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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1-5)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어디든 거룩하므로, 우리는 경외심과 겸손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놀랍고 초자연적이며, 우리는 그분의 일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개인적으로 부르시며,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알고 계시며 때에 따라 구원을 베푸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1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1-5)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던 모세가 이제 미디안 땅에서 장인의 양을 치며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장인의 이름이 여기서는 르우엘이 아닌 ‘이드로’로 언급됩니다. 결국 모세의 장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인물의 이름이 출애굽기의 근접 문맥에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곤혹스럽게도 구약 다른 본문의 증거를 볼 때, 이드로와 르우엘은 동일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민수기와 사사기에서 모세의 ‘장인’ 혹은 ‘처남’(호텐)은 이드로가 아닌 ‘호밥’으로 나타나며(민 10:29; 삿 1:16;4:11), 특히 민수기는 호밥을 ‘르우엘의 아들’로 소개합니다(민 10:29). 따라서 르우엘과 이드로는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이 경우, 이드로와 호밥이 동일 인물입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대안이 제안됩니다. 첫 번째 대안은 2:18의 르우엘에 대한 언급을 ‘그녀들의 아버지’가 아닌 ‘그녀들의 조부’로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아브’의 용법상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이때 르우엘은 이드로의 아버지로서 르우엘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여 손님 대접이나 결혼 문제에 결정권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출애굽기 2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 때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의 아버지는 르우엘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대안은 ‘그의 장인’을 ‘그의 처남’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호텐’의 용례에 비추어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이 견해의 문제는 이후의 이야기에서 이드로가 제사장이자 가장 역할을 하면서 모세의 장인 지위에 걸 찾은 인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굳이 선택한다면, 첫 번째 대안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모세는 ‘광야를 향하여’ 아마 좋은 목초지가 있는 곳으로 양 떼를 몰고 갔습니다. 이것을 굳이 ‘서쪽으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하나님의 산 호렙산이었습니다. 이 산은 틀림없이 시내산을 가리킬 것입니다. 갑자기 호렙산의 어느 산자락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덤불 나무인데 정확한 수종(樹種)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자신과 경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 2절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는데, 4절에서 그가 동시에 ‘여호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여호수아가 가나안에서의 첫 번째 전쟁을 수행하기 직전에 재현됩니다(수 5:13-15). 거기서는 여호와가 ‘군대장관’으로 나타나며, 여기처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합니다(수 5:15).
떨기나무가 불에 타오르는 현상에 대해 몰덴케(Moldenke)의 성경 식물도감은 이것이 덤불에 만발하게 핀 꽃에 대한 환각이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TWOT). 그러나 카수토(Cassuto)는 이런 견해는 전혀 본문의 의도가 아니라고 적절하게 반박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에도 건조한 사막에서 덤불들이 바람에 마찰되어 자연 발화하는 경우가 흔한데, 그런 현상이 특별하게 기적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적인 자연 발화가 아니라 나무는 실제로 전혀 타지 않고 있기에 놀라운 현상입니다. 이것은 ‘큰 광경’, 즉 ‘굉장한 광경’이었습니다. 모세가 크게 놀란 이유가 그 때문이며, 그는 그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 나무를 살펴보기 위해 접근했습니다(3).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갑작스런 음성에 대한 모세의 반응과 모세 편에서의 음성의 주체에 대한 신분 확인 과정은 생략된 채 모세의 즉각적인 응답이 이어집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고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5). 신발을 벗는 행위가 지닌 의미에 대해 몇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가장 무난한 해석은 그것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높은 권위자에 대한 예법이었으며, 종들은 주인 앞에서 통상적으로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직무할 때에도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성소에 입장할 때나 제단의 제물을 바칠 때 반드시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출 30:19-20).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은, 그곳이 나무이든 산이든 여하한 장소이든, 거룩해집니다. 어떤 공간이 특별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비록 광야의 덤불일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거룩한 공간이 됩니다. 한편, 떨기나무에 나타난 하나님의 불은 분명히 앞으로 강력한 신현의 현상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불, 즉 불기둥을 예고합니다.
구원자의 사명을 받는 모세(6-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이해하시고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을 알고 계시며 기도를 들으시고 해결하실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방식과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계획에 순종하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는 데 충실해야 합니다.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6-10)
하나님께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여기서 위대한 세 명의 조상이 모두 거명된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최초로 사용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나타나셨음을 깨닫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굴을 가립니다. 언약 백성에게는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창 32:30; 참조. 출 19:21; 신 4:33; 삿 13:22).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미 애굽에서 학대받는 백성의 고통을 다 보고 계셨다고 밝히십니다. 그들의 ‘감독자들’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부르짖음과 근심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으로 칭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셨고’, ‘들으셨고’, ‘알고 계셨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가실 것입니다. 그들을 학대받는 땅 애굽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구원 역사를 위해 애굽으로 떠날 것을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10). 그는 바로를 찾아가 담판을 지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인도하여 내다’라는 동사 ‘야짜’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노예를 풀어주는 행위에 대해서도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현재 그렇게 애굽 땅에서 노예로 속박된 상태입니다. 이 어법은 신약에서 죄로부터의 속박과 해방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지 않습니다(참조. 렘 1장). 그러나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반문하는 모세의 응답은 매우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모세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부름 앞에서 자신이 위대한 소명자 자격이 있는지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학대받는 자신의 동포를 늘 안타까워한 것은 맞지만, 그들을 해방시켜야겠다는 비전을 품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확신시키시는 하나님(11-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명을 확신시키시고, 그 사명이 이루어질 것을 보장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실현되며,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증거’는 사건의 실현을 통해 입증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과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1-12)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명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는 확고한 약속과 더불어 확정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약속은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분의 언약이 성취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모세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온 뒤, 만일 이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그것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증거’를 뜻하는 ‘오트’는 이외에도 ‘표적’, ‘이적’, ‘징표’의 뜻을 갖습니다. 여기서는 이적이나 기적의 의미의 ‘증거’가 아닌 사건의 실현을 통해 입증되는 증거를 말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하나님의 산’, 즉 시내산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는 일을 가리킵니다.
성경에는 시간이 지나서야 사실적 증거로 드러나는 사례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모세를 부르시며, 그의 두려움 속에서도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과 순종으로 응답할 때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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