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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초대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죠. 일곱 집사를 뽑는 사역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말씀이 좀 신약과 구약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좀 전해져서 여러분이 좀 이렇게 집중하고 들으셔야 말씀의 연결고리들을 좀 잘 이렇게 이어가면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좀 늘 말씀을 잘 들으시지만 오늘은 좀 더 집중해서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일곱 집사를 뽑았는데 기준이 있어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3절에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을 듣는 사람들을 뽑으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기준은 없었다는 거예요. 다른 기준은 없고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지만 봤다는 겁니다. 그래서 뽑혀진 사람이 7명이었어요. 이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가 작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든 그런 기준으로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았는데 그러니까 일본 명이 뽑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숫자에 제약을 두고 뽑지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기준에만 맞으면 다 뽑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확실하다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고 꾸준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그리고 한결같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견고하지 않으면 사역도 흔들리고 삶도 흔들려요. 예수님에 대한 나의 고백이 명확하지 않으면 내 삶도 흘리고 사역도 흔들려요. 여러분 환경이 내 삶을 흔드는 게 아니에요. 환경이 사역을 흔드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명확하지 않아서 사역도 삶도 환경도 흔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흔들리지 않을 믿음이 충만한 사람을 뽑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요?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곱 집사들은 성령이 일하시기에 완벽한 상태라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성령이 일하시기에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는 거죠. 하나님이 어떤 명령을 내려도 그 명령의 예라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이 사역을 하고 또 일곱 집사가 되었기 때문에 이 이후에 보면 능력이 이 예루살렘 교회 가운데 나타나요.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에 드러나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힘이 있으신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 누구에게서 드러나냐 세상에 성령 충만한 사람에 의해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세 번째로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았는데 지혜가 충만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교회의 이슈를 교회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의 과부가 구제에 빠지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일을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은 겁니다. 성도가 지혜가 없으면 얼마든지 사단의 일을 할 수 있어요. 교회의 지혜가 머물지 않으면 교회도 얼마든지 사탄이 일을 할 수 있어요.
여러분과 제가 지혜롭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은 거절하고 사탄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초대교회는 이런 기준으로 7명의 집사를 뽑았어요. 그랬더니 엄청난 복음의 진보가 진전이 예루살렘 교회 가운데 있었습니다. 1절에서 6절의 결과물이 이렇게 7절인 거죠. 7절을 한번 우리가 큰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7절 우리 같이 읽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이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일곱 집사를 뽑았는데 초대교회가 크게 부흥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을 뽑았는데 교회가 부흥한 거예요.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기도를 열심히 해서 전도를 열심히 해서 그게 이유가 아니라 어떻든 사람을 뽑았는데 교회가 부응했다는 거예요.
왜 이런 결과물이 나왔을까요?
그 이유는 이 7명의 집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인 거죠. 믿음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조건들을 갖출 수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능력은 예수님에게서 오는 거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지 않으면 우리가 갖출 수 없는 능력인 거죠.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 안에 있지 않으면 결코 이런 능력은 갖출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초대교회를 섬기자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좀 더 살펴야 할 내용이 있어요. 일곱 집사의 이름을 잘 살피면 그러니까 우리는 잘 읽을 때 구별되지 않지만 이 일곱 지사는 다 그러니까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어요. 그러니까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들 그러니까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었어요.
근데 알아야 될 건 이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의 주축 멤버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어요.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다 히브리인들이었어요. 그러니까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이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의 주축이 있어요.
그런데 그러면 당연히 누구를 뽑아야 될까요?
당연히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뽑아야죠. 근데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뽑지 않고 이의를 제기했던 왜 우리의 가부들이 왜 구제에서 제외됩니까라고 이 일을 제기했던 사람들 중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죠. 그중에서 일곱 집사를 뽑은 거예요.
잘 우리가 이해되지 않죠. 우리는 기본 사람을 선택할 때 내 고향인지 내 학교인지 우리 학교 출신인지 어떻든 인연 지연과 학연으로 연결되는지를 따져서 이렇게 사람을 뽑잖아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의 주류였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일곱 집사로 뽑은 게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들을 일곱 집사로 뽑았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는 거예요. 일곱 집사를 뽑아서 부흥하기도 하지만 헬라파 유대인들을 일곱 집사로 뽑았기 때문에 큰 부흥이 있었다는 거예요.
얼마나 교회가 부흥했냐 하면 제사장들도 그들의 신앙을 버리고 교회로 돌아오는 일이 벌어졌고, 요즘으로 비유하면 엄청난 구교 신자들이 사제들이 그 신교로 개종한 거예요. 더 나아가서 많은 수의 타 종교의 고위직들이 개종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뽑았는데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았고 교회의 주축이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들을 뽑았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했더니 교회가 크게 부흥했는데 많은 제사장들이 돌아왔고 그리고 많은 지도자들이 종교 지도들이 돌아오는 일들이 벌어진 겁니다.
이거 사도행전 6장에서 8장까지는 이 일곱 집사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잘 기록돼 있어요. 스데반 집사가 가장 첫 번째 순교자가 돼요. 제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아니라 이렇게 뽑은 일곱 집사 중에 순교자가 먼저 나타난 거예요.
그리고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도 했고, 또 빌립은 이방인 이디오피아 네시에게도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복음을 전하라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금까지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예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근데 누가 행했느냐? 뽑혀진 7명의 집사들에 의해서 사마리아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그리고 이방에도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러면 만약에 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주류였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들 중에서 7명의 집사가 뽑혀졌다 그러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이 사마리아인들은 불가촉 천민이에요. 그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이죠. 히브리인들에게 유대인들도 동일해 이방인들도 동일해요. 개와 돼지와 같은 사람들에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은혜도 있었고 많은 성도가 늘어났지만 정작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준행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들이 가진 신앙적인 가치관 이전에 예수를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신앙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마리아에도 복음 전하지 못하고 이방에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 사마리아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사역이 새로운 인물들에 의해서 시작이 됐다는 거예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다면 시도하기 어려웠을 일들이 헬라파 유대인들로 인해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다면 변절자인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사마리아는 같은 유대인이지만 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변절자예요. 그 변절자인 사마리아의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어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다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어요.
전통은 훌륭하고 위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전통이 교회와 신앙을 가로막을 때도 있어요. 그러면 이것은 깨뜨려야 하는 거죠. 유대인의 전통은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깨뜨려야 하는 전통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들의 기존 신앙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만약 헬라파 유대인들이 비주류라고 해서 뽑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의 전통은 깨어지지 못했을 것이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 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일곱 집사들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의미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믿음이 충만할 수 있고 어떻게 성령이 충만할 수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온 영이신 성령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가 없이 우리가 충만해질 수 있냐는 거예요.
믿음과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인격적인 교제를 전제로 합니다. 여러분 일곱 집사 중에 이후에 이들의 삶을 봤을 때 큰 문제가 없어요. 니골라당에 대한 해석에 따라 좀 차이는 나지만 일곱 집사가 큰 문제가 없이 훌륭하게 자기의 사역들을 잘 감당해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적인 교제를 기반으로 이걸 전제로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요한계시록에 언급되는 니골라당이 니고달라당이라는 이 이단이 일곱 집사의 니골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아마 그 이후에 이 니골라라는 이 집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단에 빠질 가능성도 있었어요. 이게 전통적인 개념인데 또 한편으로는 그 니골라가 이 니골라가 아닐 수도 있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거예요. 이 사실을 다 모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동안은 이들의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거예요. 사역의 자세, 사역의 열매 결과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거예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일곱 집사를 세웠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오히려 사역은 더 확장됐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감당하지 못했던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이 일어나고 이방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사도들은 왜 이 사람들을 뽑았을까요?
기도하는 일에 말씀, 사역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뽑았어요. 뜻대로 일곱 집사를 세운 후에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그래서 7절의 부흥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변화가 교회의 변화를 만듭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기로 하는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부흥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한 사람의 결정과 결단과 헌신과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삶들을 통해서 새 일들이 일어나요. 변화가 시작이 돼요.
만약에 일곱 집사가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다면 초대교회는 많은 제사장들이 돌아오는 부흥을 제자의 수가 심이 많아지는 부흥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들, 변화된 사람들이 사역의 현장에 서는 일들이 이렇게 중요해요. 교회를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변화된 사람으로 교회를 다니는 일은 너무 중요한 일이에요.
어제 홍바 기도회 때 잠깐 나눈 말씀인데 요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역대야 35장 18절 말씀을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역대야 35장 18절입니다. 시작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아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이 놓은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18절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요시아처럼 사무엘 이후에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요시아 이전에 중요한 인물들이 있었어요.
누구예요?
사무엘과 요시아 사이의 중요한 인물 우리가 이름만 다 하면 아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다윗과 솔로몬이죠. 그러면 다윗과 솔로몬보다도 이 요시아가 유월절을 더 잘 지켰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가능할 걸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아는 상식으로는 다윗의 예배, 솔로몬의 배가 얼마나 크고 웅장한지 다 알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보다 유월절은 이 요시아가 더 잘 지켰다는 거예요. 사무엘 이후에 아마 사무엘이 아마 넘버 원인 것 같아요. 유월절을 잘 지킨 사람 넘버 2를 꽂으라면 이 요시아 왕인 거죠. 그러니까 이전에 그 누구도 이후에 그 누구도 요시아처럼 말씀대로 유월절을 지킨 사람은 없었다는 거예요.
요시아가 왜 유월절을 잘 지켰냐 율법에 기록된 대로 모세의 가르침대로 유월절을 지켰기 때문에 다윗도, 솔로몬도 지키지 못한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변화, 예배의 변화, 삶의 변화는 말씀을 말씀으로 온전히 지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지키냐가 우리의 삶이 달려 있는 문제인 거예요. 이거는 말씀을 지키냐 안 지키냐 그냥 가볍게 다룰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말씀대로 지키느냐는 우리의 삶이 사역이 송두리째 달려 있는 문제라는 거예요.
다윗보다 요시아보다 다윗의 영광이 커요. 요시아보다 솔로몬의 영광이 커요. 근데 유월절은 요시아가 더 잘 지켰어요. 왜 더 잘 지킬 수 있었느냐 말씀대로 지켰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워진다는 것, 성도가 성도다워진다는 것은 말씀을 얼마나 말씀으로 지키느냐에 달려 있어요. 여러분 신앙이 더 깊어진다는 것, 교회가 더 좋아진다는 걸 우리는 자꾸 규모로 생각해요. 신앙이 더 깊어진다는 것은 기도가 시간이 더 늘어나고 전도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고 교회를 섬기는 시간이 더 늘어난다는 것으로 의미하는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더 열정이 많고 그리고 더 헌신이 많아진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말씀을 말씀대로 지킨다는 의미예요.
우리는 더 많이 봉사하는데 공허하잖아요. 왜 공허할까요?
말씀이 내 삶에서 말씀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내가 말씀을 말씀으로 지키지 않아서예요. 그래서 규모가 커져도 공허예요.
여러분 성가대가 있고 성가대가 커지잖아요. 그래서 겉보기에는 막 화려한 찬양이 들리고 하나님 영광 받을 것 같지만 그 성가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들이 말씀을 말씀으로 지키지 않으면 그들은 그들의 찬양이 아름다울수록 더 공허해질 거예요. 오케스트라 인원이 더 많아지고 성가대 인원이 더 많아져 제가 어떤 교회는 예배당 절반이 성가대로 꽉 찬 교회를 봤어요.
그게 영광스러운 일일까요? 그게 신앙이 더 깊어지고 더 좋은 교회가 됐다는 사인일까요?
아닙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지켜야 그게 신앙이 깊어지는 거예요. 지금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무엇을 더 많이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지금 우리 교회에 더 필요한 사람들은 뭔가를 더 많이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을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인 거예요. 이 사람이 부서에 있으면 부서가 바뀌고, 이 사람이 당에 있으면 당회가 바뀌고, 이 사람이 교회 안에 있으면 교회가 바뀌어요.
여러분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아닌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주류였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집사로 뽑았다면 수많은 제사장이 돌아오는 부흥을, 제자의 수가 심이 많아지는 부흥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뽑았기 때문에 허다한 제사장이 돌아오는 부흥을 경험했던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거예요.
요시야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시야 왕이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을 지켰기 때문에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누리지 못했던 유월절의 영광을 요시아는 누릴 수 있었습니다.
회복과 부흥은 내가 얼마나 말씀의 사람이 되느냐, 내가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여행을 많이 한다고 해서 회복이 될까요?
그 여행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가 있어야 여행을 통해서 회복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리로 우리 함께 돌아갑시다. 그러면 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은혜와 부흥들을 우리에게 주실 거예요.
진정한 교회의 영광은 말씀으로 살려고 할 때 볼 수 있어요. 진정한 성도의 영광도 말씀으로 살려고 할 때 우리가 만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삶을 통해서 진정한 부흥과 은혜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기대해 봅니다. 제가 원래 약간 무른 사람이에요. 얼굴은 인상이 센 것 같지만 실제로 별로 세지 않는 물론 가끔 센 적은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는 별로 세지 않는 속은 아주 여린 상상보다 생각보다 눈물도 훨씬 더 많고 남 아프게 하는 것이 너무 힘든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성도들에게 뭔가를 말을 잘 못하겠어요.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말하지 않아도 성도들을 잘 살게 하는 비결이 뭘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한 주간 주신 것 같아요.
성도들을 말씀으로 살게 하자. 성도들을 말씀으로 살게 하자. 그러면 내 권면이나 내 부탁이 없어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서 작정을 하고 헌신하면서 이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사상의 기준이 아닌 말씀이 기준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자리로 돌아가셔야 됩니다. 자신의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자리로 돌아가야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에 의해서 그 미래와 열매가 결정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열매는 다 속이 빈 텅 빈 열매들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말씀으로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이들을 통해서 교회에다 개인의 미래가 만들어지고 교회와 개인의 결실들이 만들어져요. 예수님 없이 여러분이 노력해서 만드는 결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으로 예수님과 교제해서 그 예수님이 주신 마음으로 교회와 사명을 감당할 때 그때 속이 빈 열매가 아니라 속이 꽉 찬 정말 나를 기쁘게 하는 열매들을 내가 맺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말씀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싸우십시오. 그럼 주께서 회복을 여러분의 삶에 주실 것입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