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11년, ‘희망’의 아이콘이 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성공회대 노동대학 강단에 섰다. 309일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하늘에서 투쟁한 그녀의 몸은 아직 땅에 익숙하지 않다. 육지에 적응하기에는 아직 이곳저곳 아픈 곳도 많다. 그럼에도 그녀가 강단에 선 이유는 크레인에 오르기도 전, 학생들과 약속했던 강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강연 소식을 듣고, ‘희망’을 염원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19일, 성공회대 피츠버그홀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들어찼다. 어떤 이들은 계단에서, 또 어떤 이들은 내내 선 채로 그녀가 들려주는 희망의 이야기를 나눴다. 1시간의 짧은 강연이었지만, 사람들은 시종일관 그녀의 밝음에 웃고, 그녀의 고통에 울고, 그녀의 희망에 공감했다.
# scene1. 희망버스가 왔던 날
저, 희망버스 몰랐습니다. 희망버스가 어떤 것이라는 걸 누구도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트위터 보고 알았어요. 정말 52년 살면서 희망버스를 처음 봤습니다. 노조 운동 30년 하면서 본건 조직 숫자대로, 지침에 의해 동원력이 내려지는 집회대오였습니다. 주로 맨날 오는 간부들이 집회에 참석해 위원장 대회사 듣고 경과 보고하고, 분위기 흐트러지면 율동 공연하고, 결의문 낭독하고 끝이었습니다. 조합원들은 담배를 피기도 하고, 김장 잘했냐는 얘기 하고, 천일의 약속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얘기도 해야 하고.(웃음)
그런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희망버스’라는 유령버스가 등장한 겁니다. 사실 처음에는 별 기대 안했습니다. 처음 희망버스가 온 날이 크레인에 오른지 157일 째였는데 힘든 시기였습니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숫자는 129과 60입니다. 김주익 열사가 129일날 목을 맸고, 그 날 마지막으로 본 조합원의 숫자가 60명이었거든요. 농성 129일을 가까스로 넘긴 상황이었고, 하루가 다르게 줄어드는 조합원들의 숫자를 보고 있었으니 당연히 힘들었지요. 근데 그 상황에서 희망의 버스가 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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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사람들이 영도대교를 넘어서 공장 앞 도로에서 촛불을 들고 김진숙을 연호하더군요. 저에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리고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사다리를 들고 뛰더라고요. 위에서 저 사람들이 뭐하나, 했어요. 근데 조합원들이 사다리를 놓고 위로 올라갔고, 그 사다리를 타고 사람들이 공장 담을 넘기 시작했어요. 아, 생각보다 우리조합원들 머리가 좋구나 했어요.(웃음)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아요.
1차 희망버스가 가던 날, 다 울었다면서요? 저는 위에 있어서 잘 몰랐어요. 나중에 영상을 보니 다 울면서 가더라고. 우리조합원들, 그 소 같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사실 그 전날 조합원들이 용역깡패한테 엄청 당했거든요. 조합원들은 이 사람들이 가면 자신들한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무서웠을꺼예요. 가지 말라고 잡고 싶었겠죠. 저도 손을 흔들며 또 오라고 했지만 사실 무서웠어요.
# scene2. 크레인을 둘러싼 ‘전쟁’같은 시간들
사수대 4명은 크레인 밑에서, 저는 크레인 위에서 올 여름 내내 싸웠어요. 용역들은 계단으로 매일 뛰어오르고. 6월 27일에는 크레인을 바닷가로 끌고 간다면서 와이어로 다 연결해놨어요. 스탠바이, 하면 끌고 갈수 있는 상태였죠. 무기가 없으니까, 패트병에 오줌 담아서 던지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용역이 나중에는 그걸 질색해서, 패트병에 물을 못 올리게 했어요. 봉지에 물을 담아 올리더라고요. 볼트를 한가마니 올렸었는데 그것도 6월 27일 거의 다 소진했어요. 그런 전쟁 같은 과정은 모르셨죠? 매일 일어난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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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크레인을 바닷가로 끌고 간다고 했을 때, 붐대에 올라가겠다고 난간에 매달리기도 하고, 크레인 밑에 그물을 치고 침탈을 하려 했을 때는 난간에 매달렸어요. 그것 밖에는 수단이 없었거든요. 어느 날 용역들이 황이라 동지에게 욕을 하며 밥을 못 올리게 했어요. 밥벌레 새끼들은 굶겨 죽여야 한다고요. 황 동지가 밥 들고 왔다가 싸우고 돌아가는데... 우리는 그 동지 발걸음만 봐도 기분이 어떤지 알았거든요. 걸음만 봐도 울고 있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근데 밑에 동지들은 황 동지한테 밥 주고 가라고 그러더라고요. 저를 올려다보면서도 “밥 주고 가라 카소”그러면서...(웃음)
너무 웃긴 게 제가 내려오자마자 85호 크레인에 굿을 했다더군요. 한진중 사장이 천주교 신자예요. 그리고 무당한테 129일이랑 309일을 쪼개 날을 받아서, 날 받은 날 크레인을 해체했답니다. 사실 회사는 제가 내려오자마자 크레인을 바닷가로 끌고 갔는데, 무당이 거기서 해체하면 안 된다고 했대요. 그래서 다시 있던 자리로 끌고 와서 해체했대요. 얘네 한테도 85호 크레인이라고 하면 원이 서릴거예요. 2003년도 정리해고에 실패하고, 8년 만에 절치부심해 노조를 깨려고 다시 정리해고 칼을 들었으니까요.
# scene3. 그녀의 트위터
트위터라는 걸 몰랐어요. 제가 컴맹이었거든요. 근데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을 때 한 동지가 트위터를 하라고 스마트폰을 올려준거예요. 저는 당연히 설명서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설명서 어딨냐니까 트위터는 설명서가 없대요. 제가 계정을 개설하고나서 이틀만에 트위터를 했잖아요. 이틀 동안은 짜증을 내는 시간이었어요.(웃음) 더듬더듬 시작하니 재밌더라고요. 트위터 중독이었어요. 트위터에서 김여진 씨를 만나고, 날라리를 만나고, 사람들을 만났어요. 사실 언론과 인터뷰 할 때 크레인 위에서 책도 보고 생각도 한다고 했는데 다 뻥이예요. 트위터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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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근데 전기가 끊어졌을 때는 정말 절망적이었어요. 크레인 주변 전기도 다 끊어서, 크레인은 깜깜 절벽이었거든요. 전기가 끊어진 것은 트위터가 끊어진 것이고, 그건 제가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끈이 끊어진 거였어요. 저도 답답하고 절망스러웠지만, 밖에서도 답답했나봐요. 자기들끼리도 얼마나 잔대가리를 굴렸겠어요. 스마트폰 배테리를 사서 촬영용 헬기로 띄울 생각도 했더라고요. 막판에 대용량 배터리와 태양열 배터리를 식빵을 뜯어 파고 그 안에 넣었어요. 그리고 본드로 붙이고... 그 당시 정문 밖에서 식량이 들어오면 금속탐지기로 다 헤집었었거든요. 근데 그게 용케 들어왔어요.
저는 본드가 붙여져 그 식빵을 절대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못 들었어요. 몇 달만에 빵을 보니 환장하겠더라고요. 환장하면서 먹는데 왠지 빵이 쫄깃쫄깃해요. 잼인 줄 알았어요. 근데 거기서 배터리가 나오더라고요. 별 일이 다 있었죠? 제가 정치인이랑 기자를 제일 싫어하는데, 너무 외롭고 답답하니까 언론 인터뷰를 다 했어요. 심지어 스포츠조선까지도요. 아마 제 인생의 오점으로 남지 않을까요.(웃음)
# scene4. 아직도 아픈 투쟁사업장, 그리고 비정규직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 저에게 물어요. 다음 희망버스는 어디로 갔으면 좋겠냐고. 제가 만약 희망버스를 운전할 수 있다면 쌍용자동차로 가고 싶어요. 쌍용차는 굉장히 중요한 싸움이예요. 정리해고싸움은 한 번도 이겨본 싸움이 없는데, 한진중공업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쌍차의 분노와 울분이 쌓였기 때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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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쌍차를 이미 패배한 싸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분명히 패배의 기억이 있겠지만, 쌍차는 아직도 진행형이예요. 쌍차의 아픔이 한진으로 왔고, 제가 한진에서 느꼈던 절박함도 결국 쌍차에서 온 거예요. 쌍차 동지들이 공장에서 에어컨 물과 빗물을 받아 마시고 있을 때,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희망버스처럼 도장공장 정문을 뚫을 수 있었다면... 그런 회한이 남아요. 그리고 재능과 전북버스도 얼마나 절박하게 싸우고 있는지 아시죠.
그리고, 한진 싸움하면서 가장 무거웠던게 비정규직 문제였어요. 조선소 하청노동자는 정규직 3배예요. 엄청 많죠. 이 문제, 노조도 제대로 제기해 본 적이 없어요. 초창기에는 ‘하청 외면하는 정규직 밥그릇 싸움’이라는 맨션도 많이 받았어요. 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청노동자라고 하면 꼭 보냈어요. 노동운동하면서 저의 가장 무거운 짐은 비정규직이거든요.
비정규직 싸움, 다 같이 싸워 이겨본 경험이 없었어요. 힌진 정투위 조합원들이 당장 해야 할 일은 비정규직 싸움에 나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하청 노동자들은 우리의 정리해고 싸움을 보면서도 일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비정규직의 연대 없는 파업이 얼마나 약화가 되는지 눈으로 봤어요.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 파업과는 동떨어져 일을 하는 비정규직들, 이제 그 사람들을 봐야해요.
# scene5. 소금꽃나무가 희망버스에게
1차 희망버스가 왔다 가면서 어렴풋한 희망을 봤어요. 그 전에는 아무것도 미련이 없었거든요. 사실 트위터로 “이제는 누군가가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등의 소름끼치는 쪽지를 많이 받았어요. 희망버스의 여러분이 없었다면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을거예요. 그런데 저는 희망을 봤고, 쪽지에 “너나 죽어라”고 답장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크레인 위에서의 매일 매일은 기적이었어요.
한진중공업 싸움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 만들어냈던 너무 행복하고 기적 같은 싸움이예요. 우리가 크레인을 보며 울고, 강정 바위를 보며 울었던 간절한 마음들. 흩어지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희망버스에서 모였던 마음들, 학생인권조례나 다른 투쟁사업장 싸움도 지켜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분야를 떠나서 우리가 밝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천민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어요. 그것이 끝나는 날까지 희망버스는 어디든 달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요.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이제는 우리 힘으로 끝낼 때가 왔습니다. 그런 힘으로 우리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듭시다.
지금도 송경동, 정진우씨가 아직 나오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 분들을 이야기할 때면 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 분들이 나오면 우리 희망버스 모아서 거하게 뒷풀이 하는 자리 만들었으면 합니다.
투쟁의 현장에서 건강하게 다시 뵙기를 바라며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출처 : 참세상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4380#
첫댓글 강의 잘 들었습니다.^^ 희망버스와 김진숙, 그리고 송경동 시인이 있어서 그나마 한 해를 넘기는 것이 허망하지만은 않네요. 난 뭐했나?
소금꽃을 읽고 울었던 지난여름이 생각납니다. 김진숙씨가 똑같이 죽어버릴까봐...많이 걱정되고 안타까웠는데 끝까지 살아줘서 고맙고 다시 움직여줘서, 우리에게 희망의 꽃이 되어 주어서 고맙네요~~
아직 몸이 많이 불편할텐데, 학생들과의 강연 약속이 김진숙씨를 서울로 이끌었군요. 지난 24일 토요일에 부산구치소에 갇혀있는 송경동 시인을 남전 선생님과 또 한 분의 선생님이랑 함께 면회하고 왔습니다. 아직도 다리도 불편하고 목디스크에 힘들어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더없이 맑고 밝았습니다. 내년에는 세상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 펼쳐지기를 마음으로 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참여로......
잘 읽었습니다. 그때가 어제같은 나날들..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