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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31 등재 ~ 16.09.07 조회수 657
제주문학기행 이관수
“정말 가도 괜찮을까?”
제주도로 문학기행을 간다고 했을 때 가고자 하는 마음과 갈 수 없다고 하는 마음이 반반이었다.
통풍의 찌꺼기가 몸속에 남아서 간헐적으로 재발(再發)되었으므로 걷는 게 자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구미에 사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회비를 오늘 자로 송금했으니 제주도 꼭 다녀오세요!” 당사자는 결정도 하기 전에 아들이 먼저 일을 저질러 놓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내를 보고 한마디 던졌다. “울면서 겨자 먹게 생겼네! 허허~ ”했더니
아내가 금방 맞받아친다. “에이~ 그건 아니다!!!”
“허긴 쌍둥이아빠들끼리 잘 통할 테니 문학기행 소식을 미리 알았을 테지?”속으로 상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문인회의 P목사와 작은 아들은 동기동창이면서 똑같이 쌍둥이아들들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아내와 함께 참가한 제주문학기행은 문우들과 어울려 다녀오기를 참 잘했다.
소중한 분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의미 깊은 순교지 방문이었고, 비가 내린다던 예보와는 다르게
날씨가 매우 청명하고 바다는 잔잔했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은혜롭고 의미가 깊은 장소들을 섭렵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문학기행담을 간략히 써서 남기려고 자판을 두드리고 또 두드려보는 것이다
*
제주도는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다. 임지를 섬에서 청주서문수양관으로 옮기던 해였다.
청주지방회 수련회에 어울려 얼떨결에 다녀왔기에 아쉬운 점도 많아서 한 번 더 가봤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도 않았다.
그 제주도를 간다는 것이었다. 기대하고 기다리던 바로 그 날이 되었다.
서둘러 청주공항에 일찍 도착했다. 주차장은 넓었고 공항 앞은 한적해 보였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반가운 이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간혹 낯선 얼굴이지만 일행임을 짐작케 하는 이들도 보였고...
대합실에 일행이 다 모이자 원형으로 둘러서서 모든 여행일정을 하나님께 의뢰하며,
주님의 동행하심을 간구하는 유인종 장로의 출발기도는 한마음, 하나 되기에 넉넉했다.
<2016 제주문학기행 ‘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2016년 5월 16~18일 대한기독문인회>
이 프로젝트의 첫째 날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일행은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과 뒤섞이며 탑승구를 빠져나가 JEJUair 7C 0851기에 탑승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제주공항주차장에는 SH관광버스(기사: 이승갑)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여행의 기대감으로 달뜬 마음에 아침을 거르고 떠났는데 이런 사실을 알기라도 한 듯
버스는 먼저 식당으로 안내했다. 참 맛있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메뉴가 뭐였더라?"
*
버스는 다시 우리를 태우고 제주도선교사요 목회자요 순교자인 이기풍 목사의 순교 기념관으로 향했다.
여유롭고 은혜로운 우리들의 일정은 박도훈 목사가 안내와 진행을 맡아 주었다. 잘 꾸며진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기념촬영이 시작된다. 잠시 후 영상관으로 올라가 이기풍 목사 일대기의 요약편을 영상으로 관람한 후에 안내자를 따라 선교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 내부를 돌아보았다.
그 중에 이기풍 목사 사모의 유품 속에서 발견한 "딸에게 쓴 편지" 내용을 소개받았다.
사모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소각(燒却)될 번한 실구리에서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녹색 조끼를 입고 옆에서 경청하던 한 문우에게 크게 낭독하도록 했고,
우리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 내용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
실구리 안에 기록되었던 어머니(윤함애 사모)의 유언의 말씀들
세상과 짝하지 마라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마라
열심히 교회봉사를 하라
주의 종은 하나님 다음가는 분이시다
주의 종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마라
목사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미리암과 같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네 인격을 어떠한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짓밟고 천대와 멸시를 하더라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끝까지 참아라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 심판대에서 판가름을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참으며 네가 네 자신을 죽여라
네가 죽어지지 않을 때 남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할 때 예수님도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를 제일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다
신자의 무기는 감사와 인내와 사랑과 겸손이다
감사는 축복을 열고 닫는 자물쇠이기 때문이다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겸손할 수가 없다 겸손하지 못할 때 성령님은 너를 외면하실 것이다
제일 무서운 것은 신앙의 교만이다
2002년 8월 막내딸 이사례 씀
*
이기풍 목사와 그 사모님의 유품과 기록물들을 돌아보고 나와서
일행은 정원 안에 세워진 여러 순교기념비를 둘러보며 마음속으로 순교자의 삶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제주도 선교사, 순교자 이기풍 목사
그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던 중
1890년 어느 날 평양서문통 거리에서 전도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턱을 깨 피를 흘리게 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를 받고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했다.
그는 1894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부터 1907년까지는 안악, 신천, 해주 등지를 순회하며 조사로 시무했다.
또한 마펫 선교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에 신학생이 되어 길선주, 양천백 등과 함께 수학했다.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고,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 때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의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1908년 봄에 제주도에 도착했다.
여기 비문의 일단을 소개 보면
“이기풍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제주 선교사로 마태복음 4장 15~16절 말씀에 사로잡혀
제주가 동양의 예루살렘이 되는 것을 꿈꾸며 1908년부터 1915년까지, 1927년부터 1932년까지 제주선교에 헌신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이기풍 목사와 동역자들이 제주 성안교회를 비롯하여
금성 삼양 조천 성읍 모슬포 용수 한림 세화교회를 설립하면서 제주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 ...
이제 제주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주신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기풍 목사의 선교와 순교정신을 기리며, 새로운 세기에 제주복음화와 세계선교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마지막 문장은 이를 보는 순례자들의 마음에 동일한 다짐을 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기념관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의 부인 윤 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로서 숭의여학교를 다닐 정도의
엘리트 여성이었다고 한다. 이기풍 목사는 일제치하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그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
1936년부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격렬히 반대했다. 이에 일제에 의하여 그가 미제의 스파이라면서
순천노회 산하의 오석주, 나덕환, 김상두, 김순배 목사 등과 함께 1938년 체포되었다.
노령에다 일제의 심한 취조와 고문으로 졸도하기도 했고, 결국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召天)했다.
자칭 '기록사진사'로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사진보다는 내 눈을 사로잡는 예쁘고 아름다운 풍광을 눈으로 만끽하며 다녔던 거다.
저 귀한 모습들을 내가 어찌 실감나게 카메라에 담을 수가 있을까보냐!
사람이 만든 사진기가 하나님이 만드신 내 눈을 어찌 따라올 수 있을까보냐!
*
어쨌거나 문인회원들의 주변을 맴돌면서 손녀가 준 SONY NEX-7 카메라의 앵글을 열심히 돌렸다.
바다. 하늘, 바위, 수목들, 잘 다듬어진 차밭과 자주 눈앞을 스치는 돌담들...
그러나 그 모든 경관이 아무리 빼어나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그 안에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하랴!”
알록달록 차려입고 나선 수많은 인파들이 역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 사이에 한몫 끼게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더냐!
*
문학기행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제주도가 낳은 걸출한 시인 이생진의 시비거리로 방향을 잡았다.
이동하는 차내에서 박도훈 목사는 이미 이 시인의 시 한 수를 소개한 바가 있다.
*
선교하는 바다 -이생진-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풍광은 생소한 이국 풍경처럼 보였다.
시인 이생진의 시비(詩碑)거리는 시에서 읊었듯이 성산포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성산일출봉을 건너다보며
“저 봉우리도 언제 한 번쯤 올라가 볼 수 있으려나?” 생각하는 동안
어느새 성산리 마을회에서 세운 <시의 우체통>을 만났다.
*
이곳은 성산일출봉이 바라다 보이는 ‘시의 바다’입니다.
이 길목을 지나다 잠시 멈춰 서서 ‘이생진 님의 시’를 마음에
담으며, 흐르는 땀방울을 거두고 가시기 바랍니다.
혹여 시상이 떠올라 시 한편 지으시면,
여기 우체통에 여러분의 시를 넣어 주세요.
이 우체통은 성산포를 노래한 여러분의 시를 성산포주민들에게
보낼 수 있는 <시의 우체통>입니다
성산리 마을회
*
일행은 시원한 바닷바람과 어울리며 너나없이 시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왜 안 그렇겠나. 모두 가슴 속에 시를 품고 사는 사람들 아니던가.
누군가는 이미 수첩을 꺼내들고 시 한수를 깨알같이 수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 한수가 떠오르시는가?
*
삼백육십오일 –이생진-
삼백육십오일
두고 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 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
여유로운 하루의 일정을 소화한 후 우리는 숙소를 찾아갔다.
비행기여행에 이어서 함께 어울린 버스여행은 단잠을 불러오기 안성맞춤이었다.
첫째 날의 고단함은 한밤의 단잠으로 씻은 듯이 날아갔다.
단잠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둘째 날을 시작했다.
호텔 밖으로 나와 내가 묶었던 8층을 올려다보며 혼자 속으로 중얼 거린다.
“저기 811호에서 나는 지난밤을 정신없이 ‘그냥 잤다.’^^ ”
버스 안에서 들었던 유머‘그냥 잤다’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혼자서 싱긋 웃지 않을 수 없으리라.
*
둘째 날은 먼저 마라도를 방문하는 날이다. : 마라도 행 여객선터미널에는
수학여행을 온 많은 학생들이 왁자지껄하며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질서정연하게 기다리다가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사실 배를 탄다고 하면 이미 십오 년간 여객선이나 사선(私船)을 타고 섬을 오가며 살았던 내가 아니던가.
고군산군도의 무녀도에서 목회하는 동안 바다와 배에서 겪은 에피소드도 많은데...
그래서인지 누가 뭐래도 나는 여전히 바다가 좋고 배를 타는 기분도 짱이다.
오늘 바다는 참으로 잔잔하고 날씨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청명했다.
*
이 시대는 셀카(셀프카메라) 전성시대이다.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전문가 못지않은 사진기술자가 된다.
일행은 마라도에 도착하자마자, 계단을 오르면서 혹은 팔각정에 모이는 동안 여기저기서 기념사진 남기느라 분주하다. 옛날처럼 셔터 소리가 크다면 여기저기서 찰카닥 찰칵 장단을 맞추지 않았을까.
선착장에서 내려 절벽에 설치한 계단을 오르면서 보니 오른편으로 마라도 위성사진과 관광안내도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마라도는 천연보호구역(馬羅島天然保護區域) 이라는 안내판이 선명했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서자마자 휴게소처럼 지어놓은 팔각정이 고단한 육신을 쉬어가란다.
일행이 모이자 보조를 맞춰서 함께 마라도투어에 나섰다.
유람선일까 어선일까 물보라를 뿌리며 바다를 가르는 배 한 척이 가물가물 눈에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절벽을 가로막은 난간에 나란히 한 줄로 기대어 선 채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찬양했다. 문우(文友)들의 얼굴엔 기쁨과 감사로 가득해서
찬양 또 찬양으로 하나 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어찌 다~ 담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선 천국에서 3D보다도 더 정밀하고 아름답게 이 모습들을 담아내고 있으리라.
*
“참고(參考)”
마라도는 대한민국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동중국해의 섬.
남쪽으로 이어도가 있지만 이어도는 암초이므로 마라도가 최남단의 섬이다.
제주도로부터 남쪽으로 약 11km정도 떨어져 있다.
주변 일대는 2000년에 천연기념물 제423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본래는 천연 숲이 무성했다고 전해지나, 조선시대 말기에 섬이 개간되면서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행정구역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원래는 가파리에 속하였으나 1981년 4월 1일 마라리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나무위키에서 인용)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잘 조성된 탐방로를 따라 마라도를 만끽(滿喫)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등대 모형이 전시된 곳에 우뚝 세워진 마라도등대를 바라본다.
순백색의 팔각형 모형의 등대를... 언뜻 뇌리를 스치는 노래 한가락은 누구의 노래인지는 모르나
김수환 추기경이 방송에서 부른 ‘등대지기’라는 동요였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위에 자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비탈길을 더 내려가면서 보니 지붕이 전복형태인 천주교회도 세워져 있다.
마라도의 최남단 광장에서 단체사진을 카메라에 담았고, 돌아 나오는 길목에는
십자가가 세워진 교회와 가파초등학교 마라도 분교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 절도 하나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짜장면 가게 몇 개가 눈에 띈다. 단체손님도 맞을 수 있도록 널찍한 홀도 슬쩍 확인된다.
“자장면 시키신 분~”하는 광고로 유명해 졌다는 마라도 짜장면은 시간상 눈요기만하기로 하고
다시 선착장으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배를 타고 나가려는 방문객들은 출항시간에 맞추느라 우루루 선착장으로 모여들고 있다.
“사람들이 꽤 많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짐작하는 대로 대한기독문인회원 외에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누군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지만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우리를 태운 여객선은 물보라를 날리면서 멀리 산방산을 옆에 끼고 서귀포로 달려간다.
나는 객실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카페 요르단강변의 ‘나의 일상’에 이렇게 적었다.
<마라도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곳 풍광을 보는 것은 큰 복입니다.
나는 여전히‘찍사’랍니다.> 금방 댓글이 올라왔다. “해물짜장도 드셨지요~?”-아피아-
그리고 이어서 스마트폰의 자판을 또드락거리며 시인흉내를 내보았다.
마라도를 벗어나며
좋은 시간에
나를 얹어놓고
두둥실 떠갑니다
푸르른 파도 위에
우리 모두 얹혀서
두둥실 떠갑니다
푸른 하늘 아래
푸른 꿈을 꾸며
더 넓은 땅으로 오르려합니다
임마누엘
여호와 이레
마라도 마라도 마라도
(제주도문학기행 중에)
세상에나! 바다 위에서도 카페에 글과 사진을 올릴 수 있고 카톡으로 대화할 수 있다니...
우리나라의 이런 놀라운 발전에 감탄하며 누가 감사치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은 제주 출신 제1호 목사이자 첫 순교자인 이도종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로 발을 옮겼다.
대정교회였다. 안경희 권사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찬양을 하고, 박양수 목사가 기도를 담당했고
이어서 순교자 이도종 목사와 그의 순교정신을 되돌아보았다.
<그의 순교일은 1948년 6월 16일이다. 대정교회 이도종 목사는 자신이 1937∼40년까지 시무했던
고산교회를 돌아본 후 그곳을 떠났다. 그는 중산간지역의 교회에서 순회목회 중이었다.
그는 어수선한 시국에서도 변함없이 교회를 돌보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놈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 “미 제국주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납치되었고,
순교하기까지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죄 없는 양민을 죽이는 무신론 집단의 승리를 위해 기도할 수 없다”며 최후를 마쳤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만약에 이 시대에 뜻밖에 이런 험난한 상황이 도래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며 숙연해졌다.
대정교회 옆에 추사기념관이 있어서 우리일행은 잠시 제주도 특유의 돌담길을 따라 걸어서
추사 유배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덤으로...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 ~ 철종 7년(1856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위키백과 참조)
추사기념관 안내판을 여기에 옮겨본다.
“추사 김정희는 시詩 서書 화畵 분야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현종 6년 55세 되던 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현종 14년 까지 약 9년 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유배 초기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이곳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왔다.
이곳에서 살면서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제주지역의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차를 매우 좋아한 김정희는 다도의 대가인 초의 선사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제주지역에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김정희는 추사체를 완성하고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를 비롯하여 많은 서화를 남겼다.
이곳은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198년에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었다.
2010년에 세워진 추사관에는 김정희와 관련한 역사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국립제주박물관(國立濟州博物館)이었다.
제주도 문화유산의 보존 전시 연구를 위해 지었다는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주동로에 있다.
소장품은 중앙홀, 선사 고고실, 탐라1실~3실, 조선시대실, 기증 유물실, 기획전시실,
야외전시장 등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제주읍성의 모형, 고산리 발굴 유적,
각종 패총과 분묘유적, 삼별초 관련 유물, 탐라관련 유물, 제주목 관련 자료,
제주의 생활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밖에는 연자매, 돌하르방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내용을 다 소개하자면 학술논문집이 여러 권 필요할 테니 요쯤에서 마무리한다.
박물관의 여러 유물들에 관하여 학예관의 설명과 함께 둘러보면서 언 듯
“나는 무얼 어떻게 남기지?”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일행 중의 한 명이 소리 없이 방명록에 서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급히 카메라 앵글을 돌렸다.
내가 소위 스냅사진사가 아니던가, 이 모습을 놓치면 안 되지...
역시 문인들은 모두 학구파들인가 보다. 학예관의 진지한 설명에 눈과 귀를 빼앗기며
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보는 모습은 한결같이 진지했다.
열심히 셔터를 누르다 보니 독특한 어투와 손짓으로 안내하는 여성학예관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토박이 제주여성인 듯...
다음 코스로는 순교자를 배출한 또 하나의 교회인 금성교회로 방향을 틀었다.
이번 문학기행은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보다 선교지 탐방이 주제가 아니던가.
큰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눈에 들어오는 붉은 벽돌 건물을 향해 삼삼오오 걸어간다.
“보리야 밀이야?”길가에 누렇게 익어가는 곡식을 보며 퀴즈문제가 나왔다.
“밀이야 밀~!” 요르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밀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래간만에 보는 거였다.
“밀이 다 익었는데 추수할 일군이 없나보다!”생각하며 이삭 하나를 근접촬영도 했다.
금성교회는 1907년 3월에 양석봉씨외 8명의 구도자가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그중에는 순교자 이도종 목사도 평신도로 있었다. 1908년 봄 이기풍 목사가 제주지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제주도로 들어와 순회예배를 드리던 첫 번째 교회가 되었다.
초대교인의 한 명인 조봉호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교하고, 이도종 목사는 제주4.3사건 때 순교했다.
교회당 현관에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금성교회 봉헌기념 기록이 붙어 있었다.
<금성교회를 봉헌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금성교회는 1907년 3월 이도종(李道宗)외 8인의 구도자가 양석봉(梁碩鳳)의 집에서
會集禮拜 하다가 1908년 李基豊 牧師의 전도로 趙鳳鎬, 趙云吉, 李德連 등이 예수를 믿어
처소를 이전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일제치하의 악랄한 탄압 속에서도 1923년 12월 錦城里 591번지에 초가집 예배당을 짓고
이웃부락인 郭支, 歸德, 納邑, 鳳城, 涯月里까지 전도하다.
초대교인인 조봉호는 대한민국 독립군을 위한 자금모금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1920년 4월 28일 獄中殉國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이도종은 후에 목사가 되어
복음전도 중 4.3사건 때 폭도들에 의하여 1948년 6월 19일 被殺殉敎하다.
金廷權은 1932년 예수를 믿음으로 周邊環境이 온갖 어려운 처지에 있었으나 믿음으로 堪耐
시련을 이기고 끝까지 주님을 섬기다가 1975년 8월 20일 소천하다.
90년 가까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신앙인을 배출하였으나 이웃부락의 교회설립과
이농(離農) 등에 따라 교회의 사정이 매우 어려워지고 교회당마저도 좁고 낡아 복음선교에 어려움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에 김정권 집사의 2남인 金東彬 집사는 모태신앙인으로 소년기를 가족과 함께 금성교회에서 성장하였으며
현재는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가운데도 선친의 유지와 모교회의 부흥과 선교에 새로운 전기를 갖기 위하여
현위치의 부지매입비와 건축비 전액을 헌금하여 이 성전을 준공하다.
여기에는 본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제주성안교회, 제주노회의 여러 교회들의 도움과 함께
이 성전을 봉헌하게 된 것이다.
새 성전의 헌당은 하나님의 섭리요 축복이며
지역사회의 복음화와 봉사에 헌신하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1996년 4월 19일
예배당 정면 벽면에는 교회표어가 내방객들을 반기며 도전(挑戰)해 온다.
<<<누군가가 나 000에게 “내가 예수 믿는다면 당신처럼 예수 믿고 싶고,
교회 다닌다면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이런 말을 듣는 성도 되고
교회 되게 하자. 마태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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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간...
시리아의 기독교순교자인 성 세르기우스와 바쿠스(St. Sergius &Bacchus) 기념교회를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시리아 출신의 로마군 장교로서
복음을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주피터(Jupiter)신에 대한 희생제사를 거부하다가
시리아의 동남부 레사파에서 순교한 사람들이라고 전해져 온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자동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쯤 달리면 도착하는 말룰라(=the Gate)에 있다. 기독교마을로 알려진 말룰라의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고갯길 왼편으로 올라서면 해발 1500m 산정(山頂)에 이르는데 사철 물이 솟는 우물이 있고, 그 곁에는 '겸손의 문'이라는 별명의 아주 작고 묵직한 철문이 매달려 있는데 겸손의 표상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면 암반(巖盤) 위에 세운 순교자 기념교회(수도원)이다.
네댓 명이 앉을 만한 긴 나무의자가 두 줄로 가지런한 교회당 안에 좌정하면 검은 의상을 입은
수녀 혹은 성직자가 나와서 두 순교자들과 그 교회의 유래와 현황을 설명하고
아람어로 주기도문을 암송해서 들려준다.
현실과 타협하거나 물질적 풍요를 축복이라 강조하는 이 시대에 이런 신앙적 순교자들을 기대할 수 있으려나? 유사한 상황에 직면한다면 과연 나도 그런 순교자처럼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제주의 여러 순교자 기념교회를 순례하면서 시리아에서처럼 스스로 똑같은 질문을
거듭해 보았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를 흘리셨고, 따르는 무리들은 순교의 피를 흘렸으며,
주님의 교회는 희생의 피에 의하여 세워져 가는 것을 어찌 설명할까?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교회’를 순례하는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소서!
*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는 변하는 게 많다. 얼굴모습이 달라지고, 입맛이 변하고,
키는 줄어들고, 체력도 전과 같지 않고, 시간 관리도 달라지고, 하고자 하는 꿈도 변하고 있다.
열거하기조차 힘들 만큼 내게는 서서히 혹은 급격히 변하는 게 많다.
그중에 하나 '빨리빨리'가 힘에 부치니 '천천히'와 친해지는 거다. 그
래서 이번 "제주도 순교지방문과 문학"이라는 부제목의 문학기행은 내게 참 좋았다.
여유롭게 생각도 많이 하면서 둘러보는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 금방 결단하지 않고 망서리던 것은
괜한 고민이었던 셈이다. 마지막 방문지에서는 “이렇게 오설록녹차밭에서 '망중한'을 즐기게 될 줄이야~" 라 독백하며, 전망대도 오르지 않고 눈으로만 차밭을 둘러보며 여유를 누리고 왔던 것이다. 사진을 열심히 찍으면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도서 12:1~3)
.-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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