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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주일설교.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장 1~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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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기준으로 종교라고 인정 받으려면 세 가지의 구성 요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창시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 교리가 되는 경전이 있어야 하고, 셋째, 신도들의 모임인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이단이나 사이비는 절대로 종교집단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형적인 모순 집단으로 종교 흉내를 내는 불쌍한 무리들 일 뿐입니다.
종교학에서는 종교를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로 구분 합니다. 고등 종교에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을 말하고, 하등 종교로는 무속신앙, 점술, 일본의 신사 같은 것이 있습니다.
고등과 하등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경전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기독교에는 성경이, 불교에는 불경이, 이슬람에는 꾸란이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경전을 갖추었다면 차원이 높은 고등 종교로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라고 불릴 만한 조건만 갖추면 무조건 다 종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역할과 책임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건전한 종교가 되려면 가장 먼저 인간들의 생로병사와 인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변함 없는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의 짐을 무겁게 하고 인생을 파괴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시대가 만든 사교 집단일 뿐입니다.
그 다음으로 종교가 종교다우려면, 사람이 사람다움으로 변화되어 가게 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윤리적 교훈이 있어야 하며 이를 뒷받침 하는 매우 높은 도덕적 능력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타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인정 받고 배울 만한 가치를 보여 줄 수 있는 최고 높은 수준의 집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세상을 염려해 주고 품어 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염려 꺼리가 되었다는 조롱을 받는 시대입니다. 기독교인들 향하여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들 이라고 비난 합니다. 왜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복합적인 문제가 있지만, 가장 중심적인 원인에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거룩한 성도들의 외식(겉치레 신앙)하는 신앙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외식하는 자들을 표현 하기를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마 23:27), 혹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자들”(마 23:25) 이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겉과 속이 다르고 도무지 언행일치가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오며,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외식하는(겉치레 신앙) 자들이라고 많은 질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외식하는 자들과 대립 하시는 오늘 본문 내용을 살펴 보시면서, 나 자신 스스로는 외식하는 언행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2절을 읽어 드립니다.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등장했습니다. 제가 지난 번 신, 구약 중간기 역사 설명 드리면서 마카비 혁명과 하스모니안 왕조가 약 100여년간 있었고, 이 때에 엣세네파, 바리세파, 열심당(젤롯당) 등의 유대교 분파가 생겨 났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바리새파는 예수님 탄생 이전에 생겨난 유대교의 분파중 하나입니다.
‘바리새 (원어로 파루쉬 הפרושים)’ 라는 단어는 ‘구분되다’, ‘분리되다’라는 뜻으로 이방인과 부정함에서 분리되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고 지독할 정도의 율법주의자들 이었으며, 모세의 율법에 담겨 있는 613개의 계명 뿐만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으로 이어져온 생활의 모든 습관들까지도 매우 철저하게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문자 그대로 글을 기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성경을 필사하여 보존하고, 성경을 연구하여 해석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왕이나 대 제사장 수하에 있으면서 공문을 작성하는 일과 재판과 관련한 율법적 판단에 대한 의견을 내 놓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은 ‘율법학자’였다고 이해 하시면 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백성들로부터 매우 높은 존경을 받았고, 일반 서민들은 이들에게 율법적인 다툼과 분쟁에 있어서 모든 이해와 해설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이들의 말이 거의 실정법이고 규정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나와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고 음식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습니까?”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정해진 규칙인데 왜 어기느냐 라는 시비 아닌 시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진짜 법이었을까요? 모세의 율법에는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들이 손을 씻어 정결하게 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정결하게 손을 씻고 먹으라는 규정은 없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만들어낸 사람의 전통이고 자기들만의 가르침 이었습니다. 율법도 아닌 사소한 일을 강제 규정으로 못 박아놓고 무조건 지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비 상식적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칭해서 말한 것은 우회적으로 예수님을 비난하려는 의도 였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비가 예수님에게 통할리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원한 반격이 나오는 3~6절을 읽어 드립니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아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장로의 전통’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예수님은 “너희의 전통일 뿐(너희들이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일언지하에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라고 강하게 질책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이 임의 대로, 억지로 만들어낸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내세우면서 오히려 하나님이 내려 주신 계명들은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는 율법 주의 자들의 오류를 지적하셨습니다. 속이 시원한 사이다 같은 말씀 이십니다.
예수님은 추가적으로 한 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 하십니다. 성경에는 부모를 공경하여야 하며 부모를 비방(모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고 했는데(출 21:15-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 21:17-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너희들은 하나님께 드림(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도론-선물, 고르반-예물 제물-미느하, 서원물-네데르)이 되면(예물 드리고 난 후),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였다고 생각하여 부모를 외면해 버리면 그것이 잘하는 일이냐,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이냐 라고 따져 묻습니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언급 하시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여야 된다는 말씀이 생각 납니다. 정작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을 잘 지켜야지, 이거는 하고 저거는 안하고, 이거는 했으니까 저거는 안해도 그만이고, 이거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반드시 지켜야 하고, 다른 것은 사소한 것이니 그냥 묻어 두자는 식으로 선택적으로 행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자가 아니요 율법을 기만하는 자요 하나님을 속이는 자라고 말씀 하신 겁니다.
속이 뻥 뚫리는 듯하고, 잘난 체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코를 납작 눌러 놓은 말씀입니다.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라고 지적 하시면서, 하나님의 전통(명령, 규례, 법도, 계명)을 사람의 전통(장로의 전통 이라고 우기면서)으로 바꾸어서 강요하는 오만하고 어리석은 행위를 가차 없이 공격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떨 때 사람들을 강대강으로 상대하여야 하는지 예수님이 잘 보여 주셨습니다.
괜히 한 마디 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더 강한 어조로 말씀 하십니다. 7~9절을 읽어 드립니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아멘.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 29장 13절 원문 말씀을 읽어 드리면.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 하는 것처럼 겉 모양을 잘 갖춘듯이 보였지만, 그 모습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내세운 장로들의 전통, 예수님이 질타하신 사람의 전통, 그리고 이사야서에 기록된 사람의 사람의 계명, 전부 같은 맥락입니다. 겉 모습은 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죠.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 라는 말씀이 참으로 실감 나지 않습니까? 마음은 하나도 없이 입으로만 생활하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매우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외식(헬-휘포크리타이)’이라는 용어는 ~것처럼 꾸미다, 가장하다, 속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헬라 문화 양식에서는 배우나 연기자를 뜻했습니다. 정해진 각본에 따라 관중을 의식하여 말하고 몸짓을 하지만, 정작 그 마음 안에는 타인으로부터 관심 받고, 돈을 많이 버는 수단이라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척, 착한 척, 여유로운 척, 관대 한 척, 경건한 척, 겸손한 척...이런 모든 행위 들은 그저 연극에 불과했습니다. 누가요? 그토록 전통을 내세우며 따지고 들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평소 가르치시면서 외식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을 무수히 많이 하셨습니다. 몇 가지를 말씀 드리면,
①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5)
②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1:28)
③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외식하는 신앙의 모습이 만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신앙의 선두에 서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가장 외식하자는 자들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일반 백성들의 눈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대단히 율법을 잘 지키며 거룩과 경건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속이는 거였고, 속고 있는 거였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특정해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하시면서 엄청난 질타와 책망을 쏟아내셨습니다. 화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무려 6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23장을 한 번 읽어 보시면, 사자후 같이 토하셨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거칠게 말씀하셨음을 느끼실 겁니다. 23장 마지막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라며 정말로 무섭고 소름끼치도록 말씀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2천년 전에만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물론이고, 지금을 살아가는 현재의 시대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계속해서 외식하는 자들의 행태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겁니다.
우리 각자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남의 눈을 의식해서 잘하고 있는 것처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꾸미고 가장하고 속이는 일을 언제 든지 할 수 있는 위험 상황에 노출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예수님이 질책과 책망을 해 주셨듯이,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 몸 안에 내주 하고 계시는 성령님이 그 역할을 대신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외식하는 나쁜 자세를 갖게 되는 원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 명확하게 알려 줍니다. 디모데전서 4장 1절과 2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아멘.
성령을 의지 하지 으면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믿음에서 떠나면 악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미혹해 옵니다. 성령이 떠나자 악령으로 인해 번뇌 했던 사울왕의 경우를 잘 기억 하실 겁니다. 미혹 당하기 시작하면 더러운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라 죄의 사슬에 묶여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닙니다.
상태가 악화 되면 어떤 권면이나 진리의 가르침도 듣지 아니하는 양심의 화인 맞은 상태에 이릅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삶이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알려준 외식하는 자의 삶의 과정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의 끝은 불행과 몰락과 피폐함과 멸망 뿐입니다.
이렇게 9절까지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이들이 떠나자 제자들에게 가르침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 다 함께 10, 11절을 읽겠습니다.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아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우리가 먼저 눈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썩고, 상하고, 더러운 음식이라면 당연히 먹지 않고 버립니다. 입으로 넣는 음식은 먹을만 하다는 안심이 있기 때문에 먹는 것이며, 이것을 젓가락, 숟가락으로 먹든, 그냥 그릇채 들고 마시듯이 먹든, 손으로 집어서 먹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먹는 방법 때문에 탈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잇습니다. 19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에서 도사리고 있다가 불쑥 불쑥 우리의 입으로 튀어 나옵니다. 사람의 말은 곧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으로 말씀 하신 의미는, 쓸데 없이 음식 먹는 방법 가지고 전통이니 뭐니 없는 말 지어 내서 강요하지 말고, 너희들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그 악하고 더러운 마음 밭을 깨끗이 할 생각부터 하라는 권면이자 경고의 말씀 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불쾌하고 기분 나빠져서 돌아갔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내면에 숨겨진 나쁜 마음들이 들켜버렸다는 떨림과 두려움 분명이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일반 사람보다 더 악하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지도자로 있으면서 외식에 사로잡힐 때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에 책망한 것입니다.
외식하는 사람은 맹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지도자가 맹인이라면, 자신이 맹인 이면서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게될 것입니다.(마 15:14)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라고 하셨습니다.
천국 가는 길을 인도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은 물론 이거니와 남들도 천국 가는 것을 방해 한다면, 이것은 사탄 그 자체입니다. 왜 예수님이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하시면서 이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했는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말씀들이 지도자들에게 선포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아니하고 목사인 저부터 정신 바짝 차리겠습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미혹이 외식입니다. 왜냐하면 외식은 천국 가는 길을 막는 사탄의 최고 전술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성경 읽는 것과,교회 가는 것과 봉사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막을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마지막 무기가 바로 외식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외식으로 하게 하고 성경을 외식으로 읽게 합니다. 교회 출석을 외식으로 하게 하고, 봉사를 외식으로 하게 합다. 이런 유혹과 미혹 속에 걸려 넘어지게 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같은 위선자들로 변질 되어 버립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무엇이 되기보다는 어떻게 보이기를 더 원한다는 데 있습니다. 행복하게 되기보다는 행복하게 보이기를 더 원하고, / 선하게 되기보다는 선하게 보이기를 더 원하고, / 거룩과 경건으로 살기 보다는 그렇게 보인다고 칭찬 받기를 원한다는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실제로는 하나도 진척이 없으면서 잘 하는 척, 다 되어있는 척을 하면서 폼 잡고 있는 교만한 자세와 언행, 이것이 외식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체면 문화가 너무 심합니다. 남들 눈을 의식하는 행동을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허세 문화, 자랑 문화, 사교 문화가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학벌, 지연, 학연으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고질 적인 행태가 끊어지지 않고 나타납니다.
문제는 이러한 나쁜 사회적인 상황이 교회 안에서도 깊숙이 파고 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그저 사교 생활로 바뀌어 가고, 그저 겉치레의 체면이 세워 주는 자리 하나쯤 차지하고 있으면 마치 다 된 것처럼 자세나 언행들이 뻣뻣해 집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하나도 다를게 없습니다. 오히려 더 교묘한 형태의 외식 주의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스스로가 맹인인지, 심판 받아 멸망 당할 자인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인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 하는 자인지, 분별을 하나도 못하고 있습니다. 깨우치지 못하고 끝까지 고집 부리며 이렇게 외식하는 자로 살아간다면 너무나도 불쌍한 자들이 아닙니까?
외식하는 모든 문제의 해결과 해답은 성령입니다. 오직 성령 충만으로만 돌파가 가능 합니다. 성령에 완전히 붙잡힌 자로 살아가면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진리에 이를 수 있고, 성령을 거부하고 독단 적으로 살아가면 외식하는 자들의 앞잡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 누가 외식하는 자인이,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 할 수 있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일상의 말을 살펴보면 1차 진단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말이 곧 마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이 경박하고, 무례하고, 분노하고, 자랑하고, 판단하는 말들을 수시로 하는 사람은 외식하는 자일 가능성이 50% 이상입니다.
두 번째 진단은 회개와 기도생활, 그리고 순종입니다. 이 세 가지가 수시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예배)하며 삶의 자리에서 열매 맺어 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일 가는성이 매우 높습니다.
누가, 무슨 조언이나 권면이나 경고를 해도 일절 무시하고, 화내고,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잘 한 행동이라고 오판하는 사람은 외식하는 자일 가능성이 99% 이상입니다. 제가 왜 1%를 남겨 놓았냐면, 그 1%를 지렛대로 하여 우리 하나님이 그 영혼과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외식이란 누룩과 같아서 그냥 있지 않고 점점 부풀어 번져가기 때문에 신앙인에게 가장 무서운 독소 입니다. 맑은 물에 커피 한 방울 떨어지면 금방 색이 변합니다. 두 방울 세 방울, 계속 될수록 더욱 색은 진해 집니다. 외식은 맑은 물에 떨어지는 물감처럼 금세 우리 몸 곳곳으로 퍼져 가고 깊숙이 자리잡는다는 사실을 기억 하십시오. 그 물 자체를 통째로 다 버리고 새 물을 담지 않는 한 그 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과 양심을 다 비우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거기가 성령님이 채워질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외식하기 십상인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져야만 외식하는 유혹과 미혹이 더 이상 침투 하지 못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들어 있는 부분을 다시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아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들로 규정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인하여 지금 이 시간에 우리 각자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게 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외식하는 자인지, 아닌지 판단 하고 계시며, 우리 마음과 양심을 통해 권면으로 말씀 하고 계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듣게 될 것이고, 양심에 화인 맞지 않은 사람은 성령으로 살기를 결단 할 겁니다
오늘 선포된 말씀이 어느 누구만 들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판에, 내 양심에, 내 입술에 선포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십시오.
그리하여, 오직 성령으로 분별하고, 오직 성령으로 말하고, 오직 성령으로 행동하는 삶을 살아가시려고 최선을 다하셔서, 일평생 입술로 뿐 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살아가시는 거룩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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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경건의 모양만 있고 거룩함과 열매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성령의 인도 함을 받아 겉과 속이 깨끗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 하여 주옵소서. 삶으로 모범을 보여 주시고, 행하도록 인도 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