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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자 첫 시집 {그와 나의 아포리즘}, 해설, 권 온(문학평론가)
흔들림, 기다림, 말랑말랑함
―백승자의 시 세계
백승자 시인의 첫 시집을 읽어 본다. 2016년에 등단한 이후 그녀가 언제나 시작(詩作)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날의 삶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슬픔을 참으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왔을 테다. 그러나 시인은 마침내 뜻을 세우고 시집을 발간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단순한 언어의 흔적이 아니다. 이번 시집은 백승자의 거의 모든 것이다. 독자들로서는 시집 안의 시들을 읽으며 시인에게 내재된 독특한 사유와 철학, 삶을 향한 열망과 사랑을 뜨겁게 만나게 될 테다. 또한 그녀는 고흐나 피카소 등 예술가의 삶을 시 속에 담아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다재다능하고도 예술적인 감성이 충만한 시인이다. 시집에서 엄선한 9편의 시들을 중심으로 백승자 시인의 시 세계를 점검해보기로 한다.
매일 부화하는 나는 늘 내 알레고리를 넘고 만다
낯선 나를 감당하는 법은 머리끝까지 감금하는 일
그들이 찾을 수 없는 성城에 갇히는 일
갇힌다는 건 달콤한 비밀을 풀어놓을 수 있다는 것
내 추락한 유희를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
밤낮없이 써 내린 유서 같은 낙서들
지친 혼잣말이 사방 벽을 때리다 시들어도
꺾이지 않고 스스로 침몰할 때를 얻는다는 것
어쩌다 멋모르는 망치질이 마음에 숭숭 구멍을 내더라도
빨간 장미 그려진 가면 하나 쓰고 나면 그뿐
빼곡한 가면들에 얼굴을 잃어버린다 해도
버텨내기 위해 쓰는 내 가면의 시간은
시시한 변명보다 향기로와라
―「가면의 변辯」 전문
이 시는 이번 시집의 들머리를 장식하는 작품으로서, 언어를 다루는 백승자의 솜씨가 청산유수(靑山流水)와 같음을 보여준다. 다소 거창한 감이 있는 시의 제목이 구체성을 확보한 본문에 의해 나름의 적절성을 확보한다. 특히 시를 읽는 맛이 대단하다. 독자들로서는 음악성 또는 리듬감이 충만한 귀한 현대시를 마주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녀가 한국 시단(詩壇)에 던지는 출사표이다! 시인의 시는 “알레고리”이자 “달콤한 비밀”이며 “추락한 유희”이다. 또한 그것은 “유서 같은 낙서들”이자 “지친 혼잣말”이며 “멋모르는 망치질”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언어는 “가면의 시간”을 담는다. 우리는 이제부터 “시시한 변명”을 치우고 “향기로”운 “가면의 변辯”을 내세우게 될 테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으로 살고 싶은 꿈
그물이 묶어버린 줄 알았다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으로 살고 싶은 꿈
진흙이 묻어버린 줄 알았다
그물도 진흙도
세상에 물 같은 것
세상에 공기 같은 것
외려 바람 제 가벼움이 서러워
그물을 물고 흔든다는 걸
외려 연꽃 제 연약함이 두려워
진흙의 피를 빨고 있다는 걸
탱탱한 몸에서 물기 빠져나가는 시절이 되고서야 알았다
뼈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서야
―「뼈에 구멍이 나고서야」 전문
백승자가 구사하는 언어에는 여전히 음악성이 가득하고, 리듬감이 충만하다. 독자들로서는 이 시에서 시행(詩行)의 마무리에 주목할 일이다. 1연 1행과 2연 1행에서의 “~꿈”, 1연 2행과 2연 2행과 5연에서의 “~알았다”, 3연 2행과 3행에서의 “~것” 등에서 시인은 유려한 반복의 기법을 구사함으로써 이 시를 감칠맛 나는 노래로 드높인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녀에게도 ‘꿈’이 있었다. 그 꿈은 ‘자유’로서의 “바람”과 ‘순수’로서의 “연꽃”을 지향하였다. 한때 시인은 ‘바람’을 가로막는 것이 “그물”인 줄 알았다. 그녀는 ‘연꽃’을 가로막는 것이 “진흙”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깨닫는다. ‘그물’이나 ‘진흙’은 “세상에 물 같은 것/ 세상에 공기 같은 것”이었음을. 오히려 그물과 진흙은 바람의 “가벼움”과 진흙의 “연약함”을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백승자는 “탱탱한 몸에서 물기 빠져나가는 시절이 되고서야”, “뼈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시인은 인간의 삶에서 그물이나 진흙이 물이나 공기와 같은 매우 자연스러운 요소임을 깨닫는다. 그녀는 우리에게 그물이나 진흙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과 사회와 역사는 언제나 이렇게 뒤늦게 깨닫고 조금씩 전진한다.
뿌리가 없어 나는
이름이 없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열심히 나를 낳았으나
개살구였네
개똥참외였네
아무 음식에나 내갈기는
쉬파리 똥이었네
한 번도 물속에 산 적 없으면서
물이라 말하는 이유는 고작
물가를 서성이다 젖은 발끝 때문
날아갈까 지워질까 이내
명함에 물색을 칠했으나
지문 한 줄 새기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제는 돌아볼 시간
내 텅 빈 이름에 깊은 색깔을 입힐 시간
비에 젖으면 더욱 도드라질 뿌리 색을 물들여야 할 시간
―「거울을 보다가」 전문
시인은 이번 시에서 어떤 “시간”을 내세운다. 그녀는 시적 화자 ‘나’와 겹쳐지면서 어떤 ‘시간’에 주목한다. 그 시간은 “돌아볼 시간”이자 “깊은 색깔을 입힐 시간”이며 “뿌리 색을 물들여야 할 시간”이다. 필자는 백승자의 시를 철학적인 시 또는 사색적인 시로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에서 ‘나’는 이중의 부재(不在)에 시달린다. ‘나’에게는 “뿌리가 없”고 “이름이 없”다. ‘뿌리’가 ‘나’의 근원이라면, ‘이름’은 ‘나’의 현황이다. ‘나’는 스스로를 “개살구”, “개똥참외”, “쉬파리 똥” 등으로 규정한다. ‘나’는 자신에게 “개”와 “똥”을 사용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향한 불만을 토로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열심히” 살았으나 ‘나’의 인생을 “물이라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나’는 “물가를 서성이다”, “발끝”을 적셨을 뿐이다. ‘나’는 “명함에 물색을 칠했으나/ 지문 한 줄 새기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요컨대 ‘나’의 이름은 현재 “텅 빈” 상태에 있다. “이제는”,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새로운 색깔을 칠해서 ‘이름’의 가치와 ‘뿌리’의 깊이를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시인이 “거울을 보다가” 이와 같은 일련의 반성적 인식에 도달하였을 테다. 독자들 역시 나날의 일상에서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겠다.
투두둑,
얽혀 있던 실타래 끊어진다
꼿꼿하던 분노가 휘청거린다
까짓 거
하수상한 시절이면
예수도 석가도
주워 담을 말 투성이라는데
절대라고 말할 그 무엇이 있어
어금니 꽉 깨물까
억울한 못질 되돌려주겠다
온 밤을 하얗게 벼를까
다름이 미학美學임을 아는 나이
참이슬 맑디맑은 입술로
면벽面壁하던 영혼 구석구석 탐하다 보면
나는 금세 말랑말랑한
사람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소주 석 잔에」 전문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수많은 이야기에 참여한다. 그가 또는 그녀가 경험하는 이야기가 항상 밝고 긍정적인 색채를 띠는 것은 아닐 테다. 사람들에게는 대개 얽힌 “실타래”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억울한 못질”이나 “꼿꼿하던 분노”가 쉬이 사라지지 않기도 한다. 이와 같은 억울함이나 분노 같은 감정은 때로는 외부로 나아가고 때로는 스스로에게로 돌아온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 ‘나’는 “절대라고 말할 그 무엇”과 “주워 담을 말 투성이” 사이에서 “어금니 꽉 깨물”며 방황한다. 후회와 반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는 너무 딱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백승자는 독자들에게 긴장한 ‘나’를 이완시킬 수 있는 특별한 비밀을 공개한다. 그것은 바로 “소주 석 잔”이다. 우리는 ‘나’를 본받아서 막히고 닫힌 구석이 너무 많은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사람으로 되살아나”야겠다. 물론 반드시 ‘소주 석 잔’일 필요는 없을 테다. ‘맥주 한 캔’이나 ‘와인 한 잔’도 가능할 일이다.
아직은
아득한 나라 유목민의 피가 꿈틀거리는데
어디든 떠나는 게 천성이라는데
눈요기로 묶여 있는 몸
흔들리는 게 일이다
바람이 입김만 불어도 길을 잃어버리고
마음은 먼지보다 가벼워
비어 있는 하늘 언저리만 서성서성
흔들리는 게 일이다
내 머물 곳은 땅도 하늘도 아니라는데
땅에만 눕고 싶어
하늘에만 안기고 싶어
흔들리는 게 일이다
어차피 흔들리는 목숨이라면
제대로 흔들려 볼까나
바람이 어떤 얼굴로 오든
파도 타듯
끊어지지 않는 유목민으로
―「애드벌룬」 전문
우리는 앞에서 살핀 「가면의 변辯」이나 「뼈에 구멍이 나고서야」 등의 시편에서 백승자 시의 음악성을 확인한 바 있다. 이번 시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적용할 수 있겠다. 7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2연, 4연, 6연은 모두 “흔들리는 게 일이다”라는 동일한 진술이다. 또한 1연 2행의 “꿈틀거리는데”와 1연 3행의 “천성이라는데” 그리고 5연 1행의 “아니라는데” 등을 비교하면 “~는데”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 ‘나’는 “아득한 나라”에 거주하는 “유목민” 또는 “애드벌룬”이다. ‘나’는 “어디든 떠나는 게 천성”이고, ‘나’의 “마음은 먼지보다 가벼워”서 흔들린다. 시인이라는 존재 역시 ‘나’와 닮았다. 시인은 언제나 낯설고 신선한 언어를 구사하여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독자들로서는 7연 1행과 2행의 진술에 주목해 볼 일이다. “어차피 흔들리는 목숨이라면/ 제대로 흔들려 볼까나”에 담긴 옵티미즘(optimism)의 찬란함이여!
또 흔들리나 보다
바위의 침묵을 배우지나 말 걸
나무의 시간에 기대지나 말 걸
소나기를 놓치고 갈라터지는 핏줄들
비탈에 뾰족하게 서고서야
텅 빈 대궁을 보았다
옆구리를 습격하는 바람들이 함부로 번역할 때마다
갈피갈피 죽어가는 DNA
그때마다
구석으로 비켜나 촛불처럼 누웠다
비탈에 몰리는 건
낮과 밤이 오는 것만큼 쉬웠는데
고작
흔들리는 게 전부인 저항
꺾이는 것보다 흔들리는 게 나은 건지
참는 건 비겁의 또 다른 이름인지
대답 없는 바람에 묻고 또 물으며
누워서도 봄을 울어대던 아이의 체온에 기대
촛농을 다 내어주고서라도 지켜내고 싶었던 불씨
바람이 분다
나는 또 흔들리고
그 아이도 여전히 울고 있다
―「갈대」 전문
백승자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깊은 내면과 마주하는 일이다. 그녀의 시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면모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때가 적지 않다. 이번 시 역시 그러하다. 시인이 주목하는 대상으로서의 “갈대”는 사물인 동시에 인간이다. 그녀는 갈대를 관찰하면서 스스로 갈대가 되어간다. 갈대의 본질을 보여주는 자세는 ‘흔들림’과 연결된다. 1연 1행의 “또 흔들리나 보다”, 4연 4행의 “흔들리는 게 전부인 저항”, 5연 1행의 “꺾이는 것보다 흔들리는 게 나은 건지”, 그리고 6연 2행의 “나는 또 흔들리고” 등의 시행들은 이 시가 ‘흔들림의 시학’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백승자는 앞에서 살핀 시 「애드벌룬」에서 “흔들리는 게 일이다”라는 시행을 3회 반복함으로써 시의 리듬감을 고양한 바 있다. 그녀는 두 편의 시에서 ‘흔들림’을 지속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 세계를 확장하고 심화한다. 우리는 이 시에 등장하는 ‘갈대’와 ‘바람’에게서 파스칼(Blaise Pascal)이나 발레리(Paul Valery)를 소환할 수도 있다. 독자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여전히 울고 있”는 “그 아이”의 안녕을 기원한다.
지붕 없는 집에
새들이 산다
바람도 공기도 새어들지 못하는
지붕이 너무 두터워 뚫어진 집에
죽어도 날아야만 하는
어린 새들이 산다
성골로 태어나 날개가 열둘인 텃새도
개천의 용이 되어야만 하는 날개 둘뿐인 철새도
날기 위해 날개를 접고
어미 새가 물어다주는 색깔대로 물들기 위해
독하게 버티고 있다
지붕 없는 집의 하늘은
끝을 알 수 없는 허공
그 허공에 매달려 바라본 세상은 거꾸로여서
하늘을 땅처럼 움켜잡는다
통증이 도사리고 있는
어긋난 수레바퀴 위에 서서
해맑은 꿈을 꾸는 어린 새들
비릿한 세상에 맞추어진 날갯짓을
뼛속까지 새기고 있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둥둥 떠 있기 위한 날갯짓을
―「대치동에는」 전문
시인은 하나의 대상에 둘 이상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백승자가 이 시에서 다루는 대상은 ‘새(들)’이다. 그녀가 소환하는 ‘새’는 단순한 새가 아니다. 여기에서의 새들은 “대치동”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새들이 거주하는 ‘대치동’의 “집”은 무언가 이상하다. 그곳은 “바람도 공기도 새어들지 못하는”, “지붕 없는 집”이기 때문이다. 단절과 폐쇄를 속성으로 하는 대치동의 집에는 “어미 새”와 “어린 새들이 산다” ‘어미 새’는 ‘어린 새들’에게 먹이를 “물어다주”고, 어린 새들은 먹이를 열심히 받아먹는다. 어린 새들은 대치동의 집에서 “죽어도 날아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을 감당한다. 이곳의 집은 지붕이 없고, 이곳의 하늘은 “끝을 알 수 없는 허공”이다. 대치동의 “세상은 거꾸로”된 세상이다. 대치동에서 원래 살던 “텃새”에게도, 새롭게 대치동으로 이사 온 “철새”에게도, “어긋난 수레바퀴”이자 “비릿한 세상”으로서의 대치동은 “통증이 도사리고 있는” 만만찮은 동네이다. 대한민국 사교육을 대표하는 대치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린 새들은, 어린 학생들은 “독하게 버티고 있”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는, 대치동의 하늘에서 “둥둥 떠 있기 위한 날갯짓”은 오늘도 계속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 사회 풍자로서의 현대시가 이렇게 탄생한다.
그때 그 자리에 있겠다는 것
그대가 기억하는 모습으로
늘 사랑할 준비를 한다는 것
달아오르던 열망을 삭여
아프지 않고 때로는 무덤덤하게
그대를 안아낼 수 있다는 것
그대가 나를 잊은 의자에 앉더라도
해 드는 창가를 내어주며
부르면 들릴 만한 거리에 서 있겠다는 것
그대는 매일 나를 비킨 곳만 바라보네
마음이 무너진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진실로 기다린다는 것은
11월 감처럼 말갛게 익어
12월의 그대를 파랗게 품어내는 것
―「기다린다는 것은」 전문
백승자는 단순한 시인이 아니다. 그녀는 가수(歌手)에 가까운 시인이다. 백승자의 시는 때때로 노래가 되고 음악이 된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다른 많은 시들이 그러하듯이, 이 시가 보여주는 음악성은 대단하다. 시인은 작품의 제목인 “기다린다는 것은”을 비롯하여 1연, 2연 2행, 3연 3행, 4연 3행, 6연 3행, 6연 5행 등에서 공통적으로 ‘~것’을 활용한다. ‘~것’을 7회 반복함으로써, 이 시는 시적 화자 ‘나’의 “그대”를 향한 ‘기다림’을 극대화한다. ‘그대’를 향한 ‘나’의 감정은 한때의 “달아오르던 열망”을 넘어선다. ‘그대’가 ‘나’를 외면하거나 잊는다고 해도,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무덤덤하게”, “부르면 들릴 만한 거리에 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갛게 익”은 “11월 감”을 닮은 ‘나’의 마음은 “사랑”으로서 충만하다. 백승자의 제안처럼 “기다린다는 것”은 “늘 사랑할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기다림’은 곧 ‘사랑’이다.
천만 다행히도
서라벌에 네로의 콜로세움은 없었네
올무에 사람 옭아 놓고
핏덩어리 물고 춤추는 사자들을 향해
축배 들고 환호성 지르는 열병 앓는 말벌들은 없어서
안압지 야경에 몰려드는 불나방 무리에는
기꺼이 끼어도 좋겠네
그 정도쯤이야
애교어린 이화원 한 귀퉁이
포석정 보름달 끌어안고
빙빙 술 흐른다 시 지어라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위아래 없이 엉겼다 해도
는실난실 흥청거린 폼페이우스에 비하면
진실로 그쯤이야
벼 한 모숨 심을 땅대기에 기대어
사철을 견디는 목숨들 옥토 위
턱 하니 드러누운 대릉의 주인들에게
엎드려 입 맞추는 것쯤은 무방하겠네
서라벌에
콜로세움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폼페이우스가 없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턱 하니 드러누운 대릉大陵의 주인들에게」 전문
독자들은 아마도 ‘구체적(具體的)’ 또는 ‘구체성(具體性)’이라는 어휘를 접한 적이 있을 테다. 어떤 사물이나 대상이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춤으로써 주체가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 사물이나 대상은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백승자의 이 작품은 대단히 구체적인 시이다. “대릉大陵”, “서라벌”, “네로”, “콜로세움”, “안압지”, “이화원”, “폼페이우스” 등의 어휘를 보면 그녀가 추구하는 스케일의 넓이와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빛나는 장소와 유명한 인물을 넘나들면서 시인이 최종적으로 주목하는 장소와 인물은 ‘서라벌’이고 ‘대릉’이며 “턱 하니 드러누운 대릉大陵의 주인들”이다. 백승자가 여기에서 제공하는 문기(文氣)는 활달하고 호방하다. 2연 5행의 “기꺼이 끼어도 좋겠네”와 4연 5행의 “엎드려 입 맞추는 것쯤은 무방하겠네” 그리고 5연의 “서라벌에/ 콜로세움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폼페이우스가 없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등의 진술은 이를 입증하는 사례들이다. 이제 한국 시단도 작품의 제목에 “턱 하니 드러누운”과 같은 감각적인 표현을 자연스럽게 배치하는 개성적인 시인을 얻게 되었다.
백승자의 첫 시집을 점검하였다. 그녀는 말을 능수능란하게 잘 다룬다. 시인은 말과의 놀이를 기꺼이 즐긴다. 언어유희로서의 시는 노래를 닮았다. 동일한 표현을 적당한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백승자는 자신의 시를 음악의 상태로 고양한다. 그녀는 「애드벌룬」과 「갈대」 등의 시편에서 흔들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오롯이 형상화하면서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시 세계를 전개한다.
시인은 또한 시 「기다린다는 것은」에서 기다림을 노래한 바 있다.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에 의하면 “인생은 언제나 행동할 수 있는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는 문제였다.(Life was always a matter of waiting for the right moment to act.)” 인간의 삶은 늘 기다림의 연속이다. 우리는 적절한 때를 기다리다가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다림의 대상은 각각 다를 테지만, 우리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흔들리는 목숨”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백승자의 제안을 존중하는 독자들은 유연한 사고와 상상력으로 “끊어지지 않는 유목민”이 되고 “말랑말랑한/ 사람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유목민 또는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어서 새롭게 걸어갈 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의 길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