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 김별
제형諸兄
겨울보다 혹독한 여름
살아볼수록 더 무인도 같다던 도시에서 어찌 지내십니까
난蘭 한 번 키워본 적 없는 사람이
요즘은 바람과 햇살과 계절에 몸을 맡긴 나무를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세월을 잊습니다.
꽃에 빼앗겼던 눈과
신 열매를 탐하던 마음을 버리고서야
꽃도 나무도 사람도 그 어떤 고통조차
한 시절을 살아 온 빛나는 증거였고
운명처럼 피할 수 없던
존재의 목숨 값이었다는 것과
아름다움도 욕도 결국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일
꽃이 진 자리마저 상처의 흔적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향기까지를 잃은 늦어서야 알았습니다
언제인 줄도 모를 날
씨알로 떨어진 빈터에 뿌리를 내려
키가 자라는 만큼 그늘의 범위를 넓혀 온
한 그루 나무
그 나무의 잃어버린 시절과
켜켜이 싸인 나이테의 사연을 알지 못한
얼마나 헛된 세월이 많이도 흘렀습니까
나무를 키운 것은 8할이 대지의 품이었고 나머지가 때로 깃을 치고 떠나 새들이었거나
홀씨처럼 바람을 탈 수 없기에 오히려 더욱 머물 수 없던
안에서부터 썩어져내려 결국 속을 다 들어 낸 바람벽이었겠지만
나무는 어느새 폭풍우에도 당당함과
자유보다 더 큰 세계를 열었습니다
고목처럼 온몸에 구멍을 뚫어
산 날들보다 더 크고 깊게 속을 비우고
누군가의 둥지가 되어주었다 한들
벼락에 몸 한쪽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견디다
기어이 쓰러져 간 최후처럼
끝내 아름답게 쓰러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만
나 여기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을 두고
강둑 서늘한 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향해 이미 모두 내어준
고기떼 뛰어오르는 은빛 강물을 바라보거니
아래로만 흐르는 가장 지키기 힘든 약속을 기어이는 지켰기에
물길은 이제 어느 소용돌인들
무슨 두려움이 있을까요
다만 꽃같이 피지 못한 꽃 같은 목숨들을 거두어
꽃잎처럼 떠내려 가버린 날들
억만금을 준다 해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날들은 다만
눈물 대신
돌이켜 씨앗을 뿌리는 초연함으로 갈무리 되어야겠지요
오늘도 빈 우체통
무소식이기에 안심하고
그리움이 뭉게뭉게 구름꽃으로 피어납니다
가마솥처럼 뜨거운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흙의 마음과 불의 마음
자신의 영혼마저 깨어버린 장인의 초연함뿐이겠습니까만
이제 더 무슨 소중함이 남아 있어
처음의 마음으로 마지막까지를 기약할까요
그렇지 못하기에 어쩌면
남은 날들이 오히려 더 평안한 것은 아닌지
빈지문을 닫으며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건강하소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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