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 |
국가 |
영국 |
분야 |
사회학 |
해설자 |
박홍규(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
세계는 오로지 미국이 호령하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지배될 뿐이고, 어떤 유토피아도 불가능해진 것 같은 21세기에 모어의 ≪유토피아≫를 다시 읽자는 것은 우습다 못해 차라리 무의미한 짓이 아닐까? 20세기까지의 각종 유토피아 실험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아예 부정하는 가운데, 유토피아는 도리어 그 반대인 디스토피아의 악몽이 되었다고도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500년 전에 나온 모어의 ≪유토피아≫는 사실 반드시 어떤 구체적인 이상향을 설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끝없이 절망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끝없이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이상에 대한 염원의 사례를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인류에게 보여주었기에,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모어 자신처럼 그렇게 현실을 비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어 보도록 권유하기에 이미 우리에게 고전인 것이 아닐까? 마치 지난 500년 간 인류에게 그렇게 권유해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듯이 말이다. 조금이라도 이상사회를 꿈꾸었다면 모두 유토피안이 아니겠는가? 설령 그 모두 실패했고, 우리 역시 실패한다고 해도 말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1, 2권으로 구성된다. 제1권은 현실비판, 제2권은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1권에서 모어는 먼저 ‘저 좋을 대로’ 사는 르네상스인의 이상을 제기한다. 그러나 ‘저 좋을 대로’란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따를 뿐 부나 권력에 대해 욕심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한 마키아벨리와 모어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특히 모어는 군주에 대해서 명예롭고 평화적인 일이 아니라 전쟁 수행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하고, 왕의 자문관도 왕에게 아부한다고 비판한다.
제1권에서 모어가 제시하는 현실비판은 네 가지이다.
첫째, 정부의 대책인 과도한 엄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즉 처벌로서는 너무나 가혹하고, 억제책으로는 너무나도 효과가 없는 것이어서 그런 극형에도 절도는 더욱 늘어난다고 보고, 절도에 대해서는 노동형이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거지, 부랑자, 도적이 증가하는 원인에 대한 비판이다. 모어는 그것이 농촌에서 봉건 영주가 몰락하고 그 시종이나 농민이 추방된 탓이라고 본다. 이와 관련, 봉건 영주의 시종들이 전투력의 근간이므로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군국주의식의 반론에 대해 모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했듯이 군인은 도둑과 같은 것으로 무익하다고 비판한다. 이어 모어는 저 유명한 “양이 사람을 먹어치운다”는 말을 하며 농장과 농촌을 회복시키는 법을 만들고, 부자들의 매점과 독점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과도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다. 빈곤한 노동자의 불안한 생활과 비교되는 지주나 상인 그리고 절대왕정에 기생하는 자들의 안일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사회적 불의’로 규탄하고, 부자는 그 부정하고 불법한 행위를 정의의 이름으로, 즉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넷째,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의의 원인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 모어는 화폐에 대한 욕망, 화폐의 사용, 그리고 사유재산제도에서 찾는다. 결국 모어는 모든 사회문제가 사유재산제에서 나온다고 보고, 그것을 철폐하여 공동소유제로 바꾸지 않는 한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유토피아≫ 제2권에 묘사되는 유토피아는 무엇보다도 공동소유의 사회이다. 공동소유제는 ≪국가≫에서도 주장되었으나 그것이 귀족들만의 공산주의를 주장한 것임에 반해 모어는 사회 전체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돈을 쓰지 않으며 금욕적인 무소유를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여러 사회주의 이론이나 현실 공산주의의 구체적인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유토피아는 54개 자치도시로 구성되고, 주민이 뽑은 대표로 정치를 하는 민주주의 체제라는 점이다. 각 도시에는 주민이 뽑는 시장이 있지만 공화국에는 지극히 제한된 기능을 갖는 원로회의뿐이고, 수상이나 대통령이 이끄는 어떤 행정기관도 없다. 즉 54개 도시의 느슨한 연방 같은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국가와는 전혀 다른 것이고, 정치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각 도시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귀족주의나 철인 독재정치, 또는 모어 당시 유럽에 일반적이었던 국왕 지배의 절대주의 체제와는 전혀 다른 민주주의이다.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도 상관이 없다.
그 경제기반은 공동소유제의 농업이다. 하나의 농장에는 40명 미만이 살고, 농촌에서 2년을 살고 나면 도시로 돌아간다. 매년 농촌에서 20명씩 돌아오는 대신 도시에서 20명이 농촌으로 간다. 여러 직업 사이에는 귀천이 없어서 노동이 노예의 몫으로 되어 있는 플라톤 ≪국가≫의 경우보다도 훨씬 인간적이다.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므로 노동시간이 짧아져 오전과 오후에 3시간씩 모두 6시간 노동하고, 8시간 수면을 취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자유로이 행동하는데, 주로 지적 추구에 시간을 쓴다. 그것은 사회의 요구를 충족하는 한도 안에서 모든 시민이 육체노동에서 벗어나 정신세계의 자유로운 함양을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삶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유토피아≫는 적어도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관용주의의 사회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자유주의라고는 하기 힘들다. 물론 그 속에서의 삶도 자유롭고 다양하게 묘사된다. 가령 도시의 집은 사유가 아니므로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10년마다 집을 서로 바꾸며, 사람들은 정원 가꾸기를 즐긴다. 그들은 식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을 공동으로 하며 허식과 사치를 배척한다. 플라톤의 ≪국가≫처럼 법원은 없으나, 병원은 있다. 유토피아에는 법률이 거의 없고, 형벌도 노동형에 국한된다. 특히 법률가나 변호사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재판을 한다. 이는 법률가였던 모어가 법률에 대해 얼마나 회의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유토피아의 일상생활은 공산주의와 함께 양대 원리를 이루는 쾌락주의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쾌락의 추구만을 뜻하지 않고 선과 도덕, 특히 사회적 책임을 수반한 쾌락의 추구임을 주의해야 한다. 이는 ≪유토피아≫의 처음에 나오는 ‘저 좋을 대로 사는’ 르네상스 생활방식이기도 하다.
유토피아의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반전 평화주의이다. 모어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한다. 특히 당시의 종교전쟁에 반대하고, 전쟁의 정의를 주장한 점에서도 주목된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공유재산, 민주주의, 농업주의, 관용주의, 쾌락주의, 반전주의와 같은 이념에 근거한다. 우리는 그 모든 이념이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흔히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으면 도리어 ‘어딘가에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그 묘사가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그 이념에도 친밀감이 느껴진다. 여기서 현실적이고 친밀하다고 함은 거기에 쓰여 있는 현실비판이나 미래제시가 너무나도 박진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어의 친구였던 에라스무스는 그 책이 ‘국가악의 근원’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사실 그가 그리고 있는 이상사회는 바로 르네상스 사회의 지향이었고, 이상적 인간은 바로 르네상스 인간과 근대적 인간의 지향이었다. 즉 현세적 행복의 긍정과 미래에 대한 희망, 공정한 ‘법의 지배’의 확립이라고 하는 정치적 요구, 모든 사회악을 낳은 돈의 부정, 귀족의 태만과는 대조적인 노동의 미덕, 기독교적 윤리와 인문주의적 교양의 융합에서 생긴 인간성의 이념이었다.
물론 500년 전에 쓰여진 ≪유토피아≫에는 당연히 많은 문제가 있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이면서도 종교나 일상생활에서 전체주의적 탄압의 위험성을 예상하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물론 종교의 자유는 인정되지만 그 종교의 진위를 따지는 부분은 사상 검열과 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또한 여행허가증을 필요로 한다거나 결혼 전에 남녀가 서로의 나체를 보인다거나 하는 사소하거나 우습게 보이는 문제도 사실은 큰 문제일 수 있다. 여하튼 대체로 ‘위로부터의’ ‘밖으로부터의’ 혁명에 의해 유토피아가 구성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찬성할 수 없다. 나아가 모어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에도 찬성할 수 없다.
그밖에 책 전체, 특히 제1권과 제2권 사이에도 모순되는 설명이 나온다. 영어원서로 100페이지 남짓한 작은 책인데도 말이다. 가령 죄수의 대우에 대해 제1권에서는 죄수가 경제적인 이유로 죄를 저질렀으니 인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제2권에서는 죄수를 사슬에 묶어 노예로 다루는 묘사가 나온다. 또한 평화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식민지의 원주민 저항에 대한 전쟁을 합리화한다.
그밖에도 많은 비판이 가능하다. 이처럼 16세기 르네상스시대라고 하는 근대와 중세의 교차점에서, 한편으로는 근대, 아니 공산주의라는 현대를 전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중세에 매달려 있는 모어의 시대적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런 한계야 우리에게도 당연히 있지 않겠는가?
특히 모어 자신에 대한 비판이 있다. ≪유토피아≫에서도 모어 자신은 유토피아의 이상사회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유토피아≫를 쓴 몇 년 뒤 독일에서 농민전쟁이 터지자 모어는 ≪유토피아≫에서와는 반대로 농민들이 아니라 기존 국가들을 지지했고, 공동소유는커녕 사유재산제를 옹호했다. 그가 사형을 당한 것도 사회개혁이나 종교적 관용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로마 가톨릭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토피아≫에서도 종교적 관용이 주장되면서도 사실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기독교 이념의 범주 내에 있는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토피아≫는 16세기부터 지금까지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을 지향하는 모든 사회운동의 기초가 되어왔다. 특히 모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원조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모어의 ≪유토피아≫와 그 모든 운동의 이상은 다르다. 특히 구소련을 비롯한 모든 현실 공산주의는 ≪유토피아≫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많다. 물론 공산주의라는 점에서 같지 않으냐는 반론도 있으나, 모어의 그것은 사실 돈이 없어져야 모든 사회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으로 어떤 현실 공산주의와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유토피아라는 것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사람도 많지만,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현실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유토피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500년간 인류의 고전이 되어왔고, 우리에게도 충분히 그것을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원래 라틴어로 쓰여졌다.1) 가장 일반적으로 읽히는 판본은 폴 터너(Paul Turner)가 번역한 펭귄 클래식(Penguin Classics)판이다. 1965년 제1판이 나온 뒤 지금까지 계속 간행되고 있어서 세계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판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
- 1) 원제목은 ≪가장 나은 사회 상태 또는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대해(De optimo rei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이다. ‘가장 나은 사회 상태’란 ‘Optimo reipublicae statu’의 번역인데, ‘reipublicae statu’란 ≪유토피아≫가 나온 16세기 초에는 구체적인 정치체제를 뜻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 상태를 뜻했다. 절대군주국가나 국민국가라는 정치체제와 그 전제인 국가의식이 생겨난 것은 17~18세기에 와서였다. 모어는 유토피아를 처음에 ‘Nusquama’, 즉 ‘어디에도 없는 곳’(영어의 nowhere)이라고 불렀다.