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老와의 對談 제4호
‘영원한 대종회 사무국장’ 위태선 옹
‘일파(一波) 위태선(魏泰善) 옹’은 기사(己巳)생으로 올해 9순이시다. 옹은 초창기 대종회 사무국장으로 20여년 간 일하셨다. 그래서 종인들에게 ‘위태선’하면 바로 떠오른 강렬한 이미지((Image)가 있다. 곧 “영원한 장흥위씨 대종회사무국장.” 이미지의 사전적 의미는 심상(心象), 영상(映像), 표상(表象) 등을 뜻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영상을 가리키며 주로 시각적인 것을 말하지만 시각 이외의 감각적 심상도 이미지라고 한다.
어원은 라틴어 이마고(imago)이며, 동사형인 라틴어 이미타리(imitari)는 '모방하다(imitate)'는 뜻도 있다. 따라서 이미지는 "어느 대상, 특히 사람의 외적 형태의 인조적 모방 또는 재현"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인간들을 움직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논리적 사상 체계가 아니라 단지 일련의 이미지와 암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라는 말 대신에 '이마골로기(imagologie)'라는 말을 만들었다.
일파옹에게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영원한 군인이다’는 이미지다. 그는 아버지(文煥)와 어머니(金西芬) 사이의 쌍둥이 중 차남으로 1929년에 함남 영흥에서 태어났다. 고급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6‧25 직전 홀로 월남해 육군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이때부터 육군대학을 거쳐 중령으로 제대하기까지 30년 이상을 군문에서 생활했다. 그런 탓에 함경도 사투리에 절도 있는 군인 말투가 몸에 배여 영원한 군인의 이미지가 붙게 된 것이다.
무술년인 2018년 4월 3일. 올해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나라가 전쟁의 근심에서 평화분위기로 반전되고 있다. 4월에는 남북정상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회담하고, 5월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이런 나라안팎의 분위기처럼 우리 위문에도 좋은 일이 연속되기를 기대하고 싶어진다. 일파옹과 「원로와의 대담」을 위해 남양주 마석의 자택을 찾았다. 만나 옛날을 회상하며 위문발전을 위해 허심탄회한 대담을 나눴다. (편집자 주)
장소 : 남양주 마석 자택
일시 : 2018.04.03.(수) 오후
대담 : 편집실
1.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건강하셨습니까. 여쭤보고 싶은 사연이 많았는데 막상 직접 뵈니 말문이 막힙니다. 모든 가족을 고향 영흥에 둔 채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의 구체적인 시국상황과 월남한 실질적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원산역에서 손 흔든 아버지 모습 못 잊어-
★ 영흥공립농업학교에 이어 고향 집에서 꽤 떨어진 항구도시로 잘 알려진 원산고급중학교로 전학해 1948년 7월 졸업했는데 아버지께서 고향 영흥 횡천리에서 내가 있는 원산까지 느닷없이 찾아오셨어. 반가워 어찌 이곳까지 오셨냐고 물어보니 다짜고짜 서울의 남대문 근처에 살고 있는 아버지 친구주소를 주면서 찾아가서 공부를 더해서 훌륭한 인물이 되어 돌아오라고 하셨지. 그때가 내 나이 20살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70년 전이네.
아버지는 전대를 꺼내시더니 금덩이를 내 호주머니에 넣어 주셨어. 다음날 내가 원산역에서 연천(전곡)행 기차를 타는데 아버지의 손 흔드는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꿈에서도 몰랐지. 늘 그날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쏟아져. 그때 이미 38선이 막혀서 전곡에 내려 아버지께서 내가 무사히 월남하도록 돈을 주고 안내원을 한 사람을 붙여주었는데 한탄강 지류에서 북한사무소원이 있는 것을 보고는 겁을 먹은 안내원은 도망 가버렸어요.
남쪽으로 가는 길을 전혀 모르는 나는 하늘을 보며 울다가 일단 강을 건너기로 결심했어. 배꼽까지 차는 한탄강 지류를 건너니 마침 남쪽과 북쪽을 오가며 물물교환을 하는 여자 몇 명을 만났어. 인적이 없는 곳에서 사람을 만나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어. 워낙 그 여자 상인들은 길을 잘 아는지라 장사꾼들의 도움으로 남쪽인 포천까지 쉽게 내려올 수 있었어.
남쪽의 포천지역 어느 지서(경찰서)에 가서 내가 가지고 있던 북에서 발급받았던 인민증과 지서장이 발급하는 증명서와 교환을 했어. 때마침 지서 앞에 나무를 잔뜩 실은 목재트럭이 있어 몰래 타고 축석을 거쳐 미아리, 즉 돈암동에 도착하게 되었어.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국도극장 앞에 내리니 배우인 황해와 백설희 주연의 화전(火田)이 상영되고 있더라구.
민가에서 몇 날을 지내다가 아버지께서 소개한 친구를 찾아갔는데 사는 데는 신설동으로 몇 개월 거주하면서 북에서 아버지가 주신 금도 몽땅 빼앗기고 쫓겨서 거지신세가 되고 말았어. 그래서 종로를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영흥거주 선배인 한동규 씨를 만나게 되었어. 그는 종로3가 호림장(虎林場)이라는 단체를 운영하는데 친일파를 잡아들이고 공산당을 때려잡는 전위대와 같은 단체였어. 6.25가 터지기까지 거의 2년 동안 나의 행적이지.
2.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해 소정의 과정을 밟고 소위로 임관하신 후 위씨의 집성촌인 방촌을 찾아가신 얘기를 자주 피력하셨습니다. 당시 방촌이란 곳에 대한 정보를 고향에서 들으셨습니까. 또 방촌 종씨들에게 가는 과정과 호의는 어떠했습니까.
-방촌 1주일 그 때를 행복했던 날로 기억-
★ 월남한 직후 6.25가 발발했어. 선배 한동규와 호림장에서 지냈는데 전쟁이 일어나고 6월 27일경 한강다리가 끊어졌어요. 피난은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한동규 선배가 태선이 너는 수영을 잘하니 노량진에 헤엄쳐가 보트를 가져오면 좋겠다고 해서 2척을 가져왔어. 1대는 한동규 부부와 내가 타고, 나머지 한 대는 주위의 사람에게 줬는데 무사히 한강을 건너고 11명이 탄 다른 보트는 뒤집혀버려 11명 모두 죽고 말았지. 이후 피난경로는 노량진-시흥-대전-김제-신태인-부안 줄포-고창-영광 법성포-목포항-거제도 장승포로 이어지는 도보, 기차, 선박을 통해 이루어진 고통의 시간이었지.
거제도에 가게 된 이유는 피난의 목적도 있었지만 육군신병교육대가 있었기 때문이야. 후에 인민군과 중공군포로수용소가 되면서 부산 가덕도로 옮기게 되지만 그 당시에 방위군 교육대가 주둔했거든. 전쟁통이라 스스로 찾아와 지원하니 기특했던지 글씨를 써보라고 장교가 명령했지. 횡서가 아니라 종서로 한문으로 쓰니 가히 명필이라고 하면서 잠시 행정병으로 근무하다가 방위군 교육을 받고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어. 이후 경주 예비사관학교 소위, 보병학교 갑종간부 15기로 광주에서 최종적으로 소위임관을 해서 세 번씩이나 소위를 다는 행운을 누렸지. 전쟁 중이라 행정상 미비한 것이 많았어요.
광주에 있을 때 함께 근무하던 위달수라고 하는 분이 있었어요. 나는 북한 함흥이 고향이고 월남했다고 했더니 전남 장흥 방촌에는 위씨들이 많다고 하더라구. 그러면서 방촌에 거주하는 몇몇 분을 소개해서 외박을 내서 방촌에 갔었지.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대접받고 술을 함께 권하며 장흥위씨 문중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어요. 한마디로 육군소위로 종씨에다 월남한 함경도 함흥출신이니 말소리도 신기했고 아무래도 불쌍하기도 하고 전시니만큼 든든하기도 했다고 봐야 해요. 1주일을 꼬박 방촌에 있었으니 그때가 행복했던 날로 기억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요.
3. 1990년 11월에 장흥위씨 대종회가 대전 유성호텔에서 출범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종친이 사무국장이었다는데, 어떤 연유로 종친회에 참여하셨으며, 사무국장으로 오랫동안 위문발전에 헌신하시게 된 동기라도 있으신가요.
-無에서 有를 만들고자 마음먹고 달려들었지-
★ 1990년 11월 3일 대전유성호텔에서 범곡 위찬호 재경종친회장의 주도로 70여 명의 전국의 장흥위씨 핵심멤버들이 모여 대종회를 출범시키게 되었지요. 1993년 4월 12일 범곡 위찬호 대종회장의 서울역 근처 건물을 빌려 본격적으로 대종회 업무를 시작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
대종회 창립 전인 1981년 관북파는 관북장흥위씨족보를 간행했고, 그해 8월 23일 관북장흥위씨종친회를 작년에 작고하신 송당 위재형 어르신 주도로 나도 깊게 관여를 하게 되었어. 이때 범곡 위찬호 초대 대종회장이 삼고초려식으로 간곡한 요청을 여러 번 했어요. 또한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前사무국장은 나와 관계가 좋지는 않았어요. 또한 범곡회장은 나와 함께 6.25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루고 나는 중령으로 예편했지만 범곡회장은 대령으로 예편했거든. 나보다는 나이가 한 살 어려도 뭔가 사람을 당기는 강한 카리스마가 있고 문중을 위한 신념이 대단했다고 느꼈어.
또한 범곡회장의 주변에 송담 위자형, 송당 위재형, 덕운 위황량 같은 분들이 있었던 것도 큰 작용을 했지. 무엇보다 사무국장을 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나라를 위해 전쟁을 했고 30년 가까이 군에 근무한 경력, 2급 공무원인 전사편찬위원으로 10년 가까이 근무 등을 끝마치고 이제는 장흥위씨 문중을 위해 헌신하고픈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지. 사실 봉급을 생각했으면 어려운 자리였지. 실제 처음에는 급여가 얼마 되지 않았어. 無에서 有를 만들고자 마음먹고 달려들었지. 사명감과 하고자하는 의욕이 충만했기에 견딜 수 있었어.
종보 제24호에서(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