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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걸려 도착한 누와라 엘리아에서 다시 25분 더 직진하다가 우측 언덕길로 10분 다시 좁은 차밭 길을 오르니 스리랑카 최초의 차공장과 20년 전에 총리가 지었다는 온실 모양의 호텔이다. 서늘하여 외투를 걸치고 일층의 프론 데스크와 간이 매장을 둘러보고, 차 수확 체험을 하러 차 공장으로 가니 처에게 차 딸 때 입는 옷인 사리를 입혀준다. 사리를 입고 대나무 바구니 끈을 이마에 걸친 일꾼이 되어 차 새순을 체취하나 했더니, 웬걸, 처의 주목적은 일꾼 복장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농장 안내원도 으래 그리 하다는 듯, 우리에게 사진 모델이 되라며 카메라를 넘겨받으며 포즈를 취하라한다.
차공장이라는 작은 건물에는 차를 말리는 건조기, 절단기와 분쇄기 등의 단순한 재래식 기계 4대만 있어 큰 공장규모를 예상했던 기대와는 딴 판이다. 생산량이 세계 2위라는 실론 차도 여인네들이 차나무의 새순을 따고, 이것들을 말리고 포장하는 과정이야 단순한 것이라 어느 공장이나 비슷하겠지? 차밭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밤에는 버펄로나 코브라가 출몰한다,”고 써져있는 경고문에 실소한다. 이 서늘한 고지에 웬 코브라?
스리랑카의 차 농장은 19세기 초에 들어온 영국인들이 커피농장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몇 십 년 커피농사로 재미를 보던 중, 잎마름병이 번지면서 커피나무가 고사하자, 총독부는 재빠르게 차나무를 심어 차 농장으로 전환한 것이 차 재배의 시작이었다. 스리랑카 고원지대는 따사한 기온과 알맞은 습기에 적당한 고도와 배수가 원활한 경사도까지 골고루 갖춘 차 농장으로 최적지로, 거목으로 자라는 나무를 수확의 편의를 위해 80cm 내외의 높이 이상 부분은 절개하며, 수확기의 대규모 작업인원은 남인도에서 이주시킨 타밀족 여인들로 충당하였다.
1200m 이상의 고원지대에서 성장속도가 느린 잎으로 만든 차는 은은하고 깊은 맛에도 쓰지 않아 최상의 품질로 인정해주며 대부분 수출되나, 1980년대 저질 차의 등장으로 실론티 가격이 추락하여 지금은 대체작물을 심기도 한다니 안타깝다. FOP(flower orange pekoe)라는 표시가 붙은 차는 움트는 연록색 잎으로 만든 최상품이며, 고급포장으로 명품이라고 우기는 차를 몇 배의 가격을 주고 사지 말고 FOP가 인쇄된 같은 품질의 차를 슈퍼에서 1/5 가격으로 사라는 것이 현지인의 조언이다. 이런 종류의 차는 “스트레이트 티”라고 불리며, 위스키, 밀크 계피 등을 첨가하여 취향에 맞추면 되고, 생산 시에 향이나 다른 산지의 차를 석어 만든 차인 “브랜드 티”외에, 과일 향을 첨가하여 향홍차로 불리는 플래버드 티(flavored tea)가 있다.
차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중국에서 시작된 녹차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거쳐 유럽으로 선적되어 가던 중에 태양열로 자연발효 되어 색깔이 검게 변색되어 “블랙티”란 명칭을 얻었다. 바다건너 멀리서 온 블랙티를 폐기하기가 아까워 끓여 마셔보니 맛이 괜찮아 계속 마시게 된 것이 홍차의 유래라 한다. 영국에 이 차가 전해진 것은 17세기 중반에 스페인공주가 영국으로 시집가면서 혼수품에 끼어 간 것이며, 당연히 처음에는 귀족의 기호식품이었으나, 식민지였던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차 재배가 시작되면서 가격이 낮아지자 서민들도 마시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3대 홍차는 실론티, 인도의 다르질링티와 중국의 키문티를 말한다.
숙박비가 만만치 않은 헤리턴스 티 펙토리 호텔의 1층에 위치한 식당은 녹색과 주황색으로 도색한 에치빔(H-Beam)의 조화가 돋보이는 고급식당이다. 식사의 품질에 비해 가격은 비싸지 않아 2만 원 정도면 스테이크와 생선을 골라먹고 후식으로 차나 커피가 나온다. 그러나 이 차 공장에서 차는 팔지 않아 누와라 엘리아 시내의 호텔에 짐을 풀고 시내구경에 나선다. 시장을 중심으로 한 시내는 10분이면 둘러 볼 정도로 자그마하며 중심가 삼거리 언덕의 우체국과 옆의 경찰서건물만 돋보인다. 콜라 한 병 사들고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시켰다. 기품은 있으나 욕실은 리모델링 해야 할 정도의 노후한 호텔이나 음식 맛은 제대로 냈으니, 하루 밤 자는 방을 흉보지 말자.
새벽 4시 10분에 아침용 도시락을 챙겨 호텔을 나선다. 무질서한 교통난을 벗어나는 길은 일찍 나서는 수밖에 없다. 밤길이라 기사도 잘못 든 길을 몇 번이나 수정하면서, 3시간 반 만에 얄라 사파리 공원으로 가는 길가에서 사파리용 짚차로 바꿔 타고 공원에 도착하니 매표소 직원이 차를 마신다며 기다리란다. 160대의 사파리용 짚차가 개인영업을 하고 있다는 사파리는 내국인의 20배가 넘는 입장료를 외국인에게 청구하면서도 스리랑카 돈인 루피만 받는다 하였으나, 스리랑카에서 처음 만나는 심통 가득한 매표소 직원과의 신경전 끝에, 미화로 지불을 하고 사파리 경내로 들어가면서 불쾌한 기억은 잊어버린다.
1300만 평 규모라는 이 사파리는 1983년부터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처음 만나는 동물인 몽구스를 필두로 공작, 멧돼지, 사슴, 버펄로, 악어와 코끼리 무리는 봤으나 보고 싶었던 레오파트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 사파리에서 레오파트를 보는 것은 행운이라는 가이드도 새벽 햇살에 바위에 앉아있는 레오파트를 가끔 보았을 뿐이라 한다.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싶으나 사파리 차에서 내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니, 차가 동물 가까이로 다가갈 때를 이용하거나 망원렌즈를 써야하니 호수 안에서 거니는 코끼리만 렌즈에 담는다.
2003년 말에 발생한 쓰나미가 이 사파리 해변을 덮치며 내륙 5km까지 밀려가 사피리에 피해를 입히며 주민이 46명이나 사망했다는데, 동물들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내륙으로 도망을 쳐서 살아남았다 한다. 울퉁불퉁한 흙길을 주파하는 사파리 차에 2시간 반 동안 시달린 엉덩이만 아프고 사파리를 벗어나면서 본전생각이 나는 것은 별로 본 게 없다는 것이고, 아침 5시 반경에 동물들의 식사 시간에 맞추어 사파리 차를 타지 않으면 실망하기 마련인 것 같다. 차라리 홀튼 프레이즈 국립공원에서 광활한 평원이나 볼 것을..,,.
콜롬보로 가는 차는 해변 가를 달린다. 스리랑카 관광사진에 빠지지 않는 외다리 낚시(스틸트 피싱)를 하는 모습과 서핑을 즐기는 젊은 외국인들이 수영바지 차림으로 다니는 거리에서 토속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갈레 성으로 들어가 차를 세운다. 스리랑카에서 4번째로 크다는 갈레를 현지에서는 ‘골’이라 부르는데, 네덜란드인들이 축성한 성과 등대와 그들의 주거지가 성채 안에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킹 솔로몬이 시바의 여왕에게 사파이어와 향신료 등을 여기서 가져가 환심을 샀다하지만,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그러나 옛 지도에도 나와 있는 항구라 하니 오래된 역사가 짐작되지만, 갈레가 본격적으로 역사무대에 등장을 한 것은 1505년 포르투갈 함대가 이곳에 닻을 내리면서부터이고, 그들이 첫 입항 시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 포르투갈어로 수탉인 ‘Galo'에서 따와 갈레라 이름 지었다 한다.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갈레 성 내부의 옛 건물
싱할라 왕조와의 친교로 갈레에 터를 잡은 포르투갈은 그들의 거주에 반대하는 원주민들에 밀려 콜롬보로 이주했다가, 다시 갈레로 귀환하여 1589년에 성벽과 요새를 보강하면서 육지와 연결되는 입구를 더 높게 쌓은 것이 이 성의 특징이다. 1640년 포르투갈로부터 지배권을 빼앗은 네덜란드는 1663년 기존의 성채를 10만평이 넘는 면적으로 확장하여 계획된 도시로 만든 것이 지금의 갈레성이다. 그러나 1796년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스리랑카를 지배하면서 갈레를 식민지의 거점으로 삼았던 영국이 1870년 콜롬보에 새로운 항구를 만들면서 갈레는 역사의 도시가 되어 성장을 멈추었으나, 근래에 예술인들이 몰리면서 부동산값이 폭등하는 신시가지는 활기에 차있다.
대부분 네덜란드인들이 건축한 성내의 건축물은 옛 모습 그대로이며 교회와 주거지 박물관과 호텔로 사용 중이며, 한적함과 고요한 어둠이 내리는 거리는 더없이 낭만적이나, 갈레 포트 밖의 시장과 기차역이 있는 신시가지는 왁자지껄한 풍경으로 대조를 이룬다. 밤늦게 도착한 호텔에서 4박5일을 함께한 곡예운전이 생활화된 기막힌 운전솜씨의 기사에게 감사한 팁을 두둑하게 주니, 자기 매제가 대구의 공장에서 일한다며 안부를 전해 달라 한다.
오늘 비행기를 타기 전에 먼저 제프리 바와(Geoffrey Bawa)하우스를 찾았다. 10시, 12시와 오후에 한번, 이렇게 3회에 걸쳐 가이드투어를 받아야 하는 곳이라지만 젊은 하우스가이드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금방 친해지니 하우스의 구석구석까지 안내를 해준다. 입구의 실내주차장에는 바와가 생전에 타던 구형 컨버티블 롤스로이스가 오늘도 주인을 기다리며 서있다. 1919년 타밀족인 그의 조부는 영국인과 결혼을 했고 아버지는 네덜란드 혼혈인과 결혼하여 그의 외모는 완전히 서구인이다. 스리랑카에서 태어났고 콜롬보의 명문인 Royal College를 졸업하고, 영국의 성 카데리나 컬리지에서 영어와 법학을 전공 후, 1944년 법학의 명문인 미들 템플에서 수학하여 변호사가 되었으니, 요즈음 말로 하자면 금수저 출신 스리랑카인 이다.
종전 후 스리랑카로 귀국하여 변호사가 되었지만, 모친 사망의 충격으로 일본, 미국과 유럽으로 긴 여행을 한 뒤, 이태리의 시골의 정원이 딸린 주택을 사서 정착을 하려했으나, 차라리 아름다운 정원을 건축하고 싶다는 생각에 1948년 귀국하여 벤토타에 고무농장을 매입하여 열대정원에 이태리식 정원을 접목한 건축을 하려했으나, 자신의 건축 지식이 미천함을 자각하고 1951년 건축가 문하생으로 들어갔다가 스승이 사망하자 캠브리지의 세계유수의 AA Architectural Association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하고 귀국했을 때 그의 나이가 38세. 1959년 덴마크 건축가와 함께 창업하여 건축사무소를 경영 중에 동업자가 스리랑카를 떠나자, 1960년 스리랑카 건축 연구학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독자의 건축세계로 매진한다.
그는 과거의 건축양식을 벗어나 전통양식과 재료를 도입하여 친환경적인 포스트 콜로니얼 르네상스(Post Colonial Renaissance) 건축문화를 이루는데 목적을 두어, 스리랑카 국내(국회의사당, 칸달라마 호텔, 벤토바 비치 호텔과 성 브리짓 몬데소리 스쿨 등)는 물론, 인도에 9회, 인도네시아에 3회, 모리셔스에 1회, 일본, 파키스탄, 피지, 이집트와 싱가포르에 1회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기면서 20세기 아시아 최고의 건축가로 칭송받다가 2003년 84세로 사망했다.
백색 시멘트에 에폭시로 마감한 제프리 바와 하우스 복도
시내 한 복판의 고급주택가 골목의 막다른 집 4채를 한 주택으로 만들어 작업공간으로 사용하면서 만년을 보낸 주택은 볼거리로 가득하다. 1층의 지붕이 없는 두 곳의 작고 깊지 않은 연못에는 코끼리 코에서 졸졸 물이 흐른다. 연못 한 끝에서 열대나무가 줄기를 뻗었고, 다른 연못 위에는 하늘을 반쯤 가린 낡은 오지기와가 아름답다. 침실과 작업장에는 낡은 책들이 군데군데 놓여있고, 출입이 금지된 침실 문 맞은편 복도 끝의 창으로 찾아오는 아침햇살이 그의 잠을 깨운 모양이다. 피카소의 소품 외에도 친구인 호주 화가가 그린 문짝 그림이 연못으로 이어지는 벽 한 면을 장식하고 있으며, 시멘트로 만든 작업용 큰 탁자도 에폭시를 칠하여 바닥과 차분한 조화를 이룬다.
백색의 벽과 우유 빛 에폭시로 단순하게 마감된 콘크리트를 소재로 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딱딱하게 보이는 일반 건물의 계단과는 달리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계단이라기보다는 그냥 경사진 복도를 걷는 것처럼 느껴지게 설계했다. 2층은 손님을 위한 공간으로 7평쯤으로 보이는 거실과 별도의 침실 2개와 욕실로 구성되어있다.
기둥이 있는 연못과 그의 친구가 그린 문짝 그림
그가 디자인했다는 곡선의 철제의자는 코너에 자리한 진품 바르셀로나 의자(1929년 발로세로나 박람회 때 독일관을 설계한 미스 반 데어 로데가 만들어 독일관에 전시한 것으로, 외국의 유명 건축물 한 모퉁이에 이 의자가 있어야만 고급 건축물로 대접을 받으며, 골동품은 미화로 8,000-12,000을 호가함)와 디자인 경쟁을 하는 것 같고 손을 형상화 한 문고리도 인상적이다. 2층은 일반인을 위한 객실로도 임대가 된다는데 아침 포함하여 일박에 미화 210불이라 하니 다음 기회에 일박을 해야겠다.
오후 비행기 시간이 자정이라 무료한 시간을 때우느라 아유라베다 시술을 받고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에서 한잠 자니 홍콩이다. 서울서 미리 예약해둔 실링팬 2개를 사서 다음 날 인천세관을 통과하는데 세관직원이 본 체도 않는다. 행여나 하고 송장까지 챙겨온 내가 머쓱하다. 하긴 어느 바보가 이렇게 큰 부피의 박스에 밀수품을 챙겨 넣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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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스리랑카 여행의 목적이 시기리아 바위 왕궁과 제프리 바와를 만나는 것이었는데 목적을 이루어 즐거운 마음이며,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분들께서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절대 손수 운전을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두분 사진 멋있네요! 좋은 여행 하셨고 목적하는 바을 이루어 좋으시겠읍니다. 다음은 또 어디로 가실까???
창환 형이 정성껏 올려 준 글과 그림 즐감했어요!!! 창환 오빠는 어디서나 짱 짱 짱입니다.ㅎㅎ
졸문에 과분한 말씀을 듣네요. 아직은 힘이 있다는 감정을 유지하려합니다. 내년에는 짬을 만들어 한달 정도 프랑스 구석구석과 베네룩스 3국을 가보려합니다. 동창들과 때지어 함께 가는 여행을 하고는 싶지만, 모두들 개인 사정이 있어 쉽지가 않네요? 가능하면 이국 바닷가에 모여 앉아 발 뻗고 허리띠 풀고 한잔 하는 꿈이 이루어 지겠지요? 멀잖은 일본 온천도 좋고, 코타키나바르도 나쁘지 않습니다.
몸성할때 여건될 때 하고 싶은 것 많이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