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 각성, 영적 노력을 통해 관문을 통과하라
헌신적 비이원성
일반적 지침
영적 진보는
의도(intention)에서
에너지를 얻는데
의도는
영적원리 및 수행들과의 정렬은 물론
봉헌과 몰두를 강화한다.
이는
노력, 결의, 인내심에 초점을 맞추려는
봉헌과 자발성으로 귀착되는데,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영적노력 과정을 향한
전반적 선의가 필요하다.
이상의 것은
일체의 특정한 선형적 정의를 초월하는
헌신적 태도에 포섭될 수 있다.
목표는
자동적으로
가치와 의미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이로써 영적 노력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경향이 있다.
정식 명상과 같은
영적수행을 위한 시간을
특별히 정해놓는 것이 보통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영적원리를
자신의 일상생활과
생활양식속으로 통합시키는 것이
보다 실용적인데,
왜냐하면
특별한 구획된 시간들은
바삐 돌아가는 일상생활에서 흐지부지해지고,
결국에는 완전히 포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관상적 생활양식은
특별하고 조용한 환경을
요구하는 시간을 따로 정해놓고 하는 방식처럼
쉽게 포기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단절된 수행시간은
또한 구획되는 경향이 있으며,
성격을 통해
사람의 존재속으로 통합되는 대신,
사람이 하는
어떤 것으로서
일상생활에서
정신적으로 단절되게 될 수 있다.
실제로는
영적원리를 고른 다음
그것을 일관되게
가차없이 무슨일이 있더라도
적용해야 할 삶의 내적 규칙으로 삼는 것이 좋다.
삶의 지침이 될
기본적 금언을 선정하는 것은
큰 가치를 갖는데,
예를들면
그 모든 표현을 갖는
모든 생명에 대해 친절하고
선의를 가지려는 결정이 그것이다.
이것은
추론을 통해서
표면적인 부정성이나 관찰결과,
정신적 구조물들을 용서하려는 자발성을 낳을 것이다.
기본적인 영적 금언을 따르는
삶에 대한 몰두는
기도, 간구, 그리고 에고가 아닌
신의 종이 되려는 결정으로
강력하게 보강된다.
또한
이들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신에게 직접 청하는 것과
안내, 정보, 지휘를 요청하는 것이 유익하다.
패턴들
영적몰두, 정렬, 봉헌은
어떤 비선형적 과정을 일으키는데,
그 과정에서 이제 현상과 상황들은
내부와 외부에서 공히
카르마적 경향과 요소들 또한 포함하는 사람의 내적 에너지 장들에 이끌린다.
삶은
이제부터 다른 층위에서
그리고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일어났을 것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펼쳐진다.
영적의도는
지각과 기억 및 가치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데,
가치는 이전에 우선순위를 부여받았던
이기적 목표 및 욕구들과는 다르다.
이제 영은
내적인 영적 가치와 일치하고
영적 진화에 대한 봉사와 일치하도록
우선순위를 프로그래밍한다.
의식진화는
점진적이고
영적의지의 힘을 불러일으키려는 결심에 따라
시작된 완전한 학습프로그램이다.
이후부터는
모든 경험이
영적 앎의 펼쳐짐과 발달에
귀중한 것이 된다.
이로인해
잘못이나 성공은
에고가 이전에 선호했던 것들과는 대조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영적가치와 정화과정에 대한 봉헌은
그러한 것의 표면적 대립쌍을 끌어올리는 경향이 있으며
이를 통해 카르마적 이원성이 제출된다는 것과
카르마적 이원성은
그것의 바탕에 있는 위치성들에 대한 식별을 요구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거의 확실히 일어나는
최초의 지속적 딜레마 중 하나가
'좋다/나쁘다의 이원성'인데,
이것은 매우 결실이
큰 조사분야다.
관찰을 통해
사람은
좋다/나쁘다의 양분이
검토되지 않은 추정들에 기초한
어떤 전체적 맥락화의 반영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은
깊이 겸손해짐으로써
마음은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사실 그런 분별적 식별을 할 권한이 없고,
그럴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또 그럴 능력도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은
자신이 언제, 어떤 환경에서
누구에게 좋고, 누구에게 나쁜지를 묻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발견을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일시적 학습경험으로서
인간 삶 자체의 의의와 의미에 대한
자신의 전체적 맥락화를
살펴보도록 이끌어 준다.
인간경험을
피상적으로 훓어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무엇보다
죽음이 예정된, 덧없는, 일시적인 존재라는 것,
그리고
마음은 도움받지 않고서는
자신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혹은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마음은 또한
그것의 내적구조로 인해,
제 힘으로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한다.
마음이 무슨 권한으로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생각은
영적진실이나 발전에 도달하는
아주 믿을만한 방법이 아니고,
마음은
저 혼자서는
질문을 완전히 해결해줄
비선형적, 포괄적 이해에
생각들을 내맡기는 대신
더욱 많은 생각을
끌어올리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는
발견으로 인도한다.
영적 각성은
선형적, 논리적 정신화에서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선형적 내용만이 아닌
전체적 맥락을 포함하는
이해력과 이해의 한층 확산된 직관적 오라이다.
삶의 실제적 지침이 될
기본적인 영적 금언의 선정은
지각을 변화시키려는
일련의 태도가 된다.
태도는
일련의 선형적 신념체계가 아닌
삶에 대해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삶과 관련을 맺는 한 방식이다.
이 영적식별은
수정가능하며
이해의 확장을 초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는 여차저차하게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건 이러저러한 것 같다" 혹은
"그건 이러저러한 얘기로 들린다" 혹은
"이러저러하게 보인다" 혹은
그건 "이러저러하게 느껴진다"
라고 말하는 것을 알게 된다.
질문) 나(그)의 삶에 지침이 되는 영적 금언
4. 무조건적 사랑(기쁨)을 넘어 내면에 평화에 머물러라
5. 의견을 갖는 허영을 포기하고 겸손함과 연민을 가져라
6.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선의와 존중을 가져라
7. 신에 내맡김을 제외한 모든 사적동기를 놓아버려라
이런 말은
잠정적인 감각관련 정보처리 성향들이지
"그 사람은 완전히 틀렸어. 왜냐하면...."이라고 말하는
정의 및 선언적 진술의 한계는 아니다.
초점을 바꾸면
경험담은
덜 선형적이고, 덜 한정되고,
덜 언어화된다.
그 결과,
사람은
어떤 상황에 관해
모든 것을 다 파악하는데,
이러한 지향을 가질때
정보처리는 점점 더 맥락화되고,
특수한 것이 아닌 일반적인 것이 되며,
정신적 발언과 언어화는 줄어든다.
이것은
생각함없이 각성하고,
알 수 있는 능력으로 진화해간다.
가르랑거리는
고양이를 안고 있는 일이나
꼬리치는 개와 마주치는 일의
주관적, 경험적 성질은
생각이나 정신화를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은
상황전체가 어떤 것인지를 그냥 파악하는데,
이는 정신화된 지각이 아닌
본질을 식별하는
점진적 능력으로 인한 것이다.
결국에는 이 과정을 통해,
'일체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며,
있는 것이 그것의 의미이다'
라는 것이 대단히 명료해지는데, 이는 논평과 내용을 요구하지 않고 의견과 같은 어떤 언어적이고 이원적인 위치를 주장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수용을 드러낸다.
이 방식은
도교의 유서깊은 무위의 길과 비슷한데,
무위로써
사람은
삶과 함께 유유히 흘러가고
고집과 분별을 신에게 양도한다.
무저항은
분리가 아닌
무집착으로 인도하는데,
분리는 일종의 회피일 수 있다.
무저항은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격하고 관찰하고 아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적 양식으로서의 무저항은
사람을
삶이라는 영화속의 가상적 배우에서
목격자/관찰자로 이동시켜주는데,
목격자/관찰자로 존재함을 통해
사람은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위치성이나 경과에 투자하려는
유혹을 감소시킨다.
이로써
개인적 의지는
내맡겨지고 신성한 의지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는데,
여기서
창조는
지속적이고 진화적이며
앎의 펼쳐짐을 돕는다.
변형을 일으키는 이상의 과정에서
경험함을 활성화시키는
저변의 성질이
앎 자체라는 것이 식별될 수 있다.
목격하고 경험하는
혹은 관찰하는 누구는 없다.
오히려
앎은
과정을 바꾸려고
의도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없이
수월하게 작용하고 있는 타고난 성질이다.
삶 전부는
하나의 주어진 것이 될 뿐이고,
주관성의 본질에 대한 앎은
사적인 나의 감각을
참나의 본유적 현존으로 축소시키는데,
참나는
내용에 대한 생각함 너머에 있지만
그것을 감싸고 있다.
이
앎이 빛이고,
이 빛을 통해
우리는 정신적, 감정적으로 본다.
이 앎을 통해
이제 초점은
비춰진 것의 세부를 향하는 대신
빛의 근원을 향해
안쪽으로 향한다.
사람이
마음의 내용을
다만 알기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이 빛 덕분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혹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기나마 하겠는가?
주의 분산과 매력
에고의 동물 에너지는
결국 초점을 맞추게 되고,
초점을 맞춤으로써
심령 에너지가 쏠리며,
이로 인해 감정화된다.
감정화된 정신적 내용은
그 다음에 주의를 끌어당기고
자가 증식된다.
그 결과가
오락은 물론 매력과 혐오인데,
이러한 것은
결국 일상적 행동으로서
덫에 빠짐으로 이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덫에 빠진 행동 에너지와
관심의 카텍시스(리비도가 어떤 대상에게 '착 달라붙는'(부착, 집중) 것)에 의해
중요성을 얻고,
또한 지배적 행동과 느낌,
생각의 결과적 수준을 얻는다.
이러한 것은
결국 의식의 에너지 장으로 귀결되는데,
이는 전체적이고
비개인적인 인간 의식의
끌개장과 정렬하고
또 그것에 동승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은
선택지들을 고름으로써
수신기를 라디오와 텔레비전 주파수에 맞추는 것처럼
주파수를 맞춘다.
그래서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용서나 수용의 주파수와
전혀 다른 주파수에 동조되는 것이다.
각각의 의식수준은
지각, 관련된 태도,
그리고 그러한 것에 부수된 위치성들에 영향을 미친다.
에고의 성향에 대한 탐닉은
부정성이 지불하는
감정적 대가에서
쾌락을 얻는 중독과도 같다.
그래서
부정적 위치성은
중독과 유사하게
자가 증식적인 습관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의 밑바탕에는
추정들이 있고,
기본적인 동물본능의 충족이라는
내적인 유혹의 덫이 있다.
부정적 위치성은
반복을 통해
결국 우위와 통제력을 얻게 되는데,
자기애적 에고의 타고난 목적이
애당초 이것이다.
영적 수행에서
이러한 것은
유혹으로 명명되며,
그 다음
그러한 유혹을 포기하는 데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은 정당성, 앙갚음, 낙담 등의
감정적 단물이라는 쾌락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파블로프식 조건형성이
저절로 강화되는 보상체계로 일어나서
그 다음에는 자율적이 된다.
그뒤
이런 은밀한 충족을 방해하는 것은
불쾌한 좌절감과
박탈감을 낳는다.
그리하여
에고의 감정적 마음은
부정성과 노예적 속박에 매달린다는 것,
그리고
에고는
놓는 것에 저항하고
더 높은 기능수준 및 대처기전으로 이동하는 것에
맹렬히 저항한다는 것을 흔히 관찰할 수 있다.
예를들면 분개/비난/자기연민/피해자의 수렁은 일반적으로 우회적 함정인데, 이러한 것들은 재빨리 사회적 격려를 통한 그리고 자가팽창하는 위치성들의 거짓 중요성을 통한 비준을 구한다.
사람들이 정교한 정당화,
기억의 소급적 위조,
기만으로 원한을 품은 채
평생을 보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이 심리적 컴플렉스는
200이하에 있는
모든 의식수준의 우회적 혼합물로 구성된다.
이것은
고도로 방어적이 되어
그 어떤 도전에 대해서도
완강히 버티는데,
하물며
놓거나 내맡기려는
자발성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결과
용서, 수용, 이성, 사랑은
에고의 은밀한 내적 목적에 대한
안티테제로 보인다.
조심스럽게 키워 온,
자신과 타인과 세계에 달라붙어 있는
온전하지 못한 거짓을 방어하기 위해
사람들이 삶 전체를 망가뜨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자기기만은
감정적 에고/마음의 타고난 결함이며,
영적 진실의 빛이 없다면
이것은 저절로 강화되어
실제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파괴적 결과를 낳는다.
자기기만의 희생자는
쾌락과 실제의 행복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실 실제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이 병리적 컴플렉스는
그토록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포기하거나
그 자멸적 전제에 의문이라도 갖느니
사실상 죽음을 선택한다.
우연하게
이 악순환은
때로
직면적인 삶의 위기로 인해
중단되는데,
결국 그것은 변장하고 온 축복이 된다.
감정적 에고/육체/마음으로부터 자유로의 도피
측정수준
200이하의 수준들이
자가증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애고의 동물본능이 지불하는 대가인
유혹적, 감정적 쾌락 때문이다.
단 하나의 출구는
온전한 자기정직성인데,
불행히도
사람이
이 부정적인 감정적 컴플렉스에 의해 지배되고
사로잡혀 있을 때는
그러한 것을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지 조차도 않다.
이 컴플렉스는
낮은 힘의 동물에너지로 구성되기 때문에,
회복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은
보다 강력한
진실의 에너지 뿐이다.
신성의 본성으로 인해
중재는
초대가 있어야 일어난다.
왜냐하면
사랑은 힘이며
낮은 힘의 도구를 통해서는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의 78%가
진실의 수준인 200이하로 측정된다는 것을
각성할때 연민이 일어나는데,
이 수치는
일차적으로
오직 동물본능으로 말미암아 생존하는
일부 하위문화와
세계의 일부지역에서
100%가깝게 상승한다.
에고 부정성으로부터 단순한 2단계 탈출 : 진실 메커니즘
이 모든 한계를 초월하고
복잡성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두가지 개념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1. 부정성은 정력적인 낮은 힘(동물에서 기원)에 기초하며,
이는 오로지 신성한 기원에 속하는 힘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용가능한 그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기도하는 것이 운용상 필요하다.
2. 육체/감정/마음을 나로 동일시 하지 마라.
육체/감정/마음이 나의 것이긴 해도 나는 아니라는 사실에 진실할 것이며 이를 인정하라.
처음에는 이것은 인위적이고 이상하고 낯설고 부자연스럽게 보일수도 있지만,
기본적 실상은 이것이 더 높은 진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매우 힘있고 막강한 도구가 된다.
마음은 진실은 물론 이러한 실상을 부정하려고 할 것인데(마음이 하게 되어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에고 마음은 진실이 자신의 천적임을 직관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오랜세월동안
그리고 현재의 삶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단순한 두가지 전제를 인정하느니
사실상 기꺼이 죽으려고 해왔다.
사람들은
자신이 실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자신과 타인을
기꺼이 날려버리려고 한다.
에고는 자신이 실수했거나 심지어 틀렸을수도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느니(모든 말 중에서 에고에게 가장 끔찍한 단어는 틀렸다는 것임), 행복하게 당신을 죽음으로 인도하고,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각성하라.
죽음보다 그리고
지옥같은 삶보다
더 나은 것은 성장하는 것이고,
또한 마음은
사람을 오도하고, 교활하며, 무자비하며,
자신의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에고의 핵심은
자기애적 자부심이며,
에고는 은밀히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피로만 없다면
에고는
그 은밀한 팽창하는
이원적 추정들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은
단순한 겸손함으로 해소된다.
겸손함은
자유와 행복의 경험에 이르는 문이다.
사람은
마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할때
마음의 진정한 본성을
발견한다.
분석해보면
마음은
나의 생각들이라는
추정의 복합체이자,
관찰된 사실적 데이터의 집합체라는 것이
보인다.
데이터는 유용하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그 데이터에 대한 생각과 관점은 믿을 수 없으며,
그러한 생각과 관점이
나의 것이라는 추측 및
모든 부수적 위치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왜곡된다.
일단 생각이나 느낌에
나의 것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그것은 마술에 걸린 것처럼
추상적 전지와
가정된 최고의 타당성으로 물들게 된다.
이러한 것은
모든 영적문헌에서
고전적으로 환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구성하는데,
이는 망상으로 진행하는 일이 잦다.
온전한 의심과 질문으로 중단시키지 않는다면,
광포한 마음은
자신의 추정적 통치권에 도전해 올
믿을만하고 검증 가능한
진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끝없는
포위공격을 감행한다.
(즉 모든 반대 증거에 맞서 "정당성"을 지키려고 하는 보편적 인간 성향)
마음의 지배를 취소하는 것은
단 한걸음-겸손함으로 성취될 수 있는데,
마음은 통치권자가 아니고
진지하지 않으며
진실과 거짓을 구별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만으로
겸손함은 강화된다.
마음은
육체적 생존과 대상의 인지에 이를 때
공리적 가치를 갖는다.
심지어
물질적 세계를 인지하는 데서도
마음은
세계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마치
진화가 곧 창조라는
극도로 단순한 관찰 결과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마음은
논리와 이성이라는
보호적 영역과 규칙들 안에서나
혹은 고유한 운용상의 제약과
규율안에서 유용한 도구다.
그래서
마음이 과학으로서 작용할 때,
그것은 최상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과학은
감정성이나 논리의 위반을
허용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막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요!"
이러한 발견은
더욱 큰 자유의 향유로 이끌어 주었는데,
왜냐하면
의견들은 으레 논쟁적일 뿐 아니라
구속하고 제약하기 때문이다.
생각이나 관념이
실제로 나의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그 저자는 누구인가?
생각이나 관념은
사실상 누구라는 기원을 갖지 않으며
그저 무엇에서 일어날 뿐이다.
의식의 측정가능한 장의 내용은
인류 집단의식의
한 수준의 특정한 에너지 장에 의해
조직된 생각은행과 같다.
비슷한 생각, 개념, 관념들이
다양한 수준에서 모이고
중심 끌개장주의의 영향력 아래 조직되는데,
중심끌개장은
마치 중력과도 같이
중량이나 밀도가 비슷한 관념들을 끌어당긴다.
이 현상은
바다에서 수심에 따라
물고기와 생명형태들이 층층이 나귀는 것과 비슷하다.
인간 삶에서는
수면위로 도약하는 이들은 물론
밑바닥에서 사는 이들도 있다.
일정한 유형의 사고방식, 신념체계, 밈(구호)은
수세기 동안 신화들에 지배되어 온
일정한 사회들과 하위문화들에 대해 풍토적이다.
예를들면,
온전성, 정직성, 공평함이
일상적 거래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조차 않는 큰 나라들이 있다.
모든 상호작용은 그런 것 대신
전적으로 이득에 기초하며,
기만은 가치있는 사회적 기술이자 기능이다.
그런 문화에서 도덕성은 부재할뿐 아니라
불합리하고 무가치해보이며, 나약함을 표시하는데
수많은 순진한 관광객은 집에 돌아온 뒤
귀중한 골동품으로 알았던 것이 실제는 몇 푼짜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
어디에나 있는 피해자/가해자의 이원적 허위에 대한 설명
영적 노력을 통해,
사람은 그동안
에고의 교묘한 기만에 넘어간 포로이자 "피해자'가
다름 아닌 자기자신이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에고의 모든 수법은
장구한 세월에 걸친
동물계의 다양한 종의 진화에서 관찰될 수 있는데,
동물계에서는
덫에 걸기, 기만, 경쟁, 에고이득, 사리추구, 위장,
낮은 힘이 생존을 돕는다.
사람과의 진화는
결국 호모사피엔스에 이르렀고,
이와 조화를 이루어 전전두피질이
동물 뇌의 앞부분에 출현했는데,
동물 뇌는
의식수준 200에 이르기까지
동물본능의 지배하에 남아있다.
동물본능은
사적인 이득에 전적으로 쏠리며
영적 힘과 진실의 에너지,
특히 사랑 에너지와 충돌하는
그 길을 계속 좇는다.
에고의 기만은
교묘하기 짝이 없어서
자신은 희생자이고 포로를 속여서
가해자가 저 밖에 있다고 믿게 만든다.
그렇지만
가해자는
사실상 타고났으며
이 안에 있다.
진짜 가해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조사해보면
거기에 누구는 없고,
특정한 의식수준의 에너지 장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발견될 것이다.
그 의식의 에너지 장은
진화의 시간전체를 통해서 일어났고
여전히 우세하며,
세계인구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거나
여전히 포로로 붙잡고 있다.
사람은 이를 통해 붓다가 한 말의 지혜로움과 진실을 알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드문일이다.
진실에 대해 듣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드문 것은 진실에 대해 듣고 그것을 추구하는 일이다"
이 진술의 진실은
의식측정으로 검증된다.
의식측정은
세계인구의 0.4%만이
무조건적 사랑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음을 확인해준다.
무조건적 사랑은
인간이 한 생에 도달할수 있는
실용적이고 함리적인 목표이다.
무조건적 사랑의 수준에서
영적몰두와 봉헌은
절묘한 기쁨,
심지어 황홀경의 상태들로 진화해가고,
결국에는 600에서 평화의 수준에 도달하는데,
이는 신비주의자의 초보수준이다.
신비주의자의 길은
그러한 용어의 참된 고전적 의미에서
'헌신적 비이원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첫댓글 사람은 깊이 겸손해짐으로써 마음은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사실 그런 분별적 식별을 할 권한이 없고, 그럴 준비가되어있지 않으면 또 그럴 능력도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은 자신이 언제, 어떤 환경에서 누구에게 좋고, 누구에게 나쁜지를 묻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발견을 할 수 있다.
나의 삶에 지침이 되는 영적 금언은?
-살고, 그리고 살게 해주고 _()_
내 삶의 영적 금언은?
"내 삶의 목표는 영적 깨달음"
"모든 생명에 친절하라"
"존재하는 전부에 대해 선의를 가져라"
감사합니다
언젠가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막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요!" 이러한 발견은 더욱 큰 자유의 향유로 이끌어 주었는데, 왜냐하면 의견들은 으레 논쟁적일 뿐 아니라 구속하고 제약하기 때문이다. 생각이나 관념이 실제로 나의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그 저자는 누구인가? 생각이나 관념은 사실상 누구라는 기원을 갖지 않으며 그저 무엇에서 일어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