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뒷간에서 뉘우치다
정일근
무위도식의 오후, 불식(不食)을 했다면 선암사 뒷간으로 찾아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녁 예불시간 뱃속 근심이 큰 장독에 고인 물처럼 출렁거려 뒷간에 앉는다. 사실 나는 내 죄를 안다. 그리하여 범종소리 따라 한 겹 한 겹 밀려와 두꺼워지는 어둠에 엉덩이를 까고 뉘우친다. 가벼워진 세상의 발들 전(殿)을 돌아 장등(丈燈)이 밝혀주는 대웅전 앞 섬돌을 밟고 오를 시간, 나는 뒷간 무명(無明) 속에 발 저리도록 쪼그리고 앉아 진실로 뉘우친다.
내 죄의 반은 늘 식탐(食貪)에 있다. 법고소리에 기름진 가죽이 함께 울고, 목어의 마른 울음 오장육부를 북북 긁고 간다. 운판(雲版) 소리의 파편이 뼈 마디마디 파고들어 욱신거린다. 선암사 뒷간에 앉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근심을 버리자! 근심은 버리려 하지 말고 만들지 말아라. 뒷간 아래 깊은 어둠이 죽비를 들어 내 허연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친다. 마음을 비우자! 마음은 처음부터 비워져 있는 것이다. 나무 벽 틈새로 스며들어온 꽃샘바람이 주장자(柱丈子)를 들어 내 뺨을 친다.
뱃속 근심이 우주의 근심을 만드는 저녁, 염주알 구르는 작은 원융(圓融)의 소리에도 사방 십리 안 모든 봄나무들이 깨달음의 문을 열어 꽃 등불을 켜는데, 나는 내 몸의 작은 뒷문 하나 열지 못하고, 단 몇 푼의 근심조차 내버리지 못한 채 선암사 뒷간에 쪼그리고 앉아 뉘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