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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일현스님의 염불소리에 만공스님도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
한때 함경도 석왕사 강원을 마치고 통도사에서 노전 소임을 보기도 했던 일현스님의 염불솜씨는 타고 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0대 후반에 일현스님이 수덕사에서 염불을 할 때의 일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청정한 법음(法音)을 내는 듯 법당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도량 구석구석까지 일현스님의 염불이 찾아들고 있었다. 염불을 묵묵히 듣고 있던 만공(滿空)스님이 삼매(三昧)에 빠져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만공스님은 “일현 사문은 앞으로 염불을 통해 많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게”라면서 격려했다.
일현스님이 염불삼매에만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니다. 율사(律師)에 못지않은 생활로 후학들의 모범이 되었다. 진철스님(전 마곡사 주지)은 “우리 스님은 전형적인 불제자인 ‘달마상’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다”면서 “율장에 나와 있는 크고 작은 계율을 어김없이 지키고자 노력하셨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아침예불이후 갖는 대중공양 때 불참하게 되면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일현스님의 경책을 감당해야 했다. 60년대 말 일현스님이 마곡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을 때 당시 사중에는 대중이 40여명 살고 있었다.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던 시절이지만 계율을 지키고 청규를 엄수하는 것은 다른 어느 도량에 뒤처지지 않았다.
권연옥 교수(한남대 행정대학원)는 “큰스님께서는 늘 수염을 기르고 계셔서 당시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나중에서야 초하루와 보름에만 수염을 깎는 청규(淸規)를 지키시기 위함이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옛기억을 떠올렸다.
일념으로 염불하고 계율 지키는 것을 엄격히 했던 일현스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법상(法床)에는 앉지 않았다. 진현스님(천안 승천사 주지)은 “마곡사에 사실 때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제자와 재가불자들에게 계(戒)는 주어도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신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면서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뜻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님의 제자들은 50여명 가까이 된다. 일현문도회(一玄門徒會)를 만들어 은사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진각스님(마곡사 주지)은 “늘 저희들에게 염불을 열심히 해야 한다”면서 “큰 복을 받아 출가했으니 불은(佛恩)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한눈팔지 말라고 당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후학들은 ‘석문의식집’에서 문도들이 밝힌 은사의 모습이다. “스님께서는 동진출가하시어 평생을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시는 염불수행으로 일관하셨으니 분명 이 땅의 불교계에 다시 없으신 찬불승(讚佛乘)의 상징적 존재이셨습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탄희(歎喜)하는 것이 보살행의 시작일 것이니, 찬불승의 길을 걸으신 스님이야말로 보살행의 참모습을 보이셨음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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