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 나루터
일제 강점기에는 부산에서 올라오는 소금배와
내륙의 쌀이 물물 교환되는 등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곳이다.
소금배가 끊긴 뒤에도 강 건너 상주장을 보려는 장사꾼과 주민들이 북적댔고,
예천읍내와 서울, 대구 등으로 가는 과객들이 넘쳤다.
그러나 70년대들어 새마을운동으로 다리가 놓이고
잇따라 제방이 생기면서 인적이 뚝 끊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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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막
경상북도는 최근『마지막 주모』가 세상을 뜬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삼강주막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했다.
삼강은 내성천과 낙동강, 금천의 세강 줄기가 예천에서 몸을 섞는 곳이다.
이곳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은 낙동강 강줄기 1300리에 남은 마지막 주막이다.
삼강나루터는 경남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안동까지 가기 전 쉬어가는 곳이자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기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이었다.
삼강주막은 이 나루를 오가는 길손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잠자리로, 시인묵객들의 흥을 돋구는 장소로 이용돼 온
유일한 조선시대 주막이다.
세월이 흘러 소금배가 올라오지 않고
사람을 건네주던 나룻배마저 없어지자 한 때
네개나 있던 삼강나루의 주막이 다 사라졌지만
이 곳만은 남아 지나간 세월을 증언하고 있다.
『마지막 주모』이던 고 유옥연씨가 지난 2005년 92살의 일기로 세상을 뜨자
지금은 영업은 하지 않고 예천군 풍양면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현재 경상북도에서는 유씨 뒤를 이어 주막의 맥을 이을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00년께 지어진 이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건축역사자료로서 가치가 크고
지역의 역사와 옛 시대상을 읽는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 유옥연(92)할머니는 16살 되던 해인 1932년
이 마을 배봉송(50년전 작고)씨와 결혼한 뒤 70여년간 자리를 뜬 적이 없다.
유 할머니는 생전에
“이 나루터에는 경상도의 내륙과 남쪽 지방의 소식 과 역사가 살아숨쉬고 있다”며
나루터의 장래를 걱정했다.
삼강주막이 낙동강 700리길에서 유일하게 남게되자
최근 역사학 자들과 출향인사 등이 유 할머니의 옛 흔적을 보기위해
몰려들고 있어 이곳이 다시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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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이곳에 시집왔다는 유옥련 할머니가
혼자 나루터 주변에 앉아 오가는 손님을 맞는다.
주막 바로 앞에는 수령 200년의 회화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줘
아직도 동네 노인들이 자주 들르는 사랑방이다.
팔작지붕 형태의 어설픈 스레트 지붕에 쓰러질 듯 간신히 서로를 지탱하고 서 있는
사방의 흙벽, 삐뚤삐뚤한 방문 아래 펼쳐진 널찍한 시멘트 기단.......
그러고 보니 그 시멘트 기단은 기와집의 대청마루, 사랑방 못지않은 역할을 해내고 있다.
낙동강의 소금 배며 소발에 짚신 신겨 서울로 몰고 가던
소몰이꾼이 소를 싣고 강을 건너던 곳.
주막은 60년전 유 할머니가 왔을 때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란다.
변화라면 강의 범람에 대비,
주막 앞에 둑을 쌓는 바람에 강이 보이지 않는 것,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뀐 정도.
쓰러질 듯 기울어진 이 주막에 혼자 기거하며
60여년째 주안상을 내는 것이나
주막 앞마당 강변의 2백살도 넘는 회화 나무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우리시대의 마지막 주모,
2005년 10월에 작고한 유옥연 주모의
남정네 신발 한짝이 그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