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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낮추고 말씀에 주의하자.
성경본문 : 잠언 16: 16-19
16.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17.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니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9.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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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중 목사
오늘은 우리 온교회가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여러분도 성서주일을 맞히여 성경을 많아 읽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또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음성에 귀을 기울여볼줄 아는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느 영성학자들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방해되는 두 가지 환경이 있다고 지적을 해줍니다. 첫째는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쁘고 서두르는 이와 같은 환경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무 산만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 우리의 감정, 우리의 삶의 환경이 너무 산만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하면, 안정성이 없고 집중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정감이 있는 것은 아주 귀한 은혜입니다. 집중력을 가지는 것도 대단히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정성을 잃어버리고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모두가 바쁘고 산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우리의 갈등이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대구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서울을 가는데, 그날은 아주 피곤한 날이었습니다. 대구가 광역도시 이다 보니까 터미널에 그넓은 터미널 대합실도 아주 좁게 보여지는데 어느 시골아저씨 한 분이 귀가 좀 안 들리는지 대합실 TV의 볼륨을 자꾸 높여가지고 너무 시끄러웠습니다. 그 대합실이 왜 비좁은지 보니까 절반 이상을 식당에 임대를 내주고 큰 매점도 들어서 있어서 아주 좁았습니다. 식당이라는 곳이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사람들이 식사하면서 술도 먹고 시끄럽습니다. 그 대합실에 앉아서 차를 기다리면서 쉬려고 하는데 소란해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철도를 탔는데 그날따라 유독 철도안에 핸드폰을 가지고 전화 거는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승객이 20명이면 핸드폰이 20개입니다. 저녁차니까 좀 쉬면서 가야 되는데 핸드폰 벨이 심심하면 울립니다. 벨소리는 그나마 괜찮습니다. 전화 받는 사람의 말소리는 아주 듣기 힘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열차나 버스여행을 하실 때 핸드폰 관리를 잘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특히 전화를 걸 때 상대방이 들어도 거부반응이 안 일어나도록 조용하고 세련된 목소리로 전화를 하세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전화합니다. “무슨 소리! 월말까지 갚아야 돼!” 자기는 의식도 안 하고 고함을 지릅니다. 거래 관계로 이야기 하다가 화가 나니까 그런 식으로 막 합니다. 아무튼 삼천리 반도가 조용한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한 구절이 나옵니다. 19-20절에 보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마음을 낮추는 자와 함께 하는 것이 교만한 자와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낮추는 이것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이것이 다 연관성을 가집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마음이 교만한 자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 말씀에 주의한다는 말은 말씀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마음은 낮추고 행함은 높여야 됩니다. 우리는 마음을 높이면 안 됩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함은 숨어서 하면 안 됩니다. 순종은 드러나게 하십시오. 순종은 크게 하십시오.
마음은 될 수 있는 대로 하향 지향적이 되어야 됩니다. 겸손 지향적으로 가야 됩니다. 우리는 은혜 받을수록 겸손해 지고 고난이 와도 겸손해 지는 겸손 지향적으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을 낮추라고 합니다. 기도를 할 때도 마음을 낮출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경을 펼쳐 읽을 때도 우리가 마음을 낮추고 이 말씀을 대하면 하나님 음성이 들립니다. 말씀을 듣는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이 낮추어 질 때 하나님이 내 영에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릴 줄 믿습니다. 마음은 우리에게 이토록 중요한 기능을 가지게 합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보면 한 때 이 어른이 관상학을 공부했습니다. 그것도 아버지가 ‘관상을 보는 사람은 굶어죽지 않는다’고 농담으로 하신 말씀인데, 하도 못살던 시대에 태어난 어른이기 때문에 관상은 한번 해볼만 하겠구나 싶어 공부를 했는데 상당한 식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펴놓고 자기 관상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험한 관상입니다. 온갖 액운을 타고난 관상입니다. ‘아 이게 아닌데 내가 이런 험한 관상을 타고 나 가지고 무슨 남의 관상을 본단 말인가’ 그래서 접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김구 선생이 위기를 당할 때마다 관상학에 있는 글귀 하나를 좌우명으로 새겼다고 합니다. “관상은 신상보다는 좋지 못하고, 신상은 심상보다는 좋지 못하다.”라는 말입니다. 관상은 얼굴을 말합니다. 얼굴이 잘나고 아름다운 것은 신체가 건강하고 잘난 것보다 못하고, 신체가 잘나고 건강한 것보다 마음이 건강하고 잘난 것이 낫다는 표현입니다. 결국 이 관상학의 초점도 마음입니다. 관상 한번 보고 낙심하지 마세요.
마음만 고쳐먹으면 얼굴 관상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관상보고 길조라고 너무 방심하며 살지 마세요. 마음관리를 잘못하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생겨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아주 나쁜 약점이 있습니다. 성공하고 배우고 가지면 교만해집니다. 이게 약점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실패하고 우리에게 어려움이 오면 그만 좌절하고 실망합니다. 이게 우리 마음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첫째;교만을 극복하라.
교만은 성경이 죄로 규정합니다. 낙심도 성경은 죄로 규정합니다. 우리는 교만하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기 바랍니다. 사울왕은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왕입니다. 그러나 이 왕은 교만해졌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충고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일등공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와서 충고하는 그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 중에 한 가지를 보면,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이 백성을 판단하게 하옵소서.”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영어표현에 ‘hearing heart’ 즉 말씀을 듣는 마음입니다. 말씀을 듣는 마음이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말씀이 들리는 마음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두 남녀는 정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잉태가 일어났습니다. 위기입니다. 요셉은 파혼을 결심합니다.
그때 천사가 현몽하여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아라. 그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천사가 일러준 말을 요셉은 들었습니다.
마리아도 놀랐을 때 하나님이 일러 주십니다.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두 남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천사가 와서 일러주니까 들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순종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걸로 끝난 게 아니라 그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험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것과 이 말씀에 행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면 하나님 음성은 들립니다. 그러나 이 들려진 말씀을 삼가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마음을 낮추어야 되는가 하면, 마음을 낮추어서 하나님 음성을 들어야 하나님이 의도하는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 교만한 상태에서 음성이 들리면 내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내 욕심을 이루는 일에 말씀을 적용합니다. 비일비재한 실수들입니다.
둘째;섬김의 삶
스탠리 팜은 크리스찬 사업가입니다. 이 분은 기도하는 사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기도 가운데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나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며, 한 평생 내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주여,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팜에게 들려왔습니다. 마음속에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팜아 너는 평생 종업원으로 일해라.”
처음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 말씀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나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뜻은 너는 평생 종업원 의식으로 일하고 나를 주인으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회장이지만 한 평생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종업원 의식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다 들립니다만, 이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게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은 마음이 낮아진 자라야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이 높아진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은 회개의 자세입니다.
절망도 교만입니다. 절망하는 사람이 겸손해 보일 수 있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사람은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사람은 이야기 잘 안 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겸손해 보입니다. 그러나 절망과 겸손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겸손을 요구하지 교만이나 절망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교만과 절망은 다 죄악입니다. 겸손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는 이 말씀은 운명론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선을 이루는구나.’
이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을 이루게 역사하시려면 내가 낮아져야 됩니다. 내 마음을 낮추고 기다려야 됩니다. 내 마음을 낮추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 기도하고 인내하고 기다릴 때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선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셋쨰;주를 닮아 가라.
현실의 고통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를 억압하는 현실의 고통. 지금 우리가 힘든 현실의 고통을 너무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낮추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고통 중에 우리가 마음을 낮출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고통은 새로운 은사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낮은 마음은 우리에게 많은 마음을 줍니다. 마음을 낮출 때 겸손해 집니다. 마음을 낮출 때 깨끗해집니다. 마음을 높이면 추해집니다. 그리고 마음을 낮추면 더 높은 곳을 하나님이 보게 해 주십니다. 우리 스스로 아무리 높은 곳을 보려 해도 아무리 발돋움을 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낮추면 성령께서 내가 알지 못하던 영의 세계를 보게 해 주시고, 하늘의 것을 보게 해 주시고, 먼데 있는 것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서 마음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 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에 주의하기 위해서 이 말씀에 행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이 마태복음 11장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빌립보서 2장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로서 영광을 비우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왜 내가 이 땅에 메시아로 왔는가? 그것을 늘 붙잡았습니다. 낮아진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 나는 광야의 소리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세례요한은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보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자기를 높였다면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숭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내 뒤에 오는 그 분이 메시아시다. 그분이 오시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분이 천국이니라. 세례요한이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드러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낮추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구원의 역사가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비법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쁘고 산만해도 우리가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연말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지금 세상과 우리 환경은 너무 요란합니다. 세속의 소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제 DMB시대가 열렸습니다. 너무 몰두하면 안 됩니다. 너무 세상소리에 심취하면 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세상 소리를 삼가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절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낮추고 삼가 말씀에 행하는 이 축복 안에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