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 7,12-15; 에페 1,3-14; 마르 6,7-13
+ 찬미 예수님
한 주 동안 안녕하셨어요? 지난주에 집중 호우로 안타까운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아픔을 겪고 계신 분들 위해 기도드리고, 앞으로의 호우에 큰 피해가 없기를 기도하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남북으로 분열됩니다. 결국 두 왕국 다 멸망하고 마는데요,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남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무너집니다. 두 왕국의 멸망 직전에 많은 예언자가 활동하며 하느님의 경고를 전했습니다.
이중 아모스 예언자는 특이하게도, 남유다 출신인데 북이스라엘에 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왕은 칼에 맞아 죽고 북이스라엘은 유배를 갈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언자의 말은 쓴소리가 많아 가뜩이나 부담스러운데, 남유다에서 온 예언자가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 선포하니, 많은 사람이 싫어했는데요, 가장 싫어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업 예언자들로서, 왕에게 듣기 좋은 얘기를 해서 안심시켜주고 그 대가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모스가 와서 자기들의 예언과는 정반대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말을 하니, 조직적으로 아모스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봉에 선 사람은 오늘 독서에 나오는 아마츠야였습니다. 아마츠야는 베텔의 사제였는데요, 베텔은,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과 경쟁하기 위해 만든 북이스라엘의 성소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아마츠야는 아모스를 비꼬며 말합니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아마츠야는 아마츄어였던 것 같아요. 예언의 진실성을 가지고 논해야 하는데, 인신공격을 하잖아요? 아모스는 이렇게 받아치는데요,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야훼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었으면, ‘투잡’을 뛴 건데요, 목축업도 하고 농사도 지었기 때문에 아모스는 나름 유복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츠야 너처럼, 돈 때문에, 먹고 살려고 예언하는 게 아니다. 남유다에 내 사업장이 두 개나 있다. 그런데 야훼께서 나를 붙잡으셔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라고 하셨기에 여기 온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다른 일을 하던 아모스를 불러 예언을 맡기셨는데요, 이 메시지가 매우 긴박하다는 의미였고, 직업 예언자들은 타락하여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낸 말을 전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말씀을 전하면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아모스의 예언대로 멸망했고, 아마츠야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파견하십니다. 열두 제자 역시 어부, 세리, 열혈당원 등 다른 직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을 껴입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신뢰를 지니고 파견되는데,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짚는 모습은 이집트 탈출 전날 파스카 음식을 먹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처럼 중요하고 긴급하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선포하셨는데,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수행합니다.
그런데 “회개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네 죄를 뉘우치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쉬운데요, 그런데, 만일 이런 의미만 있다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떠들어댄 내용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요? 그들이야말로 항상 남들을 죄인 취급한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예수님과 이들의 메시지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했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제물을 바칠 시간적 경제적 능력이 없는 서민들은 항상 죄인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서민들을 죄인 취급하였고, 자기들은 죄가 없는, 도덕적 엘리트로 행세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는 달랐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그 하느님 나라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회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613개나 되는 계명을 말하고, 그중 한두 가지를 어겨도 죄인이라고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죄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과, 형제자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는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길이란, 이 두 가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 딸이고 내 옆에 있는 사람도 하느님의 아들, 딸이니 우리가 서로 형제, 자매라는 것입니다.
제2독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확장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결심이나 우연의 일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에페소서는 말합니다.
우리에게 죄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들, 딸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을 나의 형제, 자매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 딸로 자각하는 그만큼 이웃을 나의 형제, 자매로 여기게 되고, 이웃을 형제, 자매로 여기는 그만큼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 딸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2독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는데,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이 구절을 ‘총괄실현’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요, 이는 세상 마지막 날에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데 모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우주는 진화하고 있고, 이 진화의 정점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임을 깨달으며 모든 이웃과 피조물이 내 형제자매임을 알아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2독서의 내용을 21세기의 우주론적 언어로 고백하는 것이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고백하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녀로서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고대 유다교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작년 사순 특강 때 드렸던 말씀과 비슷한데요, 한 랍비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언제 밤이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지를 물었습니다. 제자 하나가 말했습니다. “멀리서 동물을 보고 그것이 양인지 개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요?” “아니다.”
다른 제자가 말했습니다. “멀리서 나무를 보고 그것이 무화과나무인지 복숭아나무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요” “아니다.”
“그렇다면, 언제입니까?” 제자들이 묻자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너의 자매요 형제라는 것을 알아볼 때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몇 시이든, 여전히 밤일뿐이다.”
이 미사 중에 함께 미사를 드리는 교우가, 그리고 미사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마주친 낯선 사람이 내 형제라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면, 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고, 하느님 나라는 나로 인해 이 세상에 한 걸음 더 다가온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림 출처: Apostleship: More than Discipleship – God In All Th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