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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18일 화요일
[(녹)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노아에게, 사십 일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당신이 만드신 생물을 땅에서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분부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6,5-8; 7,1-5.10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7,1 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내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2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3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
4 이제 이레가 지나면, 내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
내가 만든 생물을 땅에서 모두 쓸어버리겠다.”
5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10 이레가 지나자 땅에 홍수가 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누룩은 지금은 매우 작고 감추어져 있지만 나중에 큰 효과를 내는 어떤 것의 비유입니다. 작은 밀가루 반죽 속에 숨어 그 반죽을 서서히 부풀려 커다란 빵을 만드는 효모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그들이 각각 대표하는 악, 곧 위선과 교만, 권력욕과 포악함 등으로, 그것들이 제자들 안에도 감추어 있지는 않는지 살피도록 경고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외적인 차원에서만 빵을 이야기합니다. 배 안에 빵이 하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걱정에 붙들려서 누룩의 의미도, 조금 전에 목격한 사건 곧 예수님께서 수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의 의미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여전히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설명하시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하십니다. 영성 생활에서는 일어난 일의 외적이고 일차적인 뜻보다는 숨은 의미, 영적인 의미를 알아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빵 하나로 충분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신 분을 배 안에 모시고 있었으니까요. 노아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실 만큼 죄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던 세대의 누룩이었습니다. 우리도 저마다 또는 공동체로서 가끔 불의와 악이 지배하는 듯 보이는 우리 세대의 누룩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안에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이 감추어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고 없애 버려야 합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할 때 마다 아스라이 옛생각이 떠오릅니다.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매일 수업만 하면 지루해하지 월 한번 씩 야외로 소풍을 다녔습니다.
보통 라면을 챙겨가 끓여먹고 오는데, 그날은 대축일인지라 삼겹살을 구워먹기로 했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잘 준비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소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가스버너를 안 챙겨왔더군요. 쫄쫄 굶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번 갈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각별히 당부도 했습니다. 다들 대답들은 시원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번에는 현관 앞에 둔 고기를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왔더군요. 이번에는 라면만 잘 끓여 먹고 왔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배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로 나오고 나서야 빵을 안 가져온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수련장’인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맞을까봐 지레 겁부터 먹고 자기들끼리 이걸 어쩌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 순간 제자들은 ‘누룩이라! 스승님께서 빵 안 챙겨 온 것을 아셨구나. 이제 혼 좀 나게 생겼구나.’며 혼 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빵 담당자, 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정신 좀 차려라.”며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코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누룩과 관련된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요. 이 문맥상 ‘바리사이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이란 말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등을 의미합니다. 빵과 관련된 말도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지니고 있는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내면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쥐뿔도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엄청 자신들을 부풀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외치고 다녔지만 실제 삶은 하느님 사랑과 반대되는 율법지상주의, 사악, 교만, 거짓, 죄로 얼룩져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빵조각을 모은 광주리 숫자처럼 일곱 광주리, 열두 광주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할나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우침의 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일곱입니다, 열둘입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 합니다만, 가르침의 핵심, 진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완고함 때문입니다. 수용성 부족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갈고 또 갈아,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열어, 최선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5년의 일입니다. 저는 우체국장 하는 형제님의 권유로 우체국 보험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담이 되었지만, 우체국 보험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2년 후인 1997년에 IMF가 시작되었습니다. 형님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제게 부모님을 모셔야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급한 대로 교구 신협에서 대출을 받아, 부모님이 거처할 집을 마련했습니다. 우체국 보험이 만기가 되어 대출금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달라스 성당에 와서도 은행 계좌를 보았습니다. 입출금 계좌를 적금 계좌로 변경했습니다. 1년이 지나면서 적금 계좌에서 수익이 발생했습니다. 예전에 본당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우들이 정성껏 봉헌한 교무금과 헌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사목자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 관리를 잘한 종은 주인에게 칭찬받고 더 많은 달란트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사막에 방주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일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는 노아와 가족 그리고 노아가 데리고 들어간 동물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노아의 방주는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는 ‘인간관계’라고 생각합니다. 함석헌 선생님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갈 수 있었는데 억울함을 풀어준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가 구원의 방주입니다. 둘째는 ‘재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은 ‘돈’입니다. 돈이 있으면 집을 살 수 있고, 돈이 있으면 여행도 가고,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도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목적도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건강’입니다. 인간관계가 좋아도, 재물이 많아도 건강하지 못하면 인간관계와 재물이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나빠져도, 재물을 잃어도 건강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은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구원의 방주는 무엇일까요?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커다란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구원의 도구이며, 공동체의 상징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밖에 남은 자들은 홍수에 휩쓸려갔습니다. 이 방주는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죄와 혼란 속에서도 신자들이 머물며 구원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은 방주를 세례와 연결하여 말합니다. "방주 안에서 물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방주의 물은 세례의 물과 같습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죄에서 깨끗해지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며, 구원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방주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경고를 받고 경외심으로 방주를 준비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때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며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무지개를 통해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이 언약은 단순히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구원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이 구원의 언약을 계속해서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믿고, 하느님의 약속 안에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4장에서 "노아 때와 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시대처럼, 종말의 날도 우리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올 것입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준비된 자들만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방주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과 삶은 정말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방주, 곧 교회와 믿음의 삶 안에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기도 생활, 성사 참여,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우리의 방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방주를 준비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그 방주 안에서 하느님께 순종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구원을 향한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려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마르 8,19)
가지려니
한 옴큼이요
나누려니
온 누리일세
오늘의 성인
성 시몬(Simon)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예루살렘(Jerusalem)
활동연도 : +107년경
같은이름 : 사이먼, 시메온, 시므온
예수 그리스도의 사촌으로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성 시몬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언급된 ‘예수의 형제’(마르 6,3; 마태 13,55) 명단에서 등장한 시몬인 듯하다. 카이사레아(Caesarea)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교회사”에서 성 시몬이 “주님의 삼촌인 클레오파(Cleopha)의 아들”이었으며, 주님의 형제 야고보(Jacobus, 5월 3일)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었다가 노년에 순교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 순교록”에서는 “주교이자 순교자로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성 시몬은 클레오파의 아들이며, 구세주와 육적으로 가까운 사이로 전해진다. 그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 다음에 예루살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트라야누스의 박해 때 많은 고문을 받고 120세의 나이로 용감하고 당당하게 십자가 형벌을 견디어내는 것을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들과 재판관 자신까지 놀라워하는 가운데 순교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에 기초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던 여인들을 언급할 때 등장하는 “이모,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요한 19,25)는 성 시몬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 시몬은 예수님의 외사촌 형제였을 것이다. 성 시몬이 예루살렘의 주교로 임명된 것은 성 야고보가 순교한 62년으로 여겨진다.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그리스도교에서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중요 위치와 역할을 상실하였다. 또 야고보가 순교한 이후 예루살렘에는 반로마 메시아니즘이 등장하였다.
유대 민족주의를 거부한 대부분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요르단 강 서안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결별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성 시몬이 예루살렘의 주교로 활동한 기간은 많은 박해와 어려움들로 얼룩진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시메온(Simeon)으로도 불리는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명인 열성당원 시몬과 동일 인물로도 여겨진다(마태 10,4; 마르 3,18; 루가 6,15; 사도 1,13).
성 테오토니오 (Theotonius)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코임브라(Coimbra)
활동연도 ; +1162?/1166년?
같은이름 : 테오토니우스, 테오또니오, 테오또니우스, 떼오또니오, 떼오또니우스
성 테오토니우스(또는 테오토니오)는 포르투갈 중부 코임브라의 주교인 크레스코니우스(Cresconius)의 조카로서 어릴 때부터 사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사제가 된 뒤에는 주로 본당사목을 하였는데, 매우 엄격한 생활과 높은 성덕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얼마 후 그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였고, 포르투갈의 황녀와 백작이 그를 주교로 영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자신이 항상 이를 거절했다.
두 번째로 성지를 순례한 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회가 코임브라에 세운 새 수도원에 입회하여 장상을 역임하였다.
그를 지극히 존경하던 국왕 알폰수스는 성 십자가 수도원에 많은 선물을 희사하였다.
그는 80세까지 30여 년 동안을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167년 포르투갈의 주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 1740-1758년 재임)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 안질베르토 (Angilbert)
신분 : 수도원장, 시인
활동지역 : 첸툴라(Centula)
활동연도 : +814년
같은이름 : 안질베르투스, 안질베르또, 안질베르뚜스, 안길베르토, 안길베르투스, 앙길베르트
성 안길베르투스(Angilbertus, 또는 안질베르토)의 별명은 '호머'(Homer)인데, 그의 라틴 시가 매우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샤를대제(Charlemagne)의 궁중에서 자랐고, 알퀴누스(Alcuinus, 5월 19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 안길베르투스는 샤를대제의 딸 베르타(Bertha)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정치적인 의미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덴마크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기를 늘 기도했는데, 폭풍우가 덴마크 군인들을 몰아내자 수도 생활을 꿈꾸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내인 베르타는 수녀원에 들어갔고, 자신은 첸툴라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그곳의 원장이 되었으며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수도원에서 성가 부르는 것을 도입하여 그의 수하에 있던 300명의 수도자들이 늘 애용토록 하였다.
그는 샤를대제의 절친한 친구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므로 궁중 사제, 고문관, 외교관의 직책도 역임하였다.
그 당시 그는 황제에게 진언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성 콜만노 (Colman)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린디스파른(Lindisfarne)
활동연도 : 605-676년경
같은이름 : 콜만누스, 콜만, 콜먼
아일랜드 북서부 코노트(Connaught) 태생인 성 콜만누스(Colmannus, 또는 콜만노)는 성 콜룸바(Columba, 6월 9일)의 지도아래 이오나(Iona)에서 수도자가 되었고, 성 피난(Finan, 2월 17일)을 계승하여 린디스파른의 세 번째 주교로 임명되었다.
663년에 개최된 휘트비(Whitby) 시노드에서 그는 성 발프리두스(Walfridus, 10월 12일)와 성 아길베르투스(Agilbertus, 10월 11일)를 반대하여 켈트(Celtic) 교회 전례의 주요 옹호자로 활동하였다.
국왕 오스위(Oswy)가 성 발프리두스와 로마 전례를 주창할 때, 성 콜만누스는 자신의 주교직을 사임하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England)의 수도자들과 함께 린디스파른 섬을 떠나 코노트 해안의 이니쉬보핀(Inishbofin) 섬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그곳에서 켈트 전례를 계속하였다.
아일랜드계와 잉글랜드계 수도자들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여 어려움에 처하자 그는 마요(Mayo)에 또 다른 수도원을 세우고 두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큰 공헌을 하였다.
복자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신분: 신부, 화가
활동지역: 피에졸레(Fiesole)
활동연도: 1400?-1455년
같은이름: 안젤리꼬, 안젤리꾸스, 안젤리쿠스,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이탈리아의 피렌체(Firenze) 근방 비키오(Vicchio)에서 태어나 귀도 디 피에트로(Guido di Pietr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프라 안젤리코는 1417년 형 베네데토(Benedetto)와 함께 피렌체의 한 필사본 작업장에서 일을 했다.
그는 20세에 피에졸레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기도생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이때 안젤리코는 조반니 다 피에졸레(Giovanni da Fiesole, 피에졸레의 요한)라는 수도명으로 작품 활동을 했고, 1436년부터는 그의 절정기에 속하는 작품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
1445년에는 교황의 부름으로 로마(Roma)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내의 여러 곳에 프레스코화를 제작하였고, 1447년에는 오르비에토(Orvieto) 주교좌성당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그의 이름이 프라 안젤리코로 널리 알려진 것은 유명한 시인이자 라틴어 학자인 코렐라의 도미니코(Domenico da Corella) 신부가 그를 ‘천사 같은’(angelic) 화가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프라’는 수도자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프라테’(frate)의 약어이다.
그는 재능 있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안젤리코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우 청렴한 생활을 했다.
그는 당시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가 자신을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을 때 극구 사양하였다.
1450년경 피렌체로 돌아와 피에졸레 수도원 원장을 역임한 뒤 1453년경 다시 로마로 왔고 그곳의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1455년 2월 18일 선종하여 인근의 산타 마리아 델라 미네르바(Santa Maria della Minerva)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1982년 10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와 동등한 전례가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으며, 이어 1984년 같은 교황에 의해 예술가와 미술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