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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김을동의 아버지, 김두한이 이승만 사주로 김원봉, 김규식, 박헌영, 여운형, 명망가 및 학생 노동자 테러학살로 독립운동세력의 몰락에 깊숙하게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승만과 자유당의 극악무도한 독재 및 인권 탄압에 처절하게 저항하던 시민, 학생, 노동자,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민족주의자 그룹을 상대로 얼마나 잔혹한 테러들을 백주에 무시로 벌였는지 자랑하는 김두한 본인의 육성(옛 동아방송 <노변야화> 1969년 10월부터 56회분 녹취·정리)으로 확인해보자.
1. 삼청동 곡괭이 피바다 사건 (돈줄:장택상)
장택상 수도청장과 만난 다음날 곡괭이 자루를 삼청동 옆 들판 창고에 쌓아두고는 밤 2시에 체격 좋은 놈(깡패들) 1백 명 데리고 학통 훈련소로 쳐들어가 자는 놈들을 습격, 삼청동 부근을 피바다로 만들었죠
2. 학생폭력, 서울상대와 연희전문 학생들 두개골 빠개기~~ (돈줄:장덕수)
서울대 상과가 주도하고 연희전문이 가장 강성이었던 국대안 반대 때 대낮에 일제 이쓰즈와 도요타 30대에 나눠 타고 가서 서울대 상과대 수업받는 학생들을 뺑 둘러싸고 1학년서부터 4학년까지 그냥 족치고 전부 트럭에 싣고서 정릉 요리집 청수장 5백 미터 위쪽 으스스한 산골 솔밭이 우거진 곳에 끌고 가 완전히 절단냈죠. 같은 날 연희대학 학생들은 수색으로 끌고 가 절단냈죠. 한민당 총무 장덕수 선생이 나를 직접 불러 지시한 거죠. 싹들 자르라고.. 이후 학생 운동은 일체 맥을 못 추었어요. 워낙 처참하게 했기 때문에.. 지독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하필이면 정릉 골짜기에 사는데, 요새 아주 꿈자리가 뒤숭숭해요. 두개골이 파열돼서…. 그냥, 지독했어요.
3. 백색테러, 공갈협박살해가 직업~~
거의 매일 공산당들을 때려잡는 백색테러리스트로 활동했습니다. 우리 사무실 지하 음침한 특수작업실에 공산당들을 납치 고문하곤 했죠.. 예술가 동맹 중 작가들이 가장 문제였는데 지하실로 예술가 동맹 책임자들 배우들, 작가, 가수 등 한 60여 명이 왔죠. "앞으로 공산당 영화나 연극, 노래가 내 눈에 띄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윽박지르고 지하실로 데리고 가 전깃불을 켰지요. "여기 양촛물하고 빙초산하고 청강수가 있다. 너희를 잡아다 여기다 처넣고 발로 밟으면 니들 뱃속으로 잘 들어갈 거다." 이렇게 겁을 주었어요. 예술가라는 게 무대 위에서는 강하지만 공갈 협박 받으면 한없이 약한 게 가냘픈 계집애보다 더 약하거든. 부들부들 떨더군요.
4. 연극인 심형일에 권총 세방
중앙극장에서 심형일이 '님'이라는 혁명극 연극을 한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처치해야겠다 싶어서 부하들 6명을 배치, 마누라와 마누라 친구를 데리고 가는 걸 광교다리에서 잽싸게 세 방을 쐈어요. "으악"고 비명소리.. 심형일이가 그 자리에서 죽지를 않아 병원으로 실려갔기에 다시 죽여야겠더라구요. 중부경찰서 부근 백병원 28호실 구석방에 있다기에 세 명이 권총 가지고 문따고 들어가 그냥 쏴 버리려고 그랬는데 갑자기 그 어머니가 들어와 그냥 날 붙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여기에는 김두한이가 약하단 말이에요. "너 들어라, 앞으로 한번만 더 나오면 죽인다. 너희 동료들, 그 연극에 관련된 놈들 다 죽일 거니까 조심해라." 이렇게만 하고 그냥 병원에서 나온 일이 있습니다. 심형일이는 그냥 병원에서 도망갔죠. 퇴원하면 죽인다고 그러니까.
5. 만담가 신불출에 권총 두방
일정 때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일본을 빈정대는 '애하라, 노하라'로 바꾼 적이 있어요. 종로경찰서 유치장에도 같이 있었고 친했지요. 신불출이 일정 때 연극을 할 때도 사회주의에 심취해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본격적으로 좌익 운동을 했지요. 이거 그냥 놔두었다간 안 되겠거든. 살인 좋아하는 고 동지를 불러 독일제 브라우닝을 주고 낙원동 신불출의 집으로 가서 고 동지가 총을 두 방 쏴서 하나는 왼쪽 팔을 뚫고, 하나는 옆구리 스쳤어요. 다시 갈기려는데 사람들이 뛰어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죽이질 못했지요. 나중에 월북했어요. 여기 있으면 죽을 테니까 도망간 가죠. 그 후로 예술하던 공산당은 거의 없어져 버렸죠.
6. 데모시민 천명 잡아 28명 옷벗겨 고문한 후 다 죽여버림 (돈줄:이승만, 도움:장택상,CIC)
이승만 박사의 민족위원회에 반탁투쟁위원회에서 이승만 박사가 본부장이고 제가 경비부장이었는데 데모한다는 전보가 들어오는 거예요. 한 1천여 명. 늙은이와 어린애만 빼고 대한적십자사 본부 옆의 한 절간으로 싹 잡아왔어요. 정진용이라고, 제 밑에 거지로 있다가 나중에 공산당으로 전향한 친구로 조선민청의 부대장이 된 친구랑 거기 잡혀온 28명 조선민청의 주력 부대원들 옷을 홀딱 벗겨서 심문한 뒤에 껌껌한 밤에 다 죽여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장택상 씨가 아주 곤란해졌지요. 원래는 방공호에 파묻으려고 했는데 CIC가 알아가지고 다른 곳에 묻어버렸어요.
7. 여운형 권총납치 살해위협 (돈줄:좌우합작반대 이승만 및 부왜파)
신당동에서 김규식 여운형이 좌우 합작 회의를 한다기에 상하이라는 동지하고 나하고 김 동지, 고 동지, 전 동지하고 같이 가서 포드차에 권총을 들이대 여 선생을 끌고 산으로 올라갔어요. "만일 좌우 합작을 다시 하신다 그러면 아까 내가 문 열었을 때처럼 그냥 쏴 버릴 겁니다. 사실은 선생을 오늘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지만 한번만 살려줄 테니. 좌우 합작을 이제부터 탈퇴해보시오." 이랬죠..
8. 김규식 가택침입, 칼로 살해위협 (돈줄:좌우합작반대 이승만 및 부왜파)
내가 김규식 선생 집에 들어가 막상 목에 대고 찌르려고 하니까 김규식 선생이 "두한이 참게. 두한아, 참아."하면서 그 노인이 벌벌 떨어요. "바깥에 신문사 사람들이 8명이 와으니 불러서 친히 한 장씩 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몇 마디 쭉 말하길 "나는 좌우 합작을 탈퇴한다. 내가 나라를 위해서 하는 줄 알았더니 혼란만 일어나므로 나는 좌우 합작에서 탈퇴한다."
9. 김원봉과 가족 가택침입, 겁박, 권총살해위협 (돈줄:좌우합작반대 이승만 및 부왜파)
김원봉. 대한임시정부 군사부장 있잖아요. 김규식 탈퇴시켰더니 그 다음에 김원봉이 좌우 합작 대표로 나오잖아요. 처치하자 했죠. 30명이 총을 들고 문을 부수면서 들어갔죠. 여자하고 애들, 하녀들을 건너방에다가 이부자리를 뒤집어 씌우고서 소리 내면 죽는다고 하고 안방이랑 벽장까지 싹 다 뒤졌는데 없어요. 그래서 부인한테 이랬거든요. "만약에 좌우 합작에 김규식 박사 대신 들어가면 죽인다. 그거 하나만 일러라. 그리고 일체 좌익에 가담하면 죽인다. 경고한다." 그리고 나와버렸죠. 그리고 김원봉은 좌우 합작을 안 했죠. 그 후에 이북으로 넘어갔어요. 죽인다고 그러는 바람에 이북으로 들고 튀었죠. 죽인다는데 도리가 있나요?
10. 김두한은 누구의 지령(돈)을 받고 현대사의 좌우합작(통일)을 진행하던 위인들(김원봉, 김규식, 여운형)을 죽였나? 이승만&윤치영!!
이승만이 의장이던 민주의원 산하 반탁투쟁위원회.. 내가 반탁투쟁위원회 동원부장(경비부장).. 이 박사께서 비서실장 동산(東山) 윤치영 선생을 보내서 "날 좀 도와달라고" 해요.. 이 박사께 들어갔더니 "중국이 새빨개졌다. 트루먼과 미 국무성의 중국 정책이 실패하는데 여기서도 좌우 합작을 해서 여운형, 김규식 박사한테다가 정권을 주려고 움직이니 큰일났다. 이번에 미스터 김이 김규식 박사를 좌우 합작에서 자진 탈퇴시켰다던데, 공산당은 중대한 문제인데 미스터 김이 심각하게 생각해서 빨리 처리해 주기 바란다" 하는 거예요. 그뿐 아니라 김원봉 장군이 좌우합작 나오려는 것을 내가 습격을 해서 그 무서운 사람, 유명한 김원봉 장군이 똥통 밑에 숨어있다 나왔다고 신문에 굉장히 크게 났거든요.. 그런데 김원봉 씨는 이북으로 튀어 버렸단 말이야. 여기 있으면 죽으니까. 장사 있나? 총질하면 가는 건데. 이 박사가 대단히 애썼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장택상 씨가 잠자코만 있었으면 죽여버리는 건데 자꾸 죽이지 말라고 해서 혼만 냈습니다"고 했어요.
11. 김구의 조언
그때 당시 백범 김구 선생 같은 분과 설렁탕 한 그릇 먹으면 우리 청년에게는 최대의 영광이거든요. 다 잡수시더니 날더러 하는 말이 "자네, 내가 들으니까 한천동의 김 박사 댁을 어떻게 했다는 소리가 들리고, 또 김원봉 집을 어떻게 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건가? 죽이면 안 되네. 우리가 어쨌든 독립이 됐으니까 될 수 있으면 화해를 하고 용서해 주고 서로 보호해야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돼. 김원봉 집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아무리 애국이라고 밀고 나가더라도 엄한 사람이 다칠 때가 있어. 그러니 이 다음에 우리 임정에 있는 사람에 대해 누가 혹시 지시하더라도 자네가 나한테 한 번 물어보고 그렇게 해주길 바라네."
12. 여운형 암살 (돈줄:좌우합작반대 이승만 및 부왜파)
당시 서울에 이북 5도 동포가 모여서 공산당 두목을 죽이려고 만든 '백의사'라는 청년단체 염동진 씨가 이승만 박사와 뜻을 합쳐, 나를 불러 여운형 씨를 죽이잡니다. "저기 18살 한지근이 한다. 쟤가 이북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학살당해서 철천지 원한을 가지고 있지." 총이랑 돈 백만 원도 갖다 드렸죠.. 혜화동 김연수 씨 별장 위 내시집에서 1차, 2차, 3차로 길목을 잡고. 혜화동 로타리에서 지나가는 것을 3명이 망보다가 한지근이가 자동차 뒤를 턱 치고 올라가면서 뒤에서 그냥 갈겼죠. 여운형 씨 목과 뒤통수에 맞았죠. 그분은 거기서 숨졌죠. 백의사는 순전히 좌익 거물급만 죽이는 데 주력했어요.
13. 박헌영 암살미수 (돈줄:좌우합작반대 이승만 및 부왜파)
염동진 씨는 박헌영을 잡아서 고문을 해 가지고 조직 내부를 알자고 했지만 나는 데려올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죽여버리자고 했어요. 서울예식장 맞은편 자유당 자리에서 박헌영을 잡아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고 종로경찰서 앞으로 걸어가라고 하니까 박헌영이 대담하게 걸어가요. 그 앞에서 박헌영이 군정재판 대위실에 뛰어들어가서 "저놈들이 나를 암살한다"고 소리를 친 겁니다. 우리는 인사동 거리를 그냥 뛰었단 말입니다. 갈겼어야 했는데..
14. 노동자 4백명 쇠파이프 대학살, 대창과 수류탄 학살테러로 노조 완전점령
전기 회사 조선전업, 남전, 경전 파업을 했는데 1차로 동대문 옆 경전을 포위하고 파업분자들 4백 몇 십 명쯤을 집어내 전차 차고에 끌고 가서 묶어놓고 쇠파이프로 내리쳤어요. 처참하죠. 아비규환이지… 그 후 우리 진영의 노총(어용노조)과 대한민청과 결성식을 해버렸죠. 해방후 노동조합 중 가장 센 곳은 노량진에서부터 인천까지 노량진, 영등포, 소사, 오류동, 부평, 인천 등 철 공장, 옷감 공장, 군수 공장 있는 40만명 일하는 공업지대거든요. 거기 밀고 들어가서 싸우는데 숯을 벌겋게 피워 콩기름에 넣었다 꺼낸 대창을 가져가요. 칼보다 좋아요. 부랑자 1만 명을 뽑아 독한 술 한 잔씩 먹여서 얼큰하게 취하게 하고선 트럭으로 정문을 들이받는 거야. 방직회사 복판으로 들어가 수류탄을 뽑아서 두 방 터뜨리면 한 서너 명이 죽어 나자빠지거든요. 3개월 후에 마지막으로 인천에 있는 조선기계제작소를 점령했어요.
15. 3200명 남조선철도파업, 경찰청장 장택상이 준 총300정과 수류탄 3상자로 무장한 김두한의 5천깡패가 투입되어 간부8명 즉석총살 (돈줄:장택상,조병옥)
1947년 2월부터 10월까지 또 싸웠는데 제일 마지막 치열하게 싸움 붙은 것이 남조선 철도파업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3200명이 38구경식 권총을 들고 수류탄을 가져오고 딱 둘러싸면서 철도파업을 시작한 거예요. 장택상 씨와 조병옥 박사는 꼭 그럴 때만 날 써먹어요. "두한이, 이번에만 자네가 꼭 해줘야겠네." 최후 결사대를 5천 명 뽑아 2천명은 정문, 3천명은 각 방향으로 쳐들어갔어요. 장택상 씨가 준 경찰전문학교 실습용 총 300정과 수류탄 3상자를 가지고 새벽녘 정문을 밀고 들어가요.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왼손에는 총을 쥐고. "김두한 부대다. 김두한이란 말이야. 손들고 나오지 않으면 죽인다. 만일 항복하면 살려준다." 김두한 부대라면 떨었거든요. 항복한 놈들 잡아다 용산 넓은 마당에 쭉 앉혀 놓고 뒤에다가 총을 하나씩 갖다댔어요. "전평(전국노동자평의회) 책임자를 내놓지 않으면 총을 쏜다. 20분 준다." 했더니 할 수 없이 간부들도 손들고 나와요. 8명을 하나씩 끌고 나가서 뒤통수를 쏴서 죽여 버렸어요. 화가 났으니까요. 그걸 언제 넘겨요? 넘기면 콩밥 먹고 징역 살고 나오면 또 골치 아프니까. 쏴 가지고서 기차 윗자리에 쏙 집어놓고서는 시멘트 싣고 오라고 그랬어요. 그때는 내가 미련해서 그랬어요. 이렇게 해서 남조선에 대한 공산주의 최후의 혁명인 남조선 철도파업을 복구시킨 겁니다.
16. 신문사 네곳 방화 강제폐간
신문사라는 게 골치 아픈 거거든요. 신문 기자를 정면으로 때렸다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고 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그때 명령할 때 신문 기자만은 전부 뒤통수를 치라고 그랬어요. 절대 누가 쳤는지 모르게. 당시 우익 신문(수꼴부왜)으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대동신문 3개이고 좌익 신문은 조선인민보, 노력인민인데 좌익 신문 만들던 곳은 나무떼기 집이었어요. 대낮에 뒤로 들어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지붕 위에서부터 밑으로 휘발유를 두루루 붓는 거예요. 그리고 불을 확 지르니까 밑에 인쇄 공장에 불이 확 붙을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골목길에 네 사람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살 사람은 살고 죽은 사람은 죽지만 할 수 없이 비밀로 했죠. 그런 식으로 해서 좌익 네 군데 신문사는 완전히 없어졌어요.
이승만과 윤치영이 김두한을 불러다 '골치아프니 처리해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면 알아서 죽여삐리~~!! 이런 개백정 살인마색휘가 국개의원 해먹고, 그 딸, 손자, 증손자 삼둥이들까지 대대손손 영광받는 이 개같은 나라!!
http://cafe.daum.net/cheonjiinmunhwa/OjX1/393?q=%B1%E8%C0%BB%B5%BF%20%BC%DB%C0%CF%B1%B9
※김좌진과 관계는? 청산리대첩때 김두한(1918년생)은 3살인데 3년뒤(1923)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울었단다. 개뻥!! 김좌진장군은 1930년 사망.. 6살 김두한어린이는 새파랗게 살아있는 김좌진의 7년뒤 죽음을 예언이라도 할 수 있는 "무당깡패"였나? 고아출신 종로깡패 김두한의 아버지가 김좌진이 아니라는 건 최근 역사학계의 정통 상식!! 당시 일왕에게 충성을 다하자며 떠들어대던 친일 매국신문 조선과 동아일보에서 김좌진과 기생 김계월 사이에서 김두한을 낳았다고 기사화했는데, 김좌진 흠집내기용이라는 게 상식적인 학계분석~ 이승만의 청부 대학살로 역사의 물줄기를 꺾어버린 유치한 청부살인업자이자, 정치입문시 자신을 뛰어난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해 김좌진장군 아들이라 뻥치며 안동 김씨가문에 찾아가 자신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니 돌림자를 달라고 해서 두한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천하의 사기꾼 김두한의 후손(김을동, 송일국, 삼둥이들)은 역사왜곡영화의 덕까지 받아가며 마치 사실인 양, 아직도 독립유공자로서 정치깡패의 얼굴에 독립투사탈을 쓰고 출세가도를 달리며 역사를 왜곡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