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멈춤’ 지대인가. 옷 주인은 가쁘게 세월을 헤엄쳐 왔건만 아직도 옛 시간을 붙들고 있는 옷장 안의 옷. 착잡한 주인의 심정이야 알 리 없는 옷들이 한 시절 그 순간의 추억을 고집한다. 자꾸 비껴가는 그녀의 눈길이 원망스러웠을 게다.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꽃무늬 주름치마를 시작으로 묵은 옷들을 하나하나 색출해 낸다.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거울 앞에서 한번 걸쳐 보고는 가차 없이 방바닥으로 던진다. 영문도 모른 채 주인에게서 내쳐진 옷들이 풀썩풀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린다. 태풍에 휙휙 잘려나가는 나뭇가지들 같다. 한창 일할 나이의 가장이 명퇴 바람으로 무릎이 퍽 꺾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돈 못 버는 남자의 풀죽은 어깨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구태의연은 금물이다. 무릇 패션이란 변화를 두려워해선 아니 되거늘.
그녀는 지극히 여성스러운 옷을 선호한다. 당연히 바지보다는 치마차림을 좋아하며, 새 옷을 사고도 굳이 옷 수선집에 들어 여성성을 더한 모양새로 ‘리폼’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레이스를 붙이거나 소매에 프릴을 달아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든다. 고가의 명품을 입는 건 아니다. 동가홍상(同價紅裳)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데 이왕이면 같은 옷이라도 맵시 나게 입고 싶어서다. 한 편의 글이 작가의 분신이라면, 옷차림은 그 사람의 현재를 말해 준다. 취향이나 직업, 신분까지 드러나는 게 옷차림이다.
“입는 것만큼 먹는 것에 신경 좀 써라.”
귀에 젖은 이 소리는 몸이 부실한 그녀에게 하시던 어머니의 당부였다. 그런데도 솔직히, 그녀는 맛난 음식보다 우아한 옷에 마음이 더 흔들린다. 고운 옷차림은 쉽게 접을 수 없는 마음 안의 판타지이기도 하며, 생의 몇 굽이를 넘어온 자신에게 하는 그녀식의 대접이라고 여긴다. 너무 합리적이고 실용성에 치충하여 작은 화사 하나도 누릴 수 없다면 삶이 얼마나 정체될 것인가.
여자들이 고운 옷에 환호하는 건 타고난 성향일 테다. 그녀에겐 유년의 허기증도 내재하는 성싶다. 그녀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옷 호사는 가당찮은 일이었다. 아이들은 명절이라야 겨우 새 옷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평소 어쩌다 어른들이 사다 주신 옷은 치수가 크고 원하는 모양과 색깔이 아니어도 감지덕지한 선물이었다. 하늘하늘한 레이스와 커다란 리본이 달린 원피스는 만화책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실루엣이었고, 꿈에도 입어 보지 못한 공주 옷이었다. 그 옷에 눈길을 매달았던 아이는 유난히 옷 허기가 지곤 했다.
흐르는 시간 따라 얼굴과 몸매는 변한다. 기품 있고 당당한 패션은 뜻밖의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삶에 활력이 될 수도 있다. 개성적이며 미적 감각이 살아 있어야 제대로 된 패션일지니, 진정한 멋쟁이라면 제 안부터 살피고 점검하는 일 또한 필수다. 수시로 덜어내고 비울 줄도 알아야 세련된 분위기를 지닐 수 있으리라. 색깔과 모양이 어우러지고 품과 길이가 맞아야 옷도 맵시를 내어주고 싶지 않을까.
옷장을 정리하는 일도 그렇다. 그녀가 옷을 정리할 때는 전문가의 노하우를 차용하고 자신의 경험을 보탠 규칙이 있다. “첫째, 놔두면 더 입지 않을까 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둘째,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린다.”가 효율적인 정리 방법임을 인정한 터다. 만약 비싼 옷일지라도 입을지 말지 고민한다는 건 벌써 그 옷의 효험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지나간 유행은 절대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살아가면서 덜어내고 비우고 재정리하는 일은 그나름의 ‘새로워지기’위한 처방 아닐는지. 심적이든 물적이든 불필요하게 누적되어 문제가 되는 것들을 가능한 줄이고 새로워지려는 노력, 그녀는 거기에 ‘옷장 정리’항목을 포함시킨다.
한데 새벽 4시경에 일어나 혼자 날개 치고 있는 저 여자. 무슨 광기일까. 방바닥엔 ‘주인보다 너무 젊다’는 죄목으로 끌려 나온 옷들이 수북이 쌓이고 널리고 퍼질러졌다. 해마다 가을 패션을 살려 주던 이 바바리와 원피스는? 꽃무늬 스커트는? 점점 시간이 늘어진다. 그녀는 당황하고 있다. 분명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어쩜 추억 속의 시간을 고집하는 옷들과 더불어 영 철나고 싶지 않은 게 그녀의 속마음일지도….
하지만 곧 툭툭 털고 차츰 홀가분해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녀만의 패션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겨울을 앞두고도 주눅들지 않는 옷, 새 계절을 지켜 줄 또 하나의 옷으로 가뿐하고 우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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