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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무위사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칭했다는 기록이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에 전하나, 이는 원효스님의 생몰연대(617-686)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부족하다. 이후의 연혁은, 삼국통일 후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갈옥사(葛屋寺)로 창건한 것이 첫번째 중창이라 전한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 9) 이후에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 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선각국사 관련기록은 경내에 서 있는 「고려국 고무위갑사 선각대사편광영탑비명 병서」에 기록된 내용으로, 무위사는 선각국사가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이름으로 이미 창건되어 있었고, 형미스님이 중창하면서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사찰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946년(정종 1)에 형미스님이 제 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나, 946년은 이미 형미스님이 입적한 30년 뒤 최언위가 지은 「선각대사편광영탑비」가 세워진 해이므로 믿기 어렵다. 이는 아마도 형미스님이 모옥(茅屋)이던 무위갑사를 왕건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무위사는 활기를 띠게 되는데, 1407년(태종 7) 12월 조정에서 각처의 명찰을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로 삼게 하였을 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따라서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사찰에서 천태종으로 성격이 변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격 변동은 고려후기 천태종 백련결사(白蓮結社)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 역시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성격 변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국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천태종 소속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 사찰 통폐합의 2차 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이 만들어지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전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을 통해 확인된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전을 건립하고 아미타삼존도ㆍ아미타여래도 등의 벽화를 조성한 것은 조성시기 및 신앙배경 등의 측면에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齋)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육지와 물 위를 떠도는 영혼을 부처님의 법력으로 천도(薦度)하는 의식으로서,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전과 아미타불 벽화 등 서방 극락정토와 관련된 불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와 같은 신앙구조 속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명종 10년)에 태감(太甘) 스님이 4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앞서 보았듯이 무위사란 사찰명이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407(태종 7)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이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진ㆍ병자의 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一道)에 으뜸이었다 한다.
그러나 이후 법당과 요사가 점차 퇴락하여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으며, 1678년(숙종 4)에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지주를 마련하였다. 1739년(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미타전ㆍ천불전ㆍ시왕전을 보수하고, 당시 주지 극잠(克岑) 스님이 중심이 되어 앞에서 언급한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을 작성하였다.
1934년에 극락보전이 국보 제131호로 지정되었으며, 1956년 극락보전을 보수하고 보존각을 설립하여 이곳에 벽화를 봉안하였다. 1975년에 극락보전을 재보수하고 보존각을 새로 세웠으며,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ㆍ해탈문ㆍ명부전ㆍ천불전을 다시 지었다. 근래에는 1991년에 산신각을 짓고 1995년에는 기존의 동쪽 요사를 늘려서 지었다.
인위적 조작이 닿지 않은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無爲’의 절이름처럼, 무위사는 월출산 남동쪽 기슭에서 한 점의 허세나 허튼 구석 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찾는 이를 맞아준다.
신라시대에 설립되어 도선국사가 중창한 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선종(禪宗)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선각국사(先覺國師)가 머무르며 널리 교화를 펼친 곳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사철 곳곳에는 선각스님의 유물과 흔적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하며,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사찰로 확고한 위치를 다져온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이르면 극락보전의 건립과 함께 무위사의 대명사격인 후불벽화(後佛壁畵) 불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당시 사찰명이 수륙사(水陸社)로 개칭되면서 육지와 물 위를 떠도는 영혼 천도의례인 수륙재(水陸齋)를 빈번히 베풀었을 것이고, 이러한 배경 하에 극락전과 아미타불 벽화 등 서방 극락정토(極樂淨土)와 관련된 불사가 이뤄진 것은 동일한 신앙구조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꼭 필요한 부재만 사용하여 검박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 목조건축인 극락보전, 우리나라 불교벽화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의 작품들로 흙벽[土壁]에 그려진 수십 점의 벽화들, 여의주를 문 용머리[龍頭] 거북이 비신(碑身)을 받친 채 온전한 모습을 드려내고 있는 선각대사 탑비 등은 무위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이다.
관람포인트
1. 무위사 극락보전은 조선 초에 세워진 대표적인 목조건물로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 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 받으면서, 조선시대의 단아함이 그대로 살아 있다.
2. 극락보전 안에는 1400년대에의 아미타삼존벽화와 백의(白衣) 관음벽화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데, 탱화가 아닌 토벽(土壁)의 붙박이 벽화로 그려진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로서, 화려하고 섬세한 고려불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명작 중의 명작이다.
3. 극락보전에서 만날 수 있는 독특한 것으로 사자의 등 위에 올려놓은 법고(法鼓)가 있는데, 사자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찿아가는길
무위사(無爲寺)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번지 월출산(月出山)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의 말사이다. (061- 432-4974, www.muwisa.org)
전라남도 서남쪽 바닷가에 육지로 오목하게 파고들어온 강진만이 있다. 강진 땅은 북쪽으로는 월출산을 사이에 두고 영암이 있고, 동쪽 장흥에서부터 흘러온 탐진강은 강진으로 와서 강진만으로 들어간다. 이 강진만은 아홉 고을의 물길이 흘러든다는 뜻으로 구강포(九江浦)라고도 불린다.
찾아오는 길
승용차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산 IC를 빠져나온 뒤 13번 국도로 접어들어 약 53km를 달리면 송정ㆍ나주가 나오고, 이곳을 지나 영암 라이온스탑 앞 삼거리에서 왼편 13번 국도를 탄다. 1km 정도 가면 만나는 오리정 오거리에서 불티재 방향으로 접어든 뒤 강진ㆍ해남 방면으로 달려 백운교를 지나면 오른쪽이 무위사 진입로이며, 약 3.3km 정도 가면 무위사에 닿는다.
광주 방면에서 갈 경우에는, 해남ㆍ진도ㆍ완도ㆍ강진 방면 국도 13번을 타고 영암과 월출산 불티터널을 지나 5km쯤 달린 후 우측의 ‘무위사 입구’ 표지판을 보고 3km 쯤 가면 된다.
순천방면에서 갈 경우에는, 강진읍을 지나 성전삼거리에서 광주방면 13번을 타고 3km 쯤 달린 후 좌측의 무위사 입구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하여 3km 정도 가면 된다.
대중교통
무위사 가람배치
사찰입구에 해당하는 천왕문을 들어서면 극락보전을 향해 박석이 갈려 있는 길을 오르게 된다. 10m 정도 오르면 왼쪽으로 범종각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극락보전에서 떼어낸 벽화를 보관하고 있는 벽화보존관이 남향해 있다. 박석길 오른쪽으로는 커다란 고목을 협시로 둔 종무소 건물이 자리한다.
이곳에 올라 정면을 바라보면 막돌과 다듬은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조선 초기의 건물인 극락보전이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을 드러내며 서 있다. 같은 축선상의 오른쪽으로 명부전이 서향해 있고, 축대 아래로 2채의 요사가 역시 서향해 있다. 왼쪽으로는 극락보전을 뒤로한 미륵전과 산신각이 서향한 채 나란히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앞으로 선각대사편광탑비와 삼층석탑이 있다.
산신각을 지나 서쪽으로 10여m 정도 가면 좁은 계곡을 만나게 되는데, 이 계곡 건너에 천불전이 극락보전을 바라보며 동향해 있다. 계곡 가에는 2003년에 무위사 벽화들을 더 좋은 조건에서 보존하기 위해 신축중인 보존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무위사의 지정문화재로는 극락보전(국보 제13호)ㆍ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상(보물제1312호)ㆍ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ㆍ백의관음벽화(보물 1314호)ㆍ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ㆍ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등이 있다.
선각국사
선각국사 형미(先覺國師 逈微, 864~917)는 신라말 고려초 가지산문 계통의 선승으로 성은 최씨(崔氏)이며 무주(현재의 광주) 출신이다. 15세에 출가하여 가지산 보림사에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5-880)의 제자가 되었으며, 얼마 지난 뒤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891년(진성왕 5) 당나라에 건너가 조동종의 운거 도응(雲居道應, ?~902)의 법을 전해받고 905년(효공왕 5)에 귀국하였다. 이후 전남 나주지방을 정복한 태조 왕건과 인연을 맺게 되어 철원에 올라갔다가 궁예의 미움을 받게 되어 피살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엄(麗嚴)ㆍ이엄(李嚴)ㆍ경유(慶猷) 등 이른바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의 한 사람으로, 조동종(曹洞宗)의 사상을 고려에 처음으로 전한 친왕건적(親王建的) 선종의 승려였다.
극락보전 벽화를 그린 파랑새
무위사의 극락보전 벽화에는 독특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짓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한 노인이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릴 것이니,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 안을 들여다보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허락한 주지스님은 약속대로 기다렸으나, 도대체 저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었다. 마지막 49일째 되는 날, 주지스님은 ‘설마 작은 구멍으로 살짝 보는 것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성보문화재
극락보전(極樂寶殿) (국보 제13호)
국보 제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의 단층 겹처마 건물로 되어 있다. 무위사에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1555년(명종 10) 4창할 때 건립된 것인데, 1983년 대량 상부를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을 통해 이 극락전만큼은 1430년(세종 12) 효령대군(孝寧大君) 등에 의해 건립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엇맞추어 쌓은 석단(石壇)에 갑석(甲石)만을 둘러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아 세웠으며, 기단은 앞쪽만 높게 쌓고 옆면과 뒷면은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세웠다.
주좌(住坐)를 새기지 않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을 가진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머리와 주심포작을 짜올려서 가구를 결구시켰다. 기둥머리에는 2출목의 공포를 올려놓았는데, 바깥쪽 포의 끝은 제공(諸貢)처럼 되어 있고, 내포는 1장의 판으로서 파련(波蓮) 무늬를 새긴 운공(雲工)으로 되어 있다.
대들보 위에는 중종보가 있어, 대들보 양쪽에 놓인 파련대공이 이를 받침으로써 이중량 구조를 이루고 있고, 종보 끝은 대공 위에서 중도리를 받치고 있다. 종보 중앙에는 화려한 파련각을 가진 마루대공이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이 마루도리를 내반이 심한 솟을합장이 받치고 있다. 가구구조는 이렇듯 이중량 구조로 되어 있으나, 건물 측면을 보면 이중량으로 보이지 않고 두 고주 위로 종보만 보인다. 그 밖에 창방과 퇴보, 장혀 등 작은 직선재로 구성된 간결한 측면관을 보여 주고 있다.
건물의 앞면은 격자모양ㆍ빗살모양을 섞어 만든 4분합 문을 달았고, 옆면에는 앞쪽에 출입살문, 뒷면에는 칸마다 모두 판자문과 창을 달았다.
건물 내부는 기둥이 하나도 없는 넓은 공간인데, 중앙부 뒤쪽에 불단을 마련하고 천장은 중앙 칸에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불단 위쪽에는 닫집모양의 보개를 올리고 불단 위에 아미타삼존을 봉안하였으며, 마루 아래에는 전돌이 깔려 있다. 1983년 해체작업을 하면서 전돌을 걷어냈더니 기둥이나 벽화에 습기가 차서 황급히 다시 깔았다는 일화가 전하여, 옛사람들의 집짓는 지혜에 새삼 감복하게 한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과 30여 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백의관음벽화만 남기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 보관하고 있다. 그밖에 사자고대(獅子鼓臺) 위에 봉안된 법고(法鼓)와 범종 등이 봉안되어 있다.이 벽화들에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짓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한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법당의 벽화를 그릴 것이니 49일간 절대로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주지스님은 이를 허락하였으나 궁금증을 참을 길 없어 마지막 49일째 되는 날, 문에 작은 구멍을 뚫어 법당 안을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법당 안에는 노인은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주지스님이 놀라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지막으로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는 입에 붓을 문 채 날아가 버렸고, 따라서 극락보전의 벽화 속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극락보전 아미타후불벽화(極樂寶殿 阿彌陀後佛壁畵) (보물 제1313호)
중앙의 본존불은 거대한 키 모양 광배 안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왼쪽에는 높은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서있고, 오른쪽에는 왼손에 석장을 잡고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서있는 구도이다. 구름을 배경으로 한 화면의 상단 좌우로는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였는데, 가슴 윗부분만 드러내고 채색을 부드럽게 하여, 중앙 삼존으로 향하는 시선이 분산되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다시 그 위에는 서광이 펼쳐진 가운데 좌우로 소형의 좌불(坐佛)이 각 2불(佛)씩 그려져 있다.
이러한 구도적 특징은 16관경변상도를 이어받은 조선 초기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1465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어, 16관경변상도의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이 단독으로 그려진 듯한 구도이다.
삼산형의 머리 윤곽과 신체의 부피감, 괄호 모양의 이마 처리, 법의의 금선문양 표현, 두건 쓴 모습의 지장보살, 관음보살의 투명한 겉옷과 치마 끝단의 구불구불한 옷주름, 온화한 색채 등은 고려적인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요소이다. 반면, 큼직한 육계와 정상계주, 발 위로 길게 내려뜨린 왼손, 간결한 문양, 사각대좌와 키 모양 광배, 발목의 레이스 모양 옷자락 표현, 본존불과 대등한 크기의 기타 인물표현 등은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벽화의 좌우 하단에는 화기(畵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오른쪽의 내용에 '○○십이년병신삼월초 길화성무량수여래관세음지장보살…화원 대선사해련(○○十二年丙申三月初吉畵成無量壽如來觀世音地藏菩薩…畵員 大禪師海連)…'이라 밝히고 있으나 연도부분이 퇴락하여 조성연도를 알 수 없었는데,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북탑지(北塔誌) 내용 중 '성화십사년무술사월십칠일(成化十四年戊戌四月十七日)…중수조(重修造)…무위사조주불설대회안거(無爲寺造主佛設大會安居)'라는 기록이 있어, 성화 12년(成化十二年)인 1476년에 화원 대선사 해련(海連)이 조성한 작품임이 확인되었다.
극락보전 신중탱 및 칠성탱(極樂寶殿 神衆幀ㆍ七星幀)
극락보전 석가삼존상 및 16나한상
극락보전의 좌측에 마련한 단에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에는 삼존이 봉안되었고, 그 측면과 후면에 2단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ㆍ우측에 각 1구의 사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삼존불좌상은 수기삼존으로, 본존불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맺고 있는 석가여래이며, 좌우협시는 보관을 쓰고 있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로 불상의 재질은 모두 석조이다.
16나한상 또한 석조로 중앙의 삼존불과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불상의 양식적 특징 등으로 보아 제작시기는 19세기 후반 경으로 보인다.
극락보전에는 사자의 등 위에 올려놓은 독특한 법고(法鼓)가 있다. 고개를 약간 쳐든 채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해태보다는 사자인 듯하며, 둔중한 신체에 막대형 다리로 표현되어 있다. 간주나 북을 받치는 받침 없이 사자의 등 위에 북을 올려놓고 천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북과 사자는 모두 채색되어 있고, 원통형의 북 몸체에는 운문(雲文)이, 가죽부분에는 삼태극(三太極) 문양이 그려져 있다. 사자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극락보전 백의관음도(極樂寶殿 白衣觀音圖) (보물 1314호)
당당한 체구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튼 3/4 측면관인 이 관음보살은, 넓적한 얼굴에 굵은 목, 넓은 어깨 등에서 전체적으로 강건한 남성적 체구를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을 앞에 모아 교차하여 오른손으로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있으며, 아미타불을 표시한 보관 위에서부터 흰 천을 내려쓰고 있는데 그 양쪽 자락이 어깨를 덮고 내려와 흩날리고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으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과 넘실대는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앞쪽 위에는 먹으로 '해안고절처(海岸孤絶處) 중유낙가봉(中有洛迦峰) 대성주불주(大聖住不住) 보문봉불봉(普門逢不逢) 명주비아욕(明珠非我欲) 청조시인수(靑鳥是人遂) 단원창파상(但願蒼波上) 친참만월용(親참滿月容)'이라는 5언 율시가 쓰여 있다.
1476년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후불벽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며,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보물 제1314호이며, 화면 크기는 가로 280cm, 세로 320cm이다.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보물제1312호)
극락보전 불단 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으로 현재 보물 제13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좌측(향우)에는 왼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한 채 보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을, 우측(향좌)에는 석장을 짚고 오른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장보살상을 배치하였다. 모두 개금처리와 개채가 되어 있는데, 다소 미숙한 개금처리로 인해 표면이 거칠어졌을 뿐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좌협시상인 관음보살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며, 머리에는 화려한 금속제 보관을 쓰고, 양어깨 위로 굽실거리는 보발이 흘러내리고 있다. 선정인과도 같은 손가짐을 취하고 있는 두 손에 보병을 받쳐 들고 있으며, 가슴에는 1조의 간단한 가슴장식이 있다. 앉은 모습은 왼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대좌와는 별도로 조성되었다. 앞쪽의 옷자락 또한 몸으로부터 흘러내리지 않고 대좌와 함께 조성됨으로써 몸체와 분리되는 특색이 엿보인다.
본존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상은 관음보살상과 대칭하여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6개의 금속제 고리가 매달려 있는 석장을 짚고 있다. 세 상(像) 가운데 비교적 갸름한 형태의 얼굴을 하고 머리에는 두건을 썼으며, 가슴에는 1조의 가슴장식이 되어 있다. 걸터앉은 듯 오른 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 상에서도 역시 관음보살상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앞쪽 옷자락을 몸체와 분리하여 대좌와 함께 조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후기 불상조각 양식의 계승과 함께 조선 초기 불상양식의 정립이라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으며, 조성연대는 1934년 보수 당시 발견된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국보 제44호) 석탑지(石塔誌) 내용 중의 ‘성화십사년무술사월십칠일(成化十四年戊戌四月十七日)……무위사조주불(無爲寺造主佛)…" 기록과 관련지어 살펴볼 때 1478년경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 삼존불은 고려 후기를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화되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 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목조불임에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으로, 우리나라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명부전(冥府殿)
맷돌
종무소 건물 옆에는 커다란 고목과 함께, 연륜과 크기를 자랑하는 대형의 맷돌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상층부는 없고 하층부만 남아 있는 이 맷돌은 지름이 180cm나 되는 대형으로, 길쭉한 바가지모양으로 생겼다. 중앙의 넓게 파진 홈에 곡식을 넣고 분쇄한 후 그대로 아래쪽에 그릇을 대고 받을 수 있도록 한 쪽이 길게 돌출된 채 트여 있다. 중앙에 놓인 둥근 돌에는 10cm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무위사 삼층석탑(無爲寺 三層石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개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2ㆍ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이 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 외의 부재는 완전한 상태로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비교적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탑의 조성연대는 선각대사 편광탑비의 조성연대(946년)와 동시대이거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고려 초기로 여겨진다. 현재 전남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396cm이다.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 先覺大師遍光塔碑) (보물 제507호)
극락보전에서 천불전 쪽으로 30m 정도 가다보면 미륵전 못 미쳐 남향으로 서 있는 비를 만나게 된다. 이 비는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864~917)의 탑비(塔碑)로, 비명(碑銘)은 ‘고려국 고무위갑사선각대사 편광영탑비명병서(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幷序)’이며, 당시 태상(太上)인 최언위(崔彦撝,868~944)가 글을 짓고, 유훈률(柳勳律)이 썼다.
비문 끝에 ‘개운삼년세차병오오월경인삭이십구일무오입(開運三年歲次丙午五月庚寅朔二十九日戊午立)’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946년(고려 정종 1)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해는 대사의 입적 후 28년이 되는 해이다.
비문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무주(武州) 출신으로 법휘(法諱)는 형미(逈微)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신라 헌강왕 8년(882)인 18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가지산 보림사 구산선문의 태두인 보조선사에게 찾아가 선법을 배웠다. 27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심인(心印)을 받고 효공왕 9년 (905)에 귀국하여 강진 무위갑사에 머무르니 이때가 대사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라 한다.
귀부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는 양각으로 뚜렷이 조각한 용두(龍頭)로서 여의주를 머금은 입은 투조되어 있다. 두 귀의 모습은 용의 귀와 같이 깃털이 날리는 듯 조각하여 사납게 표현하였고,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갑문을 정연하게 양각하였다. 비좌(碑座) 전후 2면에는 운문(雲文)을 조각하고 양측에 안상(眼象)을 각각 조각하였다.
비신 위의 이수(螭首)에는 3단의 받침을 복판연화문으로 장식하였는데, 이수는 상하 2석으로 겹쳐 쌓았으며 중앙에 방형의 전액(篆額)을 마련하고 있으나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이수 주위는 모두 반결 운룡문(雲龍文)과 반결 쌍용문(雙龍文)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며, 사실성을 띠고 있는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이고 있다.
미륵전(彌勒殿)
미륵전 석불입상(彌勒殿 石佛立像)
미륵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은 자연석에 부조(浮彫)로 새겨 모셨다. 이마 위의 육계와 머리형태가 마치 여성의 올림머리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불상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신(佛身) 주변에 화염문 광배를 선각한 점이나 목의 삼도와 수인 등에서 여래(如來)임을 알 수 있다. 부숭부숭한 눈두덩에 입술이 두껍고 인중이 짧으며 왼쪽 어깨는 움츠린 듯 좁게 표현되어 있다.
배례석(拜禮石)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장방형의 다듬은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문은 가운데 어칸 부분에만 내었다. 이 건물은 1975년 극락보전에서 떼어낸 벽화들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현재 내부에는 28점의 벽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1975년 지은 보존각이 낡고 협소하여 2003년에 새로 신축중인 보존각이 있다. 신축 보존각은 정면 9칸, 측면 5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이곳에 벽화들을 다시 보존처리하여 옮겨 올 예정이다.
삼존불화(三尊佛畵)
동측 내벽 중앙에 그려진 그림으로, 가로로 긴 화면 가운데에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협시보살을 배치하였다. 삼존불 사이와 주위로는 합장한 채 본존을 향하고 있는 입상의 두 보살상과 6비구를 배치하였으며, 멀리 뒤로는 기암의 월출산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암산(巖山)을 그려 넣었다. 비교적 활달한 필치에 적황색의 색조, 당당한 체구의 인물형태 등에서 고려적 색채가 어느 정도 엿보이지만, 사각형의 얼굴과 연꽃대좌의 형식적인 꽃잎 표현 등에서 조선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오불도(五佛圖) 1
삼존불도 위쪽 벽화로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한 다섯 부처의 그림이다. 모두 연화좌 위에 길상좌(吉祥坐)한 자세로 적색 대의를 입었으며, 육계가 뾰족하고 정상계주가 붉게 처리되어 있다. 본래 벽화 위에 덧그린 것으로 18~1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불도(五佛圖) 2
아미타래영도 위쪽 벽에 그려진 오불도로, 가운데 항마촉지인을 취한 부처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하품중생인을 취한 부처를 각 2구씩 배치하였다. 적색 대의에 육계가 뾰족하며, 정상계주는 붉게 처리하여 동벽의 오불도와 같은 솜씨임을 알 수 있다. 18~1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녹색 두광에 화려한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백련좌를 딛고 서 있는 그림이다. 어깨 위로는 보발이 길게 늘어져 있고 가슴에는 흉식이 보이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정병을 들고 있다. 18~1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정면을 향하여 앉아 있는 모습의 보살상으로 어깨 위로는 보발이 드리워 있으며, 둥근 모양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다. 채색이 많이 박락되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연꽃 자방 위에 앉아 선정인을 취하고 있는 듯하며, 머리에는 보관의 흔적이 보인다. 벽 테두리선과 세련된 필치로 보아 15세기경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연화당초향로도(蓮華唐草香爐圖)
향목(香木)을 꽂은 중앙의 향로를 중심으로 거의 좌우 대칭이 되도록 연화당초문을 배치하였다. 당초문대는 비교적 자연스러우나, 연꽃무늬의 도식화된 점은 이 그림이 18~19세기경에 그려졌음을 짐작케 한다.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
왼 무릎을 구부리고 오른 다리를 편 채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도(天人圖)이다.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음에 비해 얼굴은 우측으로 돌린 역동적 자세로, 두 손으로 박(拍) 형태의 악기를 다루고 있다. 흩날리는 치맛자락과 천의자락, 머리띠로 말미암아 마치 유유히 떠가는 듯한 모습이다.
또 다른 주악비천도는 생황(笙簧)을 연주하며 하늘을 날고 있는 천인그림과, 거의 'V'자에 가까운 자세로 입에는 퉁소(洞簫)를 물고 있는데, 마치 하늘 위로부터 아래를 향하여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듯하다. 이들 비천도는 위로 휘날리는 천의자락과 치맛자락이 율동감을 잘 나타내 주고 있으며, 조성시기는 18~1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입불도와 서로 대칭되게 자리한 정면향의 지장보살도로서, 오른손에는 고리가 여섯 개 달린 석장을 잡고 왼손으로는 구슬을 받쳐 들고 있다. 이 역시 적색법의를 착용하고 있는데, 옷의 처리와 끝단의 표현기법 등이 입불도와 동일한 솜씨임을 알게 해준다. 18~1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상모란문도(寶相牧丹文圖)
중앙에 화분을 마련하고 그곳으로부터 가지가 뻗어 나온 것처럼 표현한 그림이다. 흰색과 붉은색의 탐스러운 보상모란문을 거의 좌우 대칭되도록 배열하고, 꽃과 꽃 사이의 여백을 짙은 녹색 잎사귀로 빈틈없이 채워놓아 무성한 느낌을 준다. 18~19세기경에 덧그린 그림으로, 떨어져 나간 벽체 밑부분 그림을 보면 세련된 필치와 `````````
당초문도(唐草文圖)
산신각(山神閣)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막돌과 흙으로 다진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1991년에 조성한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편액에는 '월출산 산신각(月出山 山神閣)'이라 적혀 있고 '법철(法哲)'이 썼다고 씌어 있다.
산신각 설화
현 주지 종범스님께 법명을 들었으나,,,
철字만 기억이 났었는데...
하여간 법철스님께서 주지로 계셨을때의 또다른 영험을 소개 합니다. 여기서 필자는 법철스님을 말합니다.
"필자가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소재의 무위사 주지로 재직할 때의 경험담이다. 무위사는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상찬을 받는 월출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국보 13호 극락보전이 있는 천년고찰이다.
극락보전의 오른 쪽 뒷산 기슭에 별도의 건물로 산신각이 있는데, 월출산 산신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산신각 쪽을 돌아보니 튼튼한 전각인 산신각이 하룻 밤새에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깨어진 기왓장, 무너진 기둥, 서까래, 흙더미 속에 망가진 산신탱화….
필자는 아무리 살펴도 무너진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가운데,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무위사의 사찰경제야 논 네 마지기 뿐으로써 자체적으로 산신각을 복원하려면 시골의 신도님들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시주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몇몇 여유있는 신도님을 제외하고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무너진 산신각 복원에 대해 선듯 신도님들을 찾아 협조의 시주금을 구하는 손바닥을 내밀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산신각의 무너진 이유를 깨닫지 못했지만, 하루빨리 산신각을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른 도리 없이, 이 마을 저 마을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신도님들에게 신도님들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속에 부끄러운 낯빛으로 무너진 산신각의 설명을 드리고, 협조의 시주를 간절히 구했다.
마침내 수개월만에 성금이 어렵사리 모여서 산신각이 무너진 그 자리에 복원되게 되었다. 이번에는 나무기둥으로 하지 않고 시멘트로 큰 기둥을 만들었다. 지붕은 목재였고, 재래식 기와를 얹었다. 근사한 산신탱화도 구해 걸었다. 산신각 복원 회향식 날, 필자는 참석한 신도들에게 공로를 치하하였고, 산신각이 오래도록 고해중생의 기원처가 되고 복전이 되어줄 것을 기원하며, 신도들의 행운을 축원했다.
그러나, 복원된 산신각은 채 1년이 못되어 어느 여름 날 밤, 또다시 원인을 알 수 없는 채 무너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시멘트로 만든 네 기둥만은 서 있었으나, 지붕만 폭싹 몽땅 내리앉아 버렸고, 역시 산신각 안은 깨어진 기왓장과 서까래, 흙무데기 속에 산신탱화, 촛대, 향로, 다기그릇 등이 파묻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산신각은 수습하여 다시 사용할 수가 없는 지경으로 부서져 버렸다. 필자는 또 무너진 이유를 깨닫지 못한채 장탄식을 토 할 뿐이었다.
필자는 무너진 산신각 앞에서 불교는 인연을 소중히 가르치는데, 산신각이 연거퍼 무너지는 것은 그 자리에 산신각의 인연이 다했다는 결론으로 어렴푸시 깨달음이 왔다.
흙무데기 속에서 촛대, 향로 등을 수습하면서 인연있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제 무위사에는 산신각은 복원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산신각을 복원하자고 어떻게 신도들을 찾아 설득한다는 말인가.
웅성대는 신도님들에게 산신각을 세울 수 있는 인연 있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막연히 말하고 위로할 뿐이었다. 필자는 부처님 전에 조석으로 예불하면서 부처님께 산신각을 건립할 수 있는 인연 있는 사람을 보내주십사, 간절히 기도만 올릴 뿐이었다. 여름날에 무너진 산신각 터에는 잡초만 무성해졌고 마치 폐사의 그것처럼 황폐하기 이를 데 없어 어디선가, 귀신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름다운 미인이 나타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가 하더니 금새 초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신도들은 산신각 복원에 말이 없는 필자를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경비조달에 한계를 절감하는 필자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이었다.
초겨을의 눈발이 희끗희끗 비치는 그날은, 필자의 생일이었다.
출가승려가 생일이 무엇이냐, 고 무심히 말하는 필자를 두고 대중은 기어히 떡을 하고 미역국까지 끓여 내놓았다. 대중의 따듯한 마음에 공감하면서 큰 방에서 점심상의 수저를 마악 들려는데 마당쪽에서 주인을 찾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방문을 열어보니 거세어지는 눈발 속의 고목 밑에 사십대 중반의 여인이 고운 한복을 입고 홀로 서서 필자를 바라보고 합장하여 고개숙여 인사를 한다. 범상치 않는 기품 속에 절세의 미인이다.
방안으로 안내하여 점심공양을 대접하고 차를 대접하는데 여자분은 고맙다고 치사를 하면서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째 꿈속에 황폐한 산신각 터를 보아서 무작정 홀로 길을 떠나 산사를 찾았는데, 이곳 산신각 터를 보니 꿈속에서 본 그 광경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놀라운 마음이 되었다. 그녀는 필자로부터 연거퍼 무너진 산신각에 대한 이야기를 잔잔한 미소속에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서면서 내일 정오전 까지 산신각 복원에 대한 소식을 주겠다고 눈속에 떠나갔다. 필자는 눈속에 떠나가는 그녀의 성씨와 이름과 어디에 사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약속한 정오의 시간 전에 뜻밖에 郡공보실장이 황급히 필자를 찾아왔다.
“어제 이곳에 도지사 사모님이 오셔서 주지스님과 산신각 복원을 약속하셨다면서요? 산신각 복원에 경비가 얼마나 들겠는가 문의전화가 왔고, 새로운 산신각 자리에 주지스님의 자문을 구하라고 하셔서….”
그날 밤, 예불시간에 필자는 부처님께 인연있는 사람을 보내주신 기도응답에 감사기도를 드렸다.
마침내 산신각은 무너진 옛터를 피해서 새로운 터 위에 건립되었다. 산신각은 도지사 부인인 황미자(黃美子)씨가 책임을 지고, 산신탱화는 당시 강진군수부인이 책임을 지었고, 현판과 시주방명판은 광주 호남대학교의 국문과 여교수인 국효문박사가 책임을 졌다. 산신각 건립 회향식날, 황미자씨는 인근 시장, 군수부인과 나타나 시골신도들에게 마련해온 음식을 상냥한 미소 속에 권하면서 기뻐했다.
황미자씨의 공덕의 씨앗인가, 아니면 부군의 관운인가, 무위사 산신각 건립 회향 후, 일주일만에 황미자씨의 부군은 내무부 차관으로 발탁되어 상경하더니 곧이어 농수산부장관, 행자부장관을 역임하였다.
무위사 산신각은 그 후로는 어떠한 폭설, 폭우, 폭풍에도 끄덕 없이 역사를 거듭하며 현재까지 고해중생의 기원처로 있다.
연거퍼 무너지는 산신각…. 월출산 산신은, 산신각의 새로운 인연터를 맞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월출산 산신은 광주에 사는 황미자씨의 꿈에 황폐한 모습을 보여주며 역사할 것을 시사하였고, 그녀는 무위사에 눈속에 나타나 인연을 보인 것이다. 이 이야기도 이제 십오육년전의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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