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는 다 늘렸다? 의대 정원 확대한 나라 살펴보니…
신은진 기자
2023.08.03 09:48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전쟁]③의대 정원 확대의 해외 사례
그리스, 일본 등에서 의대 정원 확대를 통한 필수의료 및 지역의료 인력난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조선일보 DB
정부의 지원 약속에도 필수의료과는 최근 진행된 하반기 전공의 상급연차 모집에 대실패 했다. '빅5'라 불리는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조차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등 필수과목 전공의를 단 한 명도 모집하지 못했다. 지방 대학병원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럴 때일수록 의대 정원을 늘려서 필수의료과목과 지역 의료에 배치해야 한다고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해외에선 파격적으로 늘리는 의대 정원을 우리나라가 못할 이유는 없다고 한다. 실제로 영국 등 해외 여러 국가에서 의대 정원 확대가 이뤄졌다. 의대 정원을 늘린 나라들은 현재 어떻게 됐을까?
◇의대생 늘렸더니 의사 사라져… 재정 부담에 감원 재추진도
의대 정원을 늘리면 '낙수 효과'로 필수의료 인력과 지방 의료인력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그러나 해외 사례를 보면, 아직 의대 정원 확충을 통해 필수의료 전문의 부족, 지방 의료 인력난을 동시에 해결하는 데 성공한 나라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에서 의대 정원을 확충했다가 실패한 나라만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리스다. 그리스는 2007년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5.31명이었으나 특정과 쏠림 현상, 지방 근무 기피 현상이 심해 의사 수를 늘렸다. 2019년 기준 그리스의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6.31명으로 증가했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의사 유출만 늘었다. 고려대 의대 안덕선 명예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그리스의 의료 환경에서 근무할 수 없다며 해외로 나간 의사가 1만7500명에 달한다. 여전히 그리스의 공공병원은 의사를 구하지 못하고 있으며, 의사 부족으로 중환자실 운영이 중단되고 있다. 의료취약지 근무자에겐 상여금으로 매달 1800유로(약 251만원)를 지원하겠다는 정책도 나왔으나 지원자는 없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와 상황이 가장 비슷한 일본은 의대 정원을 확대했다가 부작용이 생겨 다시 의대 정원 감축을 추진 중이다. 일본의 경우 고령화, 지역 의료 인력난 해소를 위해 2008년부터 의대 정원을 꾸준히 늘려왔다. 일본 의대 정원은 2008년 7793명에서 2019년 9420명까지 늘었다. 약간의 조정을 거치긴 했으나 2023년 의대 정원은 9384명에 달한다.
일본이 겪은 의대 정원 확대 부작용은 정부의 재정 지출 증가다. 의사가 과잉 공급되면서 의료서비스 총량이 늘자 보험재정 지출부담이 커졌다. 반면, 지역의료, 특히 공공의료분야 인력난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의대 정원 감축 계획을 발표하자 지역 의사회가 단체로 정원 감축 반대 성명을 발표할 정도다. 지역 의사회는 고령화 사회에 맞춰 오히려 의대 정원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고령화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의대 정원을 감축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최근 후생노동성을 방문한 국내 의료계 인사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의대 정원 감축 의지가 굳건하다.
성패를 평가하긴 이르나 올해 6월 말 의대 정원을 2배로 늘리겠다 발표한 영국의 경우, 벌써 부정적인 조짐이 감지된다. 영국은 코로나19를 겪으며 이탈된 인력을 보완하고자 2031년까지 의대 정원을 1만5000명으로 두 배로 늘리고, 2037년까지 의사 6만명을 충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민보건서비스(NHS) 측은 의대 정원 확대를 통해 환자 돌봄 인력 강화 등이 이뤄질 것이라 발표했으나 정작 전공의 등은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파업했다. 이들은 의료진 급여와 근무 환경 등이 개선되지 않으면 의대 증원이 의미 없다고 지적했다.
◇"기본만 해줘도" 수가·의료진 보호책 공감대
여러 사례를 통해 나타나듯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진료인력, 지방의료 인력난을 해결할 정답은 아니다. 의대 정원 확대 외에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의료 현장에선 ▲수가 개선 ▲의료사고 및 분쟁 관련 법제도적 정비만 해도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임현택 회장은 "젊은 의사들이 소청과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근무 환경이 나쁘기 때문이다"며 "소청과 근무환경이 '나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낮은 수가이다"고 밝혔다. 실제 우리나라 소아청소년 수가는 매우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는 소청과 수가는 1만3000원이다. 미국은 207달러(약27만원), 호주는 335달러(약 28만4000원)로 우리나라보다 약 20배 높다. 우리나라와 사정이 가장 비슷한 일본은 소아청소년에 파격적인 수준의 수가를 적용한다. 일본은 3세 미만 아이 진료 수가를 성인의 200~500%(의원급 기준)로 가산적용하고, 소아 야간진료는 별도로 300~500%의 가산적용한다.
임 회장은 "우리나라 소청과는 그간 운영되어 온 게 이상할 정도로 수가가 낮다"며 "경영난으로 최근 5년간 소청과 662개가 폐업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아청소년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지방에서도 소아청소년과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수가인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수가 인상만이 답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온다. 필수의료과목 의사들은 반드시 의료사고와 분쟁으로부터 필수의료과목 의사를 보호해줄 장치가 있어야 지금의 인력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한림대성심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은 "응급의학과의 경우, 일은 항상 힘들었음에도 그간 의료진들이 버틴 건 필수의료를 한다는 자부심과 국가가 이를 인정해준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며 "최근의 의료진 이탈은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형민 회장은 "필수의료 분야는 의료진이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사망, 후유증이 발생한다"며 "그런데 갈수록 소송이 남발되고 국가는 최선을 다한 전문의를 보호해주지 않으니 신규 의사는 필수의료 선택을 기피하고, 기존 의료진은 이탈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그는 "필수의료분야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며 "미국, 유럽 등과 같이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보호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직선제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김재유 회장(안성모아산부인과)도 "우리나라 의사가 의료과실로 경찰 조사, 검사 기소 및 형사재판을 받은 건수 및 유죄율은 다른 나라보다 매우 높다"며 "최선의 진료 후 고소를 당할 확률이 일본의 9.1배, 영국의 31.5배, 독일의 1.7배인데 어떻게 필수의료를 선택하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밝혔다.
김재유 회장은 "정당한 진료를 한 의료진을 보호해줘야만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며 "고의 또는 중과실에 대한 명확한 처벌 기준을 명시하고, 그 외의 사고는 특례로 정함으로써 의료사고로 인한 의료인들의 형사처벌은 최소화하고 환자에 대한 신속한 피해 회복을 위한 '의료사고특례법'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같은 대책을 마련하는 것과 별개로 지금은 의사 수를 늘리는 게 맞다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 인구 감소보다 고령화 속도가 빠른 데다, 소득 수준이 성장하면서 의료 수요 역시 계속해서 늘고 있다는 이유다. 지금 당장 부족한 의사 수를 늘리되, 추후 인구 감소 추세를 보면서 숫자나 속도를 조절해나가는 방안도 제시된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김윤 교수는 “선진국은 왜 의대 정원을 늘리겠나”라며 “인구 고령화로 인해 의료 서비스 이용량은 증가하고 있어, 지금과 같은 추세면 선진국과 의사 수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3/08/03/20230803009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