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끝에서 상황시작으로 (행 27:20-26)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중에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434장)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를 알지못하고 모든 일에 계속 성공하기만 한 사람이 이 찬송을 불렀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찬송은 장님이었던 화니 크로스비가 작사한 곡입니다. 장님이 걸어가는 곳곳마다 걸림돌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만사형통합니까?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화니 크로스비는 장님이라는 자신의 끝나버린 것같은 상황을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만사형통했던 것입니다. 그는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을 눈을 감고서야 볼 수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망스러운 일이 있습니까? 혹시 하는 일이 실패로 끝났습니까? 혹시 모든 상황이 끝이라고 여겨지는 일이 있습니까?
골프공이 처음에는 매끌매끌 했답니다. 그런데 꺼칠꺼칠한 공이 더 멀리 나감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골프공업자들이 골프공을 굴곡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상황끝"이라고 여겨진 환경이 있습니까? 오히려 그런 부분들이 다시 "상황시작"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바로 그런 "상황끝"을 "상황시작"으로 만든 사람을 여러분에 소개하고져 합니다.
그는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알렉산드리아라는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어닥친 계절풍 유라굴로로 배를 탄 276명은 14일동안 구원의 여망도 없이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며 떠다니는 그야말로 모든 상황이 끝나버린 절망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일어나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밤에 내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말라 네가 가이사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외치며 배를 진두지휘하여 상륙시킴으로 배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다시 최선의 상황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올해 한 해를 살아가면서 혹시 여러분의 상황이 끝이라고 여겨져도 다시 상황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바울같은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상황의 끝을 상황의 시작으로 바꿀 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는 자입니다
가느냐 안 가느냐,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삶의 결정은 자신의 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 결정여하에 따라서 광풍을 피할 수도 있고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날 현대가 하나님의 사람의 말은 경시하고 과학기술, 경험, 물질을 중시하는 결정을 하고있기 때문에 유라굴로의 광풍을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11절)'고 하였습니다. 선장은 배를 움직이는 노숙한 경험을 가진 전문가요, 선주는 배의 소유주로서 사업가입니다. 한데 바울은 항해의 비전문가이며 죄수의 몸이었습니다. 따라서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은 것은 상식적으로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못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개인적인 자기의 경험을 내세우고 사십니까? 자기의 기술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타산적인 욕심을 앞세우고 있습니까? 영적판단을 무시하고 경시하면 유라굴로의 광풍을 만날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출발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도 비합리적인 것같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만 가야합니다. 그래야만 일고있던 광풍도 멈추고 우리의 삶을 소망의 항구로 이르게 합니다. 인간의 정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말씀대로 바로 사십시오"라고 설교하는 목사의 말이 막연하고 비합리적인 소리로 들리십니까?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알렉산드리아호에 탄 사람들이 왜 광풍을 만났습니까? "그럴듯하다. 그럴싸하다"라는 세상적인 욕망에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재주나 기술이나 돈이 우리를 풍랑에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백부장은 신앙인인 바울의 말을 따랐어야만 했습니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줄로 믿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닌줄 알아야 인생의 풍랑을 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이민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님께 들었습니다. 초창기에 이민한 어떤 사람이 이제는 더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돈을 벌었답니다. 헌데 날씨가 좋으면 골프, 비가 오면 보트타고 낚시하는데 미쳐, 교회를 떠나 자기마음대로 인생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내는 가출, 아들은 교통사고로 사망, 딸은 정신이상, 자신은 간암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거센풍랑이 그 가정에 몰아 닥쳐왔습니다. 비로소 그는 무릎꿇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 풍랑의 원인을 만들지 말아야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만이 삶의 지름길임을 아는 자입니다
인생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가는 것같아도, 더디 가는 것같아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확실한 지름길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좋습니다. 내 멋대로 믿음을 버리고 인생을 결정하고, 세상사람들의 말을 쉽게 따라가는 자의 앞날은 얼마못가 유라굴로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유라굴로 앞에서는 선장의 기술도 소용이 없습니다. 선주의 돈도 무력합니다. 백부장의 권력도 필요없습니다. 외적인 조건들은 그어떤것도 유라굴로 광풍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를 목적지에 이르게하는 것은 인간적인 요소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이 불롱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난적이 있었습니다. 막강한 함대가 있었던 그는 해군대장에게 폭풍을 거슬러 전진할 것을 명령하고 바다를 정복하라고 호령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풍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순간 나폴레옹이 탄 배가 성난 파도에 휘말려 거꾸로 처박혀 박살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이 200명이 넘는 불쌍한 군사들은 모두 수장을 당했습니다.
유라굴로 앞에서는 사회적신분이나 권력따위는 숨도 쉬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똑똑함도 허사입니다. 사람의 인생길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신앙적으로 합당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배멀미를 하는 모든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해를 보는 것같아도 뜻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에도 일시적인 형통이 있음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항로에는 반드시 유라굴로의 광풍이 숨어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언제나 하나님과 영적교통을 하는 자입니다.
알렉산드리아호의 모든 상황이 다 끝났을 때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키는 사도바울은 언제나 하나님과 교통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끝일 때 상황시작이라고 말하는 사람, 상황이 끝났다고 절망하는 자들에게 "일어나시오. 먹으시오. 안심하십시오.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새로운 상황의 시작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입니다.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고 위해 기도하는 자입니다. 미국의 대법관 다니엘웹스터판사는 퇴근길에 중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딸을 보러 병원에 갔습니다. 그가 딸의 병실에 들어서자 핼쑥한 얼굴로 신음하던 딸이 "아버지, 이렇게 추운 날에도 외투도 입지 않으시고 밖엘 나오셨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울면서 병실을 나온 그는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딸의 말을 평생 가슴에 지니고 살았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에게는 함께 승선하여 로마로 가는 276명 모두가 기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명을 안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보입니다. 사명을 안고 사랑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풍랑을 만나 상황끝이라고 말하며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말하며 손을 잡고 함께 갈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아호에 바울이 타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유라굴로로 쓰러져있는 여러분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과 기도의 대상으로 여기며 함께 동행해주는 사람이 옆에 계십니까? 그러면 축복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제는 여러분 각자 각자가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을 위해 믿음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우리교회에는 그런 자들이 필요합니다. 상황끝을 상황시작이라고 믿음으로 외치며 힘들어하는 자들을 위로하며 소망의 말을 주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과 함께 한 배를 타고 인생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사람을 살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애틀랜타 올림픽때 미국대표 선수들을 대상으로 함께 식사하고 싶은 인물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예수님이 1위였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고 말하며 걸어가는 자들이 되어야만 됩니다. 이 시대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임명받는 성가대,찬양단원들도 이런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의 200여명의 성도들을 기도의 대상으로 알고 사랑을 행하며 사는 멋진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유라굴로를 만나 죽을 수 밖에 없는 내 이웃들이 나로 인하여 모두 살 수 있는 온전한 신앙인들이 되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상황끝"이라고 부정적이며 절망적으로 말하는 자가되기 보다는 "상황시작"이라고 긍정적이며 소망적으로, 신앙적으로 외치는 바울과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