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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남 어촌마을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윗목에 던져졌다가 살아났다. 술집을 하셨던 엄마는 술을 팔면서 밤이 되면 만취상태로 술주정을 했다. 첫딸이 시집을 잘 못간 것, 막내 아들이 저능아로 태어난 것, 자신이 술장사를 해야 하는 것 등등. 그러다 불현듯 내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너희들 때문이야" 그것은 밤마다 계속된느 악몽이었다. 도망갈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그때 이미 도망가봐야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길 수 있기 위해 나는 '멋진 반항아'가 되기로 결심했다. 멋진 반항아는 좋지 않은 환경으로 삶이 고달프고 슬퍼도, 비관하거나 폭발하지 않는다. 비관하면 자신만 더 처량해지고, 폭발하면 좌절만 남기 때문이다. 멋진 반항아는 미래를 기약한다. 어쩔 수 없는 환경에 고개를 숙일지언정 마음까지 굽히지는 않는다. 그냥 마음만 굽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꼭 복수를 해 주겠다는 결심으로 자신의 실력과 힘을 키운다.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언젠가 꼭 성공하고 말 거라고. 언젠가 꼭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이 세상에 여자도 남자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를 차별한 이들이 무릎 꿇게 할 것이라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공부했다.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한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의 고등학교까지 진학은 했지만 졸업후 돈이 없어 가발공장 여공이 되었다. 삼년 후엔 미국에 식모살이를 하러 단신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서 웨이트리스로 10년간 살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노력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주었고 도움을 주었다. 일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원서를 냈는데 두 군데에 합격을 했다. 둘 다 다닐 수 없어 한 곳에는 다닐 수 없다는 편지를 쓰고 서명하는데 손이 떨렸다. 공장 여공이며 헌 옷을 입고 미국인의 식모가 되기 위해 백불을 둘고 비행기를 탄 바보간은 여자가 하버드대의 입학을 거절하는 사인을 하고 있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자랑스럽게 들어간 하버드대 석사과정 2년은 정말 힘들었다. 내 나이가 다른 학생들의 두배는 되어도 전혀 봐주는 것이 없었다. 그때 다시 내 마음속의 멋진 반항아가 의지를 불태웠다.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꼈다. 1981년 나는 미 육군 소위가 되었고 85년엔 중대장 복무를 마쳤다. 그 때 일본 자위대에 연락장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원서를 냈다. 여자라서 불합격한 사실을 알고 담당자에게 달려가 하루동안 설득하여 그 자리를 얻었다. 최초의 여성 연락장교가 된 나는 공부할 때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근무했고 좋은 성과를 얻었다. 인간의 가능성은 참 무한하다고 나는 믿는다. 이 서진규란 여자가 해냈는데 다른 사람이 못하라는 법이 어디있는가? 무엇이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엄청난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라며,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를 갖고 노력하던 그 멋진 반항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찾으시길, 그래서 힘차게 도약하시길!
-서진규 |
1948년 경상남도 동래군의 어촌마을 월내에서 엿장수 딸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언니,오빠와 2명의 남동생이 있다. 남동생중 한 사람은 미군 복무중 사고로 요절하였으며, 한 사람은 지능의 발달이 비장애인에 비해 늦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제천시로 이사, 동명초등학교와 제천여자중학교를 졸업했다. 풍문여자고등학교 수학을 위해 한국군 장교인 큰아버지댁에서 살았는데, 여학생 잡지를 친구들에게 파는 아르바이트와 아버지가 보내주시는 쌀로 생활하였다. 고등학교 졸업후인 1967년 종로구에 있는 가발공장에서 사촌 언니와 같이 일했지만, 서진규 그 자신이 자서전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북하우스)에서 '딴 생각에 사로잡힌 소녀'라고 회상할 정도로 공장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21세때인 1971년 친하게 지내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식모를 구한다는 말을 들은 서진규는 도미를 생각했다. 주위에서는 온갖 말로 미국에 가겠다는 그의 결심을 꺾으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고, 아버지가 겨우 구해준 비행기삯 100달러만 가지고 미국에 갔다. 미국에서 그는 한식당 아리랑의 웨이트리스(여성 웨이터)로 일하며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1975년 한국인 태권도 사범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의 폭력으로 얼룩졌으며, 결국 서진규는 미 육군에 사병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탈영군인의 마음을 이해할 만큼' 훈련병 생활은 힘들었지만,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어려움을 참아내어 3개월간의 훈련을 마쳤을 때는 200명중에 일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일등병이 된 그는 대한민국 용산구의 주한 미군 부대에서 군수업무를 맡았으며, 상등병 시절 주위의 권유로 간부사관을 지원하여 고된 훈련끝에 임관하였다. 장교근무시절 그는 독일과 일본에서 해외근무를 하였으며, 1987년에 어렵게 메릴랜드 대학교 경영학과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마흔두살때인 1990년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미군 대위 신분으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992년에는 하버드대학교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합격하였다. 당시 서진규는 대학교공부에 필요한 일본어구사능력을 갖추기 위해 개인교사와 일본말을 잘 하는 아버지에게 일본말을 배웠다. 하지만 공부를 더 많이 하려면 군인의 길을 접어야했기 때문에 1996년 11월 소령으로 전역하여, 20년이나 꾸준히 해온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과에서 박사 학위(수료는 1999년, 박사논문통과는 2006년)를 취득했다.
가족으로는 딸 조성아 씨,어머니,언니,오빠 내외가 있다. 현재 조성아씨는 하버드대학교 졸업후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교육 장교로 복무하고 있으며, 서진규씨는 한국에서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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