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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장코뱅 추천 4 조회 453 26.05.23 07:26 댓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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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05.23 07:34

    첫댓글 즐거운 가정의 달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 26.05.23 09:04

    네, 알겠습니다.

  • 작성자 26.05.23 08:41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7:46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 마치 기름이 동난 등블이 마지막 자기 심지를 태우며 희뿌연 연기와 불꽃을 일으키둣, 예수께서는 더이상 항거할 수 없는 죽음에의 기운과 영적인 고독 앞에서 마지막 기운을 돋우어 성부 하나님께 절규(絶叫)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 )히브리어와 아람어 음역에 따른 시 22:1의 인용으로서 십자가상의 가상 칠언(架上七言)중에 네 번째 말씀에 해당하며(요 19:28-30강해 '가상 칠언' 참조), 마태와 마가만이 기록하고있다. 그런데 마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엘리'(* )를 그대로 음역하여'앨리(* ) '엘레이(* )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마가는 이것을 '나의 하나님'(* ,엘로히)라는 아람어 음역에 근거하여 '엘로이'('* )로 표기하고 있다(막 15:34). 그 다음에 이어지는 '라마 사박다니'는 분명 순수 아람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경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에는 '엘리'를 '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능력'(my power) 으로(* ,헤 뒤스나미무; 이는히브리어 ,'헬리'의 뚱임) 번역하여

  • 작성자 26.05.23 08:41

    ('나의 능력이며 나의 능력이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치 가현설(Docetism)에 입각한 듯한 하소연으로 표기하고 있다.즉 베드로 복음서에 따르면 인간 예수만이 고틔 당하고 죽은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은 예수께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말끔하셨기 때문에 '엘'라는 말이 쉽게 사람들에게 '엘리야'를 부르는 둣이 잘못 들려질 수 있는 것 같이, '엘리'가 '헬리'로 잘못 들려졌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다욋이 예언적으로 노래한 시 22:1의 말씀이 당신의 찢어지는 듯한 영적 절망감을 예언적로 표현해놓은 것으로 인정하시고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가장 필요한 시간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데 대한 절대 고독감과 심각한 위기적 심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가 당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悽絶)하고 무거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절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1)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점(고후:5), (2)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점이(빌 2:6-8),

  • 작성자 26.05.23 08:42

    (3) 죄를 향한 하나님의 중오와 보응이 얼마나 엄격하고도 무서운 것인가라는 점, (4) 성부로서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지만(눅23:46) 죄악을 징벌하시는 심판을 하셨다.
    나의 하나님(* ,데무) -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만 나타나는 표현으로서, 비록 '하나님'이 예수 자신에게서 떠나가셨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자신의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으시고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어쩨면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仁性)으로 인류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는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며 그 인성은 신성(神性)의 절대적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아버지'가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 호소하신 것이라고 볼 수있다(Lenski).
    어찌하여(* ,히나티) - 직역하면 '어떤 목적을 두시고'과 된다. 즉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목적에 대해서 묻고 계신 것이다. 이는 분명 신성으로서의 예수가 지적(知的)결함을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과 성자예수와의 직임상의 차이를 보여 주는 동시에 성부께 대한 성자의 절대 겸손과 완전한 순종의 진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24:36).

  • 작성자 26.05.23 08:42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 버려두셨다는 뜻을 내포하는(Hend-riksen)동시에, 하나님께서 인류 죄악을 위해 마련해 두신 '잔'(진노와 심판을 그에게 마시우게 하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실로 예수의 이같은 절규에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충만한 댓가를 자신의온몸으로 친히 치르고 계신 예수의 뜨거운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말씀이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최후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 복음과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밖에도 여섯 마디의 말씀을 더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복음서를 통한 가상 칠언을 정리하면 (1) '저희를 사하여 주소서'(눅 23:34) (2) '나와 함께 낙원 있으리라'(눅23:43) (3) '저가 아들이니이다'(요 19:26) (4)본문 (5) 본문 '내가 목마르다' (6) '다 이루었다'(요 19:28) (7)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등이다.

    =====27: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 - 이를 로마 군인들 중 몇몇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으나(Zigabenus, Euthym),

  • 작성자 26.05.23 08:43

    적어도 구약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Theophy-lact). 그리고 좀더 깊이 생각하면 '엘리'의 정차한 발음을 듣지 못했다는 점에서 헬라와 유대인일 가능성도 높다.
    엘리야를 부른다 - 엘리야는 녹지 않고 살아서 승진한 의인으로서(왕하 2:9-12) 유대인들의 전통적 종말관에 따르면 그가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하러 다시 올 것으로 기대 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예수께서 '엘리엘리...'하는 박한 절규를 듣고 엘리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즉 그를은 '엘리'라는 말을 '엘리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옐리야후'(* )로 잘못 듣고 있었던 것이다(특히 70인역은이를 '* ,엘루우'로 기록함). 40절에서 예수에게 조롱하여 말하기를 '진정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었다. 이렇게 말하는 저들의 심정은 신성 모독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들의 마음속에 비록 그대상이 눈앞의 예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애타게 고대해왔던 메시야 대망(待望)이 담겨져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저들의 메시야 대망은 예수의 말씀 '엘리 엘리...'를 듣는 순간

  • 작성자 26.05.23 08:44

    곧 오해를 하여 엘리야가 와서 도와주나 보자고 하게 하였다. 아마 그들은 엘리아가 와서 예수를 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여 주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 자신보다는 십자가 아래서 예수를 조롱하고 있는 자기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27:48
    한 사람이....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 아마 이 일이 발생한 동기는 예수께서'목마르다'(요 19:28)는 맡씀을 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이 같은 행동은 예수에 대한 동정심에 근거한 것이기 보다 예수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延長)시켜 과연 엘리야가 그를 구해주는지를 보려고 한 악한 의도(47, 49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어 그것을 갈대에 째어 예수께 마시우게 한 행동은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구약 예언(시69:21)을 다시한번(34절) 더 성취시킨 사건이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한편 여기서 '해융'이란 일종의 스폰지(sponge)같이 다량의 액체를 빨아들이는 도구로서 바다생물의 뼈대 갈은 것에서 추출한다. 그리고 '신포도초'(* ,와소스)란

  • 작성자 26.05.23 08:44

    원래 '식초'란 뜻으로서 정확히는 '포스카'(posca), 즉 신포도주와 계란, 물을 섞어 만든 로마 군인들의 음료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예수께 최후의 음료를 제공한 것은 로마 군병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27:49
    그 남은 사람들이...가만 두어라 - 여기 '가만 두어라'는 말은 '지금 혼자 내버려두라', '조용히 물러서라' 등의 말일 것이다. 이는 예수를 향한 더욱더 조롱적인 어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에 의하면 이 말을 한자는 예수에게 방금 신 포도주를 준 로마 군병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임에 비해 마가복음에서는 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한 후 자신의 행동을 금하는 군중들에게 선 포도주를 예수께 먹인 바로 그 사람이계속해서 말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막 15:36). 이에 비해 요한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발설되었는지, 그리고 조롱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요 19:28,29). 따라서 어느 것이 정확한보고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찌되었든 예수의 절규하는 소리에 자극을 받은 군중들은 떠들고 그 와중에 로마 군병들은 심정적으로 합세(숨박히는 등

  • 작성자 26.05.23 08:45

    어수선한 분위기가계속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엘리야가 와서...구원하나 보자 - 적어도 유대인들은 예수가 지금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죽음의 문턱에 이르른 것이라고 자신해 해며 이 같은 조롱을 거듭하고 있다. 한편 어떤 사본에서(시내, 바티칸 등)본절과 다음절 사이에 요 19:34 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는 이야기를 추가시키고 있다. 대신 요한복음과는 반대로 '물과 피'의 순서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물과 피를 통하여 상징되는 성례전과의 절차상의 일치를 위함인듯하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Robertson) 이 이야기가 후대의 필사가에 의해 기계적이고도 무모하게 베껴 썼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위의 몇몇 사본은 역사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신학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삽입구라 본다.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로 목을 축이신 후 아마'가상 칠언'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제 6,7번째 말씀(눅 23:46;요19:30)을 외치신 것 같다. 특히 예수께서 최후의 순간에 '크게' 외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당신에게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 작성자 26.05.23 08:45

    능동적이고 자발적(自發的)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준 결과에 의해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지만 스스로 포기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요 10:17, 18).영혼이 떠나시다(* ,페켄 토 프뉴마).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의를 설명하지 않고 오직 그의 죽음의 사실만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한편예수의 죽음을 묘사할 때 '생명, 목숨'을 뜻하는 '프쉬케'(* )의 떠남으로 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을 뚱하는 '프뉴마'(* )의 떠남으로 표기한 것은 물론 당신의 죽음이 우리 인간과 똑같은 영, 육의 분리를 뜻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주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특히 '영혼이 떠나가시다'(1짜0 딱58뛔##8 he gave up his spirit)란 담담한 표현은 정해진 바로 그 시간에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강한암시가 내포되어 있었다. 진실로 예수께서 성부로부터 버리심을 당하여 깊은 심연(深淵,gulf)으로 떨어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잔인한 조롱을 받고 숨지시던 바로 그 순간이 그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ransom for many)로

  • 작성자 26.05.23 08:46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때이다(20:28). 한편 본문의 이 사실을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예수 그분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에, 원하시던 때에, 원하시는 대로 떠나가셨다.

  • 26.05.23 09:03

    큼 틀에서 묵상 본문과 논지가 비슷한 것 같아 보입니다.

  • 작성자 26.05.23 09:48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5:34
    마가는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 말씀 중 오직 한 마디 말씀만 기록해 놓았다. 이 외침은 예수가 단순히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낀 것도 아니다. 예수의 부르짖음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법적인 의미에서 버림을 받았으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는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15:35 - 36
    곁에 섰던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의 부르짖음을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잘못 들었거나 조롱하기 위하여 잘못 해석하였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의로운 수난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예수는 땅에 2 - 3피트 떨어져 매달려 있었다. 구경꾼 중의 하나가 그 예수께 신 포도주를 갖다 주어 마시게 하였다.

    ========15:37
    그가 그때 십자가에 달린 일반 죄인들과 똑같이 죽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이다. 그는 죽음 직전에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의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었고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이 빌리도의 놀람에 대한 설명이다.

  • 26.05.23 10:16

    네, 알겠습니다.

  • 작성자 26.05.23 09:50

    <호크마 주석: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 표현은 고통의 심연(深淵)에서 울부짖는 듯한 외침이다. `어찌'란 표현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은 단순히 절망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내 하나님...내 하나님' 이란 표현 자체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즉, `내 하나님이여'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다윗 자신에게 적용한 것으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므로 `나는 당신의 도움과 구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Kraus, Rawlinson). 그리고 본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인용하신 구절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마지막 순간까지 언약의 하나님의 신실성을 끝까지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Delitzsch). 한편, 본구절의 히브리어는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인데, 주께서 인용하신 구절에는 `아자브타니'(* )가 `솨바크타니'(* )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내용상의 차이가 있는것은 아니며,

  • 작성자 26.05.23 09:51

    단지 그리스도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신 까닭에 이 같은 차이가 있게 된 것뿐이다. 어찌 나를 멀리하여...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원문에는 `어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 )가 앞의 구절에만 속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개역 성경에서는 두 번의 부정문이 사용되었으나, 원문에는 `아니'에 해당되는 부정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본 구절을 `나의 구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내가 신음하는 소리를 냅니다'로 번역한다(Rawlinson, Briggs, Delitzsch). 그러나 대부분의 영역 성경이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찌하여' 나 `아니'란 용어가 단순히 앞 구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본 구절과도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이 다윗의 탄식을 극대화시킬 뿐만 아니라 문장 구조상으로도 적절하다.

    =====22:2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 본 구절은 끊임없는 부르짖음과 애통함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같이 계속적인 탄식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시지 않고 있는 사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여기서 `잠잠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완전한 체념을 상징한다.

  • 작성자 26.05.23 09:51

    그러나 잠잠치 아니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체념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했음을 보여준다(Lange).

    =====22:3
    이스리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 여기서 다윗은 고통중에서도 불평하지 않는 신앙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설혹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실지라도 역시 거룩하신 분이시라고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이란 80:1; 99:1 의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이란 표현과 매우 유사하다. 다윗은 그룹위에 좌정하셔서 그룹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 위에 계셔서 그 백성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과 연관지은 것 같다. 또한`거룩하시니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절대적으로 구별되이 계신 분임을 나타낸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지체 하실지라도 여전히 세속과는 완전히 구별되신 존귀하신 분이다'라는 의미이다(Kraus, Delitzsch, Rawlinson).

    =====22: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건지셨나이다 - 열조들의 신앙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 작성자 26.05.23 09:52

    이와 같은 은혜스러운 과거를 회상함으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더욱 굳게 하고 있다(Rawlinson).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 곧 전능하신 능력을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발견한 것이다(Kraus).

    =====22:5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 이는 구원의 근거로서 부르짖음에 대한 강조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구원의 근거가 부르짖음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재발견했다. 그런뎨 본 구절이 어떤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진술인지는 분명치 않다.

    =====22:6
    하나님의 잠잠함에 대해 신앙적으로 항의한 다윗이 이제 인간들로부터 받은 수치를 호소하고 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귀함이 짓밟히고 있으므로 다윗은 자신을 벌레에다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벌레'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존엄성의 상실을 상징하며 아울러 죽음 직전의 절박한 상태를 암시하기도 한다(사 14:11).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한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사 49:7; 52:14; 53:3).

    =====22:7
    입술을 비쭉이고 - `비쭉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 작성자 26.05.23 10:02

    `파타르'(* )는 `열다'는 뜻으로 이는 입술을 벌려 조롱 한다는 의미이다(35:21; 요 16:10).
    머리를 흔들며 - 이는 조롱의 몸짓이다(44:14; 64:8).
    이러한 조룽의 몸짓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했던 무리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 27:39)

    =====22: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 여기서 `의탁하니'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골'(* )은 `굴려버리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짐을 맡김을 의미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다윗을 조소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악인들은 그들 안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사실은 다윗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Craigie).

    =====22:9
    주쩨서...의지하게 하셨나이다 - 이 순간에 다윗은 큰 모순을 발견하고서 애통하고 있다. 즉, 출생의 순간부터 다윗은 하나님께 맡겨진 존재였으나 지금은 커다란 고난 중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신앙의 경험들은 지금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기에 그가 느낄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는 사실 뿐이었다.

  • 작성자 26.05.23 10:02

    =====22:10
    본절은 9절과 평행 대구를 이루고있다 - 다윗이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이런 표현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런 신앙에 따라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하나님께서 속히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암시한다 =====22:11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 다윗은 탄식에서 간구로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바꾸고 있다. 그는 절망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향해 간구할 수 있었다.

    =====22: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 악인들이 황소에 비유되고 있다. 팔레스틴의 황소들은 아주 난폭하며 야성적이라고 알려져 있다(Rawlinson).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 바산은 갈릴리 바다 북동쪽에 위치한 광활한 평야로서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목초지였으며 이곳의 소들은 대단히 힘이 세었다. 따라서 바산의 소들은 힘센 자를 상징한다(신 32:14; 암 4:1). 따라서 본절 전체는 다윗의 대적들이 얼마나 난폭하며 강한 자인지를 암시해 준다.

    =====22:13
    부르짖는 사자 - 이에 대해서는 10:9 주석을 참조하라. 사자의 포효(咆哮)가 모든 들짐승에게 두려움을 주듯이 다윗의 대적들도

  • 작성자 26.05.23 09:53

    다윗을 삼키기 위해 큰 위협을 가하였음을 알 수있다.

    =====22:14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 이는 다윗이 대적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완전히 탈진한 상태를 의미한다(수 7:5; 겔 7:17; 21:12).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 본 구절은 모든 뼈들이 연결되지 않았다는 뜻으로서 다윗 자신이 대적들의 위협 앞에 무기력하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육체(뼈)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탈진해 버렸음을 보여 주고 있다. `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아'(* )는 주로 (1) 사람의 내장, (2) 남녀의 생식 기관, (3) 감정의 자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3)의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 원수들의 위협 앞에서 극도로 허약해진 다윗 자신이 마치 쉽게 부숴지는 질그릇 조각과 같이 회생(回生)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내 뼈가 잇틀에 불었나이다 - 이런 다윗의 처지는 극도로 피곤함의 결과이다(69:3) 이와같이 `내가 목마르다'(요 19:28)는 그리스도의 외침 역시 극도의 탈진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작성자 26.05.23 09:54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 다윗은 자신의 영육간의 상태를 점층법적으로 묘사해 오면서 본 구절에서는 죽음 직전까지 몰린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을 진토에다 비유한 것은 인간이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창 3:19).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 악인들이 개에 비유되고 있다. 개는 율법에서 금지한 죽은 고기를 먹으며 물고 뜯는 잔인성을 가지고 있기때문에(59:7, 15; 왕하 9:35, 36; 렘 15:3)속된 자. 또는 악한 자에게 비유되었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 다윗의 대적들은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에워 싸고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대적들이 기회만 있으면 그를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 `찔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키푸니 카아리'(* ) 어원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즉 `카아리'는 `사자같이'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또한 `히키푸니'는 `에워싸다'란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내 수족을 사자같이 에워쌌나이다'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개들'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사자가 개와

  • 작성자 26.05.23 09:54

    대비되어 여기에 등장한다는 것은 부자연 스럽다. 또한 둘러싸는 행동은 사자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개들에 의한 것으로 보여 진다(Briggs). 왜냐하면 사자는 무리를 지어서 먹이를 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번역은 타당치 않다. `카아리'는 `파다', `꿰뚫다'는 뜻의 동사 `카라'(* )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벌에 적용 될 수 있다. 더욱 이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 견해를 따라 번역했다. 따라서 이 견해를 취하는 것이 무난하다(Calvin, Delitzsch, Hengstenberg).

    =====22: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 내용상 이 구절은 14절의 `내 모든 뼈는 어그러 졌으며'와 유사한 구절로서 극도로 쇠약해진 다윗의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다. 즉 다윗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피골이 상접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Calvin, Delitzsch ,Lange, Rawlinson).
    저희가 보고 - 여기서 `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 )는 특별히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TWOT). 따라서 이 말은 저희가 다윗의 불행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고

  • 작성자 26.05.23 09:55

    그를 바라보았음을 시사해 준다(Delitzsch).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 본 구절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구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생애에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복음서의 저자들은 로마 군인들의 행위를 통해 이 예언이 그리스도에게 직접 성취되었음을 기록하고있다(마 27:35; 요 19:24. Rawlinson).

    =====22:19
    본절에서는 다윗의 탄식시에 전형적으로 언급되었듯이 또다시 절박한 상황 중에서낙심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나의 힘이시여 - `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얄루트'(* )는 힘의본질, 또는 힘의 원천을 뜻한다 (Delitzsch). 이처럼 다윗은 극한 상황에서도 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찾았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22: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 여기서 `칼'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상징적 표헌이다. 이와 흡사한 기도의 내용을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에서 발견할 수

  • 작성자 26.05.23 09:55

    있다(마 26:39; 눅 22:42).
    내 유일한 것 - 이는 영혼을 뜻한다. 이 영혼이 `유일한것'으로 표현된 까닭은 지금 다윗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형편에 있기 때문이다(Calvin).
    개의 세력 - 악한 무리들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서는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22: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 여기서 사자는 개와 같이 악인들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보다 본질적으로 악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단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Lange, Rawlinson).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에서도 사단이 우는 사자에 비유되었다(벧전 5:8; 계 10:3).
    들소 뿔에서 - 여기서 `들소' 나 `바산의 힘센 소들'을 가리킨다(12절).

    =====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로 인한구원의 역사를 강조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형제'는 여호와를 경배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한다. 한편, 본절은 히 2:12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구절인데, 이 경우에 형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을 일컫는다.

  • 작성자 26.05.23 09:55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회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할'(* )은 회집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다(35:18; 출 16:3; 레 4:13-21; 민 10:7; 15:15; 20:6). 이들의 특성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경배하는 것이다.

    =====22:23
    본절에 언급된 세 구절은 서로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다 -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해야 함을 강조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고 의지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며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 때문이다(21절).

    =====22:24
    그는...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했음을 엿 볼 수 있다. 즉, 전에는 밤낮으로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으나(2절), 이제는 하나님의 응답을 이미 체험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체험이 그에게 찬송의 근거가 되고 있다(Kraus, Craigie). 한편 `곤고한 자의 곤고'에서 `곤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 )는 `가난'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용어이다. 하지만 가난의 의미는 본 문맥상

  • 작성자 26.05.23 09:56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아니'(* ) 는 앞에서 다윗의 호소한 바 있는 극도의 고통을 의미하는 말이다(1, 14-17절).

    =====22:25
    대회 - 문자적으로는 `큰 회중'(* , 카할 라브)이다. 이는 절기 때에 모인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數)를 가리킨다(Kraus).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 이는 찬송시 내용을 일일이 하나님께로 부터 계시받아 작성하였다는 뜻이 아니고 그의 찬송의 모든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다. 즉, 구원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그의 찬송이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말이다(Briggs, Lange).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 다윗은 고난 중에 감사제(레 7 :15, 16)를 서원한 것 같다(Lange, Kraus). 이제 모든 고난에서 벗어난 후, 다윗은 이전의 서원을 갚고자 했다. 그런데 혹자는 `서원'을 단순히 헌신과 일치시켜 생각하였으나(Rawlinson), 이는 다음 절에 기록된 감사제의 의식들에 비추어 볼때 비합리적이라고 보여 긴다.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 `겸손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윔'(* )은

  • 작성자 26.05.23 09:56

    24절의 `곤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 )의 복수형으로 여기서도 `곤고한 자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곤고한 자는 악인에게 억압받는 의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후자는 `아나윔'을 `가난한 자'로 번역하여 다윗이 과부나 고아등 가난한 자들을 초청해 이 감사제에 동참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Delitzs ch, Lange). 그러나 본 구절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는 예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돤다.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 다윗이 의를 끝까지 좇은 자들에게 복을 비는 장면이다. 한 조각의 음식이 저들의 마음을 영원히 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앞 구절과 함께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향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을 주의 성만찬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희생의 살과 피를 나누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언으로 본다(Delitzsch, Rawlinson). 그러나 본 구절은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의의 원리를 따를 때 영혼이 소생할 것을

  • 작성자 26.05.23 09:57

    예표하는 구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렘 15:16; 겔 3:1-3, Lange). 이렇게 볼 때 `너희'는 단순히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경건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Kraus). `여호와를 찾는자' 란 표현이 그와 같은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2:27
    본절에서 부터 마지막 절 까지의 내용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시대를 예고 하고 있는부분이다. 이로써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경험만을 기록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경험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본시에서 예언적으로 기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Delitzsch, Lange, Rawlinson).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 `땅의 모든 끝'은 지구 전체를 포괄하는 구절이며(2:8; 67:7; 72:8; 사 45:22; 52:10), 특별히 이 표현은 이방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세 이방인들은 우상 섬김으로 잊어버렸던 여호와를 기억하고 이전의 무지함에 대해 회개할 것이다. 여기서 `돌아온다'는 말은 곧 회개의 행위를 의미한다(Briggs).

  • 작성자 26.05.23 09:57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 위의 구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본 구절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창 12:3 ; 28:14).

    =====22:28
    나라는...열방의 주재 - 여기서 `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멜루카'(* )는 `왕권'(royalty)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주재'라는 용어가 뒤이어 나오기 때문에 본절에서 `나라'란 표현보다 `왕권'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 즉, 이 왕권은 온 세상에 대한 왕권이다. 이는 이방의 나라들이 여호와께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그의 통치하에 있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왕권에 의해하나님은 `열방의 주재'로 경배 받게 된다. 한편 여기서 `열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임'(* )은 특별히 이방 민족을 가리킬 때 사용된 용어이다.

    =====22:29
    세상의 모든 풍비(豊備)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여 - 이는 아무런 차별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풍비한 자'란 세상에서 부요한 자, 또는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나 나라도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 작성자 26.05.23 09:58

    하나님 나라에서 제의되지 아니할 것이다(Hengstenberg, Briggs, Lange, Delitzsch). 한편, 여기서 또다시 `먹는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는데 조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는 영적인 양식을 먹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Delitzsch, Lange). 여기서 이들의 먹는 행위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관련되어 진술되고 있다. 즉, 이 표현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만찬에 초대되어 함께 먹으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을 암시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옴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구원의 양식'(영적인 양식)을 먹은 부요한 자들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게 될 것임을 예언한 구절이다.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 이에 대해 학자에 따라 견해가 서로 다르다. (1)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으로 간주하는 견해이다(Rawlinson) 이 견해에 따르면, 한번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인간들이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무롸을 굻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보여준다. (2) 이미 죽은 자로 해석 하는 견해이다(Kraus, Knight). 이는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 작성자 26.05.23 10:00

    죽은 자들도 죽음의 세계에서 라도 그에게 절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죽어가는 나라를 비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이다(Briggs). (4) 앞의 `풍비한 자'와 대조적으로 가난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Delitzsch, Lange). 여기서 (1)의 견해는 `풍비한 자' 에 대한 진술 이후에 모든 사람을 언급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리고 (2)의 견해도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사후(死後)의 세계에서는 종교적 활동이 중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6:5; 88:10-12). 따라서 죽음의 세계에 있는 사자(死者)들이 그리스도께 절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생각될 수 없었던 일이었다. (3)의 견해 또한 받아 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본절은 나라에 대한 언급 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4)의 견해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은 본절 전체가 부요한 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진토'는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가장 `천한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 작성자 26.05.23 10:00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란 가난과 질병으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 즉 거의 죽어가는 인생을 의미할 것이다(사 9:1-4).

    =====22:30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 여기서 `후손'은 직접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믿음의 자손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은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바라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구절은 모든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대대로 선포될 것임을 다윗이 깨달았다는 말이다(Craigie).

    =====22:31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 이는 한 세대가 새로 오는 다른 세대에게 구원의 도(道)를 전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저들이 전하는 `공의' 란 하나님께서 고난 당하는 자신의 종을 보호하시고 악인들에게서 건지신 의로운 행위를 의미한다(Briggs).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 `이를 행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킨다. 즉, 이 구절은 최종적으로 본시를 마무리 짓는 구절로서 고난 당하는 다윗을 구원하신 개인적 사건 뿐만 아니라 모든 족속과 나라들을 구원해 내신

  • 작성자 26.05.23 10:01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전역사(全役事) 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Briggs). 그런데 이 하나님의 구원의 전역사는 본시에서 예언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의 전 역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 26.05.23 10:22

    길고 풍성한 설명 잘 훑어 보았습니다.

  • 26.05.23 10:14

    * 십자가 위에서 육체적·영적 고통을 온몸으로 견디시며 단절의 아픔까지 대속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가슴 깊이 다가와 먹먹해집니다.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가장 처절한 절규 속에서도 낙심을 넘어 복음의 완전한 승리를 선포하신 주님의 신비를 영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 절망의 순간에도 신실하게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신 메시아를 바라보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십자가 사랑과 복음을 끝까지 붙들기로 다짐합니다.

  • 26.05.23 10:16

    * 예수님이 직접 뱉으신 아람어 발음 그대로 음차된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라는 절규 속에서, 우리를 위해 홀로 조롱과 오해를 견뎌내신 메시아의 철저한 고독과 날것 그대로의 고통이 절절하게 전해집니다.
    * 영원 전부터 하나이셨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적 교제가 인류의 죄 대속을 위해 역사상 단 한 번 끊어지는 '거룩한 단절'의 순간을 마주하며, 우리가 받아야 할 지옥의 형벌을 대신 겪으신 무한한 사랑에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 이 처절한 부르짖음이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즉흥적 비명이 아니라, 수백 년 전 다윗이 예언한 시편 22편의 메시아 고난과 대반전의 승리 결말을 온몸으로 성취하시고 선포하신 위대한 구원 계획의 조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영적 무지 앞에서도 시편의 첫 구절을 통해 "다 이루었다"라는 완전한 승리를 당당히 공포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도 삶의 절망 속에서 낙심치 않고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끝까지 신뢰할 것을 결단합니다.

  • 26.05.23 15:45

    아멘!

  • 26.05.23 10:17

    * 철저한 패배자의 비명처럼 보였던 외침이 사실은 나를 위해 지옥의 단절을 견디신 대속의 사랑이자, 온 우주를 향해 복음의 완전한 구원을 당당히 선포하신 메시아의 위대한 승리였음을 고백하며 가슴 깊이 감동하게 됩니다.
    * 주님이 대신 버림받으셨기에 그 어떤 환난과 곤고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을 기억하며, 세상에서 외롭고 낙심될 때마다 십자가의 승리 음성을 붙잡고 당당히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아멘!

  • 26.05.23 15:57

    아멘!

  • 26.05.23 10:50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세 가지 핵심 내용을 잘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우 은혜롭습니다.
    특히, 두 번째 신학적 의미가 마음에 깊이 와 닿네요. 성자가 항상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부의 호칭을 여기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성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단절된 상태이기에, 또 성자는 인류의 죄를 통째로 짊어지고 공의의 심판과 진노를 받고 있기에 그런 것이군요. 즉 인류를 대표하여 죄인으로서 심판을 받고 있기에 성부와 성자 간의 분리가 일어났고, 그 단절의 순간이 가장 큰 지옥의 경험이었다는 거군요. 대속의 순간에 삼위일체 간의 거룩한 단절이 일어났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의미도 매우 소중합니다.
    시 22편의 예언을 정확히 성취하신 예수님의 위대한 사역이 있었기에, 향후 우리가 어떠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예수께서 하나님과 단절되는 지옥을 이미 경험하시고 우리에게는 큰 승리를 안겨주셨음을 기억하고 용기를 가지자,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자는 당부의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6.05.23 10:52

    핵심을 잘 짚은 좋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 26.05.23 15:58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주님의 처절한 외침이 나를 대신해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으신 대속의 고통이자, 우리에게 완전한 승리와 구원을 선물하신 위대한 선포였음을 가슴 깊이 묵상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영원한 사랑의 단절을 겪으셨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용납되었음을 믿사오니, 세상의 그 어떤 환난이나 곤고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복된 확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하옵소서.

    이번 한 주간 세상에서 외롭고 낙심될 때마다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를 선포하신 주님의 음성을 붙잡게 하시고, 나를 위해 영원한 단절을 견뎌내신 그 위대한 사랑에 힘입어 거친 세상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당당히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 26.05.29 06:02

    안녕하세요 여러분 😊
    저는 새로 가입한 회원이며, 이렇게 멋진 커뮤니티에 함께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좋은 분들을 만나 긍정적인 대화를 나누고, 모두와 좋은 우정을 만들어 가길 기대합니다. 따뜻하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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