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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수필
생태문학으로 진화되어 가는 산림문학
- <산림문학>, 봄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동양의 시법에 '격약 불로' 格弱不老란 말이 있다. 수필은 품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윤오영은 내용이 저속하면 속문이라 하고, 문장이 좋지 않아 표현이 졸렬한 글을 악문이라 했다. 속문과 악문이 결합된 수필을 맹수필이라 부르면 어떨까? 수필의 시대에 수필로서의 격을 갖추지 않은 맹수필류의 글이 넘치는 것은 아마도 수필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인 듯싶다. 수필이 대중화되는 추세에 따라 수필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은 좋으나 격이 낮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수필의 격이 낮아지는 요인은 수필가에게만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쓰는 사람보다 편집자, 독자, 비평가에게 더 책임이 크지 않을까. 특히 비평가의 책임이 막중하다 할 것이다. 수필의 격을 냉정하게 재단해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리라 본다.
'이단 불심'理短不深이란 이치가 짧으면, 그 뜻이 깊지 못하니, 내용이 없는 부실한 글이 됨을 이르는 말이다. 사상과 철학 즉 정신적인 요소가 결여되면 결국 잡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수필은 신변을 수필적 소재로 하여 쓰되, 반드시 문학적 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 수필가의 개성적 시각이 없는 흔해빠진 일상사가 나열된 수필이 아직도 문학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는 현실은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동양의 시법에 나와 있는 두 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볼 때, 수필은 지식의 나열이나 사상의 조술에 진의가 있는 것도 아니요, 글로 씌어진 지식의 축적은 더더군다나 아닌 것이다. 또한 단순한 생활의 기록이거나 신변의 잡사를 보고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수필은 보이지 않는 본질을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II. 클릭
글을 쓴다는 것에는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예술성이란 의미의 각색이다. 작가의 인식이 녹아 있는 메시지의 미적 조형성이 결국 수필의 격을 결정짓는 축이다. 이것은 단순한 직관이나 관찰로는 수필이 일상성을 못 벗어난다는 의미다. 문학성은 제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작가가 얼마나 개성을 참신하게 탄력적으로 발휘하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작가의 지적 치열성도 요구된다. 의미를 논리적으로 정돈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객관적 지식이 배제된 창의적 인식이 주된 역할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좋은 수필을 쓰는 사람은 거의 계속 좋은 수필을 쓴다. 작수필유법불가무법역불가(作隨筆有法不可無法亦不可), '수필은 쓰는 법이 있다고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법이 없다고 해서도 아니 된다'고 하는 수필의 구성적 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갖춰진 결과로 여겨진다.
김은희의 <난쟁이 소나무>란 글에서 작가는 ‘난쟁이’라는 상징을 잘 활용해서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었다고 하겠다. 물론 이 단어의 선택이 수필의 품격도 살렸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글이기도 하다. 사랑의 개념에서 우리는 ‘소유’를 종차로 내세우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구체적인 경험을 가지고 말하고 있어 공감을 준다.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인문학적인 사유의 중요성을 되짚어보게 하는 측면에서 내용적으로 의미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좋은 수필은 시대정신을 이끄는 수레여야 한다. 탄탄한 논리적 구조와 대상을 보는 그만의 개성은 김은희 수필의 격을 한층 드높였다. 도입부의 첫 문장, '육년 전 전라남도 도초도로 여행을 갔다. 그곳은 해안선을 따라 울창한 소나무슾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진술은 평범하지만 이 글의 제재를 언급함으로 해서 발단부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소화했다고 하겠다. 작가는 결국 탐스러운 소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 소유하고 싶은 욕심을 갖는다. 다섯째 단락의 네 번째 문장 ‘결국 내 욕심에 소나무의 행복을 빼앗은 것이다’라는 진술이 긴장미를 준다. 작가는 소나무를 소유하고 싶은 욕심에 뿌리 끝에 달려있는 흙 한 줌과 함께 소나무를 자신의 농장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이런 서사 장치는 도입부터 문단의 연결성을 강화해 수필의 전개가 긴장감 속에 나아가게 한다. 대상에 잡힌 의미를 반성적 성찰이라는 수필의 특성과 잘 연결해서 전개해나가는데, ‘난장이 소나무’란 제재를 통해 인간의 소유욕을 비판하면서 생물의 회귀본능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의 솜씨가 돋보인다.
난쟁이가 된 소나무를 가까운 곳에 있는 섬으로 데려 가야겠다. 최소한 비슷한 환경이라도 만들어 주어야겠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한 바구니 담아서 그곳에 두고 오리라. 그 마음이 거름이 되어 적응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 육년의 아픈 세월은 보상할 수 없어서 안타깝다. 난쟁이에게 다짐한다. 더 이상 식물들의 보금자리를 이탈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모든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바라보는 것임을, 난쟁이 소나무에게 아픔을 주고서야 무지했던 행동을 뉘우친다.
- 김은희의 <난쟁이 소나무> 중에서 -
작가의 반성적 성찰이 잘 드러나는 진술, ‘난쟁이에게 다짐한다.’라는직설적인 표현은 특히 수필의 결말부에서 불필요했다. 작가가 직접 반성을 했다는 것을 독자에게 직설적으로 진술하는 것보다는 의미의 재구성을 통해 독자들이 작가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구나 하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게 하는 것이 더 문학적인 기술방식임을 알아야겠다. 또 하나 수필의 품격은 직접적인 진술, 즉 ‘전달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전달차단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감안할 때, ‘결말부에 가서 '무지했던 행동을 뉘우친다.’는 문장도 사족이다. 문학성은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자는 인문학적 사유는 공감이 가고 설득이 되지만, 그런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진술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전략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문학적 감동은 연상과 상상을 통해 나온다. 수필은 사람이나 사물, 사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자, 해석이다. 주제를 일반화하기 위한 예화와 삽화의 적절한 활용이 주제 구체화를 도왔고, 반성적 성찰이 담긴 안정감이 있는 결구 처리로 메시지는 잘 전달되었다. 인문적 사유를 기반으로 쓴 수필이라 내용적인 면에서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박용규의 <수목장의 효시>는 임학자 오재 김장수의 외길인생을 중심으로 해서 자연장의 기원을 파헤치고 있는 글이라 정보적 가치가 큰 글이다. 이런 수필을 우리는 인물수필이라 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와 밀접한 우리네 인생길에서 특수한 장례문화의 일면을 다루고 있다는 데서 문학적 가치를 찾을 수도 있다. 좋은 수필은 좋은 제재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어 좋은 제목에서 결정되는 법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재는 주제의 재료여야 한다. 문학적 글의 제목은 제재로 설정하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제목을 지을 때, 주제가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수필은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다양한 장례법을 소개하고, 바람직한 수목장법을 찾아나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문제는 제목의 직접성이다. 멋도, 맛도, 향기도 진하게 우려내려면 제목 설정이나 주제의미화에서 ‘간접성’을 중시해야 한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이 놓치기 쉬운 ‘주제제시의 간접화’는 앞으로 수필창작에서 유의해야 한다. 작가가 제자로서 스승의 훌륭한 업적이나 공적을 문학적 소재로 삼고, 탄신 100주년에 즈음하여 스승을 추모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결말을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추모시에 담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문학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최초 인간의 이름인 ‘아담’이란 그리스말로 흙이라는 뜻이다. 흙으로 돌아가 어떻게 하늘나라로 올라 갈 수 있을까? 수목장으로 하여 나무 밑에 묻히게 되면 우리의 육은 원래 태어났던 흙 속으로 사그라지고 그 안에 남아있는 영은 같이 살고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하늘나라로 귀천하게 되는 것이다.
나무는 성스러운 존재이다. 그 밑에 잠들어 그 나무를 통해 귀천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어느 누구에게나 다가올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내 인생을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박용구의 <수목장의 효시> 중에서 -
'흙‘과 ’나무의 관계 속에서 귀천의 의미를 발견하고, 나무의 성스러운 존재에 기대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 위 인용 예문은 주제의 간접화를 돕는 부분이다. 주제가 생활에 여과되면서 도출됨으로써 주제의식이 구체화되고, 이것이 문학적 향기를 발하는 것이다. 이 글의 문제점 역시 제목에 노정되어 있다. 문학의 원리는 간접화에 있다. ‘우회성’이야 말로 무학의 향기를 가져올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원리를 알았다면, 제목을 ‘수목장의 효시’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수목장’으로 하는 것이 훨씬 문학성을 주는 데 도움이 된다. 글의 주제덕목이기도 한 ‘수목장의 효시’가 제목에 제시된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제목에 부제를 단 것도 추천할 만한 것이 못된다. 글의 요건으로 네 가지 성질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조형성’이다. 결국 모든 글은 그것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이면 그냥 딱 봐도 첫인상이 수필로 보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 수필가들이 제목을 지을 때, 부제를 쓰지 않는다. 부제를 쓰는 순간, 수필의 조형성과는 멀어지고, 그 글은 수필이 아니라 논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차라리 ‘수목장과 김장수’로 제목을 정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문학적인 글을 쓸 때는 너무 친절한 것을 경계해야 한다. 주제를 제목만 봐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금물이다.
옥형길의 <가시철조망>은 우리 사회의 문제라 할 수 있는 세대갈등, 분단갈등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해낸 수필이라 하겠다. 창작 과정에서부터 ‘발견’과 ‘상관화’의 원리가 적용되어 이 수필은 본격수필의 틀을 갖추고 있다. 수필의 발단과 전개부에 관련 사건 등의 삽화를 넣은 것도 좋았지만, 전개부를 넘어가면서 철조망을 우리 주변의 보이지 않는 철조망으로 전이시켜서 문학적 형상화로 마무리해낸 전략도 좋았다. 수필은 비판적 사고가 잘 드러나는 부류의 글이다. 현실 상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만으로는 참신한 수필을 쓸 수가 없다. 작가는 그냥 철조망도 아니고 가시철조망을 통해 현대사회의 특징인 단절과 소외 그리고 갈등을 주제의식으로 잘 의미화해내었다. 발단부에서 휴전선 철조망을 배치하는 등 구성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했다. 이 글에 소개된 예화는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적 구성이라고 봐야겠다. ‘소유 영역의 표시’로써 철조망에 대한 해석 역시 탁월한 인식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작가의 메시지에 강한 작가적 인식이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이 수필의 맛은 톡 쏘는 사회성과 시대성에서 나온다. 각박한 현실에 대한 근거 있는 비판은 글에 탄력을 주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 요소가 된다. 간접화된 메시지를 통해, 문장을 따라가면서 얻을 수 있는 문예적 향취를 음미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가시철조망’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가 미적 울림통을 울렸다고 하겠다. 제재를 제목으로 설정한 것이 문학성을 견인하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이문자의 <나, 물이라네>는 우의적인 수법으로 쓴 수필이다. 구성은 대단히 완벽하다. 이런 구성은 수필에는 마치 이렇다 할 구성이 없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물의 관점에서 진술을 해나간다는 점에서 이 수필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 따라서 물의 입장에 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간접화의 문학원리는 자동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작품의 미적 효과를 위하여 의인화의 기법을 활용했다는 것은 오늘날 수필문학의 새로운 변모를 위한 우리 수필가들의 노력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우의적 원리를 적용해서 창작되어졌다는 사실은 수필이 적어도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는 글인 한, 오늘의 뜻 있는 수필가들에게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우회성 자체가멋을 내고 맛을 주는 것이다. 물이 가진 정체성을 반추하는 데 있어서, 이 작품은 물에 대한 묘사와 비유가 서정적인 정취를 자아내고 있어 공감을 준다고 하겠다. 물에 담긴 의미를 유추해내어 인간사와 결부시키는 작가의 예리한 인식능력이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한다. 현대 수필에서 문장 기능은 생명적이다. 소설의 경우는 인물의 창조나 사건의 조직화로 주제전달이 가능하지만 수필은 주제나 제재를 기본 요소로 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수법이 감동 창출에 있어서 중요하게 기능하는 법이다. 이 작품의 문명비판은 눈맛까지 준다.
언제부터인가 내 임무인 ‘물의 순환’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됐다네. 지구가 걸핏하면 앓아눕거든. 지구훼손의 주범이 사람이라니 될 법한 소린가. 창조주가 분기탱전할 노릇인 게지.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원망이 하늘을 찔러도 내 동정심만으로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네. 인간이 자초한 지국 온난화, 맨붕에 이른 대기가 걸핏하면 정상쾌도를 이탈하지 않나. 그 바람에 나도 그만 정신줄을 놓을 때가 비일비재거든. 태초에 삼라만상을 이롭게 하라는 분부를 받고 지구상에 왔거늘. 가뭄 땐 비 한 방울 모으기 힘들다가 수마로 지탄받게 될 줄을 어찌 알았을까. 난 순환의 법칙을 따를 뿐이네. 인간의 무분별이 저지른 죄과를 내게 전환시키지 말게나. 제발 ......
- 이문자의 <나, 물이라네> 중에서 -
위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물을 의인화하여 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파괴 앞에서 자연은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 인간이며, 이런 인간의 오만 때문에 물은 본래적 가치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다. 어머니의 정한수에 담긴 물의 의미도 공감과 감동을 준다. 순환이란 자연의 법칙을 잘 따르지 못해 일어나는 제 현상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하는 전략으로 작가는 결말부를 ‘동면에 든 나목에 부지런히 수액을 올려 나도 부지런히 거동에 나서야겠네. 지구별의 찬란한 봄, 아니 그대들을 위해서 말이네.’라는 물의 대사로 장식했다. 이렇게 작가가 지구별의 생태계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작가정신의 발로라 하겠다. 물이 주는 메시지와 특성 그리고 입장 등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데, 한 가지로 집중해서 전개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인간중심주의라는 틀을 벗어나 타자의 관점으로 사물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문학적 사유에 박수를 보낸다. ‘지구훼손의 주범이 사람이라니 될 법한 소린가’라는 표현으로 에코필리아적 가치를 고양하고,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도모한 것은 매우 적절한 주제화전략이라 하겠다.
조철형의 <숲속의 춤판>은 진한 사부곡을 주제의식으로 내세운 수필로서, 산림문학회 K회원의 휘모리 공연을 통해 아버지의 숲사랑을 되새기는 글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외로운 나무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며 뒷산에 여러 나무를 심고 슬하의 자식처럼 나무를 가꾸었다. 가슴 찡하게 울려오는 스토리에 실려 오는 작가의 진한 사부곡은 에코필리아의 향기를 안고 발단부터 결말까지 독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아버지가 추는 숲속의 춤판을 고승의 승무에 비유하는 데서 작가의 기량이 빛난다. 아버지의 춤판을 바라볼 때마다 넋이 빠졌던 그때를 회상하는 모습에서 그가 숲에 감사를 드리는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실향민을 위한 작은 음악회를 통해 아버지의 숲사랑을 전달하고자 하는 전략은 조철형 씨의 디테일한 구성에 힘입어 성공적이다. 숲속의 춤판은 비장함을 안겨준다. 숲속 춤판의 상징성 속에는 숭고성이 번뜩인다. ’곡우가 되면 산에서 폭설에 난을 당한 설해목을 정리하고, 간벌과 나뭇가지를 전지했다‘고 하는 진술은 생태적 상상력에 숨어있는 아버지의 숲사랑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작은 음악회 휘모리 공연에서 아버지를 연상하면 가슴이 달아오른다는 작가의 감정처리도 비장미를 야기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비장미와 숭고미 등이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하면서 무거운 미적 울림을 만들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III. 로그아웃
수필에는 어떤 정해진 틀이 있다고 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어떤 틀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수필은 나름대로 수필의 형식이 존재한다. 비문학적 에세이의 특징인 설명적인 글은 수필의 본 맛을 주지 않는다. 몇몇의 글은 독자의 의식 속에 어떤 사실을, 다시 말해 객관적인 지식을 좀 얻었다는 느낌만 줄 뿐, 이성이나 감성에 호소하는 주제의 서정적 구체화나 그 미학적인 훈기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런 글들이 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된다는 것은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수필은 문학이기에 ‘격’을 요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봄호에 실린 수필들은 수필 전문지에 실린 글답게 작은 감동을 주었다. 산림수필이 생태수필로 발전되어 가는 징후에 필자는 안도감을 갖는다. 탈북민의 정체성을 다루고 있는 윤경덕의 <경계인들>은 분량상 다루지 못해 아쉽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 정해진 어떤 법이라는 것을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메시지를 어떤 방법에 의해 미적으로 구체화할 것인가 하는 의미의 조형화를 말한다. 수필은 조금이라도 지식의 냄새를 풍기면 안 된다. 설명적인 언술로 주장만 늘어놓는다면 굳이 문학적 에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은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는 측면에서 수필로서의 격, 즉 문학성을 유지해야 한다. 사상과 철학 같은 정신적인 요소가 문예미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겠다. 독자들보다 더 잘 알고 있는 특정 분야, 즉 산림에 관한 지식의 나열만으로는 품격이 살아나지 않는다. 사과 속의 영양분처럼 정서화된 지성이 작품의 배면에 아련하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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