상곡을 공격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지금으로부터 2,370 여 년 전이다. 이후 조양을 경계로 삼았다. 조앙은 지금의 북경시 조양구(朝陽區)로 추정된다.
BC 339년에는 연이 번조선을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여 연의 도음인 계성(薊城)까지 진격하자 연은 왕의 자제를 인질로 보냈으며, 이때 연의 장수 진개는 고조선에 포로가 되었다. 이후 번조선왕이 죽은 후 후사가 없자 지자의 후예로 알려진 기후가 왕이되어 기자조선이 되었다.
BC 305년 조선에서 연나라로 돌아간 진개가 번조선을 공격하여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군을 빼앗고, 이곳에 연장성을 설치하였는데, 갈석산 진황도시 부근 양평에서 조양까지 연장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BC 305년 전까지 번조선(번한)의 영토는 만리장성(연장성) 안쪽의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까지 포함되었던 것이다.
사기에서는 연나라가 동호(東胡: 동쪽 오랑게)와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진서(晉書)에는 연이 조선(朝鮮)과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동호는 조선의 별칭임을 알 수 있다. 연장성 동쪽 끝을 만번한이라고 하였는데, 만번한은 번조선의 수도였던 진황도시 부근 창려(昌黎)를 말하는 것이다. 조양(朝陽)은 중국 수도 북경의 중심도시 조양구(朝陽區)가 있는데, 이곳은 만리장성인 팔달령과 멀지 않은 곳이다. 필자는 연나라 장성의 북쪽 끝인 조양(朝陽)을 지금의 북경시 조양구가 분명할 것으로 비정한다.
진개가 쌓은 연장성의 동남쪽은 양평(陽平)인데, 양평은 요동의 속현으로 금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後漢書 李賢이 註)고 하였다. 이 연장성은 진시황이 다시 보수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쌓은 것이며, 진장성의 시발점은 갈석산(碣石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평(陽平)은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당시 좌12군 12번째의 침략경로에 있었으므로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 고구려 땅에 속해 있었고, 연장성의 남쪽 끝이다. 양평은 전술한 바와 같이 평주 노룡현 서남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진황도시 남쪽의 창려에 있었던 양평이 고구려의 따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 진(秦)나라가 멸망되고 한나라가 세워진 이후 7대 한무제에 이르기 까지 한나라 초기에는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국경이 너무 멀어 요동고새(遼東古塞)를 국경으로 삼았다고 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요동고새나 양평은 지금의 천진시 부근이므로 천지시 부근을 지나는 패수(浿水)는 지금의 영정하고 비정해야 한다.
이병도나 식민사학자들의 패수 청천강설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고 날조이다. 어떻게 만리장성도 멀어서 패수(영정하)와 상하운장(上下雲章: 지금의 북경 부근)과 요동고새를 국경으로 삼았던 한나라가 어찌 머나먼 청천강이나 평양을 점령할 수 있었겠는가? 이병도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일본 역사학자의 추종자에 불과하다.
◉낙랑은 원래 고조선의 땅이었다
[사기] 조선전 집해集解)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集解]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가 있고, 이 세 강물이 합하여 열수(洌水)가 된다. 낙랑(樂浪)이나 조선(朝鮮)이란 여기에서 취한 이름으로 추정된다」 [索隱] 조(朝)의 소리는 조(潮)와 같고, 선(鮮)의 소리는 산(汕)과 같으며, 산수(水汕)라는 강이 있어서 이 조선이란 지명이 되었다. ([集解] 張晏曰 朝鮮有 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索隱] 案 朝音潮, 直驕反. 鮮音仙. 以有汕水, 故名也. 汕一音訕)
***참고: 위의 기록을 보면, 세 개의 강이 합친 곳에 조선이 있고, 낙랑 조선은 이 강의 이름에 유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낙랑은 조선땅임을 기록하였다.
또 사기집해에서는
“집해에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 진황도시 남쪽에는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위소가 말하기를 옛날 읍의 이름이라고 했다. 응소가 주를 달았는데, 지리지에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와검성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 정의(正義)를 하면 왕검성은 낙랑에 있는 것이다.
(集解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索隱 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應昭注地理志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王儉城在樂浪郡 浿水之東也 正義 臣瓚曰 主險在樂浪郡也(史記 三家註 卷115)
***참고: 위의 집해 기록을 보면 조선왕의 옛 도읍 왕검성이 낙랑군 패수(浿水:지금의 영정하) 동쪽에 있고, 창려: 진황도시 남쪽 험독현이 왕검성이 있던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수경에는
[수경] 패수(浿水: 지금의 영정하)는 낙랑군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海로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고 하였다.
***참고: 수경에서 “패수(浿水: 지금의 영정하)는 낙랑군 루방현을 나와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누방현(鏤方縣)을 일본인들이 평양에서 발굴했다고 하여 지금도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누방현관인봉(鏤方縣官印封泥)”라는 해괴한 조작 발국물을 근거로 누방을 “평양시 강동군 삼등리 일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참으로 황당한 일본인의 역사 날조이며, 왜곡이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계속 누방현이 평안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총독부의 발굴 기록은 북경 우리창에서 구입한 것을 무덤이나 성터 발굴시 낑워넣고, 속여서 발굴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전부 폐기해댜 마땅하다. 다음은 수경 주에 기록된 내용이다.
(水經註)
“허신(許慎)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루방현을 나와 동쪽으로 海로 들어가는데 혹은 패수현을 나온다고 하였다.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군 동북쪽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 동쪽에 있는데 모두 (패수현과 루방현) 그 현을 나와 남쪽으로(본문의 南을 而로 쓴 것도 있다] 루방현을 지난다고 하였다.
옛날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으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는데 조선은 옛 기자의 나라이다. 기자는 백성에게 올바름을 가르치고 밭갈기와 옷감짜기를 믿음과 두터움으로 하였으며 8법으로 금하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드디어 예절과 풍속을 이루었다.
전국시대에 위만이 이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방 수천리였다. 그 자손 우거에 이르러 한무제 원봉2년에 루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右渠)를 공격하였는데, 우거를 패수(浿水)에서 깨뜨려 드디어 우거를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흘렀다면 동쪽으로 건너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고 있는데 내가 고구려 사신에게 찾아가 물으니 말하기를 고구려의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난다고 하였는데, 즉 낙랑군 치소이다.”
“(註)
(許慎云..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盖出其縣南逕鏤方也 昔燕人衞滿 自浿水西 至朝鮮. 朝鮮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 田織信厚, 約以八法, 而下知禁, 遂成禮俗. 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 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 討 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髙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 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為逺, 循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于事差謬, 盖經誤證也).“
***참고: 위의 수경과 수경주의 기록을 보면, 패수현은 낙랑군 동북쪽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 동쪽에 있는데, 모두 패수가 나오는 곳이라고 하였다. 위만이 번조선을 멸하고 위만조선을 세웠는데, 이 패수는 수경(水經)에서는
“패수는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海로 들어간다(”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수경주를 쓴 역도원은 “고구려 사신에게 찾아가 물으니 말하기를 고구려의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난다고 하였는데, 즉 낙랑군 치소이다” 다고 답변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강물의 방향이 동쪽으로 흐르던 강이 갑자기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되었고, 당시 평양성 북쪽에 패수가 있다고 답변하여 전혀 방향이 달라져 있다.
그 이유는 수경주를 쓴 역도원의 시기(AD 472-527년)는 고구려 장수왕(재위 AD 413-490년)의 후기 이후 시기 이므로 이 때는 고구려의 수도가 수경을 쓴 시기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일본총독부와 세키노의 낙랑, 대방 무덤 발국기록은 모두 폐기 되야 한다.
평양낙랑군유적 발굴 최고로 기여한 자는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이다. 그는 평양의 낙랑군 유적을 발굴하기 전인 1918년에 북겨의 유리창(琉璃廠)이라는 골동품 판매 중심지를 방문하고 많은 낙랑군 유물을 구입했다는 일기를 남기고 있다.
“그의 일기장에는,
대정 7년(1918) 3월 20일 맑음 북경
서협 씨의 소개로 중산용차 씨(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했다.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 씨를 방문하여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 씨의 동료부터 유리창 의 골동품 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대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했다.
(大正七年三月二十日晴 北京西脇氏ノ紹介二ヨリ中山龍次氏(支那交通部顧問, 越後 出身)ヲ訪ヒ,同氏ノ紹介二ヨリ郵便局長中林(空白)氏 ヲ訪ヒ,郵便局囑託文學士黑田幹一ノ東道ニヨリ瑠璃廠ノ骨董店ヲ廻覽シ, 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漢時ノ 發掘品ヲ三百餘円ヲ購フ.)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샀다. 유리창의 골동품 점에 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 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 (二十二日晴 午前, 竹村氏 瑠璃廠 往古玩購. 瑠璃廠 骨董鋪 比較的漢代 發掘物多, 浪出土品大抵皆在, 余極力之蒐集.)라고 기록 되어 있었다(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세키노 타다시 (関野 貞 , 1868년 ~ 1935년)”
또 평양 낙랑군 태수의 봉니라고 주장한 유적이 현장에서 발굴한 게 아니고 조선총옥부 박물관에서 사들인 것이란 기록도 있다.
“1922년 10월 30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고가인 150원에 매입”
“1931년 1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100원에 매입”
“1934년 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대윤장’ 봉니를 100원에 매입” (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위와 같이 한 대의 유물과 낙랑의 유물을 북겨시 유리창 골목에서 구입한 세키노 타다시 (関野 貞)가 평양에서 많은 무덤을 발국하고 그 발굴된 무덤에서 낙랑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논문을 발표한 사실이 밝혀 졌음에도 한국 역사학자들은 세키노 타다시 (関野 貞)의 발국과 논문을 금과옥조로 유지하고 있다. 세키노 타다시가 북경 골목에서 산 낙랑 유물은 북경지역 낙랑의 유물이지 어찌 평양 무덤의 유물이겟는가?
세키노 타다시란 자가 북경에서 한 대와 낙랑 유물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구입한 사실과, 이런 자가 평양의 무덤 발굴을 하고 낙랑계 유물이 나왔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하자가 있는 자이므로 그의 낙랑군 평양설을 뒷받침하는 모든 발굴 기록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조선총독부의 낙랑이 평양에 있다고 쓴 모든 문서 역시 허위의 사실을 조작되고, 역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완전히 들어난 만큼 오두 폐기해야 한다.
◉『사기』에 기록된 위만이 건넌 패수(浿水)
『사기』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조선왕 위만(衛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 요동 밖의 순찰지역)에 소속시켰는데,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遼東古塞)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한나라 연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의 옷을 입고는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나와 패수를 건너 진시황 진(秦)나라 영토였던 옛 비어 있는(秦故空地) 상하장(上下鄣: 낙랑군 雲鄣)에 거주하면서,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을 도읍으로 정했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 朝鮮蠻夷及故燕, 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참고: 연나라 전성기에 연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는 것은 연나라의 진개(BC 311-279)가 번조선을 공격하여 천여리를 점령하고 조선과의 경계로 상곡, 어양, 북령, 요서, 요동을 포함시킨 연장성(燕長城)을 쌓았다. 연장성은 진시황이 이어서 쌓은 만리장성이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은 만리 장성의 안쪽에 위치한 땅으로 이곳은 모두 예전에 고조선의 땅이었다.
위만은 한나라 초기 한나라가 진나라 때의 국경이 너무 멀어서 지금의 천진시 부근인 요동고새(遼東古塞)와 패수(浿水)의 서쪽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 위만이 천여인을 데리고 이 패수(浿水)를 건너 번조선왕에게 벼슬을 하사 받고 지금의 패수(영정하) 동쪽 상하운장(上下雲章) 지역 국경 수비대장으로 있다가 반란을 일으켜 왕검성을 점령하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이때 반란에 가담한 무리들이 제(齊), 조(趙), 연(燕)에서 피난하여 귀순한 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위만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그가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많다. 이는 위만이 진개가 점령한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 지방 사람으로 진개가 죽은 후 얼마 안되어 조선으로 망명한 것을 볼 때 원래 조선의 땅이었던 이 곳에 살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진개가 번조선을 침략한 왕검성은 평정하로 추정되는 패수(浿水)에서 수천리 떨어진 지금의 왕검성이 절대로 될 수 없다. 당시의 왕검성 험독은 지금의 천진시 부근이었다.
◉위만이 점령한 당시 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어디인가?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는
“집해에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 진황도시 남쪽에는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위소가 말하기를 옛날 읍의 이름이라고 했다. 응소가 주를 달았는데, 지리지에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와검성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 정의(正義)를 하면 왕검성은 낙랑에 있는 것이다.
(集解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索隱 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瀆縣 應昭注地理志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王儉城在樂浪郡 浿水之東也 正義 臣瓚曰 主險在樂浪郡也(史記 三家註 卷115)
위의 사기 집해에 따른 기록의 왕검성은 패수(지금의 영정하)가 흐르는 천진시 부근으로 비정된다. 왕검성은 패수(영정하)에서 수천리 떨어진 지금의 평양이 결코 될 수 없다.
◉왕검성에 대한 기록
사기 집해에서,
”〖집해〗서광이 말하기를 창려: 진황도시 남쪽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위소가 말하기를 옛 고을의 이름이다.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진황도시의 남쪽 현 이름) 남쪽에 험독현이 있는데, 응소가 주를 달기를 지리지의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현의 동쪽에 있다
(〖集解〗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凟縣 廣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臣瓚云 王儉城在樂浪郡浿水之東).“
위만조선의 수도가 요동군 험독현에 설치되었다고 했는데,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험독현(險瀆縣) 조에는 당시 광령현(廣寜縣) 동남쪽의 바다 가까운 곳이라고 하였다(險瀆故城 在今廣寜縣東南.....濱海之地)”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사마천의 사기 기록에 의하면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큰 바다(海. 河)에 림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余)가 있으며, 남으로 예맥(濊貊)이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다. 사방 가히 천리(千里)이다. 땅은 기름지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고, 마땅히 오곡이 있고, 밭농사도 좋다.
➡ 注[一]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蓋馬大山)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고, 평양은 곧 촹검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東 沃 沮 在 高 句 驪 蓋 馬 大 山 之 東[一] 東 濱 大 海; 北 與 挹 婁、夫 余, 南 與 濊 貊 接。其 地 東 西, 南 北 長[二] 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 注[一] 【山 : 】 (王 儉 城)이다.”(『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라고 하였다.
일본인들이나 사학자들은 개마대산을 지금의 백두산이라는 주장을 하는 자도 있고, 일본시대 지어진 이름인 지금의 낭림산맥 개마고원이라고 주장한다. 그 개마고원 동쪽의 함경도와 연해주 지방까지 옥저(沃沮)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개마대산은 노호아산(老虎兒山)이며 그 동쪽의 개주시(개평) 부근에 왕검성이 있었을 것으로 비정이 된다. 역사학자들의 주장인 함경도나 연해주에 왕검성이 있을 수 없다. 개마대산의 동쪽 옥저의 평양 왕검성은 지금의 개평(개주시) 부근이거나, 진황도시 창려현 부근일 것이다. 옥저는 고조선 영토라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기록된 바 있다.
또 1927년 낙양의 북망산에서 발견된 ‘천남생 묘지명’에
“공(公)의 성(姓)은 천(泉)이고, 휘(諱)는 남생(男生)이며, 자(字)는 원덕(元德)이다. 요동군(遼東郡) 평양성(平壤城) 사람이다(遼東郡 平壤城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연남생의 묘지명을 보면 연남생이 고구려의 요동군 평양성에서 태어났다고 했는데, 당시의 요동군은 수양제가 “아름다운 땅 낙랑과 현도 및 요동을 오랑케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다”라고 조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지금의 조백하 부근에 위치해 있던 고구려 영역이었다. 이 기록은 연남생이 태어난 AD 633년은 고구려 27대 영류왕 15년이며, 이 당시 요서 요동군에 평양이 있었다는 기록이 된다. 연남생 묘비명이 정확하다면 이 당시 요동군 평양성에 대한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상의 여러 기록을 보면, 황검성 험독이 창려(진황도시의 남쪽 현명)에 있었다는 기록과 왕검성 평양이 개마대산의 동쪽 옥저땅(개주시로 추정)의 기록이 서로 다른 점이 있다.
필자의 견해(見解)는 왕검성 험독이 창려 남쪽이라 하였고, 개마대산의 동쪽이라고 하였는데, 수양제의 침략경로 좌11군에 옥저가 기록된 것을 감안할 때 옥저는 갈석산과 북경 팔달산으로 이어지는 높은 산들의 동쪽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이는 필자의 가설(假設)이다.
◉한사군의 설치 위치 비정 동쪽 끝은 열하와 요령성이었다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BC 108년 진번, 임둔, 현도, 낙랑의 한사군을 두었다고 한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인들의 주장과 이병도란 자가 제시했다는 학설을 금과옥조로 추종하여 현재까지도 한반도 내 한사군 설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사군은 설치 26년 후 토착민들에게 밀려 진번은 현도에, 임둔은 낙랑에 각각 흡수 병합되었다. 이후 9년 뒤에는 현도마저 토착민에게 쫓겨 서쪽으로 밀려낫으며, 그 지역은 지금의 조백하 상류 지역으로 비정된다.
그러므로 최초의 한사군 설치 지역은 숭덕시 열하특별구경(熱河特別區境)에 열하(熱河)가 한무제 때 국경지역이었다는 기록을 볼 때 이곳이 현도에 흡수된 진번의 최동북단 지역으로 비정되며, 또 임둔 태수의 인장이 요령성 금서시에서 발굴된 사실을 볼 때 설치 후 25년 만에 낙랑에 흡수된 임둔은 요령성 지역까지로 추정된다. 또 낙강의 지역은 후술하겠지만, 낙랑군 소속의 모든 군현이 수양제의 침략 경로인 점을 볼 때 조백하 부근 고구려 국경지역에 밀집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른 글에서 상세히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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