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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신춘문예-시 당선작
농민신문
잔등노을
정연희 <경기 용인>
소잔등에 부르르
바람이 올라타고 있다
곱슬거리는 바람을 쫓는 꼬리는
등뼈를 타고 나간 장식
억센 풀은 뿔이 되고
오래 되새김한 무료는 꼬리 끝에서 춤춘다
스프링을 닮은 잔등 속 간지러움은
온갖 풀끝을 탐식한 벌
한 마리 꽃의 몸속에 피는 봄
연한 풀잎이 키운 한 마리 소는
쌓아 놓은 풀 더미 같고
잔등은 가혹한 수레의 우두머리 같다
논두렁 길 따라 비스듬히 누운
온돌방 같은 소 한 마리
눈 안에 풀밭과
코뚜레 꿴 굴레의 말(言)을 숨기는
저 순응의 천성
가지런한 빗줄기가 껌벅 껌벅거린다
융단처럼 펼쳐놓은
노을빛 잔등이 봄빛으로 밝다
주인 닮은 뿔처럼 몸 기우는 날은
금방 쏟아질 것 같은 잔등의 딱지가
철석철석 박자를 맞추고
저 불그스름한 노을은
유순한 소의 엉덩짝을 산처럼 넘는다
총 244명의 응모작 중 예심을 통과한 19명의 작품을 사전에 전달받아 각자 읽고 합평회를 가졌다. 선자(選者)들은 우수한 작품이 많아 황금 나락 펼쳐진 들판 앞에 섰을 때처럼 행복하기도 했지만 고민도 컸음을 토로했다.
신문의 특성 때문인지 농촌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아 진부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런 작품은 없었다. 두부처럼 반듯하고 말랑말랑한 작품보다 비지처럼 좀 거칠더라도 마음에 씹히는 질감이 있는 작품들이 결국 남았다.
사람 냄새가 많이 묻어나는 작품을 선호하는, 응모작을 통해 앞날의 작품을 감히 예측해보는 선자들의 취향이 반영되었음을 실토한다.
논의 끝에 압축된 작품은 ‘가실’ ‘동그란 색연필’ ‘밥 먹는 나무’ ‘장수 산부인과’ ‘잔등 노을’이다.
‘가실’은 잘 발효된 남도 사투리의 야생적인 말맛이 일품이었으나 내용에서 농촌의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동그란 색연필’은 ‘뚜껑을 열고 뛰쳐나가는 각각의 눈동자들’처럼 상상력이 발랄하고 이미지를 오버랩시키는 기법이 돋보였다. 그러나 동봉한 작품 중에 긴장감을 잃고 풀어진 구절도 보여 안타까웠다.
참신하고 세련된 감각의 잔치를 보여준 ‘밥 먹는 나무’와 굵은 시상과 따뜻한 시선이 빛나는 ‘장수 산부인과’는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었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잔등 노을’은 이미지가 활달하고 선명하다. 대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치열함이 절로 읽힌다. 직유를 줄여 행간의 이미지를 더 증폭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덮고 그 치열한 힘이 그려낼 미래를 믿어보기로 했다. 치열함으로 치열함마저 넘은 담담한 마음이 이미 싹트고 있음도 소중히 보았다.
사람들이 아닌 시의 세계로부터 축하한다는 말을 듣는 시인이 되길 바라며 우선, 당선을 축하한다
함민복. 황인숙
제주 영주신문 시 당선작]
고립 / 송창권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숱한 바람 따라 머무른 그 곳
네모난 절벽에 떨어지고 만다
불빛만 화려해진 세상
정작
고요라는 추상은
저 몸짓에 지워져 가는가
여기
좁다란 땅에 발 디딜 틈조차 보이지 않는 세상
스스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콘크리트 벽으로
창살로
아!
동트는 새벽 미명이라도
만질 수 있으려나
아니,
보기만 해도
볼 수만이라도 있으려나.
세상 속에 푹 빠져
나오지 못하는 각진 영혼이여
시나브로 작아지고 있다
버려지고 있다
저 네모 속에 몸부림치는 고적(孤寂),
무덤 속의 침묵!
5월 억새에게 내미는 시 / 임지나
할머니들 아직 하늘로 올라가지 마세요
똑똑 분질러져도 자꾸 휘어져도 같이 살아요
저는 꽃의 키만큼도 닿지 않은 걸요
사람이 사람을 뚫고 나오는 걸 알았네요
할머니의 뻣뻣한 발등에서 푸른 순이 올라오는 걸 봤어요
오늘은 밀알만 한 무당벌레가 어디서부터 기어 왔는지
얇고 가는 마른 대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더군요
모든 것들은 꼭대기라는 정자亭子를 향해 나는 걸 좋아하지요
그러다 갑자기 날개를 펼치고 붕붕대네요
늙어서 너무 길어진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누구에게나 넓은 등이 되어 주셨잖아요
쓸쓸한 할머니의 은비녀 사이로 저수지도 보이네요
저수지는 삶이 관통한 듯 여지없이 파랗군요
누런 풀들 사이로 제 눈에 막 들어오고 있어요
그것은 드문드문 보이는, 만질 수 없는 영애令愛같은 고움
잠겨 있는 옛날이야기 같은 거죠
패물 상자처럼 언제까지나 우리 꽉 끌어안고 있기로 해요
몇 해가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늙수그레한 풀과 호수는
이 계절을 처음 앓는 듯 쑥쓰러워하네요
아, 저 성성한 머릿결 같은 햇빛, 약하지만 발걸음 소리 내는 풀
꿀을 머금고 있는 공기, 바람과 나부대는 나무는
저를 교란 시켜요, 할머니
저는요, 조용히 또 임신하고 싶어요
시부문 심사평]
인터넷신문의 깊이가 느껴지는 시인들의 열망
병신년 올해 10회를 맞이하는 영주신춘문예에 응모한 작품들의 응모자들은 다양했다. 여러 해 동안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일념하나로 작품을 쓰고 지우고 한 원고를 생각하면서 마지막 마무리로 보내온 작품을 감상하노라면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제주에서 공모를 함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원고들뿐만 아니라, 국제우편으로 보내온 원고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또한 최근 추세에 컴퓨터 워드로 작성하는 시대에 원고지에 직접 손으로 쓴 작품들의 열정들도 뜨거웠다.
많은 신인작가들의 원고와 우편요금이 아깝지 않게 좋은 작품을 따지기 전에 그 열정들을 잊지 않기 위해 옥고를 고르기 위해 쉴 여유가 없었다.
우선 심사를 하면서 완벽한 시보다는 현대시의 흐름을 반영하되, 그 중 새로운 감각을 지니되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을 가려내기로 하였다. 그렇게 해서 본심에 부쳐진 작품으로는 김길전, 김진실, 송창권, 백승권, 임지나 씨의 작품들이었다. 각각 일장일단이 있는 작품이면서도 오랜 세월 습작의 이력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들이라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신춘문예 작품의 취지에 맞게 열정적인 작가의 작품을 고르기로 합의하였다.
김길전의 ‘처남댁’이라는 시들에서는 세 편 모두 산문시 형식인 듯한데, 평이한 언어로도 개성을 살린 시편을 만들어냈다는 장점은 있으나 딱딱한 끝맺음의 어휘로 조금은 아쉬움이 있었다.
김진실의 ‘즐거운 식사’는 독특한 제목으로 상상력을 구사하여 맛깔스런 시들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상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산문적 어법이 아쉬웠다.
송창권의 시들은 응모한 3 편 중 산문시 형식이 아니어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쓴 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표현에서 조금 아쉬움이 있었다.
백승권의 ‘늘 같은 색의 겨울’ 이라는 시는 그리 도드라지는 표현이 없으면서도 읽고 나면 뒷입맛이 달짝지근해지는 느낌이 있는 시였다. 다만 제목과 내용이 조금은 거슬렸다.
임지나의 시들은 앞에서 지적한 시들의 단점을 거의 지니지 않고 있어 맛깔스런 느낌을 주는 시들이었다. 현실을 바탕으로 하되 현실에 치우치지 않고, 상상력의 유희를 즐길 줄 알면서도 시적 이미지가 난잡하거나 산만하지 않은 장점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으로는 임지나와 송창권 두 사람의 작품이 남아, 심사위원들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한 사람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쉽다는 의견에 이르러, 공동 수상자로 결정하였다. 신춘문예에 공동 수상이 마땅한 일일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을 선택하고 다른 쪽을 제외하는 것은 너무 큰 아쉬움이었기 때문이다. 낙선한 분들에게는 격려를, 당선하신 수상자들에게는 큰 박수로 우리 시단의 미래를 기대해 본다.[대표심사위원 양대영 영주일보 편집국장]
강원일보
갈라파고스
김태인
어둠이 입술에 닿자 몸 안의 단어들이 수척해졌다 야윈 몸을 안고 섬 밖을 나갔다가 새벽이 오면 회귀하는 조류(潮流), 금이 간 말에서 아픈 단어가 태어나고 다 자란 말은 눈가 주름을 열고 떠나갔다
남겨진 말의 귀를 열면 치어들이 지느러미를 털며 들이 닥쳤다.은어(隱語)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욕설이 귀를 깨문 몸 안에 손을 넣어 상한 심경을 꺼내 놓자 말수 줄은 언어의 생식기는 퇴
화되어 갔다
파도를 멀리 밀어낸 밤은 등대를 잡고 주저앉았다 부레를 떼어낸 언어는 외딴섬에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발굽에 물갈퀴가 생기고 단어에 부리가 자랐다 비늘이 깃털로 변해 조류(鳥類)로 진화했지만 텅 빈 죽지에 감춘 내재율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아주 오래된 하늘에 운율이 돌면 첫 문장은 가슴지느러미부터 따뜻해졌다 야윈 말들이 하나 둘 돌아온 섬은 언어의 기원에 종말을 고하고, 밤은 더 이상 섬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동쪽으로 흘러든 난류는 바다거북 등껍질에서 불가사의한 문자를 캐고 암염처럼 굳어버린 죽은 언어를 떼내었다
남쪽 염전에서는 느린 운율과 음가들이 뿔 고동의 귓가에서 보송보송 말라갔다 새벽이 되어 방에 불을 끄면 되살아난 단어들이 몸 안에 환한 섬을 산란하는 것이었다
*갈라파고스 - 찰스 다윈이 발견한 섬 혹은 제도.
경남일보
꽃게
최병철
장손은 섬이었다
할아버지가 펼쳐놓은 바다에 담겨 있던 당신
잠시 뭍에서 맡은 쇠 냄새만
해안선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맴돌고 있었다
바다의 모퉁이에 헐렁하게 용접되어 있었지만
기운 기둥을 일으켜 촘촘하게 그물을 걸고
부력으로 집안을 밀어 올렸다
뱃머리가 바다를 가를 때마다
철공소에서 대문을 만들었던 시간들이 솟구쳐 올랐다
가풍의 출입을 철대문으로 막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배를 저어갈 때 방향을 잡아 주던 어머니가
물 밑으로 가라앉고
철의 껍질에서 탈피했다
조금씩 자유로워질 때쯤
딱딱해진 가슴 위로 그물을 펼치고
휑한 구멍을 꿰매고 있었다
물때를 기다렸던 밤
팽팽한 수면을 찢고
그렁그렁 달빛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바다가 심심해지면 안부가 궁금해지는 법
기다림만 키우다 통발에 자신을 가두던 당신
절단기로 섬을 해체하고
배를 수평선 바깥으로 몰아 마지막 항해를 시작했지만
집게발이 파도를 물고 놓지 않는다
경상일보
고래를 격려하며
김예진
외벽에 녹슨 고래 몇 마리
물 바깥으로 나와 숨을 쉰 흔적
그 숨을 찾는 심장소리가 손끝에서 떨렸다
혼신을 다해 호기롭게 살았을
먼 우주를 되짚어도 더 이상의 숨은 없다
때때로 바람이었다가 절벽이었다가
수세기의 흔적이
수 천 년 거리에서
천변 반구대를 서성였을
내세의 염원과 사랑을 갈구하는 수단이 손아귀 힘이었다면
피눈물로 쪼아서 새긴 그 기원이
울음에 갇혀 해답을 기다리는 동안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늙은 고래가 볼모로 잡혀있다
녹슨 세월이 한데 엉겨 붙어서
아직 물을 건너지 못한 배고픔과 서러움
매질과 학대와 손가락질
슬픈 작살에 핏물이 번지고
뼈와 살이 바람으로 흩어지고
다른 행성에 잘못 온 것처럼
가압류 딱지가 붙어버린
고래의 적막은 한겨울처럼 쓸쓸하고
세상의 기억은 겨울 끝에 머물러 있다
경인일보
미역귀
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 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 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 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뭇
경향신문
백색소음
이다희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 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나’와 사물의 의미 탐구하는 자세 믿음직
이시영·최정례 | 시인
전체 응모자 1025명 중 예심을 통과해 본심의 대상이 된 열한 분의 작품들은 대체로 기존의 시적 관습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그 이상으로 말을 정확하게 운용하고자 하는 노력은 부족한 듯했다. 예심 통과작 중에서 몇 편은 구체적 정황을 나타내는 단어의 앞뒤에 모호한 관념어나 철학적 냄새를 풍기는 용어를 결합하여 그 정황을 애매하게 뭉개버리는 시들이 있었다. 또는 이제는 사라져 버려 우리의 현재 생활과는 동떨어진 시골 전경이나 자연을 낭만적으로 그리며 이상화하여 사실감을 뭉개버리는 시들도 있었다. 박다래의 ‘토끼의 밤’과 김나래의 ‘넙치’는 생생한 말로 시작했으나 시의 마무리 부분까지 그 생기를 끌고 가지 못하고 긴장을 풀어버리는 허약함을 보였다. 주민현의 시들은 구문과 구문 혹은 연과 연을 긴밀하게 조직하는 힘이 부족해 보였다.
이들 중에서 돌올하게 신선하고, 침착한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며 생각을 펼쳐내고 있는 작품이 이다희의 ‘백색소음’이었다. 심사위원 둘이 서로 다른 감식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마음으로 단번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며 흔쾌하게 이 작품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 작품에 함께 호감을 표한 이유는 아마도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과의 관계, 즉 우리가 담겨있는 이 세계 속에서 ‘나’와 사물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자세가 믿음직스럽고, 말의 꼬리를 붙잡고 조근조근 할 말을 밟아나가는 말의 운용 방식 또한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당선작과 함께 응모한 나머지 작품들도 당선작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차분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로 끈기있게 밀고 나가는 자세에서 저력이 느껴졌다. 시는 원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어서, 앞으로 시 쓰다 어려운 고비를 만나더라도 오늘의 기쁨을 원천으로 삼아 지치지 말고 정진하기를 바라며, 2017년 신춘의 새 시인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전북도민일보
각시거미
이삼현
그녀와 나 사이,
서먹해진 간격에 집을 지은 거미
한 점 침묵으로 매달렸다
말끝을 세운 몇 가닥 발설이 한데 얽혀 덫이 되고
하루, 이틀, 사흘
무엇을 먹었는지 마셨는지 소식도 없이 제자리에 멈춰있다
나는 여문 것을 좋아하고
그녀는 부드러운 걸 좋아하지만 거미의 식성은 육식성이다
단단한 저녁이 말랑말랑해진 태양의 육즙을 천천히 삼키는 동안 거미는
한마디 미동도 없이 어두워졌다
몰래 들여다봐도 내통도 없다
팽팽하게 벌어진 틈새를 붙잡고
며칠 째 끈적끈적한 긴장의 끈을 당기는 저 고집은 불통이다
꼭 돌아올 거라고 활짝 열어둔 오늘이 무음無音으로 지고
내일의 가지에 또 무슨 꽃이 피려나
마음은 나팔처럼 불 수가 없다
경계를 풀고 다가올
기척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순간이 쉼표도 없이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죽은 듯 산 듯
다시 낮달이 떴다
세계일보
빅풋
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해학·역설의 묘미 살려 삶의 애환 잘 갈무리”
시 심사위원 - 김사인·황인숙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좋게 말하면 말과 느낌을 적절히 짜 맞추는 솜씨들이 상당해서 안정감이 있었다. 그런데 한 발 떨어져서 보면 평면적이고, 어딘가 낯익은 형언과 방식에 기대어 있는 느낌이다. 그런 가운데 석민재씨의 응모작 ‘계통’ 외 2편은 단연 돋보였다. 그의 시들은 수월하게 읽히면서 수려한데 그 속에 삶의 애환이 갈무리돼 있다. 또 근년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보암직한 축조방식으로부터도 자유로이, 시를 다루는 방식이 신선하다. 좋은 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응모한 세 편의 시들이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건 빨강 네가 아무리 우겨도 빨강/파랑 같아도 이건 빨강/노랑 같아도 이건 빨강’으로 시작되는 시 ‘계통’은 빛깔 이미지들과 이응의 음성상징이 공처럼 통통 튀면서 설사 내용을 모르더라도 읽으면서 기분이 좋다. 그의 시 ‘빅풋’을 당선작으로 기쁘게 뽑는다. ‘빅풋’은 무지무지하게 슬픈 상황인데 아버지의 당당함(‘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과 쾌활(‘왼발 오른 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그리고 엄마의 해학(‘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으로 상황을 뒤집어 보여준다. 상상력의 전복, 역설의 묘미를 깔끔하게 끌어낸 시다.
함인우(‘아스피린’ 외 3편), 의현(‘여유가 있다면’ 외 2편), 김순철(‘복숭아’ 외 2편)의 응모작들도 놓치기 아까운 작품들이었다. 특히 이미지를 첩첩 겹쳐 연결시키는 힘이 여간 아니며 변두리 주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뛰어난 함인우의 시들이 그러하다. 약국이라는 작은 공간을 그 이름이 ‘우주’인 것을 빌려 우리네 작은 세상의 삶과 죽음을 우주에 병치시키는 ‘아스피린’이나 피아노와 노파와 파를 음계와 연계시키며 펼치는 ‘버려질 것을, 산다’나 삶의 통증과 페이소스로 자욱하다. 당선자께 커다란 축하를, 세 분께 안타까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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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윤장대
김성신
삼월 삼짓날은 윤장대를 돌리는 날
풍경소리 곱발 세우고
산자락은 그늘을 등지고 좌정한다
108배 올리던 법당에서
굽은 허리와 무릎 뼈 석탑처럼 일으켜 세우고
윤장대 돌리는 어머니의 마음에는
묵은 발원이 한 각씩 깊어진다
상현달 달무리 지는 밤
아이의 울음소리 희미하게 살아나고
안간힘을 토해내던 흑백의 한 생
몸속 경(經)이 된 통증을
한 올 한 올 부풀리니
저만큼 솔바람에 가슴 쓸리기도 해
앞뒤 없는 회한과 갈망은
두 손 맞잡고
배웅하듯
한 곳을 바라보니
이마 위로 맺힌 땀방울
눈물의 동의인양 하염없이 흐른다
더 두툼해질 법문의 책장에
줄 맞추어 반듯하게 들어가 있을
어머니의 비워낸 몸을
나는 가만히 부축하여본다.
광남일보
스웨터
황성용
엄마 영정사진을 찍는 날
일생의 좌중을 한 번에 멈추고 그 안에서 골몰히 앞을 바라보는 한방의 시선, 시장 냄새도 들어간다
느슨했던 안이 넘어졌는지 엄마의 얼굴이 카메라 앞에서 손님 쪽으로 살짝 기운다
엄마 스스로 올올이 물 수 있는 어금니 하나로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린다 힘들었던 무게는 내리고, 쪼그렸던 다리는 반듯이 편다
푸르른 날과 무성한 날을 곱해도 영이 되는 적자의 숲에서 내려오지 못해 항상 엄마의 앞치마는 땀으로 젖어 있다
비누칠을 해도 빠지지 않을 때 방망이질의 쓰임에 따라 한 방에 끝내려고 사진사는 필요 없는 각도를 버린다
버릴 컷을 버려진 시간으로 남아 있을 때 엄마는 살림의 다이어트를 위해 땀방울 하나하나 털실로 꿰매는 절약 스웨터(sweater)
코가 빠져도 스웨터의 구멍을 버리지 않는 센스, 엄마는 유산의 단추 하나를 남겨둔다
나는 아침을 먹기 전에 빼빼한 삶의 스웨터로 찍힌 영정사진을 찾으러 간다
국제신문
질감
김순옥
방을 빼라는 집
주인의 목소리가 뜨거워
엉뚱한 방에 들어가 누워보아요
문지방에 끼인 돌멩이가 으스러져요
감긴 눈을 씹었어요
생선꼬리라도 주세요
돌멩이가 입 안에서 굴러다녀요
미안해요 뱉을 수가 없어요
입 깊숙이 밀어 넣어 볼까요?
늙은 복숭아 껍질에 돋은 거웃이
천일동안 타고 있대요
꽃을 달고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
노랗게 곪아가는 눈
저만치
나는 엄마보다 더 늙었고
낯익은 젊은 여자 하나
생뚱맞은 얼굴로 거울을 빠져 나가요
불 꺼진 방 아랫목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요
대전일보
페인트 공
성영희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매일신문
두꺼운 부재(不在)
추프랑카
안 오던 비가 뜰층계에도 온다 그녀가 마늘을 깐다 여섯 쪽 마늘에 가랑비
육손이 그녀가 손가락 다섯 개에 오리발가락 하나를 까면 다섯 쪽 마늘은 쓰리고, 오그라져 붙은 마늘 한 쪽에 맺히는 빗방울, 오리발가락 다섯 개에 손가락 하나를 까면 바람비는 뜰층계에 양서류처럼 뛰어내리고, 타일과 타일 사이 당신 낯빛 닮은 바랜 시멘트, 그녀가 한사코 층계에 앉아 발끝을 오므리고 마늘을 깐다
매운 하늘을 휘젓는 비의 꼬리
마늘을 깐다 한 줌의 깊이에 씨를 묻고, 알뿌리 키우던 마늘밭에서 흙 탈탈 털어낸, 당신 없는 뜰층계에서 통증의 꼬리 하나씩 눈을 뜨며 낱낱이 톨 쪼개고 나와야 할 마늘쪽들, 층계 갈라진 틈 틈으로 촘촘하게 내리는 비, 집어넣는 비, 비의 꼬리도 꿰맬 듯 웅크려 앉아 그녀가 마늘을 깐다. 묵은 마늘껍질처럼 벗겨져, 하얗게, 날아가 버리는 맨종아리의 육남매 비안에 스며 있는 그늘의 표정으로 여섯 해, 꿈속 수면에 번지던 당신 뜰층계에 불쑥 붐비는 당신의 이름, 아멘 아멘 아멘 마늘은 여섯 쪽이고 육손이 그녀 뒤뚱거리며, 오리발가락 여섯 개에 손가락 여섯 개를 깐다
세 시에 한번 멎었다가 생각난 듯 쿵, 쿵 아멘을 들이받으며 아직 다 닳지 않은 비가, 다시 여러 가닥으로 쪼개진다
모호한 화법이지만 '여섯' 리듬의 변주 뛰어나
책으로 묶인 예심 통과 작을 읽으며 시의 균질화 현상에 잠시 당황했다. 하나의 예로, 세계를 ‘책’으로 펼치고, 일상을 ‘열람’하며, 물의 ‘문장’으로 바꾸는 환유(換喩)들은 범상한 재능으로 상투형에 가까운 것이다.
한 교재로 시를 배운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시적인 것’에 갇히면 ‘날것의 감각’과 낡은 작법(作法)을 깨고 부수는 신인의 예기(銳氣)를 드러내기 힘들다. 스무 명의 본심 대상작들 중에서 1차로 고른 것은 송현숙, 이도형, 김재희, 박윤우, 김종숙, 김서림, 추프랑카 등 여섯 분의 시다. 이 중에서 송현숙의 '박스를 접다', 이도형의 '구름을 통과한 검은 새의 벼락', 김종숙의 '파'를 눈여겨보았으나 상상력의 발랄함과 시적 갱신의 정도가 모자라다고 판단했다. 최종적으로 김서림의 '사해문서 외전(外傳)'과 추프랑카의 '두꺼운 부재(不在)'가 당선을 겨루었다. 김서림은 시를 빚는 조형력과 언어 구사가 좋았다. “물속에 파종된 햇빛” “달의 뒤꿈치에서 하얀 밤이 돋는다” “슬픈 거미들은 죽음의 전언을 행으로 옮긴다” 같이 의미를 감각화 하는 시구들은 반짝이지만, 낯익은 발상과 기성(旣成)의 영향이 어른거리는 것은 흠이다. ‘날것의 감각’이 미흡하다는 방증이다.
추프랑카의 '두꺼운 부재(不在)'는 모호하고 화법(話法)이 낯설지만, 우리는 그 낯섦을 ‘날것의 감각’으로 이해했다. 여섯 쪽 마늘, 육손이, 여섯 해, 육 남매 등에서 ‘여섯’은 잉여고, 덧나고 아픈 상처다. 시인은 상처를 화석화하고 정적인 것으로 소모하지 않는다. 이 특이점은 까고, 벗기고, 날아가고, 스미고, 붐비고, 들이받고, 쪼개지고… 등등 다양한 움직씨 활용으로 나타난다. ‘여섯’은 여러 가닥으로 쪼개지고 끝내 셀 수 없는 빗줄기로 전화(轉化)한다. ‘여섯’을 리듬에 실어 여러 겹의 의미로 변주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두 심사자는 추프랑카의 '두꺼운 부재(不在)'의 낯섦이 다른 응모자들이 보여주지 못한 시적 새로움의 징후라고 판단하면서 기쁘게 당선작에 올렸다.
심사 : 장석주(시인), 장옥관(시인`계명대 교수)
문화일보
목판화
진창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을 나무에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좁아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팬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
조각 칼끝 따라 삶의 고단함 담아내… 詩的 형성력 완성
“언어를 다루는 말솜씨는 있다. 말들을 재미나게 쓰기는 썼다. 그래서 내용이 불확실하지만 싱겁지는 않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말재주만 가지고 시를 너무 쉽게 쓴다. 그런데 삶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지 않아서 말의 유희만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는 본심 심사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나눈 대화의 한 부분이다. 이 대화 속에 오늘날 신춘문예 투고 시의 문제점이 깊게 드러나 있다.
가능한 한 위의 문제점을 불식시킬 수 있는 작품을 고른 끝에 진창윤의 ‘목판화’, 고은진주의 ‘장어는 지글지글 속에 산다’, 이언주의 ‘사과를 깎다가’ 등 3편이 최종심에 올랐다.
‘장어는 지글지글 속에 산다’는 장어를 잡아 생계를 잇는 한 가족의 가난하지만 따뜻한 풍경이 그려져 있으나 시적 응집력이 약하고 산만하다는 결점이 두드러졌다.
‘사과를 깎다가’는 “사과를 깎다보면/ 툭, 껍질이 끊어지는 소리/ 꼭 눈길을 걷던 당신이/ 뒤를 돌아볼 것 같아” 등 서정적 개성이 두드러진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단순한 소품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목판화’는 ‘시로 쓴 목판화’의 구체적 풍경을 통해 시적 형성력을 완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호감이 갔다.
목판을 깎는 조각도의 칼끝을 따라 눈 내리는 겨울밤 골목을 배경으로 삶의 고단한 한순간이 진솔하고 과장됨 없이 그려져 있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라든가,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삶과 시가 유리되지 않고 일체화되어 있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자폐적 언어의 유희화가 왜곡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한국 시단에서 이러한 구체적 형성력의 높이를 지닌 시를 만난 것은 큰 기쁨이다.
황동규. 정호승.
부산일보
허공에서 더 깊어지는 추위
김낙호
세 길 높이 배관 위
긴 칼 휘두르는 단단한 추위와 맞선다
방패는,
작업복 한 장의 두께
빈곤의 길이를 덮을 수 없는 주머니 속에서
길 없는 길을 찾는 추위에 쩍쩍 묻어나는 살점
더 먼 변두리의 울음소리를 막아보려
등돌린 세상처럼 냉골인 둥근 관을 온몸으로 데운다
두려움의 크기 따라 느리게
혹은, 더 느리게
허공을 차는 발바닥의 양력揚力으로 기는 자벌레
수평으로 떠 있는 몸이 공중을 써는 동안
바람은,
밀도 낮은 곳만 파고드는 야비한 마름
풍경風磬이 될 수 없는 공구들 부딪치는 소리
눈앞에 튀어 올랐던 땅의 단내가 목구멍을 채우는,
숨죽였던 모골이 축축한 닭의 볏이 될 때마다
날개 없는 포유류가 새가 된 적 없다는 걸
한 발 느리게 깨닫는다
떨어져 나갔다 다시 매달린 간肝으로부터
소름의 갈기가 잦아드는 한숨
자꾸만 밀어내는 세상의 복판을 자주 헛짚어
복부 근육으로 변두리를 붙잡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
허공을 기는 힘이 연소될 때마다
그나마 조금 환해지는 하루
노동자 삶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
심사위원 : 강은교, 김경복.
최종 심사에 올라온 작품은 '헛도는 속도', '터치터치', '사막에 눈이 오다', '텔레마케터', '허공에서 더 깊어지는 추위' 등 5편이다. 심사위원이 논의한 결과 우선, '헛도는 속도'는 주제의식 면에서 현대 산업사회의 무의미한 반복과 헛된 욕망의 지향성을 잘 설정하였으나 관념적 성격이 많이 남아있음이 문제로 지적되었고, '터치터치' 또한 현대인의 고립성과 소외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으나 추상적이고 관념적 성격을 다 벗어내지 못함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사막에 눈이 오다'는 표현의 묘미와 삭막한 땅 위의 고독한 존재자의 쓸쓸한 심리를 잘 드러내 주고 있으나 산업사회의 상징적 의미로 쓰고 있는 사막이 조금 진부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텔레마케터'는 물질적 사회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억압된 심리를 텔레마케터와 고무인형으로 잘 살려낸 점이 돋보였으나 아직 정제되지 않은 표현이 보여 선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비해 '허공에서 더 깊어지는 추위'는 현대 사회 속의 하층 노동자의 삶을 사실적 사물들을 동원하여 참신하게 그려내고 있으면서 그것에 따뜻한 시선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성과 진정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으로 꼽혀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서울신문
진단
신동혁
머리를 자르면 물고기가 된 기분입니다
나는 종교가 없고 마지막엔 바다가 온다는 말을,
소금기가 남은 꼬리뼈를 믿습니다
훔쳐온 것들만이 반짝입니다
지상의 명단에는 내가 없기에
나는 나의 줄거리가 됩니다
나는 맨발과 어울립니다
액자를 훔치면 여름이 되고 비둘기를 훔치면 횡단보도가 되는
낯선 버스에서 승객들이 쏟아집니다
멀리서 보면 선인장 더미 같습니다
서로를 껴안자 모래가 흐릅니다
모래가 나의 모국어가 아니듯
빈 침대는 바다에 대한 추문입니다
나는 모르는 햇빛만을 받아 적습니다
혼잣말을 엿들을 때 두 귀는 가장 뜨겁습니다
지도를 꺼내어 펼쳐봅니다
처방전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듣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호주머니가 깊어집니다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 찬 시편… 독창성·몰입도 탁월
▲ 심사위원 정끝별(왼쪽) 시인, 황현산 문학평론가.
‘신예(新銳)’란 새롭게 등장해 만만찮은 실력이나 기세를 떨치는 대상을 향해 쓰는 말이다. 신예가 될 신인시인에게 기대하는 우선적 요건을 ‘얼마나 오래 쓸 것인가’에서 찾고자 했다. 오래 쓰기 위해서는 문장이 힘차고, 쓰고 싶고 쓸 수밖에 없는 운명적 열정이 배어나고, 개성적인 스타일을 담보해야 한다.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독창성, 몰입에서 비롯되는 에너지야말로 신인의 요건일 것이다.
본심에 오른 열 분의 작품들은 언어 구사력과 시적 완성도가 돋보였으나 문화적 지표에 기댄 채 포즈화되곤 했다. 시의 세련된 문화화는 모험을 포기한 대가일 것이다. 그럼에도 ‘상상 수프’와 ‘10월 삽화’의 시적 가능성은 녹록지 않았다. 전자의 경우 어휘와 문장은 화려하고 세련되었으나 그 강점이 약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에 대해 응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일상에 대한 섬세한 천착이 믿음직했으나 자기가 감각한 것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는 설명적 묘사가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었다. 타자화된 세계를 감각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신동혁의 ‘진단’을 당선작으로 내보낸다. 보들레르에서 이상에 이르기까지, 세계에 대한 병리학적 ‘진단’은 현대시의 오랜 자세다. 지도와 처방전을, 모래와 모국어를, 침대와 바다에 대한 추문을 연결시키는 감각은 풍부하고 그 이미지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이 젊은 시인은 “혼잣말을 엿들을 때 두 귀가 가장 뜨거워지는” 부재의 역설을, “모르는 햇빛만을 받아 적는” 시의 비의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막 탄생하려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의문의 창문들을 열게끔 설계된 그의 시편들이, 끊임없는 자기갱신으로 시간의 수압을 잘 견뎌내기 바란다.
영남일보
공복
김한규
당신이 하고 있는 무엇
가만히 있게 가만히 두지 않는 시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나왔네요.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왔습니다.
먼지가 부풀며 피에 섞인다
아스팔트가 헤드라이트를 밀어내기 시작하고
한 마디를 끝낸 입술이
냉동고 속에서 굳는다
언 것이 쌓이기 시작하자
흔들리던 빈속이 쏟아져 내린다
무엇을 하기 위해 당신은
약봉지를 잊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이 보인다
죽은 나무 위에서 늦은 밥을 먹을 때
문은 닫히는 소리를 낸다
밝아올 것이라는 말을 지워버린
아침에는 감꽃이 떨어지고
눈물을 말리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하고 나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끝났습니다.
아니면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연락하겠습니다.
전북일보
귀촌
정연희
귀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멀고 가까운 말들도
촌에서는 하나로 연결된 귀가 된다
귀걸이처럼 빛나는 소문들
귀가 제일 빠른 곳은 촌이다
특용작물을 심은 노총각의 이야기, 젊은 며느리와 늙은 시어머니와 다국적 갈등, 파리 한 마리와 한나절을 놀았다는 과부댁, 허리가 점점 늦가을 풀포기처럼 구부러지는 재 너머 노인, 합죽의 입 꼬리에서 뛰어오는 손자들 부러운 마음 감추고 듣는 독거노인들 이야기가 점심 물린 마을회관에 가득하다. 토지수용 소문에 동네가 술렁이고 쇠약한 용돈을 먹고 약장사가 지나가고 나면 촌에는 보일러 공기구멍에 집을 짓는 새와 부엌이 놀이터인 쥐가 퍼트리는 소문이 있다
반상회가 끝난 자정 무렵
민화투 점수로 오고가는
소문의 끄트머리들이
텅 빈 까치집으로 들어간다
폐가는 집 비운 소문으로 흉흉하고
논두렁에는 논두렁 소문이 길게 늘어나고
어쩌다 주춤했던 귀들도
오일장 다녀 온 뒤로 다시 무성해지는
이발관 그림 같은 풍경에 뛰어든 사람들
밤이 빨리 찾아오는 촌 풍경에
바쁜 귀가 몰입해 있다
조선일보
애인
유수연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다
서로의 이해는 아귀가 맞지 않았으므로 나는 왼손으로 문을 열고 너는 오른손으로 문을 닫는다
손을 잡으면 옮겨오는 불편을 참으며 나는 등을 돌리고 자고 너는 벽을 보며 자기를 원했다
악몽을 꾸다 침대에서 깨어나면 나는 생각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애인을 바라보며 우리의 꿈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악몽 중 하나였지만 금방 잊혀졌다
벽마다 액자가 걸렸던 흔적들이 피부병처럼 번진다 벽마다 뽑지 않은 굽은 못들이 벽을 견디고 있다
더는 넘길 게 없는 달력을 바라보며 너는 평화, 말하고 나는 자유, 말한다
우리의 입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안과 밖
벽을 넘어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
어둠과 한낮 속에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티브이를 끄지 않았으므로 뉴스가 나오고 있다
'무엇이 우리 삶의 진실인가' 질문을 던지다
심사위원:문정희 . 정호승 시인
오늘날 한국 시의 큰 병폐 중 하나로 소통의 결핍과 부재를 들 수 있다. 시를 쓴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이 서로 소통되지 않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적 삶과 동떨어진 비구체성, 환상과 몽상의 방법으로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언어적 태도, 개인의 자폐적 내면세계에 대한 지나친 산문적 천착 등으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이러한 시들을 제외하고 시적 형성력의 구체성이 높은 작품을 우선하기로 먼저 논의했다.
본심에 오른 15명의 작품 중 최종적으로 거론된 작품은 곽문영의 ‘마법사 K’, 이광청의 ‘초콜릿’, 이은총의 ‘야간비행’, 노경재의 ‘캐치볼’, 신성률의 ‘신제품’, 유수연의 ‘애인’ 등이었다. 이 중에서 ‘신제품’과 ‘애인’을 두고 장시간 고심했다. ‘신제품’은 구멍가게를 하며 늙어가는 한 내외의 삶을 신제품에 빗댄 시다. 옛것을 통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이야기하고 있는 시로, 발상은 신선하나 진술에 지나치게 의존한 산문적 안정감이 오히려 시적 형성력과 신선미를 잃고 있다고 판단했다.
‘애인’은 시대적 삶의 투시력이 엿보이는 시다. 오늘의 정치 현실을 통해 무엇이 우리 삶의 진실인가 질문을 던지는 시다. 그러나 단순히 정치 현실을 바탕으로 세태를 풍자한 시라기보다는 인간관계로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삶의 진실을 추구한 시다. 여와 야, 적과 동지,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오늘의 정치 현실적 관계라면, 이 시는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와 “더는 넘길 게 없는 달력을 바라보며 너는 평화, 말하고 나는 자유, 말한다”에서 알 수 있듯 인내를 통한 평화와 자유의 관계가 현실적 삶의 진정한 원동력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다”에서도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실은 그 가치의 공존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오늘 우리의 삶을 애인 관계의 공생성에서 찾아내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한 이 시를 통해 내일 우리의 삶은 분명 사랑과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전쟁의 시간
주민현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치며 싸락싸락 소리가 났다.
라디오에서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앵커의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쁨과 안도가 터무니없이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언덕을 넘어가고 있는 군인들의 긴 행렬을 떠올렸다
바게트 굽는 냄새가 식탁 위로 흘러 넘쳤다
하지만 불안이 커튼처럼 남겨져 있었다
어쨌거나 다시 자랄 것이다
식물이나, 아이나, 어둠 속에 수그린
수련이나, 오래 구겨져 있던 셔츠 같은 것이
교사나 수렵꾼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생활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뜯어진 커튼처럼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태어난다고 믿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끝내 믿을 수 없어 했다
이곳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반쯤만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식은 총구에서 나는 싸늘한 냄새를 맡으며
수프를 먹었고, 기도를 했고, 달력을 넘기며
고작 이 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칼로 가른 물고기 뱃속에는 구슬이 가득했다
종종 정신이 돌아오는 늙은 어머니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종려나무야, 다른 신발을 쥐고 태어난 깨끗한 발아,
이것을 좀 보렴, 이렇게 아름답잖니
신은 언제나 우리의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다
어머니는 자주 누워 있었고 집 밖에 내어 놓은 의자는 비에 젖었다
전쟁이 끝나고 좀도둑 떼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곧 사월이 오면 먹을 게 좀 생길 거다
이웃집 사람들과 매일 대화를 했다
이 동네를 떠나세요, 아직 젊으니까 도시로 가면 여기보단 지내기가 나을 거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워서 중얼거리는 어머니는 조금씩 물고기의 형상을 닮아 갔다
오빠 마구간에서 새끼 양들이 태어났어
이상한 일이다, 신의 증거 같은 것일까?
그 양들은 옆집에서 도망친 가난한 슬픔일 뿐이란다
사는 게 지옥 같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아직 지옥엔 도달하지도 않았는걸요
사월에도 눈이 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학교에 갔고
곳곳에 무너진 건물이 다시 건축되고 있었다
가는 물줄기 안에서 물고기 몇 마리가
더 커다란 물고기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한국일보
전원 미풍 약풍 강풍
윤지양
0100
밤이었다.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가락으로 더듬다
0010
새벽에 매미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여름엔 매미가 커지고 점점 커져서
새를 잡아먹는다. 새소리를 들을 수 없다.
1000
숨이 막히는 줄 알았어.
0100
비행기 엔진 소리
잡아먹힌 새가 매미가 되는 소리
1000
(나는 이곳에 없다.)
0001
침대 위의 옷가지
0100
침대는 깨끗하다. 아직은 숨이 막힐 때가 아니다. 탁자 위 물 한 컵
0010
이곳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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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무심하고 당돌한 시…앞으로가 더 기대돼
심사를 맡은 세 사람은 투고작들 가운데 7명의 원고를 1차로 골라냈고, 그 중 셋을 다시 추려 논의를 이어갔다. 강응민의‘꽃은 여남은 몸짓의 침묵이다’ 외 2편은 유장한 흐름과 단단한 구축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비교적 긴 시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행까지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그 긴장으로 인해 시의 흐름이 때로 경직된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조금 더 유연하게 강약 조절이 이루어졌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지나의 ‘귀귀귀귀’ 외 2편은 장면에서 장면으로 건너뛰는 서늘한 비약이 인상적이었다. 비약 속에 감추어진 감정 혹은 사건이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기도 했다. 그러나 우연성과 자의성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끝내 지우지 못했다. 집중의 힘이 조금 더 강해진다면 이분의 작품도 머지않아 다른 지면에서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윤지양의 ‘전원 미풍 약풍 강풍’ 외 4편에 어렵지 않게 마음을 모았다. 눈치 보지 않고 자신만의 시적 착지점에 닿은, 혹은 닿으려 하는 원고들이었다. 사소한 착상을 충분히 확장시킬 줄 알았고, 그렇게 확장된 세계에는 독특한 파토스가 담겨 있었다. 투고작 전반에 신뢰가 갔다. 이분이 앞으로 쓸 작품들을 계속 읽고 싶어졌다. 5편 중 특히 2편, ‘전원 미풍 약풍 강풍’과 ‘누군가의 모자’를 두고 어느 쪽을 당선작으로 삼을지 고심했다. ‘누군가의 모자’는 괴팍하면서도 생기 있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였다. ‘전원 미풍 약풍 강풍’은 작은 모티브에서 출발하여 무심하고 당돌한 스타일로 감각과 정서를 끌어내는 시였다. 설왕설래 끝에 한겨울에 읽는 한여름의 시, ‘전원 미풍 약풍 강풍’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축하 드린다. 건필을 빈다.
황인숙. 김정환. 신해욱.
동아일보
손의 에세이
김기형
손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굿모닝 굿모닝
손에게 손을 주거나 다른 것을 주지 말아야 한다
손을 없게 하자
침묵의 완전한 몸을 세우기 위해서 어느 순간 손을 높이,
높이 던지겠다
손이 손이 아닌 채로 돌아와 주면 좋을 일
손이 손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면 좋을 것이다 굿모닝 굿모닝
각오가 필요하다 '나에게 손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나는 아직 손을 예찬하고 나는 아직도 손을 사랑하고 있다 손의 지시와 손의 의지에 의존하여 손과 함께 가고 있다 손과 함께 머문 곳이 많다 사실이다 나는 손을 포기 하지 못하였다 '제발 손이여' 라고 부르고 있다 '제발 손이여 너의 감각을 내게 다오, 너의 중간과 끝, 뭉뚝한 말들을 나에게 소리치게 해다오' 라고 외친다 손이 더 빠르게 가서 말할 때, 나는 손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손의 탈출은 없다
다만 손들이 떨어진 골목을 찾고 있다
해안가에 앉아 손도 없고 목도 없는 생물들에게서 그들의 뱃가죽을 보면서 골목을 뒤진다
손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 손은 쉬지 않는다 손이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손은 자신이 팔딱거리는 물고기 보다 훨씬 더 생동하고 멀리간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손이 말하는 불필요, 손이 가지려 하지 않는 얼굴
손은 얼굴을 때린다 친다 부순다 허물기 위하여 진흙을 바른다 손은 으깰 수 있다 손은 먼 곳으로 던질 힘이 있다 손이 손을 부른다 손이 나타나면 눈을 뜨고 있던 얼굴들이 모두 눈을 감고 손에게 고분하다 손에게 말하지 않고 손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손은 다른 침묵을 가진다
손의 얼개가 거미줄 처럼
거미줄과 거미줄 그리고 또 그런 거미줄이 모여든 것처럼 내빼지 못할 통로를 연다
손 사이에서 망각한다 손 안에서 정신을 잃는다 손의 춤을 본다 그 춤을 보면서 죽어갈 것이다
스러져가는 얼굴들이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한다 나는 손에게 조각이 난다
손을 감출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울었지만 동그랗게 몸을 만 손이 어떤 불을 피우는지, 무엇을 터트리려고 굳세어지는지
이 공포 속에서 손에 대한 복종으로 계속 심장이 뛴다고 말한다
손을 놓고 가만히
탁자 앞으로 돌아온다 손이 응시한다 손이 그대로 있겠다고 한다
손이 뒤를 본다
손을 뗀다 반짝하고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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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매개로 한 전개 ‘시적 사유’ 확장 돋보여
예심에 의해 선택된 작품들 중 5명의 시를 집중 검토했다. ‘아마이드 밤 골목’ 등 5편의 시는 작은 행위들을 모아 하나의 이국적이고 신화적인 공간을 축조해가는 시들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문장들을 주어, 서술어만으로 짧게 분절하자 오히려 행위들이 표현되지 않고 설명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재의 형태’ 등 5편의 시는 같은 제목의 시를 쓴 그리스 시인 야니스 리초스와는 달리 사다리를 오르는 동작과 묘사를 통해 시공간의 안팎에서 부재의 형태를 발견해 나가는 시적 전개가 있었다. 그러나 같이 응모한 다른 시들의 긴장감이 떨어졌다.
‘여름 자매’ 등 5편의 시는 소꿉놀이, 유년기의 자매애 같은 이야기들이 스며들어 있는 환한 시들이었다. 마치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은 깊이 묻어 버린’ 세계, ‘계속해서 실종되는’ 세계를 불러오는 듯했지만 시적 국면이 조금 단순했다.
‘창문’ 등 5편의 시는 얼핏 보면 내부의 어둠, 검정을 성찰하는 시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것들을 뭉개는 도형을 시가 그리려 한다고 느껴졌다. 응모된 시들이 고루 안정적이고, 스스로 발명한 문장들이 빛났다. ‘손의 에세이’ 등 5편의 시는 우선 다면적으로 시적 사유를 개진하는 힘이 있었다. 이를테면 손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손을 없애 보고, 손과 함께 머문 곳을 생각하고, 얼굴을 없앨 수 있는 손을 그려내고, 손의 얼개를 떠올리고, 손에 의해 부서지면서 손의 통치를 생각해 보는 전개가 돋보였다. 작은 지점들을 통과해 나가면서 큰 무늬를 그려내는 확장이 좋았다. 최종적으로 ‘창문’과 ‘손의 에세이’ 중에서 ‘손의 에세이’를 당선작으로 선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