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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를 자극하는 사진 한 장.
나이 먹어가는 고약한 증거 중 하나가 철지난 무엇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는 거다. 가령 폐쇄된 驛舍- 구둔역 같은.
마을 이름을 딴 구둔역은
1940년 4월 1일 첫 열차가 지난 이후, 72년 동안 운영되다가, 중앙선 복선화에 따라 2012년 8월 16일자로 폐쇄된 경기도 양평의 폐역. 신 역사는 일신리로 옮겨갔으며(일신역), 구 역사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교육장 용도로 활용 중이다. 이곳에서 시한부판정 커플의 사랑을 그린 <네버 엔딩 스토리> 정려원&엄태웅의 재회 장면을 찍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오빠들의 여동생- 수지를 볼 수 있는 <건축학개론> 철로 걷는 장면을 찍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건축학개론>은 잊고 살았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용주 감독은 ‘한 곳에 머물던 남자와 계속 떠돌던 여자가 10여 년 후 다시 만나, 여자는 이제 정착을 준비하고 머물렀던 남자는 떠날 준비를 한다.’는 컨셉을 오랫동안(10년?15년?) 구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속 남녀가 이별한 시간만큼이 흘렀을 즈음, 명필름이 내민 손을 잡고 드디어 영화를 만들어냈다.
<건축학개론>
감독 이용주
출연 엄태웅/이제훈(승민), 한가인/수지(서연), 조정석(납뜩이), 유연석(재욱). 고준희(은채)
개봉 2012.03.22
SCENE 1
선글라스를 낀 여자(서연)가 낡은 집에 들어선다. 여기저기 둘러본 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어지는 장면은 설계사무소. 막 출근한 소장이 밤샘 작업으로 책상 위 널브러진 채 잠든 부하직원(승민)을 깨운다.
밤샌 걸 꼭 그렇게 티를 내요.
나도 퇴근이란 걸 좀 합시다.
궁시렁거리는 승민에게 첫사랑 서연이 찾아온다. 지적도 한 장을 펄럭이며.
동문주소록 정확하다. 혹시나 했는데 맞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근데 누구...신지?
나, 몰라...세요? 대학 1학년 때 정릉에서. 나, 양서연. 음대...
아, 양서연.
서연이 얼떨떨해하는 승민에게 지적도를 내민다. 설계 의뢰다.
돈이 안 돼 그런 건지, 마음이 안 내키는 건지 떨떠름해 하는 승민에게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소장이 쐐기를 박는다.
집은 왜 짓는 거야. 강남에 사는 사모님께서, 구태여 제주도에.
말 예쁘게 한다. 그래 돈지랄이다. 아, 더럽게 재수 없어. 집 짓는 이유가 그렇게 중요해?
왜 짓는 줄 알아야, 맞는 설계를 하지.
아, 그래서 나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
그렇게 옛 인연이 이어지지만 새로 지을 집에 대해선 전혀 의사소통이 안 된다.
사이트 쉐입, 플렉서블 디자인, 중정 스페이스, 스페이스 디바이드... 무슨 말인지 알겠지.
왜 죄다 영어야. 영어마을 짓니? 그래도 오늘 옷은 좀 예뻤어. 그 넥타이는 좀 그렇지만.
동석한 여자 동료직원이 서연에게 툭 던진다.
두 분이 어떻게 알게 됐어요? 겹치는 것도 없고, 과도 틀린데. 혹시 소개팅?
그게...얘가 하도 나를 쫓아다녔었거든요.
‘이건 또 무슨 창의적인 소리’냐는 승민의 항변이 작아지며 화면은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참고로 영화는 정확히 6번 과거로 돌아간다. 자의적으로 매긴 짝수 SCENE이 과거다.
SCENE 2
건축개론 강의실. 서연이 들어선다. 승민이 쳐다본다.
음대생 소연이 일반교양으로 건축개론을 선택했다. (84학번 필자가 다닐 때도 의상학과/주생활학과 등 여자들이 많이 원정 왔다. 지금 생각해도 흐뭇~)
서연은 제주 출신이다. 당찬 성격이지만 강남 개포동에 미사일 대포동을 떠올릴 만큼 서울이 낯설다. 정릉의 주인을 정조/정종/정약용으로 헷갈려 하는 허술함도 있고.
소심한 승민은 그냥 범생이다. 연애도 못 해봤고, 담배도 못 피우고, 당연히 전람회나 기억의 습작이 무언지도 모른다.
수업 중 별명이 정약용이 된 서연과 승민이 집⇔학교 動線을 지도에 그린다. 정릉우체국 인근에서 출발한 붉은 선이 정릉시장-국민대-북악터널-서울예고-홍제우체국-서대문구청-연희동(연대)으로 이어진다. 겹치는 동선에 승민이 슬그머니 미소 짓는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던 동네 골목/길/건물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건축학개론의 시작입니다.
담당교수의 조언에 따라 동네 답사에 나선 승민이 정릉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리저리 셔터를 누르는데 서연이 렌즈에 잡힌다.
저 알죠? 건축학개론 수업 듣지 않아요? 예!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 예!
그럼 이 동네 잘 알겠다. 예!
자꾸 눈에 밟히는 여자에 대해, 승민은 불알친구에게 자문을 구한다.
애인 생겼냐?
아니.
납득이 안 되네. 납득이... 대학생이 연앨 하라고 대학생인 거지.
납뜩이는 재수생이지만 자칭 연애의 고수다. 그런 납뜩이에게 승민은 스킬을 전수받는다. 그 효과는 미지수지만. (납뜩이는 너무 쎈 케릭. 이 글에선 최대한 첫사랑 남녀에 집중!)
서연이 주인 없이 방치된 빈집 대문을 밀고 들어간다. 마루에 올라가고 풍경도 건드려보고 시계태엽도 감아주고.
저기요, 무단침입...
뭐 어때요... 근데 넌 왜 말 안 놔. 같은 1학년인데. 너도 놔.
예, 알았어요.
놓으라니까!
소심한 승민은 쿨한 서연에게 늘 끌려 다닌다. 납뜩이에게 얻은 무스도 발라보고, 있어 보이는 티셔츠(GUESS,GEUSS)도 입고 나가지만... 진도 빼기는 언제나 서연의 몫이다.
아빠는 거기(제주도) 계셔. 우리 엄마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 미안.
네가 뭐가 미안해. 우리 엄마가 너 때문에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어쩔 줄 몰라 하는 승민에게 쿨함을 뿜뿜 뿜으며,
들을래? 서연이 이어폰 한 쪽을 건내주며 로맨스를 이끈다.
이젠 버틸 수 없다고/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 기대어...
SCENE 3
난 왜 이렇게 낯설지?
서연은 설계가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사사건건 트집이다. 건축주는 갑! 서연의 요구에 따라 싹 밀어버리고 새로 지을 예정이었던 계획이 뼈대를 살린 리모델링으로 바뀐다.
갑질이 미안했던지 서연이 선물할 넥타이를 골라 식사자리를 마련한다. 오붓해야할 분위기가 승민을 따라나선 은채에 의해 야릇하게 변한다.
저 결혼해요. 연말 쯤. 늦으면 내년 초 쯤요.
그 남자 땡잡았다... ... 뭐야, 둘이 그런 사이였어?
회사에서도 아무도 몰라요. 그래도 언니는 아셔야할 것 같아서...
말끝을 흐린다. 이렇게 여자의 촉은 무섭다. 촉수를 바짝 세운 은채가 확인사살을 시도한다.
오빠가 학교 다닐 때 첫사랑이 있었다던데. 1학년 때. 썅년...
서연은 신경 써 고른 넥타이를 병상의 아버지에게 드린다. 쓰레기통에 처박지 않은 것은 ‘자식은 키워봐야 헛일’이란 팩트를 새삼 강조하기 위한 이용주 감독의 배려다. ㅋㅋ
SCENE 4
연애가 아닌 썸. 그것도 초기단계에선 확인이 기본스텝이다. 승민이 은근히 떠본다.
재욱 형이 그러더라. 너 서클에서 인기 많다며. 그럼 남자친구,,,
지도 없으면서... 인기야 재욱 오빠가 짱이지. 잘 생겼지, 키 크지, 집도 부자지.
너도 재욱 형 좋아해? 그래서 개론 수업 듣는 거야?
안 돼? 그래봤자... 나 혼자 삽질하는 거지.
승민에게 개포동 출신 재욱 선배는 넘사벽. 재욱은 개인 작업실에 메모리 1기가 펜티엄 데스크-탑을 갖춘 부잣집 아들내미다. 안타까운 마음에 납뜩이에게 자문을 구한다. 횡설수설하는 승민에게 납뜩이가 핵심을 찌르고 들어온다.
저기 내가 아는 애가 있는데...
너지? 잤어?
아니, 그냥 친해졌는데...
(됐고 ㅋㅋ) 일단 소주 한 병을 사. 걔네 집 앞에 가는 거야. 가서 병나발을 불고 전화를 해. 그리고 그냥 끊어. 그럼 궁금해지잖아. 갑자기 왜? 여자로선 납득이 안 되잖아. 납득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뒤돌아 서. 아니면 한마디만 해. 널 갖고 싶어. 나랑 같이 살자.
SCENE 5
공&사 구별이 확실한 서연의 자질구레한 갑질에도 불구, 리모델링 공사는 조금씩 진척을 본다. 물론 다시 시작된 썸에도 진척이 있다.
너 분명히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그랬었다고!
내가 그런 유치한 말을 했을 리가 없어.
근데... 그 썅년이 나야? 네 첫사랑. 그치 나 아니지. 근데 왜 자꾸 나 같지. 그 썅년이.
로맨스에 웃음만 있는 건 아니다. 엄마와 통화를 하며 짜증을 내는 승민에게 못된 아들이라고 서연이 타박을 준다.
네가 뭘 아는데. 돈 많고 시간 많고 혼자 사니까 그러니까 속편한 소릴 하는 거 아냐.
너 어떻게 알았어. 나 혼자 사는 거.
싸워도 썸을 끝낼 게 아니라면 야간 횟집에 나와 ‘처음처럼’으로 풀어야 한다. 집어등 환한 밤바다를 배경으로.
지난달에 도장 찍었어. 아득바득 버틴 덕에 이렇게 집도 짓는 거구. 나 열라 치사하지. 썅년이지. 그래도 그런 게 사는 거니까...
매운탕! 탕인데 맵다. 그게 끝이잖아. 안에 뭐가 들어가도 다 매운탕. 그게 마음에 안 들어... 그냥 나 사는 게 매운탕 같아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고, 그냥 맵기만 하네.
술이 올랐다. 한 병 더 주문하는 여자와 만류하는 남자. 취한 여자가 넘어진다. 남자가 일으켜 세운다.
병신, 개새끼. 아, C발! 다 ㅈ같아!!
응어리가 터진다. 승민에게 안겨 울음보가 터진다.
SCENE 6
막 썸을 시작한 남녀가 양팔을 벌린 채 철로를 걷는다. 혹시 따라했다간 현행법상 벌금이다.
나 오늘 생일이다. 11월 11일. 외워놔~
막걸리로 생일 건배. 서연의 꿈은 피아니스트가 아닌 아나운서다. 돈 많이 벌고, 유명한.
그때 네가 집 지어줘. 공짜로.
서연이 계약금으로 전람회 시디를 건넨다. 무딘 승민은 집 지어달란 의미보단 공짜란 말에 신경이 쓰인다. 해 떨어진 버스정류장에서 서연이 승민의 어깨에 기대 까무룩 잠 든다. 남자의 고개가 슬로모션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키스! 아쉽게도 입술만 살짝 닿았다. 남자의 고개가 원래 위치로 돌아가자 여자가 눈을 뜬다. 잠 깬 첫마디는
나, 오줌 마려워!
정말 깬다. 그래도 다음 대사가 흐뭇하다.
너, 망 잘 봐. 멀리~ 가 있어. 그렇다고 너무 멀리 가진 말고.
승민이 자신의 몽롱한 상태에 대해 납뜩이에게 상담을 받는다.
그게 키스야? 키스란 건... 혀가 스스르... 섞여... 비벼... 존나 비벼... ... 네가 한 거는 만나면 반갑다는 뽀뽀뽀고.
손목 때리기는 아무 사이에서나 하지 않는 거 아냐?
그럼 뭐 할까. 아구창을 날릴까.
거저먹는 썸은 없다. 초 치는 놈이 꼭 나타난다. 그것도 꼬챙이로 약점을 후비며.
쟤 셔츠 봐라. 게스가 geuss잖아... ... 나중에 작업실(?)로 놀러와.
선배 재욱의 작업이 마각을 드러내는 와중 서연이 강남으로 이사를 간다. 그래도 반지하방의 첫 집들이 손님은 승민이다.
영광인 줄 알아. 네가 처음 놀러 온 손님이야.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는다. 여자가 자신의 어릴 적 앨범을 보여준다. 그걸로 땡이다. (이 장면에서 승민이 진도 쭉 뺐다면 SCENE 8의 재욱 앞에 당당히 나섰을 텐데 ㅠ.ㅠ) 그래도 새끼손가락 걸고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다. 정릉 빈 집에서.
SCENE 7
바다를 향해 시원스레 슬라이딩 창을 낸 증축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건축주의 갑질도 땡이다.
밥 좀 먹자니까.
왜 하루 종일 밥 타령이야.
미역국이나 챙겨주게. 너 오늘 생일이잖아, 1111.
선물은 없어? 나, 받고 싶은 거 있는데. 피아노 놓을 곳이 필요해. 다 정리하고 여기 내려와 살려고. 우리 아빠, 길어야 1-2년... 그리고 이번 기회에 나도 내 인생 리셋 좀 해보려고.
건축주는 준공을 앞두고 또 설계변경을 요구한다. 제일 속이 터지는 건 결혼을 앞둔 은채다.
그 여자 진짜 이상하네. 우리 결혼식은? 장난해? 그건 그 여자 사정이지~
예비신부가 핏대를 세우지만, 승민은 자신이 직접 마무리 하고 싶다.
서연이 맨발로 2층 테라스를 걸어본다. 잔디 위엔 승민이 잠들어있다. 여자가 옆에 눕는다. 검지로 남자의 입술을 건드려본다. 남자가 움찔하자 손을 거두고 쳐다본다. 같이 잠 든다.
SCENE 8
한 학기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종강입니다.
서연이 삐삐(무선호출기)를 들여다본다. 메시지가 없다. 재욱이 찾아오고, 서연은 쫑파티에 끌려간다. 그 시각 승민은 직접 만든 집-모형을 들고 서연의 집 앞을 서성인다. 초겨울의 추위를 막 배운 담배로 버티고 있는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서연이 선배의 차에서 내린다. 취한 서연에게 재욱이 입술을 가져간다. 서연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안기다시피 집으로 들어간다. 불이 켜지고, 침묵 같은 시간이 흐르지만, 선배가 나오지 않는다.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던 승민은 발길을 돌린다.
개-썅년. 여자가 걔 하나야. 다 잊어. 그런 썅년은 줘도 안 가져.
납뜩이가 위로를 해본다.
아무 일 없을 수 있는 거잖아. 취했으니까 그냥 데려다 줄 수 있는 거잖아.
운다. 납뜩이 앞에서 운다. 납뜩이에게 안겨 서럽게 운다.
다음날 서연이 쓰레기로 버려진 모형을 발견한다.
SCENE 9
나무로 된 외 창, 8등분 대형 미닫이, 피아노 방, 중정을 대신한 채광창, 2층 테라스... 공사가 끝났다. 승민은 서연의 성장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외벽 마감재- 적벽돌을 그대로 살렸다.
건축주와 설계자, 어둑해진 탓으로 실내가 비치는 거실 창을 바라보며 캔맥주를 마신다.
이제 정말 끝이네. 다 끝났네... 말 해봐. 그때 왜 나한테 잘해줬어.
널 좋아했으니까.
고백이야? 오래도 걸렸네.
알고 있었어?
내가 바보냐. 그걸 몰랐을까... 그거 내 첫 키스였는데
늦었다는 핑계로 남자가 일어선다. 어질러진 박스를 치워주다가 예전에 자기가 만든 모형을 발견한다.
왜 나를 찾아온 거야? 이제 와서 굳이, 뭣 때문에?
궁금해서. 너 어떻게 사는지.
그게 이유야? 그게 다야? 그래서 이딴 것까지 갖고 있는 거야?
첫사랑이었으니까!
이번엔 진짜 키스다. 납뜩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과연 키스로 끝났을까?
SCENE 10
서연이 수업을 마친 승민을 찾아왔다. 좀팽이 승민은 아직도 주둥이가 댓 발 나왔다.
내가 계속 연락했었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길레...
승민이 굳은 표정으로 CD를 돌려준다. 그리고 뱉어내는 독한 한마디.
이제. 좀. 꺼져줄래.
SCENE 11
은채가 결혼 드레스를 고르는 중이다. 예비신랑에게 어떠냐고 물어보지만, 승민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다. 한편 서연은 아직도 병원침대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리모델링 사진을 보여준다. 폰의 화면을 넘기는데 승민의 사진이 나온다.
이 사람 누구냐?
그냥... 친구.
서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마음이 복잡하기는 승민 역시 다르지 않다.
미국가지 말까. 나 가면, 엄마 혼잔데.
엄마가 통장을 내민다. 가게를 정리한 돈이다. 손때 묻은 집을 떠나지 못하는 엄마에게 쏘아붙이고 나온 아들. 승민의 눈에 15년 전 홧김에 걷어차 오그라든 철-대문이 들어온다.
SCENE 12
첫눈이 내렸다. 서연이 빈 집을 찾는다. 혼자다. 승민과 나란히 앉았던 마루의 그 자리에 CD&CDP를 올려두고 떠난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썸남의 형편을 고려, CDP를 함께 놓아두는 센스. 쩐다.
SCENE 13
승민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 집에선 서연이 동네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소포가 전해진다. 첫눈 오는 날 빈집에 두었던 전람회 시디와 시디플레이어다.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이젠 말할 수 있는 걸/너의 슬픈 눈빛이 나의 마음을/아프게 하는 걸...
미소 짓는 서연이 줌 아웃되면, 승민이 만들어준 슬라이딩 거실 창으로 서귀포(남원읍 위미리) 앞바다가 펼쳐지고, 엔딩 자막이 오른다.
건축은 공학인 동시에 예술이다.
정밀한 공학은 오차 없는 계산을 요구한다. 하중계산에서의 오차가 허용범위를 넘어서면 사고가 발생한다. 사상누각이란 말이 그래서 생겨났다.
섬세한 예술은 아날로그 감성을 요구한다. 디지털로 얻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감성은 수치로 표현될 수 없다. 플러스 무엇의 덩어리가 더 필요하다. 건축을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이유다.
그래서 건축과 사랑은 닮았다.
완성해가는 과정이 흡사하다. 터파기 공사가 부실하면 지상에 건물을 올리는 게 아예 불가능하다. 건물을 올려도 기둥/들보 같은 하중을 받는 구조물이 부실하면 붕괴 위험이 있다. 기둥 사이를 부실하게 채우면 창호가 뒤틀리고, 마감이 션찮으면 꼴 보기 싫어진다. 그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축공학과 90학번 이용주 감독. 그가 서연&승민의 첫사랑을 세밀히 짚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설계 경력에 도움을 받은 탓이리라.
한편 빈번하게 오가는 현재와 과거 속에서도 관객의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는 까닭은
이용주 감독의 설계가 충분히 아날로그적이고, 오차 범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첫눈에 빈집을 찾은 서연의 메이크업은 다소 과장이 있지만) 공사 진척에 따라 (정착을 시도하는) 서연의 화장이 엷어지는 것을 보라. 이런 디테일이라니!
봉준호 감독과 합을 맞춘 이력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96년 모습에 무리가 없다. 두꺼비 소주, CDP 디스크맨, (정릉-개포동) 710번 버스, 무스탕 잠바, 짝퉁 게스 등은 충분한 고증을 통해 등장한 것이다. 다만, 연대가 아닌 타대(경희대?) 캠퍼스를 카메라에 담은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첫사랑을 다룬 영화는 많다.
언뜻 생각나는 국내 영화만 하더라도 <내 마음의 풍금 1999> <클래식 2003> <광식이 동생 광태 2005> <김종욱 찾기 2010> <쎄시봉 2015> <너의 결혼식 2018>이 있고, 내가 보지 못 했거나 알지 못 한 작품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첫사랑이라면 (<클래식> 빗속을 뛰는 장면과 함께) <건축학개론> 어둑한 버스정류장 화면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수지의 풋풋함에 입꼬리가 올라가고, 납뜩이의 호들갑에 낄낄거리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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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어요
지난번 요청하신 저희동네 연못 사진 회원사진란에 올렸어요 봐보세요
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정말 재밌게 봤던 영화입니다. 가슴에 뭔가가 샤르락~ 하면서 설레이게 했던 영화죠.
그리도 납뜩이는 닮고 싶은 최애 캐릭이었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