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말 안 하면 '쫓겨나는' 대학
수업 시간에 말 안 한다고 학생을 쫓아내는 대학이 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비싼 학비 내고 학교에 다녀주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해야 하는거 아니야? 요즘 세상에 다니겠다는 학생을 쫓아내는 학교가 어디 있어?"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런 학교가 세상에 존재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학교에 오기 전까지는.
나는 미국 뉴멕시코 주 산타페의 세인트존스 대학을 졸업했다.
이 대학은 리버럴 아츠 칼리지로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 스와 뉴멕시코 주 산타페라는 두 도시에 각각 캠퍼스가 있다.
뉴욕의 세인트존스 대학교와는 다르다.
세인트존스는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같은 유명한 아이비리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애머스트, 스미스 같은 유명한 리버럴 아츠 칼리지 또한 아니다.
가장 적절한 표현은 아마 '특별한 리버럴 아츠 칼리지'쯤 될 듯하다.
세인트존스는 미국에서도 그리고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도 특별한 커리큘럼으로 많이 알려졌다.
그 커리큘럼이란 바로, 4년 동안 고전 100권을 읽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고전 100권만 읽는 것은 아니다).
세인트존스에서는 고전을 읽으며 토론하는 수업이 4년 내내 계속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말 말을 안 한다고 학생을 쫓아낼까?
진짜로 쫓아내나?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쫓아낸다.
정말로 세인트존스에서는 학생이 수업 시간에 말을 안 하면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공포의 직사각형 테이블
대학생이 되기 전, 나는 '대학' 하면 일인용 접이식 책걸상이 빼곡한 커다란 강의실을 상상했다.
그 일인용 책걸상은 내 상상 속 대학의 로망이었다.
배낭이 아닌 숄더백을 메고, 무거운 전공 책을 안고 교실에 들어가 일인용 책걸상에 앉아 모두 함께 저 멀리 강의실 맨 앞에 있는 커다란 칠판과 교수님을 바라보는 것.
하지만 세인트존스에 그런 강의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선 어떤 교실에 가든지 그 안을 꽉 채우는 커다란 직사각형 테이블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커다란 직사각형 테이블과 벽에 걸린 분필 칠판이 세인트존스 교실에 있는 학습 도구의 전부다.
입학하기 전에는 그런 교실의 모습을 보고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때는 이 직사각형 테이블의 공포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이 학교의 학생이 되고 보니 제일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 바로 수업 때 학생들끼리 서로 얼굴을 마주 봐야 한다는 두려움이었다.
학생끼리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 왜 두려울까?
수업시간에 졸지 못하게 감시하게 되니까?
이 공포의 테이블에 앉아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고 수업을 하는 이유는 누가 조는지 안 조는지 감시하려는 게 아니다.
이 테이블의 목적은 따로 있다.
세인트존스에서의 수업이 진정한 수업이 될 수 있도록 이 테이블이 교실에 있는 것이다.
이 직사각형 테이블은 세인트존스의 수업이 '授業' 도 아니고 '受業'도 아닌, '修業'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
세인트존스에서 수업이란
첫 번째 수업은 줄 수, 업 업으로 학업이나 기술을 가르쳐'준 다'는 뜻의 수업이고, 두 번째 수업은 받을 수, 업 업으로 학업이나 기술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의 수업이다.
학생들이 '수업 듣고 있어' 할 때 받는 수업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수업, 즉 주는 수업과 받는 수업은 내가 어려서부터 상상한 일인용 책걸상에 않아 강의실 칠판을 바라보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세인트존스에서의 수업은 이 두 가지, 주고받는 수업이 아니다.
바로 마지막 종류의 수업이다.
이 수업은 '닦을 수'를 쓴다.
학업이나 기술을 익허며 닦는다는 뜻이다.
세인트존스의 수업은 이런 의미이기 때문에 교실에 교수님과 칠판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일인용 책걸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는 무섭고 거대한 테이블이 있는 것이다.
이 테이블에 앉아 학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토론을 통해 함께 학업과 기술을 닦는다.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되는 이유는 여기 있다.
토론 수업이 전부인 학교에서 학생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뜻으로 비칠 수 있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조용한 한국 학생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쫓겨날 위기에 처했었다.
(학생이 쫓겨나는 데는 이 이유 말고도 다양한 이유가 있다. 참고로 내가 쫓겨날 뻔했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였다.)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 중에서
세인트존스를 소개합니다
조한별 지음
첫댓글
쫓겨나기전에 웃으며 도망가야 겠네요 ㅋㅋ
조기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